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11주간 화요일(마태5,43-48)

2011. 6. 14. 오전 6:53:32

글자

 

2011 6 14일 연중 제11주간 화요일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같이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라.”
(마태오 5,43~48)

 So be perfect,

just as your heavenly Father is perfect."

 

  

말씀의 초대

바오로는 마케도니아 신자들이 극심한 가난 속에서도 후한 인심을 베푸는 실천적인 사랑을 전한다. 따라서 코린토 교회 신자들도 믿음과 말과 지식 등 모든 면에서 뛰어나므로 사랑을 실천하는 데도 그런 모습을 보이도록 권고한다(제1독서). 주님께서는 선한 사람에게나 악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햇볕을 주시고 비를 내려 주신다. 주님처럼 우리도 모든 이에게 차별 없이 우리의 사랑을 실천하며 살아야 한다(복음).

☆☆☆

오늘의 묵상

“재작년에 남편이 폐암 말기 판정을 받았다. 비록 남편과 이혼한 사이였지만 살 날이 6개월 정도밖에 남지 않은 사람을 위하여 다시 그녀가 병구완에 나섰다. 처음에 남편은 자기의 병을 인정하지 못하여 난폭하게 굴었지만, 묵묵히 자신의 병상을 지키는 부인에게 끝내는 참회의 눈물을 흘리고 숨을 거두었다. 그 눈물 하나로 그녀는 결혼 생활 40년 동안 받았던 억울함과 고통의 큰 바윗덩이가 가슴에서 쑥 빠져 나간 것 같았다고 했다.”
황영애 교수의 『화학에서 인생을 배우다』에서 인용한 글입니다. 이혼한 남편의 임종을 지켜 준 이 글의 주인공은 이 책을 쓴 저자의 집에서 가사를 도와주는 분입니다. 그분은 가정 형편 때문에 초등학교만 졸업하였으며, 지금의 남편과 혼인하면서 평생 고통스러운 날을 보내야 했습니다. 시집 식구들을 거두어들여 돌보아야 했던 것은 물론이고 시어머님이 돌아가시기 전까지 7년 동안을 대소변을 받아 내며 병 수발을 해야 했습니다. 더욱이 남편은 남편대로 제대로 하는 일 없이 술로 세월을 보내면서 아내를 괴롭혔습니다. 결국 그분은 자녀들 때문에 이혼을 하고 온갖 궂은일을 다하며 훌륭하게 키워서 일류 대학에 입학시켰습니다. 그리고 이제 마지막으로 자신의 인생에서 운명적으로 만난 이혼한 남편의 임종을 지키며 한 인간으로서 도리를 다했습니다. 눈물을 흘리며 죽음을 맞이한 남편도, 그분도 모두 구원되었습니다.
우리에게는 누구나 억울한 사연들이 있습니다. 우리 삶에서 만난 억울한 일들을 그저 ‘억울함’으로 안고 살면 그것은 억울한 채로 남아서 ‘슬픈 인생’을 만들어 냅니다. 그러나 그것을 적극적인 사랑으로 승화시키면 자신의 인생에 의미가 되고 축복이 됩니다. 우리 삶에서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똑같이 햇볕을 주시고 비를 내려 주시는’ 착한 하느님 마음만을 담고 살아야 합니다. 다른 계산을 하면 금방 우리는 억울해집니다.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원수를 사랑하여라.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무심코 읽지만 놀라운 말씀입니다. 어떻게 원수를 사랑하고 박해자들을 위하여 기도할 수 있을는지요? 그렇게만 할 수 있다면 세상에 못할 것이 없을 것입니다. 그런 마음가짐으로 살아간다면 어찌 하늘과 땅이 돕지 않겠습니까?
원수는 원한이 맺힌 사람입니다. 언젠가 외나무다리에서 만날 사람입니다. 하지만 그런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한쪽은 원수라 생각해도 상대방은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쌍방이 모두 원수로 여기는 관계는 많지 않다는 이야기입니다. 말만 원수였지 실은 미운 사람이었을 뿐입니다. 미움을 털고 나면 또 이웃이 될 사람들입니다.
미움의 출발도 하찮은 것이 대부분입니다. 상대를 잘 몰랐기에 생겨났습니다. ‘알았다하더라도 잘못 알았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 다시 출발해야 합니다. 지난날을 지우고 새롭게 시작해야 합니다. 그러기에 주님께서는 사랑하고 기도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서운하고 섭섭해도 마음을 닫아서는 안 됩니다. ‘그런 행동이 쌓여 미움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용서의 출발은 닫힌 마음을 여는 행위입니다. 여는 순간 은총의 햇볕이 들어갑니다. 누구에게나 사랑의 능력이 있습니다. 마음을 열면 이 잠재 능력이 작동하기 시작합니다.

