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7주간 화요일 (요한17,1-11)

2011. 6. 7. 오전 5:3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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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6 7일 부활 제7주간 화요일

“나는 아버지께서 나에게 맡겨주신 일을 다 하여

세상에서 아버지의 영광을 드러냈습니다.” 

 (요한 17,1-11ㄴ)

 

 I glorified you on earth
by accomplishing the work

that you gave me to do.

 

 

말씀의 초대

바오로는 성령에 이끌려 예루살렘으로 가기 전 교회의 원로들에게 작별 인사를 한다. 그가 가는 곳마다 투옥과 환난이 기다리고 있지만, 그는 예수님께서 주신 직무에 충실하며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다 마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수난을 앞두고 당신 자신과 제자들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신다. 예수님께서는 비록 아버지께로 떠나시지만 지상에 남을 제자들을 염려하시며 이들을 지켜 주시고 하나가 되게 해 주십사고 기도하신다(복음).

☆☆☆

 오늘의 묵상

우리가 살면서 하느님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하는 것은 무엇인지요?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어서 사업이 번창하게 되었고, 자신의 생활이 윤택하게 된 것이 주님을 영광스럽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어서 축복을 받고 세상에서 잘 먹고 잘살게 되었다고 “주님, 영광 받으소서!” 하고 외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오늘 복음에서 당신께서 “땅에서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하셨다고 성부께 기도드리고 계십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하느님 아버지께 드린 영광은 세상에서 권력과 부를 누리는 것과는 반대였습니다. 당신의 생애를 온전히 가난하고 병든 이들을 위해 바치시다가 마침내 십자가에서 희생을 당하시는 것이 하느님 아버지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었습니다.
크고 화려한 교회를 지어서 바치는 것이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을 믿어서 부자가 되고 세상에서 성공을 하였다고 하느님을 영광스럽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물질적인 축복에만 매달려 있는 신앙은 인간의 탐욕일 따름입니다. 하느님의 영광은 무엇을 얻고 누리는 데서가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것을 비우고 희생하는 데에서 드러납니다.
얼마 전 우리 곁을 떠난 이태석 신부. 아프리카 수단의 톤즈 마을에서 자신을 온전히 바친 한 사제의 생애가 하느님의 큰 영광이 되었습니다. 착한 목자의 삶을 살았던 김수환 추기경, 캘커타의 마더 데레사, 세상에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삶의 자리에서 묵묵히 그리스도를 드러내 보이며 살았던 수많은 분들, 이런 분들이 하느님을 영광스럽게 한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 삶을 축복해 주셨습니까? 그러나 그 축복을 누리기만 하고 우리 자신을 비우고 희생하는 삶이 없다면 부끄러운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께 드릴 영광을 내가 누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

술을 너무 많이 마시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술이 취한 날에는 가족들을 성가시게 했고, 가끔은 이웃 사람들에게 망신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다음 날이 되면 미안해서 고개도 제대로 들지 못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자녀 가운데 주일 학교에 다니는 초등학생이 있었습니다. 하루는 아들이 아버지에게 말했습니다. “아빠, 어젯밤 꿈에서 예수님을 봤어요.”

그러자 아버지는 피식 웃었습니다. “얘야, 예수님이 어디 있느냐? 오늘 밤 또 나타나면 한번 물어봐. 네 아빠가 지은 죄를 알고 있으면 말해 보라고 해 봐. 그러면 진짜인지 가짜인지 알 수 있어.” 그는 장난스럽게 대꾸했습니다.

다음 날 아들이 아버지에게 말했습니다. “아빠, 어젯밤 예수님이 말씀하셨어. 아가야, 아빠한테 얘기하렴. 나는 네 아빠가 지은 죄를 벌써 다 잊었다고.” 그 말을 듣는 순간, 아버지는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러고는 바로 술을 끊었다고 합니다. 은총이었습니다. 아들을 통해 무언의 깨달음을 만났던 것입니다.

