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12주간 목요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하늘 나라에 들어간다.
(마태7,21-29)

말씀의 초대
아브람의 아내 사라이는 자신이 아이를 낳지 못하자, 자신의 여종 하가르를 아브람에게 보내 아이를 갖게 한다. 하가르가 임신을 하자 사라이를 업신여기면서 주인과 여종 사이에 갈등이 생긴다. 사라이가 하가르를 구박하자 하가르는 그를 피해 도망을 간다. 하가르는 아들 이스마엘을 낳는다. 주님께서는 늘 약한 편에서 그의 아픔을 들어주신다(제1독서). 아무리 주님을 자주 부르며 기도한다고 해도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실천하지 않으면 모래 위에 지은 집과 같다. 비바람이 몰아치면 무너져 버리고 만다. 신앙은 삶으로 드러내 보일 때 굳건해진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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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요즘은 정보 매체의 발달로 지식의 홍수 속에 살고 있습니다. 전문 지식뿐 아니라 종교 지식도 넘쳐 나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 안에도 훌륭한 강론과 강의를 얼마든지 찾아서 들을 수 있는 좋은 책들이 서점과 도서관에 쌓여 있습니다. 오늘날은 오히려 너무 많은 지식이 넘쳐 나는 것이 문제처럼 보입니다.
사람들은 가끔 자신이 아는 것을 사는(生) 것으로 착각하며 살고 있습니다. 좋은 강의를 쫓아서 몰려다니지만 정녕 삶 속에 뿌리를 내리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아는 지식은 모래 알갱이와 같아서 언제든지 물결에 쓸려 내려가고 마는 것입니다. 신앙마저 아는 것으로 깊은 것인 양 착각해서는 안 됩니다.
아는 것이 가슴으로 내려와 마음이 되고 손과 발로 전달되어 행동이 되어야 비로소 자신의 것이 됩니다. 몸이 기억하고 실천하지 못하는 지식은 죽은 것일 따름입니다. 마치 수영을 하는 이론은 훤히 알고 있지만 정녕 몸으로 익히지 않아서 깊은 물속에서는 헤엄을 치지 못하고 물에 빠져 죽는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오늘날 우리 교회에도 ‘영적 유목민’이 참 많은 것 같습니다. 목마른 사람처럼 이리저리 좋은 지식을 얻으려고 찾아 나서는 사람은 많지만 삶 속에 뿌리를 내리고 이웃과 나누며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은 적습니다. 손에 묵주나 작은 십자가를 ‘쥐고’ 사는 사람은 많지만, 삶으로 십자가를 ‘지고’ 살려는 사람은 적습니다. 폭풍이 몰아치고 강물이 불어나는 신앙의 위기가 오면 어떻게 될지 걱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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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말을 앞세우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말로만 섬기지 말고 몸으로 실천하라는 가르침입니다. 우리는 수없이 “주님, 주님!” 하고 불렀습니다. 그만큼 행동이 뒤따르고 있었는지 이제는 돌아볼 시간입니다.
다급할 때에는 누구나 “주님, 주님!” 하고 부릅니다. 하지만 상황이 좋아지면 서서히 잊어버립니다. 말은 빠르고 행동은 느린 ‘인간의 본질’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신앙생활은 말이 아니라 행동이라는 것을 누구나 조금씩은 알고 있습니다.
우리말에 ‘시원섭섭하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해하지만 외국인은 잘 모릅니다. 우리만의 독특한 표현입니다. 성당에서도 ‘시원섭섭한’ 모습을 만나게 됩니다. 어떤 것은 시원한데 어떤 것은 섭섭한 것이지요. 대부분 사람과 연관된 일입니다.
화끈한 교우들이 있는가 하면 그렇지 않은 교우들도 있습니다. 무던한 신부님이 계시는가 하면 괴팍한 신부님도 계십니다. 시원한 모임도 있지만 귀찮은 모임도 있습니다. 하지만 섭섭한 모임과 까다로운 사람들에게서도 ‘어떤 순간’ 힘을 얻습니다. 믿음으로 받아들이면 은총이 함께하기 때문입니다.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자신이 말하는 것처럼 행동하라는 말씀입니다. ‘말하는 만큼’ 행동하려고 노력하라는 말씀입니다.
