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에게서 바라는 대로 (마태오 7,6.12-14)

2011. 6. 21. 오전 6:11:37

글자

 

  2011년 6월 21일 화요일 성 알로이시오 곤자가 수도자 기념일 

너희는 남에게서 바라는 대로 남에게 해 주어라.
(
마태오 7,6.12-14)

Do to others whatever you would have them do to you

 

말씀의 초대

주님께 축복을 받은 아브람은 큰 부자가 되었다. 그러나 가축을 치는 아브람과 롯의 목자들 사이에 싸움이 자주 일자, 롯에게 필요한 땅을 선택하도록 하여 서로 갈라져서 살게 한다. 롯은 물이 넉넉한 이집트 동산과 같은 땅을 선택한다. 재산에 대하여 자유롭고 넉넉한 아브람의 마음을 볼 수 있다(제1독서). 진주는 하느님 말씀인 복음이다. 진주를 돼지에게 던지지 말라는 것은 하느님 말씀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 곳에만 복음이 선포될 수 있음을 말한다. 예수님께서는 거룩한 말씀이 불경스럽게 다루어질 것을 염려하신다(복음).

 

오늘의 묵상

혼자 사시던 시어머님이 큰 병이 드셨습니다. 온통 마음이 혼란해집니다. 아들이 여럿 있지만 하나 둘 저마다 핑계를 대며 어머니를 외면하기 시작합니다. 굳이 막내며느리인 자신이 맡아서 어머니 병 수발을 해야 할 이유가 없다고 마음속으로 항변합니다. 지금 아이들이 어리고, 성당에서도 열심히 봉사하고 있기에 자신은 시어머님을 돌보지 않아도 된다고 스스로 위로해 봅니다. 그런데도 자꾸만 마음이 불편합니다. 이제는 형제들이 야속해지고 그동안 시어머님에게 받은 상처들도 떠오릅니다. 아들들을 저렇게 잘못 키우셨으니, 그것은 시어머님이 지고 가셔야 할 십자가라며 이제 원망을 시어머님에게 돌립니다. 그동안 해 오셨던 잘못을 생각하면 저 정도 고통은 당하셔야 한다며 자신의 정당성을 시어머님 탓으로 돌립니다. 남편도 아내의 이런 주장에 더 이상 말을 하지 못합니다.
이 땅의 수많은 늙은 부모들이 어쩌면 자식들의 이런 모습 속에 혼자서 고통을 당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심지어 성당에서 열심히 봉사하는 사람 가운데서도 자신이 져야 할 십자가를 애써 외면하는 경우가 없지 않습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운명처럼 져야 할 삶의 십자가를 기꺼이 지는 일을 말합니다.
성지 순례 때 베들레헴에 있는 ‘예수님 탄생 성당’에 가면 아주 낮고 좁은 문이 있습니다. 그곳 안내원은 그 문에 대한 역사적인 사실에 그 문의 영성적인 의미를 붙여서 설명합니다. 그것은 누구든지 고개를 숙이고 작아져야 들어갈 수 있는, 『성경』에서 말하는 ‘좁은 문’이라고 했습니다. 겸손하게 몸을 낮추어 그 문을 통과해야만 성당 안의 ‘예수님 탄생’, 그곳을 만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삶에는 반드시 통과해야 할 좁은 문이 있습니다. 그 문을 통과해야만 우리는 주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멸망의 문은 넓고 편하지만, 생명의 문은 좁고 그 길이 비좁아서 그리로 가는 사람이 적다고 합니다. 어떤 길을 지금 걷고 있는지요?