  

원수에 대한 사랑은 참으로 알아듣기 어려운 가르침입니다. 정의를 넘어서기 때문입니다. 옛날이야기에는 산속에서 무술을 닦고 돌아와 하나하나 복수를 해야 하는 원수들이 나옵니다만 과연 자신에게 그렇게 죽여 없애야 할 원수들이 있는지 따져 보면 대부분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분명 미운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른바 ‘웬수’입니다. 아주 가까이 있습니다. 본디 친한 친구였거나, 사랑하던 애인이었거나, 또는 가까웠던 가족이나 친척들이었던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그들이 어느 날 상처를 주었기 때문에 ‘웬수’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미워해도 그에게는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오히려 미워하는 나 자신만 잃는 게 많을 따름입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웬수’를 사랑하라 하신 것입니다. 미움을 중지하라는 것입니다. 상처로 친구가 원수가 되었다면, 그 원수는 사랑으로 친구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마음을 닫고 싶은 유혹을 자주 받습니다. 너무 서운하거나 섭섭해서 마음을 닫는다고 하지만 그런 것들이 쌓여 미움이 됩니다. 사랑받고 싶은 마음은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서 인정받고 싶은 마음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관계는 어느 한쪽이 원하는 상황으로만 진전되지 않습니다.
오해는 상대의 마음을 모르는 데에서 생겨납니다. 설령 안다고 생각하더라도 제대로 알지 못하기에 생겨납니다. 그러기에 오해는 필연적인 것입니다. 살다 보면 누구나 오해를 경험하며 마음 아파합니다. 그렇지만 받아들여야 합니다
.
열심히 일했는데도 윗사람이 알아주지 않거나 최선을 다하였는데도 시부모님이 시큰둥한 반응을 보일 때에 어떻게 하겠습니까? 마음을 닫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입니다. 그러나 닫아서는 안 됩니다. 마음을 여는 행위가 용서의 첫 단계입니다. 용서를 어마어마한 것으로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용서는 이렇듯 작은 행위에서 비롯됩니다. 마음을 열고 미소를 띠고 다가가야 합니다. 사랑은 미소와 함께 출발합니다. 섭섭함을 웃음으로 극복하는 이가 위대한 사람입니다. 그에게는 사랑의 능력이 잠재되어 있습니다
.

             

원수를 사랑하라고요?

 -반영억신부-

살아가면서 나를 아프게 하는 사람을 만납니다. 그래서 나는 많은 상처를 받았노라고 말합니다. 사실 상처를 주는 사람은 멀리 있지 않습니다. 아주 가까이 있습니다. 아내가 될 수도 있고 남편이 될 수도 있고 자식이 될 수도 있으며 부모나 이웃, 절친한 친구, 동료가 될 수도 있습니다. 상처를 풀지 못하고 시간이 흐르면 마음의 병이 되고 미움이 쌓여서 결국은 원수가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 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마태5,44-45) 고 말씀하셨습니다. 미움을 사랑으로 정복하라는 말씀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아버지께는 원수와 박해하는 사람, 악인과 선인, 의로운 사람과 불의한 사람이 따로 없습니다. 다 내 자식이요, 사랑해야 할 대상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아낌없이 사랑을 베푸십니다. 오로지 사랑만이 충만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원수를 만드는 것은 바로 나입니다. 사랑으로 충만하다면 원수가 있을 수 없습니다. 가끔 신자들의 기도소리를 들어보면 세상에 못된 사람이 너무 많은데 회개할 수 있게 해 달라고 청합니다. 이러저러한 상태를 낱낱이 고발하는 식으로 얘기해 놓고는 그러니 고쳐주십시오. 하는 식입니다. 자기는 아무런 잘못도 없고 회개할 이유도 없는데 남들이 잘못해서 이지경이 되었으니 그들을 좀 어떻게 해 주십시오. 하고 간절히 기도하고 있으니 안타까운 일입니다. 원수를 사랑하라고요? 하느님을 믿는 우리에게는 이미 원수가 없습니다

