2011년 6월 2일 부활 제6주간 목요일
너희는 근심에 잠길지라도
그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요한 16,16-20)
You will grieve, but your grief will become joy."
말씀의 초대
바오로는 코린토에서 아퀼라와 프리스킬라와 함께 천막을 만드는 일을 하고 회당에서 유다인과 그리스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며 말씀 전파에 전념한다. 그러나 그들이 반대하며 모독하는 말을 퍼붓자 옷의 먼지를 털고 바오로는 그곳을 떠난다. 옷의 먼지를 터는 행동은 그들과의 결별을 뜻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에게 닥칠 죽음과 부활에 대하여 제자들에게 일러 주신다. 제자들의 근심이 “조금 있으면” 기쁨으로 바뀔 것임을 전해 주시며 슬픔의 순간을 잘 견디도록 격려하신다(복음).
오늘의 묵상
“조금만 더 올라가면 정상이야.” “조금만 더 힘을 내면 돼.” 등산을 해 본 사람들은 산행이 힘들어질 때마다 동료끼리 하는 이 말을 종종 들었을 것입니다. 아직도 한참을 더 올라가야 하는데도 지쳐서 뒤처지는 사람에게 ‘조금만 더’라는 말을 자꾸 해 주게 됩니다. 이런 말을 하는 이유는 힘들지만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며 마침내 정상까지 올라가 그 기쁨을 함께하려는 간절한 동료애 때문입니다. 그래서 ‘조금’이라는 말로 지친 사람에게 희망을 주고, 그가 한 발 한 발 고통을 이겨 나갈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예수님께서도 오늘 ‘조금 있으면’이라는 말씀을 여러 번 하십니다. 제자들을 떠나야 하실 시간이 다가오자, 그들이 ‘조금만’ 참고 기다리면 기쁨의 날이 올 것이라는 사실을 알려 주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 떠나시더라도 절망하지 말고 희망을 갖고 슬픔을 견디어 낼 수 있도록 하시려고, 예수님께서 우리처럼 ‘조금 있으면’이라는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제자들을 두고 떠나시는 예수님의 애절한 사랑의 마음이 느껴집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삶의 고통스러운 순간에 마치 산의 정상으로 이끌어 가시듯, 우리의 기도 속에서 이렇게 말씀해 주십니다. “조금만 힘을 더 내. 너는 할 수 있어!” “조금만 있으면 이 폭풍우가 지나가고 맑은 날이 시작돼.” “조금만 있으면 너의 근심이 기쁨으로 바뀔 거야. 힘을 내!”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합니다.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탓입니다. 그들은 스승님께서 떠나신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전적으로 그분께 의지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헤어짐은 일상사입니다. 어떤 형태로든 체험하게 됩니다. 신앙생활도 결국은 ‘혼자’ 가는 길입니다.
주님의 제자들도 불안해했습니다. 그러기에 세례를 받은 후 신자들이 ‘신앙생활의 실망’을 체험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불과 몇 개월만 교육받은 교리 지식이 앞날을 인도하지는 못합니다. 그야말로 ‘입교 예식’에 불과할 뿐입니다. 스스로의 노력과 구도의 자세가 절실합니다. 그러기에 공동체의 체험을 권하고 있습니다. 흔히 만날 수 있는 단체가 ‘레지오 마리애’입니다.
신앙과 재미는 별개의 사항입니다. 믿음의 기쁨은 언제나 은총의 이끄심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은총의 체험을 늘 우선해야 합니다. 행동하는 신앙이면 성령께서는 반드시 함께하십니다. 그렇게 해야 신앙의 ‘홀로서기’가 가능해집니다.
“조금 있으면 너희는 나를 더 이상 보지 못할 것이다.” 당신의 수난을 예언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렇지만 제자들에게는 ‘낯선 말씀’이었습니다. 지나고 보면 평범한 가르침인데, 당시는 너무 몰랐습니다. 영적 공부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지나고 보면 축복이 담긴 고통이건만, 대부분은 너무 불평합니다. 깊이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조금 있으면 너희는 나를 더 이상 보지 못할 것이다.” 스승님께서는 비장한 말씀을 남기십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알아듣지 못합니다. 함께 계실 분으로만 믿고 있습니다. “무슨 이야기를 하시는지 알 수가 없군.” 그들은 이렇게 서로 수군거릴 뿐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이 아직은 현실이 아닙니다.