 

 

주문모 신부님은 우리나라에 들어온 첫 외국인 선교사입니다. 청나라 사람으로 북경교구 신학교 1기생으로 졸업하고 사제가 되었습니다. 교구장 구베아 주교님은 조선 교우들의 청원을 받아들여 그를 조선 땅으로 보냅니다. 주 신부님은 조선인으로 변장하고 1794 12월 어렵게 국경을 넘습니다. 그를 안내했던 분은 순교자 지황이었습니다.
신부님은 한양에 도착하여 최인길의 집에 머물며 조선말을 익힙니다. 마흔두 살의 나이에 외국 말을 배우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듬해인 1796년 예수 부활 대축일에는 교우들과 함께 조선말로 미사를 드렸습니다. 이 땅에서 봉헌하는 첫 번째 예수 부활 대축일 미사였습니다.
하지만 얼마 가지 못해 배교자에 의해 입국 사실이 알려지고 최인길과 지황은 순교합니다. 다행히 신부님은 피신했지만 숨어 지내며 사목 활동을 해야 했습니다. 1801년 신유박해로 교우들은 붙잡히고 신부님의 거처를 캐묻는 문초를 받습니다. 교우들의 고통에 마음 아파한 신부님은 순교를 결심하며 관아에 자수합니다. 그리하여 1801 5 31일 한강 새남터에서 군문효수형을 당하셨습니다. 당시 나이 49세였습니다.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생명으로 이끄는 문은 비좁기 마련이다.’ 자신을 낮추고 작아져야만 들어갈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주문모 신부님은 그렇게 사신 분입니다. 이 땅에서 활동하신 첫 사제였지만 지금도 소박한 모습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거룩하신 분은 하느님 한 분 뿐이시며, 하느님 나라 또한 거룩합니다. 그러나 오늘 날 돈, 명예, 권력에 집착해 하느님의 뜻을 무시하거나 업신여기는 경향이 짙습니다. 그것들이 참된 행복을 가져다 주는 줄로 착각하면서, 언젠가는 썩어 없어지고 말 것에 목숨을 겁니다.

 하느님을 향한 마음이 아닌, 썩어 없어질 것들에 마음을 두는 것은 이기적인 마음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기적인 마음은 남에게서 바라는 대로 남에게 해 주라는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을 알 턱이 없습니다. 다른 사람들과 맺는 관계에는 아랑곳 하지 않고,  모든 것을 순전히 자기 방식대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논어에서 '자기가 싫어하는 바를 남에게 시키지 마라'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행하기가 얼마나 어렵습니까?  다른 사람이 행하지 않는 좁은 길을 선택한다는 의미입니다. 머뭇거린다든지, 온갖 우상들이 제안하는 길은 더욱 쉽고 넓은 길이겠지요? 거기에는 진리가 없고, '거짓'만이 판을 칠 따름입니다.

바라는 그대로

 -반영억신부-

 사람은 살아가면서 기대와 바람을 가지고 있습니다. 부모가 자녀에게 바라는 바가 있고, 자식이 부모에게 바라는 바가 있습니다. 부부간에는 물론 이웃 간에도 친구에게도 기대하는 바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기대와 바람에 만족하고 기쁨을 갖는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기대에 못 미친다고 느낄 때가 훨씬 많습니다. 내가 이만큼 했으면 너는 이 정도는 따라주어야 하는 것이 아니냐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무엇인가 기대를 한다는 것은 상처를 받을 준비를 하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남이 너희에게 해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대접 받기를 원한다면 남을 똑같이 대접해 주어야 합니다. 사실 내가 받는 고통이나 기쁨은 내가 남에게 어떻게 해줘야 할 것인지를 가르쳐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어느 한정된 사람을 뛰어 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그 한정된 테두리를 극복 하도록 촉구하십니다. 혹“은혜를 베풀었다면 그 보답을 바라지 말 것이며 남에게 주었다면 후회하지 말아야”하겠습니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인정을 받겠느냐? 죄인들도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은 사랑한다.”(루가6,32)

신자가 운전하는 차를 탈 기회가 있었습니다. 신부를 옆자리에 태운 것이 긴장되었는지 후진을 하다가 그만 택시를 들이 받았습니다. 얼른 내려서 잘못을 얘기하려고 하는데 그 운전사는 차량 상태를 확인도 하지 않고 그냥 가라고 했습니다. 별 이상은 없다고 하더라도 차량상태를 확인할 법도 한데 말입니다. 아마 확인을 하였으면 마음이 달라질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은혜를 입었으니 기회가 되면 그런 넉넉한 마음을 표현해야겠습니다. 