오늘은 하느님의 풍성한 은총으로 하느님의 마음을 닮을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하느님의 마음을 간직하여 모두가 사랑해야 할 사람으로 보인다면 비로소 하느님의 자녀라 말할 수 있습니다. 사실 사람들로부터 온갖 멸시를 받고 죄인취급을 받았던 세리들도 서로를 사랑하며 서로 상대방을 헐뜯지는 않았습니다. 하느님을 모르는 이방인들 사이에서도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서로를 존중하고 우애를 베푸는 것은 아주 보편적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의 처지에 안주하지 말고 적극적인 사랑의 실천을 통하여 하느님의 완전함을 드러내시기 바랍니다. 많이 사랑하십시오. 그리고 많이 행하십시오. 이미 우리가 받은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어졌기 때문입니다.(로마5,5)  "원수든 친구든 예외를 두지말고 끊임없이 사랑하십시오! 그들도 하느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우리의 형제요, 이웃입니다. "사랑합니다.

 

 

 

†♡†♡†♡†♡†♡†♡†♡†♡†♡†♡†♡†♡†♡†♡†♡†♡†♡†♡†♡†♡†♡†♡† 

 

†♡†♡†♡†♡†♡†♡†♡†♡†♡†♡†♡†♡†♡†♡†♡†♡†♡†♡†♡†♡†♡†♡†

원수와 기도

-김선오 신부-

 

상식적으로는 원수를 미워하고 박해하는 자들을 상대로 싸워야 하는 것이 일반적인 삶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누구나 서로 사랑을 주고받으며 살고 싶어 합니다.
그러다 보니 “왜 내 주변에는 그런 사람이 없지?” 하는 불평 또한 자주 하게 되는데 그런 고민에 빠져 있으면 세상은 무척 어둡습니다. 그래서 오늘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기도는 ‘하느님과 우리의 대화’입니다. 기도 안에서 하느님께 ‘왜 이런 시련을 저에게 주십니까? 혹은 제가 어떻게 해야 할까요?’라고 여쭈어볼 때 그분께서는 언제나 답을 알려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아버지처럼 완전한 사람이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완전한 사람이 되는 첫 번째 방법 또한 ‘기도’입니다.
‘신앙의 힘’을 빌어서 우리는 원수를 내가 먼저 친구로 대하고 박해하는 사람에게 내가 먼저 호의적으로 다가갈 수 있습니다.
사실 사랑과 원수는 상호적입니다. 사랑을 먼저 주면 사랑으로 돌아오고, 원수를 갚으면 또 다시 원수를 갚으러 돌아오는 법입니다.
누군가 먼저 원수의 고리를 끊는 것이 중요합니다.

 

†♡†♡†♡†♡†♡†♡†♡†♡†♡†♡†♡†♡†♡†♡†♡†♡†♡†♡†♡†♡†♡†♡†

 

신비로운 나라의 역설적 사랑

- 박혜원-

 

그리스 메테오라에서 산상 미사를 드린 적이 있다. 우리는 하늘을 향해 두 팔을 벌리고 나의 삿된 욕망과 집착이 사라지길 바라며 하느님의 위엄과 영광만을 생각했다. 막 미사를 시작하려는데 스테파노 수도원에서 수녀님 두 분이 오셨다. 그리고 가이드에게 뭔가 이야기를 했는데, 뜻밖에도 ‘이곳에서 미사를 드리지 말라.’는 것이었다. 이 신성한 산, 메테오라에서는 그리스 정교식 미사만 허용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그리스 정교식이 아닌, 다른 형식의 마지막 산상 미사를 드린 셈이었다.
일제강점기를 겪은 우리로서는 400여 년간 터키의 지배에서 벗어나는 데 수도사들의 역할이 컸던 호국 그리스 정교의 중요성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왠지 이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대다수 인간 사회는 자기 집단에 대한 사랑은 고취시키면서 외부인한테는 폐쇄적이다. 적개심마저 드러낸다. 그런데 예수님은 가까운 사람이나 먼 사람이나 구별을 없애고 사랑하라고 하신다. 인간적 차원에서는 미워하는 사람에게조차 똑같은 해가 뜨고 비가 내린다는 사실이 용납될 수 없지만, 그러나 그것은 하느님의 일이고 하느님의 계획이다. 우리는 그것을 믿고 받아들여야 한다. 인간이란 아무리 종교적으로 자신을 승화시키려 노력해도 그 한계를 뛰어넘을 수 없는 유한한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 때론 내가 미워하는 사람조차 하느님 나라에 속해 있다는 사실이 이율배반적 감정에 빠지게 하지만, 하늘나라는 우리를 초월하는, 참으로 신비롭고 아름다운 나라일 것이다. 또한 그 믿음이 나를 행복하게 만든다.

