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15일 연중 제11주간 수요일 (마태오 6,1-6.16-18)

2011. 6. 15. 오전 5:5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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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6 15일 연중 제11주간 수요일

 

자선을 베풀 때에는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그 자선을 숨겨 두어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아 주실 것이다.
(마태오 6,1-6.16-18)

 

When you give alms,
do not let your left hand know what your right is doing,
so that your almsgiving may be secret.
And your Father who sees in secret will repay you
.

 

 

 

 

말씀의 초대

우리가 기쁜 마음으로 선행을 하면 하느님께서도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에게 넘치도록 은총을 베푸신다. 그러면 오히려 모든 면에서 부유해져서 하느님께 감사하는 마음을 갖게 된다. 주님의 축복은 우리가 베풀수록 몇 배로 커져 간다(제1독서). 예수님께서 올바른 자선과 기도, 그리고 단식에 대하여 말씀하신다.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도 모르게 하는 숨은 기도와 행동은 주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신앙의 태도이다(복음).

 

☆☆☆

오늘의 묵상

아침마다 늘 신문을 한참 동안 보는 노인이 계셨습니다. 수십 년째 아침이면 신문을 보십니다. 그런데 그분은 글을 읽을 줄 모르는 문맹자이셨습니다. 그분이 신문을 보시기 시작한 것은 아들이 혼인하고부터입니다. 며느리와 같이 살면서 자신이 문맹자임을 감추시려고 아침마다 신문을 읽는 척하셨던 것입니다. 글을 모르는 아버지를 부끄러워해서 아들은 늘 아버지 앞에 신문을 가져다주었고 아버지도 자신과 아들의 체면 때문에 아침마다 신문을 들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분이 문맹자임을 밝히시고 수십 년 동안 글을 배우셨으면 한글만 깨우치셨겠습니까? 그런데도 힘들게 신문을 읽는 척하시며 세월만 보내고 계셨던 것입니다. 우리 삶에 체면치레와 겉꾸밈이 무엇인지를 보여 주는 이야기입니다. 그분이 부끄러워하셔야 할 것은 글을 모르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자신을 꾸미고 사시는 위선적 태도입니다.
실제로 우리는 너무나 많은 ‘척’을 하며 살고 있습니다. 아는 척, 가진 척, 잘난 척, 있는 척…… 그야말로 우리 모습에 척을 가져다 붙이면 척척 들어맞습니다. 엄청난 가격을 지불해야 살 수 있는 명품이라고 불리는 상품들이 왜 불티나게 팔리겠습니까? 이 좁은 땅에서 왜 대형 고급 차, 고급 아파트에 사람들이 몰려듭니까? 성형 수술이 왜 유행처럼 번지고 있습니까? 주관이 없고 삶에 중심이 없을 때 온통 겉꾸밈에 의지하며 살게 되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두리번거리며 사람들 눈치를 살피며 살면 이렇게 겉꾸미는 행동에 빠지게 됩니다. 그러나 주님께 눈길을 두고 삶의 중심을 잡으면 참으로 자유로워집니다. 그 방법을 오늘 복음의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십니다. 주님과 만남을 이루는 내밀한 기도, 보이지 않는 자선, 그리고 자신을 비우는 단식입니다.

☆☆☆

 

 

자선은 남을 돕는 선행입니다. 진정한 자선은 예수님의 가르침처럼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해야 합니다. 사람 앞의 선행이 아니라 주님 앞의 선행이 되게 하라는 것이지요. 사람들은 알지 못하게 처신하고 주님만이 아시도록 선행을 베풀라는 말씀입니다.
세상에는 그런 선행을 베푸는 이들이 많습니다. 끝까지 자신을 감추며 선행이 드러나는 것을 바라지 않는 이들입니다. 그들이 별나서 그런 것은 아닙니다. 성령께서 그들을 인도하신 결과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당신의 기쁨을 아무도 모르게 반드시 주십니다.
자선의 다른 말은 적선입니다. ‘선을 쌓는다는 뜻으로 불교에서 많이 사용하는 용어입니다. 악한 기운이 넘어오지 못하게 선행으로 무장한다는 표현입니다. 불교에서는 자신의 업보를 없애려면 반드시 적선해야 한다고 가르치지요. 살면서 저지른 생활 속의 잘못을 보속하라는 말과 같습니다. 자선은 이렇듯 사람의 앞날을 밝게 합니다.
누군가를 돕는다고 하면 돈과 재물을 먼저 연상합니다. 넉넉해야 쉽게 베풀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하지만 물질을 베푸는 것만이 자선은 아닙니다. 따뜻한 말과 눈빛에서도 얼마든지 자선은 가능합니다. 어린이를 칭찬하고 젊은이에게 용기를 주는 것도 아름다운 자선입니다. 이웃에게 기쁨과 희망을 주면서 살고 있다면 가장 큰 적선을 베풀고 있는 것입니다.