예수님께서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고 하시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과는 다른 삶을 살아야 생명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세속의 온갖 유혹을 거슬러 살려면 문이 좁고 길이 험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지는 소명입니다. 밑지고 손해 보는 것 같지만 옳은 길과 옳은 문을 찾는 수고는 마땅히 해야 할 일입니다. 나의 기대와 바람만큼 걸 맞는 수고와 땀을 소홀히 하지 않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사랑합니다.

   하느님 나라 자격증

-정명숙 수녀-

자격증 시대입니다. 어떤 분야에서든지 자격증을 가지고 전문가가 되지 않으면 낙오자가 되는 현실입니다. 그러기에 사람들은 수많은 정보를 얻으며 빠른 시간안에 많은 것을 배우고 얻고자 합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을 얻기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입니다.

그러나 정작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한 자격을 얻기 위해서는 어떤 노력을 하고 있는지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 생명의 나라에 들어가기를 원하는 사람들에게 그 길을 알려주십니다.

 “남이 너희에게 해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주어라”(마태 7,12).

참으로 간단한 듯합니다. 그러나 실제의 삶에 적용해서 살기란 얼마나 어려운지요. 서로 사랑하는 법을 배우는 데는 왜 그리 더딘 걸까요.
프란치스코 성인께서 남겨주신 평화의 기도가 생각납니다.

주님, 저를 당신의 도구로 써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다툼이 있는 곳에 용서를

위로받기보다는 위로하고, 이해받기보다는 이해하며,

사랑받기보다는 사랑하게 하여주소서.

우리는 줌으로써 받고, 용서함으로써 용서받으며,
자기를 버리고 죽음으로써 영생을 얻기 때문입니다.”

이 기도가 내 삶의 언어가 되어 살아 숨쉬기를 바라는 오늘입니다.
이 삶은 나를 하느님 나라로 이끌 것입니다.

새 법, 곧 복음의 법

-박영봉 신부-

새 법, 곧 복음의 법은 자연법과 하느님의 법을 이 세상에서 완성한 것입니다.
복음의 법은 그리스도의 업적이며, 산상설교에 표현되어 있습니다.
복음의 법은 율법의 계명들을 완성합니다.
산상설교는 옛 법의 신적이며 인간적인 진리를 모두 드러냅니다.
산상설교는 새로운 규정을 첨가하지 않지만, 마음을 개선하도록 인간을 이끕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복음은 율법을 완성하여 인간이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완전하심을 본받게 하고, 하느님처럼 원수를 용서하고 박해자들을 위해 기도하게 합니다.

복음의 법은 또한 ‘생명 또는 멸망의 길’ 가운데에서 결정적인 선택을 하게 하고, 주님의 말씀을 실천하도록 명합니다.
복음의 법은 “남이 너희에게 해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주어라”
(마태 7,12)라는 이 황금률 안에 요약되어 있습니다. 복음의 법 전체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도 서로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새 계명’에 들어 있습니다.