 

†♡†♡†♡†♡†♡†♡†♡†♡†♡†♡†♡†♡†♡†♡†♡†♡†♡†♡†♡†♡†♡†♡†

 

그리스도인, 완전함을 목표로 하는 사람들

-이준석 신부-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커다란 도전이 되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이 결코 쉽지 않음을 우리에게 알려주는 대표적인 말씀입니다.
나를 공개적으로 반대하는 사람을 친절하게 대할 수 있습니까?
받은 만큼 돌려주고 싶은 마음이 일어나지 않겠습니까? 더구나 갖은 교묘한 수법으로 내 자존심을 건드리고 내 인격을 무시하고 나를 곤란한 상황으로몰고가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그리스도라는 이름을 몰랐더라면 그들에게 복수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의인이라는 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들에게 직접적인 해를 가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사람들에게 그만하면 대단한 것이다
마음 좋은 사람이다라는 소리를 들으며 자족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라는 이름을 알고 있는 이상 거기에 멈추어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우리도 완전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 우리에게 적의를 품고 해를 가하는 사람들을 사랑해야 합니다.
실망하거나 두려워하지 맙시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우리도 하느님 아버지처럼 완전에 이를 수 있습니다.

†♡†♡†♡†♡†♡†♡†♡†♡†♡†♡†♡†♡†♡†♡†♡†♡†♡†♡†♡†♡†♡†♡†

""를 사는 삶

-김찬선신부-

 예전 미국에 있을 때 방학을 이용하여 선교모금을 한 적이 있습니다.
여름이 되면 많은 본당 신부들이 휴가를 떠나기 때문에
이때 주일 미사를 대신 드려주고 선교지를 돕기 위한 모금을 선교사들이나 저 같은 학생들이 하는 것입니다.
저도 그 해 미국 전역을 돌며 선교모금을 하였는데
유타 주 Salt Lake City를 갔습니다.
처음 가는 곳을 주소만 가지고 찾아가다 보니
네거리에서 그만 접촉사고를 내고 말았습니다.
상대방에서 경찰을 불렀습니다
.
제가 저의 과실을 인정했습니다
.
그랬더니 경찰이 상대방에게 하는 말이 “우리 신자가”하면서
잘 해결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유타 주는 몰몬 교도가 95%를 차지하는 주로서
교리가 엄격하게 지켜지는 매우 종교적인 지역입니다.
그래서 범죄도 적고 마약이나 술은 물론 자극적 음료도 팔지 않습니다
.
경찰이 우리 신자가 잘 해야 되지 않냐고 말하고
그 말에 그 사람이 그렇게 하겠다고 하는 것을 보고
유타 주의 종교적인 분위기가 수긍이 되었습니다
.

오늘 독서와 복음은 우리 믿는 이들에게 “더”를 요구합니다
.
고린토 2서의 말씀은 마케도니아 교회를 예로 들면서
자선을 하는 데서 다른 데보다 “더” 뛰어나야 함을 얘기합니다.
주님께서는 세리나 이방인보다 “더”를 살아야 함을 말씀하십니다
.

그것은 세상 재물을 더 많이 차지하고
다른 사람보다 더 높은 지위에 오르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자녀라면 사랑의 은총을 “더” 많이 받았으므로
사랑의 실천에 있어서 남보다 “더” 뛰어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모든 면에서 곧 믿음과 말과 지식과 온갖 열성에서
또 우리의 사랑을 받는 일에서도 뛰어나므로
이 은혜로운 일에서도 뛰어나기를 바랍니다.

댓글 0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

매일말씀묵상

목록 전체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