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11일 토요일 성 바르나바 사도 기념일(마태오 10,7-13)

2011. 6. 11. 오전 6:0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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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6 11일 토요일 성 바르나바 사도 기념일

 

  

그 집에 들어갈 때에는 ‘평화를 빕니다!’ 하고 인사하여라.

그 집이 평화를 누릴 만하면 너희가 비는 평화가 그 집에 내릴 것이고

그렇지 못하면 그 평화는 너희에게 되돌아올 것이다.”
(마태오 10,7-13)

 

As you enter a house, wish it peace.

If the house is worthy, let your peace come upon it;

if not, let your peace return to you.

 

 
바르나바 성인은 레위 지파 출신으로 키프로스에서 태어났다. 성인의 이름은 본래 요셉이었는데 사도들은 그를 바르나바로 불렀다. 성인은 자신의 모든 것을 팔아 초대 교회 공동체에 바치고 사도들과 함께 열성적으로 선교하였다. 성인은 60년 무렵 키프로스의 살라미스에서 돌에 맞아 순교한 것으로 전승에서 전해지고 있다.
스테파노 순교 후 예루살렘에서 주님의 제자들을 매우 심하게 박해하여 흩어졌던 사람들이 안티오키아에서 복음을 전하자 수많은 사람이 주님을 믿게 된다. 이 소식을 듣고 예루살렘 교회는 바르나바를 안티오키아로 파견한다. 안티오키아에서 예수님의 제자들을 부를 때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을 사용하였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시며 아무것도 소유하지 말라고 하신다. 오로지 주님께 의탁하며 가는 곳마다 평화를 빌어 주고 하늘 나라를 선포하라고 하신다(복음).
 

오늘복음 묵상

등산을 준비할 때면 늘 어떻게 하면 짐을 줄일까를 고민하게 됩니다. 산이 높고 산행 기간이 길수록 이런 고민은 더 깊어집니다. 힘든 산행일수록 목적하는 산을 잘 오르려면 무엇보다 등짐 무게를 최소화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여성 산악인 남난희 씨는 한겨울에 태백산맥을 혼자 종주할 때 칫솔의 손잡이까지도 잘라냈을 정도입니다. 이처럼 험난하고 오랜 산행을 할 때는 작은 무게도 견뎌 내기 어렵습니다.
영성 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영적으로 성장해 가는 데 가장 큰 적은 많은 것을 안고 살 때입니다. 가진 것이 많고 얽힌 것이 복잡해질수록 우리의 영성 생활은 거꾸로 갑니다. 하느님을 향한 오롯한 마음이 없어지고 마음이 산란해지고 맙니다. 신비주의 사상가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는 “우리 인간의 영혼은 잡다한 피조물에 포로가 되어 있다.”라고 하였습니다. 우리 영혼이 세상의 온갖 무게에 짓눌려 있다는 것이지요.
우리가 영적으로 성장한다는 것은 우리 영혼에 무엇을 자꾸 덧붙이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 영혼에 덕지덕지 붙어 있는 온갖 불순물들을 떼어 내는 것입니다. 우리가 나이가 들수록 더 갖고, 더 많은 인연을 만들어야 삶이 안정되고 평화로워진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나이가 들수록 더 많이 버리고 삶을 단순화시켜야 중심이 잡히고 평화로워집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아무것도 가지지 말고 빈 몸으로 떠나라고 하신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주님께서 원하신다면

  -반영억라파엘신부-

‘숲속의 땅’이라 불리는 중앙아메리카의 과테말라는 인구 1천3백만의 소도시입니다. 그냥 보기에는 평화롭고 아름다운 고산지대로 살기가 좋은 곳인데 중남미 국가 중 가장 치안이 불안한 국가입니다. 일일 평균 약 20건의 살인 사건이 발생하여 많은 출산에도 불구하고 인구증가는 없다고 합니다. 문맹율이 80%가 넘는 가난의 고통이 너무도 큰 나라입니다. 