의지했던 사람이 떠나가면 누구나 허우적거립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방황을 모르실 리 없습니다. 그렇지만 ‘홀로서기’를 기다리십니다. 그래야 당신의 참제자로 다시 태어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신앙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세례를 받는다고 ‘모든 것’이 깨달아지는 것은 아닙니다. 모르는 것이 더 많습니다. 친절하게 가르쳐 주는 이도 없습니다. 알아서 해야 합니다. 고해성사도 봐야 하고, 묵주 기도도 알아서 바쳐야 합니다. 힘든 것을 스스로 해야만 ‘홀로서기’가 가능해집니다. 그 사람은 머지않아 은총의 이끄심을 만나게 됩니다.
신앙심은 저절로 자라나지 않습니다. 공동체 안에서 부딪치고 어울려야 자라납니다. 지식 위주의 교리는 언제나 안내자일 뿐입니다. 사람과의 만남 속에서 ‘실천하는 믿음’이라야 신앙생활이 공허해지지 않습니다. 사막을 걷지 않으면 오아시스를 만날 수 없는 법입니다.

지금 누리는 것이
-반영억라파엘신부-
만남은 헤어짐을 전제합니다. 평생 이별이 없었으면 좋겠지만 아무리 사랑하고 좋아한다 할지라도 때가 되면 이별을 감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때 사랑의 관계가 참되었는지가 드러나게 됩니다. 어떤 이는 잠시잠깐의 만남을 기뻐하고 어떤 이는 좀 더 오랜 만남을 기대하고 희망합니다. 기왕이면 떠날 때 떠나더라도 가슴에 남는 만남을 이뤄야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울며 애통해 하겠지만 세상은 기뻐할 것이다. 너희가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요한16,20) 하고 말씀하시며 세상을 떠나 아버지 하느님께로 가게 됨을 제자들에게 거듭 알려주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알아듣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슬픔에 잠겼습니다. 그리고 세상의 권력자들은 십자가에 무참하게 처형된 예수를 보고 기뻐하였습니다. 결국 제자들은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직접 겪은 후에야 그 말씀의 의미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부활의 사건을 통하여 근심이 기쁨으로 바뀔 것이라는 말씀을 체험케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내가 무엇을 안다고 하는 것이 다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인 것처럼 생각하고 편견과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다른 것을 받아들이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새로운 것을 받아들인다는 것이 쉽지 않지만 모든 것을 다 이해한 다음에 수용하겠다는 것도 꼭 바람직하지는 않습니다. 스승의 가르침은 머리가 아니라 먼저 가슴으로 따르고 비로소 논리를 확인하게 됩니다. 지금 알아듣지 못해도 때가 되면 알게 됩니다. 그때 아는 것은 이미 있었던 진리를 확인하는 것뿐입니다. 그러나 그때가 오기까지 제자들은 함께 해산의 진통을 겪어야 합니다. 봄에 씨 뿌리지 않으면 가을에 거둘 것이 없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그러므로 스승과의 깊은 신뢰를 쌓고 스승의 모든 것을 가슴으로 받아들여야겠습니다. 스승이 일일이 말하지 않아도 그 마음을 헤아릴 수 있을 때 참 제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스승은 많이 알아서 스승이 아니라 모든 것을 품을 수 있어서 스승입니다. 지금의 근심이 기쁨으로 바뀌기까지 넘어야 할 산이 많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동행하여 주심을 믿고 여기서 기쁨을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주님의 뜻을 다 알 수는 없지만 이순간만은 주님께서 함께하심을 느끼며 오늘도 당신의 도구로 쓰임 받기를 희망합니다. 사랑합니다.
