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11주간 월요일(마태5,38-42) (파도바의 성 안토니오 사제 기념일)

2011. 6. 13. 오전 6:4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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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11주간 월요일(마태5,38-42) (파도바의 성 안토니오 사제 기념일)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오히려 누가 네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 대어라.

또 너를 재판에 걸어

네 속옷을 가지려는 자에게는 겉옷까지 내주어라.
(마태오 5,38-42)

 

 

Offer no resistance to one who is evil.
When someone strikes you on your right cheek,
turn the other one to him as well.
If anyone wants to go to law with you over your tunic,
hand him your cloak as well.

 

 

 

말씀의 초대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이 슬프고 가난해 보이지만 그들은 진리와 말씀의 힘으로 마음은 늘 기쁘고 풍요롭다. 매질과 모욕, 옥살이를 당해도 그들은 손에 의로움의 무기를 들고 진실한 사랑을 전한다. 초대 교회의 예수님 제자들의 선교 모습이다(제1독서). 이스라엘의 복수 동태법은 무자비하게 복수를 하는 것에서 가해자를 보호하고 형평성에 따른 동등한 형태의 벌을 주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것마저도 거부하시면서 오히려 더욱더 적극적인 사랑을 바라신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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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살면서 억울한 일이 많습니다. 직장에서 부당한 대우를 받기도 하고, 사람들의 오해와 편견으로 소외를 당하고 미움을 받기도 합니다. 여성이라는 이유로, 학벌이나 외모 때문에 차별을 받기도 하고, 누명을 쓰거나 이유 없이 해를 입어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내기도 합니다.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 산다는 것이 이렇게 녹록하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나에게 고통을 안겨 준 사람에게 그만큼 하느님께서 갚아 주시면 얼마나 시원하겠습니까? 내가 받은 슬픔과 고통을 그들도 똑같이 받아 보아야 그들이 정신을 차리고 정의가 바로 설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에는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 상처는 상처로, 멍은 멍으로 갚아야 한다.”(탈출 21,24)는 ‘복수 동태법’이라는 법이 생겨났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그와는 반대로 더 억울한 말씀을 하십니다. “네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 대고”, “속옷을 가지려거든 겉옷까지 내주어라.”고 말씀하십니다. 더구나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마태 5,45)라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주님의 정의는 어디에 있느냐고 항변하고 싶어집니다.
폭력에 대한 적극적인 저항은 ‘사랑’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악을 악으로만 갚을 때 그 악의 세력은 더욱 번창해 갑니다. 오른뺨을 때리면 왼뺨을 돌려 대 주는 누군가의 ‘바보 같은 사랑’과 희생이 있을 때라야 악은 그 힘을 잃고 맙니다. 사회에 질서와 정의를 세우는 것은 인간이 만든 법과 힘일 것 같지만, 사실은 더 깊은 곳에 누군가의 희생과 사랑입니다. 전능하신 힘을 가지신 주님께서 결국에는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바보 같은 사랑을 하신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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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네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 대어라. 네 속옷을 가지려는 자에게는 겉옷까지 내주어라.” 참으로 어려운 말씀입니다. 아무리 그렇더라도 뺨을 때리는 사람에게 또 때려 달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웬만해서는 속옷과 겉옷을 벗어 줄 수 있는 상황이 아닙니다. 그렇게 했다가는 오히려 오해받을 수 있습니다.
말씀의 의도는 어디까지 참고’ ‘어디까지 자선을 베풀어야 할지를 알리려는 데 있습니다. 무고하게 뺨을 맞았더라도 다른 뺨을 대 줄 만큼 참으라는 말씀입니다. 속옷을 달라는 어이없는 청일지라도 겉옷까지 줄 수 있는 자세로 임하라는 말씀입니다.
물론 아무나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보통 사람에게는 어림도 없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인내의 한계점을 제시하신 겁니다. 우리가 목표로 삼아야 할 자선의 최정상을 꺼내 보이신 것입니다. 등산하는 이들은 높은 산을 오르고 싶어 합니다. 그러려고 그들은 자주 훈련합니다. 누구라도 단박에 지리산 정상으로 올라갈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뱁새가 황새를 따라갈 수는 없다고 했습니다. 노력하고 훈련해서 황새가 되어야 합니다. 일류 선수는 정상을 지키고자 끊임없이 연습합니다. ‘피나는 연습말고는 답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 역시 노력해야 합니다. 먼저 나를 잘 대해 주는 사람에게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것이 인내와 자선의 첫출발입니다.