우리는 너무 쉽게 ‘죄와 연관된 하느님’을 생각합니다. ‘사랑과 연관된 하느님’이 정답인데도 늘 잊고 지냅니다. 하느님을 인간적으로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죄는 벌로 이어진다고 늘 자책합니다. 그래서는 시련의 의미를 알 수 없습니다. 시련이 은총임을 깨달을 수 없습니다. “저는 이들을 위하여 빕니다. 세상을 위해서가 아니라,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이들을 위하여 빕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행복을 누구보다도 깊이 바랐던 분이십니다

 

☆☆☆

 

 

★★★

 

요한 복음 17장은 예수님의 유언입니다. 십자가의 죽음을 앞두신 그분께서는 제자들이 서로 일치할 것을 간곡히 기도하십니다. ‘아버지와 당신께서 하나이신 것처럼’ 그들도 하나가 되어 살 것을 기도하십니다. 그만큼 주님께서는 ‘일치’를 바라셨습니다.
우리는 일치의 하느님을 삼위일체 안에서 묵상합니다. 그리고 그 일치의 힘을 은총으로 주실 것을 청합니다. 신앙생활 역시 마지막 목표는 주님과 일치하는 데 있습니다. 이렇듯 신앙인은 예수님의 유언을 실천하는 사람들입니다.
사도행전에 따르면, 주님의 제자들도 서로 격렬하게 논쟁하였습니다. 그렇지만 늘 스승의 유언으로 합일점을 찾았습니다. 박해가 끝나고 수많은 이단이 교회를 혼란시켰지만 제자들은 이를 극복합니다. 일치를 위한 숨은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 이준석신부-

제자들에게 마지막 고별사를 마치신 예수님이 하느님께 당신 자신과 제자들,
그리고 장차 당신을 믿게 될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위해 기도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대사제가 자신과 온 이스라엘 회중을 위해 희생제물을 드리듯이
예수님께서도 당신 자신을 희생제물로 바치시기 전에 이 기도를 하십니다.
그리하여 이 기도는 많은 이들 사이에서 ‘대사제의 기도’라고 불리고 있습니다.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앞에서 저를 영광스럽게 해주십시오”라고
기도하십니다. 얼핏 이 기도를 들으면 예수님께서 제자들보다 당신 자신을 먼저
챙기신다고 오해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제자들을
위해서라도 먼저 영광스럽게 되어야 하셨습니다. 그분의 영광은 제자들이
앞으로 얻어 누릴 영광의 예표입니다. 그리고 제자들도 당신처럼 영광스럽게
해주시길 빌며 기도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위해 단순히 기도만 하신
것이 아니라 성령을 통하여 그들과 함께하셨습니다. 제자들을 위한 예수님의
기도는 오늘날 우리를 위해서도 계속됩니다. 성령을 통하여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오늘 하루 당신께서 뽑으신 제자들을 위해 기도하시는 주님의
모습을 묵상하며 예수님의 사랑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갑시다.

 

 

 

나도 사제로서

-김찬선신부-

 

무당은 철저히 신과 단골 사이의 존재입니다.
무당도 보통 때는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자신을 위해 자기 신에게 치성을 드리고
자신을 위해 살아가지만
무당인 한에는 철저히 신과 단골을 위한 존재입니다.
단골의 청을 신에게 아뢰고
신의 뜻, 신이 내린 말을 단골에게 전하는 역할을 합니다.
말하자면 이것이 그의 Raison d`etre(존재이유)인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복음은 대사제이신 주님의 기도입니다.
대사제도 하느님과 사람들 사이의 존재로서
이제 당신의 제자들을 위해 마지막으로 기도하십니다.

이 기도에는 먼저 당신의 사제직에 대한 고백이 있습니다.
당신의 사제직은 당신이 맡으신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당신에게 맡기신 것임을 고백합니다.
아버지께서 사람들을 당신에게 주셨고
아버지께서 사람들에 대한 권한을 주셨으며
아버지께서 일과 사명을 맡기셨음을 고백합니다.

그리고 당신에게 맡겨진 권한과 사명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주님께 맡겨진 것은 권한이자 사명으로서
당신에게 맡겨진 사람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는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는 그 엄청난 것이
권한이자 사명으로 주어졌음을 고백하며,
그 영원한 생명이란 어떤 것인지 말씀하십니다.