이곳에 선교사제로 파견되어 있는 홍 가브리엘신부는 사제생활비 1천불이 너무 과분하다고 생각되어 버림받은 어린이 10명을 데리고 살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일이 커졌습니다. 150명이 숙식할 수 있는 고아원 ‘천사의 집’과 250명의 배움을 감당할 수 있는 ‘미리내 초등학교’를 건립하고 그들과 함께 살고 있습니다. 얼마 전 신부는 미국 뉴저지에 피정을 겸한 후원회원을 모집하러 나섰습니다. 공항에서 병원으로 실려 가는 처지가 되었는데 검진결과 “영양실조”였습니다.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살려면 그들보다 더 가난한 삶을 살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러나 먼저 쓰러지면 그들은 어쩌란 말인지요? 그와 피정을 함께 하였습니다. 그는 또 하나의 꿈을 지니고 있습니다. 지금의 시설에 올 수 없는 그야말로 오지에 버려진 어린이들을 위해 살고 싶답니다. 항공요금이 비싸서 3 년 만에 한국에 나온 사람이 돈도 없이 또 다른 계획을 세우는 것을 보고 놀랐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한 번도 굶어 본 적이 없고, 돈 걱정을 해본 적도 없다. 필요할 때 필요한 만큼을 주님께서 채워 주셨고 앞으로도 채워주실 것이다. 주님께서 원하신다면 앞으로도 그 믿음으로 아이들을 사랑하며 살 것이다.”

전대에 금도 은도 구리 돈도 지니지 않았고 여행 보따리도 여벌 옷도 신발도 지팡이도 지니지 않은 채 주님을 차지한 홍 신부는 ‘한 눈 팔지 않고’ 가야할 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초대교회 사도들의 열성으로 그는 복음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마태10,8)는 말씀에 따라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몸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온전히 내어놓고 있습니다. 

모두가 하느님의 것이고 우리는 잠시 관리자로서 관리하는 것일 뿐인데 왜 욕심을 부리며 사는지 모르겠습니다. 하느님의 섭리와 안배를 몸으로 받아들이며 희생의 삶을 사는 선교사들을 위해 기도하는 오늘이기를 희망합니다.

우리 모두가 사도의 열성으로 선교에 나서야하겠습니다. 가난하고 고통받는 이들을 우선적으로 배려하면서...... 하느님을 차지하는 기쁨에 감사하기를 바랍니다. 사랑합니다. 

제가 청주교구 해외선교후원회 담당 신부입니다. 후원회 계좌를 알려 드릴까요? 

 알려드리죠. 

해외선교후원회 미사 : 매월 첫주 토요일 오전 10시 용암동성당

후원회 통장 계좌번호: 농협 : 1180-01-016558    우체국 : 300038-01-010305

                                 우리 : 1005-601-261474   신한   : 100-023-738316

                                  예금주 : (재)청주교구 해외선교후원회

                                  연락처 : 010-4196-4515

그리스도인, 관대하게 포용하는 사람들

-이준석 신부-

 

바르나바 사도와 바오로 사도는 함께 이방 세계에 예수님의 복음을 선포한 파트너였습니다. 바오로 사도가 타협을 모르는 곧은 성품의 소유자였다면 바르나바 사도는 관대하고 개방적인 분이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 공동체가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던 사울(바오로)에 대해 거부감을 지니고 있을 때 그를 받아들인 사람이 바르나바입니다. 이 바오로 사도와 함께 이방인들에게 열린 마음으로 복음을 전하고 그들에게 유다교식 관습, 이를테면 할례 강요하던 몇몇 유다계 그리스도교 형제들에게 유연하고 개방적인 태도를 취하도록 촉구한 이도 바르나바였습니다.

바오로 사도가 이방인들에 대한 이중적 태도를 보인 베드로 사도를 비판했을 때에도 베드로 사도를 감싼 이가 바르나바입니다. 바오로 사도가 첫 전도여행에서 중도에 전도를 포기한 요한 마르코를 비겁한 사람이라 여겨 그를 두 번째 전도여행에 데리고 가지 않겠다고 했을 때 마르코를 자신의 여정에 동행시킨 이도 그입니다. 우리는 모두 하느님을 선포하는 그리스도의 제자들입니다.

그런데 복음 선포에는 불같은 열정과 과감한 결단력만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넓게 포용하는 너그러운 마음, 기준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움도 필요합니다. 이것이 그의 가르침입니다.