  

 ‘십자가의 길’ 14처 가운데 가장 감동적인 장면은 어디입니까? 저에게는 12처인 ‘십자가에서 돌아가시는 예수님’이었습니다. 한때는 ‘키레네 사람 시몬’이 예수님을 도와 십자가를 지는 장면과 ‘용감한 여인 베로니카’가 예수님의 얼굴을 닦아 드리는 장면이 가슴에 남았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제1처’가 감동으로 다가왔습니다. 무죄한 분께서 죄인으로 몰려 사형 선고를 받으시는 장면입니다. 의롭고 선량하신 분께서 사형 선고를 받으시는 모습이 마음을 눌렀습니다. 그분께서는 변명도 항변도 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담담히 판결을 받아들이십니다.
‘삶의 억울함’을 인정하시는 모습입니다. ‘인생의 불공평함’을 받아들이시는 모습입니다. 그렇습니다. ‘제1처의 예수님’께서는 억울함과 불공평은 어디에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기에 우리 역시 살면서 억울함을 당합니다. 때로는 모함도 받고 때로는 이용도 당합니다. 오해 때문에 멍들었던 일도 한두 번이 아닙니다. 우리는 어떻게 처신하였습니까? 어쩔 수 없다며 받아들였습니까? 아니면 악쓰며 반항하였습니까? 결과야 어떻든 남은 것은 상처입니다.
이젠 받아들여야 합니다. ‘억울함의 상처’가 십자가라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생각하면 가슴 떨리고 증오가 솟더라도 끌어안아야 합니다. 그러면 은총이 함께합니다. 누군가 ‘오른뺨을 치더라도’ 눈은 흘길지언정 참아 내게 하는 주님의 은총입니다.

☆☆☆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동태 복수법으로 정의를 실현하고자 하였습니다. 말하자면 상대방이 자신에게 상처를 준 것 그 이상으로 보복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자기가 입은 상처보다 더 큰 상처를 주며 보복하고 싶어 합니다. 그런 이유로 악순환이 계속됩니다. 상대편은 자기가 준 상처보다 더 큰 보복을 당했다고 여겨 또 보복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악순환의 고리를 끊으시고자 보복하지 말고 오히려 한술 더 떠서 친절하기를 요구하십니다. 복수의 악순환을 끊는 지름길이지만 사람들이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해결책입니다. 이성으로는 알아들을 수 있지만 감정으로 소화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하느님의 은총이 필요합니다.  

 

 맞서지 마라

  -반영억신부-

살아가면서 이러저러한 의견을 접하게 됩니다. 그리고 자기에게 이익이 되면 좋아라. 하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반박할 생각을 하며 심지어는 골탕을 먹일 때도 있습니다. 남에게는 넉넉한 마음으로 품고 살아야 한다고 말하면서도 정작 자신의 마음은 바늘 하나 들어갈 틈 없이 냉정하기도 합니다. 때로는 네가 그런 식으로 하면 내가 가만있지 않을 것이다. 협박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한 발 더 나아가 누가 오른뺨을 치거든 왼뺨마저 돌려대고 속옷을 가지려는 자에게 겉옷가지 내주어라 고 하십니다. 천 걸음을 걷기도 힘들거늘 이천 걸음을 걸어야 하고 달라는 자에게 주고 꾸려는 자를 물리치지 말라고 하시니 그저 당하고 있으라는 말씀으로 들립니다. 정말 이렇게 불이익을 당하는 것이 싫습니다. 그렇지만 당신이 하라고 하시니 이유나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당하고 있으라는 말씀이 아니라 악을 선으로 갚으라는 말씀으로 받아들입니다. 악의 고리를 끊는 유일한 방법이 바로 이것입니다. 당신 친히 갖은 조롱과 모욕을 안고 십자가의 죽음을 받아들이셨으니 오늘도 여전히 그 방법이 유효합니다. 자신이 입은 상처는 상처로 되갚을 때 극복되는 것이 아니라 인내로운 사랑으로 흡수될 때 그 악은 힘을 잃게 됩니다. 우리는 악이 스스로 설 자리를 잃을 때까지 사랑으로 채워야 합니다.

어제 뉴스를 보니 ‘친인척 간의 해묵고, 골 깊은 감정 다툼이 11살 앳된 초등학생의 생명을 앗아가는 참극을 불러왔습니다.’ 12일 오전 전북 순창군 구림면 금평마을 양모 씨의 집에서 양씨의 외삼촌 김 모씨가 불을 지르고 난동을 부려 김 씨가 불에 타 숨지고 양씨의 딸이 불에 타고 연기에 질식해 숨지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집안 간 채무관계가 얽히고 설켜 있었고, 2년 전에는 김 씨가 양씨를 마구 폭행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이 폭행 사건이 이번 참극의 기폭제가 됐다고 하니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남도 아니고 친인척도 소용없는 시대입니다.

오래 전 일입니다만 한국의 모 기업회장은 폭행을 당한 아들의 분노를 폭력으로 되갚으려 했다가 더 큰 원한을 키웠고 그로 말미암아 물적인 손해뿐 아니라 동안에 쌓아놓은 명예는 물론 물질로는 해결할 수 없는 많은 것을 잃고 말았습니다. 자식의 고통을 바라보는 아버지의 마음이야 위로 받을 수 있다고 하지만 폭력으로는 결코 악의 고리를 끊을 수 없다는 교훈을 얻게 해 주었습니다. 