영원한 생명이란 홀로 참 하느님이신 분을 아는 것이요,
예수께서 하느님이 보내신 그리스도이심을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대사제이신 주님께서는
사람들에게 하느님을 알려주셨고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말씀을 전해주셨으며
당신의 모든 것이 아버지에게서 온 것임을 믿게 하셨습니다.

오늘 아침, 대사제의 뒤를 따라 사제직을 살아야 하는 우리.
우리에게 맡겨진 권한과 사명에 대해 묵상합니다.
우리에게도 같은 권한과 사명이 맡겨졌음을 묵상합니다.
먼저 모든 사람이 나에게 맡겨졌음을 묵상합니다.
그리고 그 모든 사람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줘야 하는,
그 엄청난 사명이 맡겨졌음을 묵상합니다.

그런 다음, 우리는 우리 자신을 반성합니다.
이 모든 사람이 맡겨진 것에 대해 부담스러워 하지 않는지 반성합니다.
이런 엄청난 사명이 우리에게 맡겨진 것을 영광스럽게 생각하기보다
부담스러워하는 것은 아닌지 반성합니다.

그리고 사명 수행 방식에 대해서도 반성합니다.
하느님을 알게 하고
하느님의 말씀을 전함으로써
하느님께는 영광이 되고
사람들에게는 영원한 생명을 주는 것이 우리의 사명인데
하느님을 빙자하여 자기 일이나 하고
하느님을 알게 하기보다 거창한 사업이나 하며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기보다 자기주장을 내세움으로써
내가 영광을 받으려 하지 않았는지 반성합니다.

 

 

 

 

 

  "나는 아버지께서 나에게 맡겨 주신 일을 다하여 세상에서 아버지의 영광을 드러냈습니다."

 

주님의 영에 사로 잡혀

 -김찬선 신부-

 

바오로 사도는
예루살렘으로 가기에 앞서 에페소 원로들과 작별을 합니다.
작별인사는 회고와 앞으로의 계획과 권고로 나뉘는데
오늘의 사도행전은 이 작별인사의 한 부분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자신의 과거를 회고하며
1)
시련 가운데 아주 겸손히 주님을 섬겼음과
2)
사람들에게 유익한 것이라면
하나도 빼놓지 않고 알려줬음을 얘기합니다.
그리고 앞으로 계획을 얘기하며
1)
성령에 사로잡혀 예루살렘으로 간다는 것과
2)
무슨 일이 닥칠지 모르지만
투옥과 환난을 겪으리라는 것을 예견합니다.

저도 저의 인생에 대해 이렇게 얘기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바오로 사도처럼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내 할 바를 다하고
이웃과의 관계에서 내 할 바를 다 했다면
어디 한 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계명을 잘 완수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바울로 사도는 먼저 시련 가운데서도 하느님을 겸손히 섬겼고
앞으로도 투옥과 환난이 닥칠 것이지만
다 성령의 이끄심에 의한 것이라고 얘기합니다.
이는 주님께서 성령의 인도를 받아 광야에 가시고
거기서 악마의 유혹을 받으심을 상기시킵니다.

그런데 성령께서는 왜 우리를 시련의 길로 인도하실까요?

요 며칠 저는 저의 삶에 대해 진지하게 성찰을 하였습니다.
며칠 전 묵상 중에
“또 내가 어찌하려고 하는구나!”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의 고질병입니다.
원장이라는 책임감과 사랑이 지나쳐서
형제가 잘못하는데 내가 그 형제보다 더 괴로워하고
그 형제의 잘못을 내가 고쳐주려고 하고,
공동체의 분위기를 내 입맛대로 바꾸려고 하고,
생긴 문제를 내가 해결하려고 하고 내 힘으로 해결하려고 합니다.
하느님이 빠졌습니다.
하느님께서 시작서부터 끝까지 Initiative(주도권)를 가지시고
하느님께서 다 하셔야 하는데 제가 하려고 합니다.
저는 그저 시키시는 대로 하고
이끄시는 대로 가면 되는데 말입니다.
다 주님의 영(Spirit of the Lord)에 따라 살지 않고
육의 영(spirit of the flesh)에 따라 살기 때문입니다.