  

“적선(積善)하는 사람은 귀신도 두려워한다.”는 옛말이 있습니다. 그만큼 적선에는 하늘의 힘이 담겨져 있다는 뜻입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불안하면 점을 보고 부적을 붙이고 액을 쫓는 데에만 열중했지 적선은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말은 쉬워도 행동은 예로부터 어려웠던 것입니다.
남을 돕는다고 모두가 적선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참된 적선은 아무도 모르게 해야 합니다. 복음 말씀처럼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너무 쉽게 적선을 금전과 연관 짓습니다. 돈으로 도와야 적선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아닙니다. 남을 돕는 일이 어찌 금전뿐이겠습니까?
불교의 보시(布施)에는 세 등급이 있습니다. 첫째가 무외시(無畏施)입니다. 삶의 두려움을 없애 주는 것을 최고의 적선으로 보았습니다. 두 번째는 가르침을 베푸는 법시(法施)입니다. 제일 낮은 것이 재시(財施)입니다. 재물로 도우는 것을 적선의 기본으로 본 것이지요.
그러니 진정 요구되는 것은 돈과 재물이 아니라 애정입니다. 때로는 ‘따뜻한 말 한마디’가 강렬한 적선이 됩니다. ‘다정한 눈빛 하나’가 어떤 행위보다 힘 있는 자선이 됩니다. 베풀면 반드시 은총이 옵니다. 하늘의 힘이 그와 그의 주변을 지켜 줍니다.

 

자선과 기도, 단식은 우리가 하느님께 더 가까이 가는 방법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에 따르면, 올바른 자선과 기도, 단식이란 그것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남모르게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숨은 일도 보시기 때문입니다. 가끔 우리는 짐짓 옳고 멋진 사람이라는 걸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자선과 기도, 단식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것은 올바르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드러내 보여야만 보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숨은 일도 모두 보시는 하느님 아버지의 전능하심을 먼저 인정하는 일이 필요합니다. 우리의 선행이나 악행은 하느님께 결코 숨길 수 없습니다. 사람을 속일 수는 있으나 하느님을 속일 수는 없습니다

 

연중 11주간 수요일(마태6,1-6. 16-18)

 

 

입을 다물었으면 좋으련만

  -반영억라파엘신부-

여야가 논의해온 사법개혁안이 검찰과 법원등의 저항과 로비로 좌초되었다고 합니다. 법원과 검찰을 국민에게 돌려주겠다고 시작한 사법개혁이 무위로 돌아간 것입니다. 이즈음 야당대표는 반값 등록금등 민생문제를 주제로 한 대통령과의 만남을 제안했고 대통령도 이른 시일 내에 만났으면 좋겠다는 의사를 전했습니다. 국민을 위한다는 빌미로 장을 만들어 놓고 다음 선거를 위해 전략적으로 이용하거나 자기들의 생각을 강요하며 주장하는 것은 아닌지 우려됩니다.

 