혹시라도 누군가와 맞서려거든 사랑으로 맞서십시오. 주님의 사랑으로 대결하십시오. 사랑은 악을 이겨내는 능력입니다. 불의를 크게 앙갚음하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겁이 나서, 마음이 약해서 피한다면, 심지어는 상대방과 같은 부류의 인간이 되기 싫어서 맞서지 않는 것은 악을 이기는 방법이 아닙니다. 우리는 한 차원 높아져야 합니다. 적극적인 사랑의 행동을 통해서 악을 이겨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악에 굴복 당하지 말고 선으로 악을 굴복시키십시오.(로마12,21) 사랑합니다.

 

그리스도인, 손해 보는 장사꾼들

-이준석 신부-

고대 근동의 민형사상 손해배상에 관한 법의 기본이 되는 원칙은 동태복수법이었습니다. 즉 내가 다른 이에게 손해를 당한 것만큼 갚아준다는것입니다. 기실 이 법은 작은 범죄를 크게 벌하는 가혹한 형벌을 방지하는 효과도 있었습니다. 이를테면 다른 이의 팔에 작은 찰과상을 입힌 소녀의 팔을 통째로 잘라버린다든지, 적은 재산상의 손해를 끼치자 전 재산을 몰수한다든지하는 가혹하고 불공정한 법집행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 근본 취지였습니다.
고대 근동 사람들은 이 원칙에 근거해서 받은 만큼 돌려 준다라는 태도를 항상 지니고 살았습니다. 그들이 보기에 이익이든 손해이든 서로 준 만큼 되돌려 받는 사회가 정의로운 사회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관점에서정의란 전혀 다른 개념이었습니다. 그분께 정의롭고 평화로운 사회는 주고받음이 동등하고 정확한 사회가 아니라 손해를 손해로 갚지 않고 아쉬워하는 사람에게 조건 없이 베푸는 사회, 강하고 여유 있는 사람들이 약하고 모자란 사람들을 보살피는 사회였습니다. 정의로운 사회에 대한 예수님의 이러한 전망을 나누는 사람들이 바로 그리스도인입니다.
당신은 그리스도인입니까?

 

그리스도인의 투자

-김선오 신부-

세상에는 세 부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첫째는 남의 것을 빼앗아서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소위 나쁜 사람들이지요. 하지만 자본주의가 원래 그런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내가 살기 위해서 다른 사람이 희생당해도 괜찮다고 생각하곤 합니다. 두 번째 부류는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것을 삶의 목표로 삼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보통 그런 사람들은 남들에게 피해를 주지도 않지만 남에게 도움을 주지도 않습니다. 그냥 혼자서 잘 사는 스타일입니다.
어떻습니까? 두 번째 부류의 삶도 괜찮지 않을까요? 이 정도만 해도 충분하다고 생각하겠지만 이런 삶은 그리스도인의 삶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런 삶은 ‘무관심의 삶’이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 부류의 사람들은 주고 또 주고 내어주고 또 내어주는 이들입니다. 세상의 똑똑하다는 사람들은 그들에게 ‘바보’같다고 표현합니다. 하지만 오늘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런 삶을 살라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우리 주위에는 늘 내어주고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인간은 본성상 무언가를 내어놓으면 어떤 것을 채워 넣어야만 합니다. 그래서 내어놓으면 그 이상으로 하느님께서 채워주신다는 것을 경험한 사람들이 남에게 또 내어놓습니다. 실제로 하느님께서 “주고 또 주어라”라고 말씀하시는 부분의 뒷말씀은 “내가 채워주리라”입니다. 그것을 믿고 체험하는 삶이 신앙인의 삶입니다.

네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대어라.

-김지영 신부-

 ◆누가 오른뺨을 칠 때 왼뺨마저 돌려대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속옷을 달라는 사람에게 겉옷까지 내주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또 누가 오리를 가자고 하는데 십리까지, 곧 바래다 주었다가 되돌아오는 사람이 그리 흔할까? 한번 생각해 보자. 복음에서 왼뺨이 아니라 오른뺨을 칠 때라고 분명히 언급되어 있다. 그렇다면 손바닥이 아니라 손등으로 때린 셈이다. 사실 손등으로 맞는다는 것은 큰 모욕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도 다른 뺨마저 대주라고 한다. 또한 가진 것이라고는 겉옷과 속옷 한 벌밖에 없는 처지인데 누가 겉옷을 달라고 하면 당장 벗어주고 거기다 속옷까지 벗어주라고 한다. 과연 이러한 실천이 인간 사회에서 가능한 것일까? 예수께서는 실천 불가능한 것을 말하신 것이 아닌가? 차라리 구약의 율법이 현실에 더 맞는 것처럼 여겨진다.
러시아의 대문호 톨스토이는 산상설교를 글자 그대로 이해해야 할 규범으로 인식하였으며 그것이 공동생활에서 가장 이상적인 질서를 만들어 준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톨스토이는 현실이 그렇지 못하다는 것을 깨닫고 그것에 대한 항의로 은둔자의 길을 택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이 말씀을 어디까지 실천해야 하는가? 예수께서는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로써 노력하는 자세를 보신다. 상처를 상처로 갚지 않고 사랑으로 포용하길 원하신다. 이것이 진정한 의미에서 율법을 지키는 것이다. 말로만 사랑을 외치지 말고 마음으로 행동으로 실천하라는 것이 산상설교의 핵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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