프란치스코는 얘기합니다.
“형제 여러분, 우리 모두 온갖 교만과 헛된 영광을 조심합시다.
육의 영은....실천에 옮기는 데 있어서는 노력을 적게 합니다.
그리고 내적으로 신앙과 성화를 얻으려 하기보다
사람들에게 겉으로 드러나는
그런 신앙과 성화를 얻기 원하고 열망합니다.
이와 반대로,
주님의 영은 육신이 괴로움과 모욕을 당하기를 원하며,
육신이 천한 것으로 여겨지고 멸시받기를 원합니다.

육의 영은 자기를 섬기기에 자기가 영광을 받으려 하지만
주님의 영은 바오로 사도처럼 하느님을 겸손하게 섬기기에
하느님 뜻을 섬기는데 따르는 온갖 시련과 환난을 마다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느님을 섬기기 위해 시련을 마다하지 말아야 하고
시련을 당할 때는 하느님 일을 하기 위해 시련을 받는다는 마음으로
흔들리지 말고 꿋꿋해야 합니다.
오히려 순조로울 때 조심해야 합니다.
교만해져 매사 자기 좋을 대로 하려 하기 쉽기 때문입니다.

 

 

 

부활 7주간 화요일 (요한17,1-11)        

 

     사랑으로 하나가 되는 

 -반영억라파엘신부-

 많은 분들이 성체조배나 묵주기도, 9일기도, 15기도, 자비의 기도, 십자가의길 등 열심히 기도를 합니다. 그런데 가끔 9일기도를 하면 소망을 꼭 들어주신다고 하는데 그렇습니까? 하는 질문을 받습니다. 믿음으로 기도 하고 기도하는 만큼 주님과의 일치를 이룬다면 그렇게 됩니다. 그러나 삶의 변화나 주님과의 사랑의 일치를 이루지 못한 채 기도문만 외운다고 그렇게 이루어지겠습니까? 횟수나 형식에 매이지 말고 진심어린 마음으로 그 기도가 지향하는 바대로 삶의 쇄신을 이뤄야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을 떠나시기에 앞서 당신자신과 제자들, 그리고 앞으로 당신을 믿게 될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셨습니다. 자신을 위해 기도하신 것은 아버지께서 주신 권한을 통해 아버지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기 위함이었습니다. 또한 아버지께서 주신 이들과 앞으로 당신을 믿게 될 이들을 위하여 기도함에 있어서 밑바닥에 깔려 있는 기본핵심은 사랑의 일치에 있습니다.

 

아버지와 아들, 아들과 제자들, 그리고 제자들의 증언을 통하여 믿게 되는 이들, 바로 우리와의 사랑의 관계를 완성하길 바라십니다. 그리하여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로부터 하늘과 땅의 권한을 받았기에 믿는 이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생명의 빵과(요한6,32이하) 생명의 물(요한4,10이하)을 주시며 풍부하게 하십니다. 그리고 영원한 생명이란 아버지 하느님과 예수님을 아는 것이요, 안다는 것은 결국 통교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더불어 한 몸이 된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기도한다는 것은 주님과 사랑으로 하나되는 것에 초점을 두어야 합니다. 주님은 아버지와 하나되어서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셨습니다. 우리도 주님과 하나되어야 비로소 온전히 기도할 수 있습니다. 기도는 사랑하면서 사랑의 친교 안에 있는 것입니다. 마더 데레사 수녀님은 기도는 '심장과 심장의 만남'이라고 하였습니다. 작업시간에는 일로써, 기도시간에는 기도로써 우리는 일치를 이루어야 합니다. 기도를 말, 생각, 장소, 시간에 국한시키지 말고 그 한계를 넘어서서 언제 어디서든지 현존하시는 주님과 친교를 나누는 것으로 이해한다면 우리는 항상 기도할 수 있습니다. 부디 삶이 기도이기를 희망합니다.

이번 주간은 청주교구 사제들이 피정에 임하고 있습니다. 사제들이 주님과 하나가 되고 사제들간에 한 마음 한 뜻을 이룰 수 있는  귀한 은총의 시간이 될 수 있도록 기도해 주십시오. 절대침묵을 원하시는 주님과 함께 ....사랑합니다.