정국의 상항을 보면 여야는 자기의 주장이 옳다는 것을 입증하겠다는 의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어쩌면 사사건건 서로물고 뜯는 양상으로 대결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시끄러울 때는 나 하나라도 조용히 해야 합니다. 가지나 시끄러운데 나까지 가세하면 더 시끄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침묵이 얼마나 큰 힘인지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말보다는 행동의 모범이 필요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입을 다물었으면 좋으련만 그 입이 가만있지 못하고 있으니 원망스럽게 생각하는 사람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의로운 일을 하지 않도록 조심 하여라.(마태6,1)고 하셨습니다. 자선을 베풀 때, 기도할 때, 단식할 때에도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지 말고, 숨어계신 네 아버지께 보여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주실 것이다.(마태6,18)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야말로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말씀입니다. 사람에게 잘 보이려고 애쓰면 그 순수성을 잃게 되고 공든 탑이 무너지게 됩니다. 아니 공든 탑이 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무엇을 하든 상을 받기 위해서 하지 않고 그저 하느님께서 주신 탈란트를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용하며 최선에 최선을 다할 뿐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은 하느님께서 어찌하시든 기다리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마음의 은밀한 생각까지도 다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알아들을 귀가 있는 사람은 알아듣고 그대로 행하게 되면 그 안에서 하느님의 축복을 만나게 됩니다. 인간의 칭찬을 구하는 허영은 사라지고 사람의 모든 이해를 뛰어넘는 하느님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지켜줄 것(필리4,7)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을 꿰뚫어 보시고 올바른 마음의 자세를 아시며 상을 구하지 않아도 우리의 생각보다 훨씬 더 풍성하게 상을 마련해 두십니다. 단식이나 기도, 그리고 자선, 논리와 설득, 그 어떤 것에 있어서도 인간의 인정이나 칭찬을 구하지 말고 천상의 것을 추구하시길 기도합니다. 생색내기가 아닌 사랑의 진정성이 힘을 얻기를 바랍니다. 사랑합니다.

오늘은 최양업 토마스 신부님 선종150주년 되는 날입니다. 청주교구는 배티순교성지에서 현양대회를 개최합니다.

함께 기도해 주시고 시성시복추진결과의 열매가 속히 주어지길 기도합니다.

 

하느님의 시선만 바라보는 사람들

-이준석 신부-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 중에 가장 가련한 사람들은 자신의 존재감을 다른 사람들의 평가로부터 찾으려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자신의 내면 깊숙한 곳에 숨겨진 자신을 대면하기보다 타인에게 내가 어떠한 모습으로 비추어질까를 더 고민합니다. 예수님 시대에도 그런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스스로를 온전하게  채워주는 것이 다른 사람들로부터 주어지는 명예와 좋은 평판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스스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고 인식하지 못했을지라도 그들의 무의식 깊은 곳에는 다른 사람들에 의해 주어지는 존경과 영예에 대한 갈망이 용솟음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선도, 기도도, 단식도 그러한 목적에 맞게 실행했습니다.

사실 이 모든 것들은 하느님과 이웃을 향한 일이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이 거룩한 행위들을자신을 향한행위로 변질시켰습니다.

우리도 내면으로부터의 성화보다 겉으로 드러나는 신심행위에 더 몰두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스스로 되물어야 합니다. 내 자신이 하느님의 뜻에 따라 살아가는지 아니면 나를 영예롭게 해줄 다른 사람의 시선에 따라 살아가는지….

예수님께 속한 기쁨

- 임순연 수녀-

 기도에 대해 부끄럽게도 이제야 조금씩 그 의미를 알게 됩니다. 기도는 내 안에서 일어나는 경험이고 내 안에서 술렁이며 내 안에서 퍼져 나가는 기쁨입니다. 기도는 외적인 의식이나 자신만의 만족이나 유행처럼 퍼져 있는 여러 가지 방법에 대한 나의 반응이 아닌 하느님과 나의 관계 안에서 은총으로 씨 뿌려지고 성장하고 열매 맺어 가는 소리 없는 생명입니다.
기도의 결과는 삶에서 드러나는 열매에 있습니다.
우리는 인간이기에 자신이 경험한 기도에 대해, 그 내용에 대해, 체험에 대해 표현하는 데 한계를 느낍니다. 그러기에 그 결과를 확인하고 싶어하는 유혹을 겪게 됩니다. 하지만 기도의 결과는 기도 후에 바로 드러나지 않고 생활에서 드러납니다. 그 모습은 사랑입니다. 기쁨과 즐거움과 함께 어려운 가운데 희망을 가질 때 우리는 그곳에서 기도의 결과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기도의 열매는 충실한 매일, 매 순간의 기도가 꾸준히 조금씩 이어질 때 성령의 이끄심 안에서 일상을 통해 드러나고 영글어 가는 것입니다.

 

죄짐 맡은 우리 구주 [대금성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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