 

 

거룩한 동행

- 임순연 수녀-

 

거룩한 동행, 우리는 매일 길을 나섭니다. 길 위에서 여러 가지 상황과 사람을 만납니다.
때로 앓는 이를 만나고, 때로 우리가 앓기도 하면서 길을 갑니다.
길을 가는 목적은 하느님 나라를 알리기 위한 것입니다.
길은 하느님께로 뻗어 있고, 길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곳으로 향해 있습니다.
길 위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걷는 것입니다.
어디를 가든, 무엇을 하든, 누구를 만나든, 하느님과 함께 걷는 것입니다.
하느님과 함께 걸으며 하느님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내게 거저 주어진 신앙을 전하는 것입니다.
내가 지닌 것과 내가 아는 것과 내가 소중히 여기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조용히 걷지만 큰 울림을 지니며 선포합니다.
나는 지금 하느님의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나의 하느님은 당신도 사랑하십니다.

 

  바르나바 축일

  하늘 나라 선포

-박영봉 신부-

모든 사람이 하늘 나라로 들어가도록 불림을 받았습니다. 이 나라에 들어가려면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 나라는 겸손한 마음으로 하늘 나라를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도록’ 당신의 제자들을 파견하셨습니다. 그것은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마태 5,3)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르 2,17)고 하시며, 죄인들을 하늘 나라의 식탁에 초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하여 그들에게 회개를 호소하시며, “하늘에서는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더 기뻐할 것”(루카 15,7)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구유에서 십자가에 이르기까지
가난한 사람들의 삶에 참여하셨습니다. 배고픔과 목마름과 궁핍을 겪으셨으며, 더 나아가 여러 가난한 사람들과 당신 자신을 동일시하시고, 그들에 대한 실천적 사랑을 당신 나라에 들어가는 조건으로 삼으셨습니다.

 

누가 먼저 줄까?

-김찬선신부-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카자흐스탄에 선교 나가 계시는 형제님께서 여러 차례 하신 말씀.
그곳에서 작은 병원과 빈민 식당을 하시는데
빈민 식당 옆에 온실을 만들어 상추를 비롯해 채소를 가꾸신답니다.
그곳 한인 신자들에게 선행을 하는 기회도 주고
빈민 식당 운영에 보탬도 되게 채소를 싼값에 팔았답니다.
그러다 너무 번거롭기도 하고 모양새도 별로 좋은 것 같지 않아
어느 날부터 그냥 드렸답니다.
그랬더니 한인 신자들이 팔 때보다 훨씬 더 많이 성금을 내시더랍니다
.
작은 사랑의 기적이고 사랑의 이치입니다
.
주고받는 것은 두 가지입니다
.
거래 형태와 사랑의 형태입니다
. 그런데 어떠합니까?
거래는 정확히, 사랑은 후하게 아닙니까
? 이것이 우리의 심리입니다. 그리고 거래는 주고받은 것이 물건뿐인데 사랑은 물건에 더 하여 사랑까지 주고받습니다.
받을 때 물건에 사랑을 더 하여 받았기에
줄 때도 물건에 사랑을 더 하여 줍니다.
누가 먼저 이렇게 거저 주기만 하면
아무도 그냥 입을 싹 닦는 사람은 없다는 것이 저의 믿음입니다. 받는 사람도 반드시 사랑을 더 하여 되돌려줍니다.
그런데 누가 먼저 이렇게 거저 줄까요
?
먼저 누군가에게 사랑을 받은 사람
. 먼저 사랑을 받아 먼저 이 사랑의 이치를 안 사람입니다. 먼저 이 사랑의 이치를 알아 먼저 행복한 사람입니다.
행복이 너무 충만하여 다른 사람에게 나누지 않을 수 없는 사람입니다
.
그래서 오늘 우리가 축일을 지내는 바르나바 사도와 같은 사람입니다
.

오늘도 제 주변에서 저는 이런 사람을 많이 봅니다
.
남쪽 사람이건 북쪽 사람이건
자기와 아무 상관이 없는 사람에게 크게든 적게든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들입니다.