‘떠나심’과 ‘다시 오심’ 사이에서
-이준석신부-
예수님께서 고별의 말씀을 전하고 계십니다. “조금 있으면 너희는 나를 보지 못할 것이다”라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에 제자들은 적잖이 실망했습니다. 그러나 곧이어 “다시 조금 더 있으면 나를 보게 될 것이다”라는 말씀은 제자들에게 다시금 희망을 안겨주었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제자들은 주님의 ‘떠나심’과 ‘다시 오심’ 사이에서 상실과 희망을 복합적으로 안고 살아가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처지에 놓여 있는 것은 이천 년 전의 제자들만이 아닙니다.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도 같은 처지에 놓인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부재不在를 자주 체험합니다. 시시각각 다가오는 절망적이고 안타까운 소식들, 생명을 경시하고 경제적 이익만을 추구하는 세태, 가난한 사람은 더 가난의 나락으로 떨어지고 부유한 사람의 부는 그 끝을 알 수 없을 정도로 치솟는 세상을 보면서 우리는 “주님께서는 어디 계십니까?”라고 묻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희망을 지니고 살아갑니다. 그분께서 오시리라는 약속을 믿고 살아갑니다. 왜냐하면 한 번 이루어주겠다고 약속하신 것은 반드시 이루고야 마는 주님께서 다시 “나를 보게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지금은 근심하지만 주님께서 오시면 그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입니다. 그러니 희망을 가지고 살아갑시다.
사랑을 향한 근심은 주님을 뵈옵는 기쁨
-김우성 신부-
우리는 스스로의 힘으로 자신을 어느 만큼 돌볼 수 있을까요? 스스로의 힘으로 자신에게 어느 만큼 참 위안이 될 수 있을까요? 스스로 자신의 마음에 어느 만큼 빛을 밝힐 수 있는 걸까요? 믿음 안에서 성찰해보면 그것이 도저히 불가능해 보입니다. 스스로의 힘으로는 나에게 구원의 가능성이 없어 보입니다.
오직 내가 주님의 뜻과 사랑의 길에 온 마음을 내어드릴 때, 지극한 믿음으로 따를 때, 나는 비로소 있는 그 자체로 주님의 자비 안에서 완벽하게 구원받으리라 믿습니다. 광야에서 예수님이 받은 유혹도 바로 스스로의 힘으로 모든 세상 안에서 군림할 수 있다는 유혹입니다.
그런 유혹이 우리 자신 밖에 있는 하느님의 자비를 망각하도록 이끌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 말씀에서 뜻하는 근심은 스스로의 힘으로 자신에게 갇히는 근심이 아닙니다. 게다가 앞으로 닥쳐올 사건에 대한 두려움에서 오는 근심이 아닙니다. 바로 하느님의 크신 자비를 향해 하느님 백성을 모아들이기 위한 근심, 복음의 생명을 나누어주기 위해 자기를 비워내는 근심이었습니다.
하느님 사랑으로 향하게 하는 근심은 스스로의 힘이 아닌, 바로 은총으로 주시는, 주님을 뵈옵는 기쁨으로 인도하는 근심입니다.
더욱 사랑하셨습니다
- 이영석 신부-
아버지 하느님께로 가실 때가 된 것을 아신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사랑하시던 제자들을 더욱 사랑하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당신 사랑의 고별사를 들려주십니다. “조금 있으면 너희는 나를 더 이상 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다시 조금 더 있으면 나를 보게 될 것이다.”
예수님의 고별사를 전하는 오늘 복음을 들으며 제 신앙 여정을 돌아보니 지금까지 똑같은 날이 하루도 없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어떤 날은 무엇인가를 보았는데, 또 어떤 날은 그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어떤 날은 기뻤고 어떤 날은 슬펐습니다.
어떤 날은 매사에 적극적이었지만 어떤 날은 소극적이었습니다. 어떤 날은 주님의 숨소리마저 들으며 그분의 손길에 감사했고, 어떤 날은 주님께서 그 어느 곳에도 계시지 않은 것 같아 허전하고 고독했습니다. 때로는 나도 모르게 마음의 눈이 밝아져서 모든 것 안에 계신 주님의 현존에 들뜨기도 했지만, 또 때로는 그 눈이 어두워져서 미사 중에서 나와 함께하시는 주님을 잊어 버렸습니다.
이는 저에게만 일어난 현상이 아니라 우리 대부분의 모습일 것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압니다. 곧 다시 주님의 현존 속에서 기쁨과 평화를 되찾게 될 것이라는 것을. 늘 우리와 함께하시는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더욱더 간절하게 우리를 찾아오시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주님을 보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다시 조금 더 있으면 주님을 보게 될 것입니다. 우리 믿음의 모든 주도권을 쥐고 계신 분께서는 우리의 유익을 위해 함께 머무르기도 하고, 또 떠나기도 하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보지 못할 때, 주님께서 ‘언제, 왜’ 떠나셨는지 생각해 보는 것이 더 큰 은총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