 

 -양승국신부-

 

<햇살이 눈부신 날은>

예수님 지상생활의 결론은 하느님의 뜻에 대한 철저한 순명을 통해 아버지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순종은 어쩔 수 없이, 혹은 죽지 못해 하는 순종이 아니라 기쁨으로 충만한 순종이었습니다.

공생활을 마쳐가던 무렵, 예수님께 다가온 상황은 철저하게도 사면초가의 상황이었습니다. 고통의 도가 너무 지나쳐 인간적으로 도저히 견디기 힘든 상황이었지만 있는 그대로를 수용하십니다. 이런 측면에서 예수님은 철저하게도 낙관주의자였습니다.

기쁨의 순간이 다가올 때면 그 순간을 최대한 즐길 줄 아셨습니다. 슬픔이 다가올 때면 그 슬픔 안에 담겨있는 하느님 아버지의 마음을 읽을줄 아셨습니다. 마침내 죽음이 다가왔을 때, 그 죽음 안에 담겨있는 새 생명의 씨앗을 보시고 기꺼이 받아들이셨습니다. 세상 모든 것을 긍정적으로 바라보신 것입니다.

아버지께 대한 순명의 삶이란 실패나 좌절 가운데서도 부단히 희망하는 낙관적인 삶이라고 보면 거의 정답입니다.

교회 잡지 안에 "공동선"이란 잡지가 있는데, 이 잡지의 편집장으로 계시는 한상봉 선생께서 언젠가 이런 글을 교회 신문에 쓰셨는데, 참으로 공감이 가는 말씀이어서 소개합니다. 세상 만사를 비관적으로 보지말고 일단 좋게, 긍정적으로 생각하라는 요지의 글이었습니다.

"<날마다 좋은 날 되십시오> 하고 새해가 오면 인사들을 하는데, 이는 고통은 하나도 없이 매일 좋은 일만 생기라는 말이 결코 아닙니다. 매일 고통스럽더라도 매일을 좋은 날로 삼으라는 말입니다.

예를 들어 산골짜기에 살다보니 눈이 너무 많이 와서 산길이 막힐 때가 있는데, 이럴 때 열 받지 말고, 이럴 때는 며칠을 두고 눈이 녹을 때까지 자기를 바라보는 즐거움을 창조하라는 전갈로 여기라는 것입니다.

반대로 햇살이 눈부시면 몸을 움직여 땔감을 마련하고 그리운 사람들을 찾아 나서라는 전갈로 여긴다는 것입니다.

아기가 울면 시끄럽다고 짜증낼 것이 아니라 세상에 한 목숨이 살아있음을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다툼이나 불편, 고통이 생기면 땅에 엎드려 겸손을 배우라는 은총의 순간임을 알아차리라는 것입니다.

결국 <좋은 날>이란 물질적 이득, 만사형통, 운수대통만을 기대한다거나 물질적인 이득만을 챙기는 날이 아니라 우연적인 환경에 좌우되지 않고 만사를 나의 영적 성장에 이바지하도록 돕는 날이란 뜻으로 새겨 읽으라는 말입니다.

아침마다 좋은 날을 기대하며 눈뜨는 자는 행복합니다."

지난 날 우리가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그 숱한 선물들을 기억해보십시오. 참으로 놀라운 은총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 각자 인생의 역사는 흘러 넘치는 하느님의 자비와 인내, 축복과 사랑의 역사였습니다. 좋은 것들을 그토록 흘러 넘치도록 많이 받았으니, 이제 아버지께서 우리 영혼의 성장을 위해서 주시는 고통의 가시밭길, 시련의 쓴잔이나 십자가, 죽음마저도 기쁘게 받아들여야하지 않겠습니까?

하느님 아버지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이란 하느님의 뜻에 한치의 오차도 없이 순명하는 삶이며, 그런 삶은 철저하게도 낙관적인 삶이라는 것을 기억하는 하루가 되시길 빕니다.

우리가 조금만 마음을 관대하게 먹는다면 매일 우리에게 다가오는 모든 상황, 사건, 사람들이 다 은총이자 선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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