 

-김찬선신부-

 바르나바는 열 두 사도에 속하지 않으면서도 바오로와 마찬가지로 복음 선포에 열정적이었기에 사도라 불립니다.
키프로스 태생의 레위인으로서 본명이 요셉인 바르나바는 다른 사람을 너무도 잘 위로할 줄 아는 람이었기 때문인지 ‘바르나바’, ‘위로의 아들’이라는 뜻의 별명을 받습니다.
위로를 잘 한다는 것은 기술이 아니라 마음입니다. 굳이 능력이라고 한다면 동감하는 능력일 것입니다.
바르나바는 사도들로부터 복음을 전해 받은 다음 소유하고 있던 밭을 팔아서 그 돈을 사도들의 발치에 놓았습니다.
하느님 나라를 소유하고 하느님으로 충분한 사람이라야 할 수 있는 일이고 밭에 묻힌 보물을 발견한 사람이라야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이것을 오늘 입당송과 사도행전은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착한 사람이라고 바르나바에 대해 얘기합니다.
사랑과 자선은 넘치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충만하지 않으면 억지로 하려 해도 아까워하며 시늉만 낼 것입니다. 그러나 충만함으로 바르나바가 나눠준 것은 돈만이 아닙니다.
먹을 것과 입을 것을 나누는 것도 착한 일이지만 더 훌륭한 일은 복음을 만나게 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누리는 복음의 참 행복을 다른 사람들도 누리게 하기 위해 바르나바는 바오로와 함께 열정적으로 선교하였습니다.
이러한 바르나바였지만 흠 없이 완벽한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우리와 마찬가지로 약함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할례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두려워 베드로처럼 이방인들과 음식을 먹지 않는 것처럼 행동한 바르나바였습니다.   그리고 사촌 마르코를 선교에 동행케 하는 것을 놓고 바오로와 심하게 다투고 갈라져서 선교를 한 바르나바였습니다.
감정이 격해지면 감정조차 죽이지 못하는(사도15,39) 약한 사람이었지만
성령으로 그리스도를 위해 목숨을 내놓은 바르나바였습니다(사도15,26).

가서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여라.”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당부하신 말씀입니다. 그러시면서 아무것도 지니지 말라고 하십니다. 많이 가지면 망설임도 많아집니다. 이것도 아닌 듯하고 저것도 아닌 듯합니다. 가진 것이 적으면 분명 유혹도 적어집니다.
하지만 가진 것이 없으면 어떻게 활동할 수 있을는지요? 사도들에게는 주님께서 주신 능력이 있었습니다. 병자를 낫게 하고 마귀를 물리치는 능력입니다. 기적의 힘과 함께 살았기에 그들은 버틸 수 있었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아무것도 없으면불안해지기 마련입니다
.
그러므로 아무것도 지니지 말라.’는 말씀을 아무것에도 얽매이지 말라.’는 말씀으로 받아들여 봅니다. 복음 선포를 위해서는 자유로운 사람이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누구나 자유롭기를 원합니다. 그렇지만 어떤 삶이 자유로운 삶인지 잘 모릅니다. 스승님의 말씀에서 아무것에도 얽매이지 않는 삶이라고 묵상해 봅니다
.
하늘 나라를 선포하려면 먼저 그런 삶을 살아야 합니다. 물질을 따라 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은총으로 사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지요. 많은 것을 소유하고 있지만 그 소유에 얽매이지 않으려는 노력입니다. 모든 것을 받아들이지만 언제나 자유롭게 살려는 자세입니다. 그런 마음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라는 것이 복음의 교훈입니다.

 

선교는 하느님을 전하는 일입니다. 그분의 권능과 사랑을 알리는 일입니다. 그러기에 아무것도 지니지 말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아무것도 없기에 주님의 힘이 함께하십니다. 온전히 비어 있기에 주님께서 채워 주십니다.
누구나 자신이 체험한 일을 말할 때에는 힘이 생깁니다. 또한 체험 이야기는 듣는 사람들을 더 감동하게 만듭니다. 진실한 이야기일수록 더욱 그렇습니다. 선교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이 만난 하느님을 전해야 상대방을 움직일 수 있습니다. 선교사들이 그랬습니다. 자신들이 체험한 하느님을 전하려 했으므로 성령께서 함께하셨던 것입니다.
믿음을 전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신앙생활을 기쁘게 하지 않으면 더욱 그렇습니다. 자신은 긴가민가하면서 어떻게 남에게 확신을 요구할 수 있겠습니까? 선교에 앞서 신앙생활을 기쁘게 해 나가기로 다짐합시다. 너무 많이 가지려는 마음 때문에 믿음의 기쁨을 얻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봅시다. 욕심에서 조금만 자유로워져도 성령께서 함께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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