그 길 외에 또 다른 길은 없다

-엄재중-


오늘 복음에 나오는 황금률에 대해서 예수님은 이것이야말로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 곧 성경 전체의 정신을 종합한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런데 이어지는 구절에서 주님은 이 길이 아주 좁아서 이 길로 들어가는 사람은 매우 적다고 하신다. 이 말씀으로 미루어 볼 때 좁은 길로 가는 것은 인간 본성 안에서 아주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일은 아닌 듯하다.
나를 떠나 너에게로 가는 것은 간단치 않다. 이 세상에서 나보다 타인을 더 사랑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어쩌면 원수마저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나 자신을 돌이켜볼 때 너무 과도한 주문일 수 있다. 나약한 육신과 이기적인 본성은 너무나 쉽게 내 안으로 움츠러들기 때문이다. 원수가 괜히 원수인가? 도저히 사랑할 수 없을 정도로 나에게 심각한 피해를 끼친 인간이기에 그에게 원수라는 딱지를 붙인 것 아니던가? 그런 원수를 사랑하라니. 역시 그 길은 너무 좁다고 한탄한다.
인류 역사 안에서 모든 위대한 종교는 대부분 인간이 갖는 이기심의 문제에 천착했다. 어떻게 하면 안으로만 숨어들려는 나를 버리고 타인에게 갈 수 있는지 그 원인과 대안을 제시했기에 역사 안에서 의미 있는 자리를 차지했던 것이다. 이들의 한결같은 가르침은 타인에게 나아가지 않고서 오로지 내 안에만 머물러서는 결코 행복할 수 없다는 것이다. 심지어 타인 없이는 나 자신조차도 알 수 없는 것이다. 너의 말을 들으면서 나를 비로소 깨닫게 되고, 너에게 이끌리면서 나 자신도 사랑할 수 있게 된다. 예수께서 자신의 전 생애와 죽음으로 증명하신 그 길 위에서, 내가 지금 당장은 자주 넘어진다고 하더라도 그 길 외에 다른 길은 없다.

하느님이 나에게 해주었으면 하는 것을 하느님께 해드리기

-서철신부-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은 “남에게서 바라는 대로 남에게 해주어라”고 말한다. 이는 ‘남이 나에게 해주었으면 하는 것을 남에게 해주기’, ‘남이 나에게 하지 말았으면 하는 것을 남에게 하지 않기’로 말할 수 있다. 이 말씀대로 사는 것이 신앙생활의 출발점인 것 같다. 그런데 이 ‘다른 이’가 꼭 사람이어야만 하는가? 하느님이라면 어떨까? ‘하느님이 나에게 해주었으면 하는 것을 하느님께 해드리기’, ‘하느님이 나에게 하지 말았으면 하는 것을 하느님께 하지 않기’
나는 하느님께서 나에게 시간을 내어주어 내 기도를, 내 하소연을 들어주기를 원한다. 그렇다면 나는 먼저 하느님께 시간을 내어드리고, 하느님의 기도를, 하느님의 하소연을 들어드려야 하지 않을까? 나는 하느님께서 나를 잊지 않고, 나만을 사랑해 주시기를 원한다. 그렇다면 나는 하느님을 잊지 않고, 하느님만을 사랑해야 하지 않을까? 이렇게 하느님께서 나에게 해주었으면 하는 것을 하나하나 적어보고, 또 하느님께서 나에게 하지 말았으면 하는 것을 적어보자. 그리고 반대로 내가 하느님께 해드렸으면 하는 것을 해드리고, 하지 말았으면 하는 것을 하지 않는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리고 이 정신을 하느님뿐 아니라 내가 만나는 구체적인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적용해 본다면 어떨까? 

 

좁은 문으로 들어가려면 작아져야 합니다. 욕망을 희석시키고 욕심의 물줄기를 가늘게 해야 합니다. 결코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러기에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사람은 많지 않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그 좁은 문을 당연히 어려운 문으로 여깁니다. 경쟁이 치열한 문으로 상상합니다. 그러나 그건 세상의 편견에 불과합니다. 천상 문은 경쟁이 없이 누구나 들어갈 수 있습니다. 몸을 낮추고 자신의 마음을 비운 사람이라면 누구나 들어갈 수 있습니다.
우리 주위에는 신앙생활을 힘들게 여기는 사람이 적지 않습니다. 왜 이런 현상이 나타날까요? 내가 신앙에 가까이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신앙이 내게 가까이 오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내가 은총 속으로 나아가려는 노력을 해야 하는데, 그저 은총이 내려오기만을 기다리기 때문입니다.
기쁨은 자신의 내면에서 나오는 것이지 누가 주는 것이 아닙니다. 어린 시절에는 받는 기쁨이 전부지만, 어른이 되면 주는 기쁨도 깨달아야 합니다. 베풀고 나누는 사람에게는 더 이상 좁은 문이 있을 수 없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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