무엇이 ‘아버지의 뜻’이겠습니까? 인생에 대한 그분의 뜻을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생각할수록 중요한 질문입니다. 이 질문에 대한 작업을 영성 생활이라고 합니다. 아무튼 한 사람의 일생에는 ‘아버지의 뜻’이 분명히 숨어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생명을 주시면서 동시에 ‘삶의 설계도’도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그 설계도를 찾아내야 합니다. 이 작업을 영성 생활이라 합니다.
많은 영성 학자들은 ‘아버지의 뜻’을 ‘기쁨의 생활’에서 찾으려고 하였습니다. 하느님의 설계도는 먼저 인간이 감사와 즐거움으로 살게 되어 있다는 견해입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구원된 인류이기에 감사와 기쁨은 ‘삶의 의무’라고까지 말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아무튼 신앙의 길을 걷는 우리가 불안 속에서 살아서는 안 될 일입니다. 그렇게 사는 것은 분명 ‘아버지의 뜻’이 아닐 것입니다.
주님은 ‘주인님’의 줄인 말입니다. 무엇의 주인이겠습니까? 내 인생과 미래의 주인이며 내 소유와 운명의 주인이라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이해의 문제가 아니라 고백의 차원입니다. 말뿐 아니라 실제로 그렇게 받아들이며 살아야 할 문제입니다. 그래야 삶의 기쁨에 닿을 수 있습니다.
사라는 아브라함의 정실부인입니다. 그녀의 옛 이름은 ‘사라이’였는데, 하느님께서 기적의 아들 이사악을 낳게 하시면서 이름을 ‘사라’로 바꾸신 것입니다. 사라이 시절에는 걱정이 많았습니다. 무엇보다 아이를 낳지 못해 얼굴을 들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여종을 남편에게 보내 아들을 낳게 하였으나 이 일로 걱정이 더 많아졌습니다. 그래서 여종을 구박하였습니다.
그러한 그녀를 하느님께서는 새로 태어나게 하셨습니다. 사라가 일찍이 아브라함의 자녀를 낳고 그 아이들이 장성해 있었다면 얼마나 기고만장했겠습니까?
그녀는 아이를 못 낳는 여인이었기에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였습니다. 그 부분을 이야기하면 자신의 강한 자존심을 꺾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게 하여 하느님 앞에 엎드릴 수 있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이처럼 포기를 통하여 겸허한 사람이 되게 하셨습니다. 이 모두가 준비 단계였습니다. 아브라함의 부인에서 이사악의 어머니로 바뀔 수 있게 주님께서 마련하신 섭리였던 것입니다.
실천하는 사람이 되라
-반영억신부-
매괴성모순례지성당은 지방 문화재로 등록이 되어있습니다. 1896년에 본당이 설립되었고 현존하는 성당은 1930년도에 봉헌되었습니다. 80년 만에 마루 바닥 보수공사를 하고 있습니다. 80년 동안 보존 되어온 것은 그만한 정성과 사랑을 담아 공사를 한 결과라는 것에 감탄을 합니다. 새로운 기술로 보수를 하고 있지만 옛 정성을 따라가지 못합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혼이 담겨야 합니다. 그래야 아름답고 살아있으며 감동이 있습니다.
‘반석위에 지은 집’과 ‘모래 위에 지은 집’은 같은 집이지만 비가 내려 강물이 밀려오고 바람이 몰아치면 하나는 견디고 하나는 무너집니다. 반석위에 집을 지어야 하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알면서도 모래위에 집을 짓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들은 하느님 나라를 희망하면서 입으로만 주님, 주님! 하고 부르는 사람과 같습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라야 하늘나라를 차지한다는 것을 잊고 있는 사람입니다.
사실 “실천 없는 종교는 그림의 떡”입니다. 주님의 가르침을 듣고 가슴에 새기고 손발로 실천을 할 때 귀한 열매가 맺어지는 것입니다. 가르침대로 살지 않는다면 위기가 닥칠 때 그 허상이 드러나게 마련입니다. 우리 삶에 위기가 닥칠 때 가르침을 사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본색이 드러나며 하나는 견디어 내고 하나는 넘어집니다. “예수님께 다가가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오히려 장애가 될 때가 많습니다. 스스로 실천하지 않으면서 복음을 전한다고 하니까요.”(마더 데레사)
우리가 “매 순간 주님의 뜻을 찾고, 주님 앞에서 결정한 것은 미루지 말고 그분의 뜻대로 실천”해야 하겠습니다. “말씀을 실행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말씀을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야고1,22)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기 좋아하는 자들처럼 눈가림으로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하느님의 뜻을 진심으로 실행하십시오.”(에페6,6)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