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6월 22일 연중 제12주간 수요일
너희는 행위를 보고 그들을 알게 될 것이다
By their fruits you will know them.
(마태오 7,15-20)
말씀의 초대
아브람이 환시 중에 주님의 말씀을 듣는다. 주님께서는 그날 아브람과 계약을 맺고 땅과 후손을 주실 것을 약속하신다. 여기에서 아브람의 계약은 하느님 바로 그분과 한 계약이며, 주님께서 약속을 지키겠다고 맹세하신다. 곧 계약의 주도권은 주님께 있으며 펼쳐질 미래는 전적으로 주님의 이끄심으로 이루어진다는 뜻이다(제1독서). 참된 예언자는 하느님 말씀에 충실하며 행동으로 드러난다. 그러나 거짓 예언자는 하느님 말씀을 교묘하게 조작하여 자신의 이익을 추구한다(복음).
오늘의 묵상
우리가 살면서 맺고 사는 열매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육(肉)의 열매’와 ‘성령의 열매’입니다. 육의 열매는 불륜, 더러움, 방탕, 우상 숭배, 시기, 질투, 적개심, 분쟁, 분노, 이기심과 같은 것이지만, 성령의 열매는 사랑, 기쁨, 평화, 인내, 호의, 선의, 성실, 온유, 절제라고 했습니다(갈라 5,17-23 참조). 우리가 본성대로 살면 우리 안에 엉뚱한 나무가 자라서 육의 열매를 맺고, 주님의 뜻을 따라 살면 좋은 나무가 자라서 성령의 열매를 맺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틱낫한 스님은 마음을 ‘밭’에 비유하시지요. 그 밭에는 기쁨, 사랑, 이해, 즐거움, 희망과 같은 긍정적인 씨앗이 있는가 하면, 두려움, 분노, 미움, 절망, 시기, 외로움, 그리고 건강하지 못한 집착 등과 같은 부정적인 씨앗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어떤 씨앗에 물을 주어 열매를 맺을 것인지는 우리의 선택에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신앙인의 마음 밭에는 늘 말씀의 씨앗이 뿌려지고 있습니다. 날마다 말씀을 읽고 새기고 묵상하면 저절로 우리 안에 좋은 나무가 자랍니다. 좋은 나무가 자라서 큰 나무가 되면 본성에 뿌리를 두고 자라던 ‘못된 나무’는 시들시들 힘을 잃고 맙니다. 다른 사람들이 이 큰 나무 그늘에 모여 쉴 수 있는 넉넉한 사람이 됩니다. 성령의 열매가 맺혀 삶이 풍요롭고 아름다워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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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께서는 거짓 예언자들을 조심하라고 하십니다. 그들은 양의 탈을 쓰고 있지만 사나운 이리일 뿐이라고 하십니다. 하느님 나라와 그분의 정의와 평화를 뒤흔들거나, 기본적으로 사람들이 선택하지 못하도록 하는 일체의 시도들은 모두 거짓 예언자들의 행태입니다. 이것들은 주로 우리 사회 안에서 사상이나 이념, 체제나 제도들을 등에 업고 나타납니다. 그것들은 흔히 현란하고 매력적이며, 언제나 인간적이라는 외양과 심지어 신앙을 앞세우면서 우리 앞에 나타납니다.
우리는 그것들이 세상 안에서 만들어 내는 과정들을 잘 볼 수 없습니다. 언제나 그들이 제시하는 그럴듯하게 포장된 결과들만 봅니다. 그렇지만 그들이 양산해 내는 것들을 조금만 주의 깊게 살펴보면, 그것이 얼마나 거짓된 것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억압과 착취를 일삼는 재물욕, 얼굴을 드러내려는 명예욕, 내로라하는 권력욕 등을 통해서 우리는 거짓 예언자들의 실체를 알아 낼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너희는 그 행위를 보아 그들이 어떤 사람인지 알게 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현세를 살아가면서 거짓 예언자들에게 현혹되지 않도록 무엇보다도 조심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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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콩쥐 팥쥐’ 이야기가 있습니다. 새엄마로 들어온 팥쥐 엄마는 팥쥐만 위하고 콩쥐에게는 매몰찹니다. 세월이 지나자 팥쥐는 엄마의 과보호로 거만한 아이가 되지만, 고생하며 자란 콩쥐는 겸손해져 복 받는 아이가 됩니다.
이 이야기의 교훈 역시 간단합니다. 팥쥐처럼 되지 말고 콩쥐처럼 되라는 것이지요. 어머니들에게도 숨은 교훈이 있습니다. 팥쥐 엄마처럼 되지 말라는 것이지요. 그럼에도 그러한 어머니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이웃 아이에게는 냉정하면서도 자기 아이에게는 갖은 정성을 다합니다. 다른 아이가 자기 아이를 조금만 건드려도 콩쥐 대하듯 합니다. 선생님이 조금 꾸중한 걸 가지고 전화를 걸어 따지곤 합니다.
아이의 외적인 면에는 이렇듯 극성스럽지만 내적인 면에는 둔감합니다. 겉만 예쁘면 속도 예쁠 것이라 착각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아닙니다. 영악한 아이는 영악한 어른으로 바뀔 뿐입니다. 오히려 어수룩했던 아이들이 성격 좋은 어른으로 탈바꿈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좋은 나무는 좋은 열매를 맺는다.”고 했습니다. 좋은 나무는 뿌리가 좌우하지요. 보이지 않는 뿌리가 좋은 나무의 열쇠인 셈입니다. 뿌리는 부모입니다. 선생님입니다. 영적 지도자입니다. 그들이 건전하면 아이 역시 건전해집니다. 좋은 나무는 반드시 좋은 열매를 맺기 마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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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제대로 알아보는 일이 그리 쉽지 않습니다. 열매를 맺는 것을 보고 판단하려면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 합니다. 하지만 열매를 기다리기보다는 보는 첫 순간에 판단하려고 합니다.
처음에는 괜찮은 사람으로 판단하였으나 그게 아닌 사람, 반대로 처음에는 별 볼 일 없는 사람으로 여겼으나 정말 괜찮은 사람을 만난 경우가 있을 것입니다. 서두르지 맙시다. 함부로 판단하지 맙시다.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도와줍시다.

좋은 열매를 보면 (마태7,15-20)
-반영억신부-
사제관 뜰에는 토마토, 고구마, 감자가 잘 자라고 있습니다. 보좌신부가 정성으로 가꾸고 있습니다. 잡풀을 뽑아주고 둑을 돋구어주며 땀을 흘렸으니 곧 잘 익은 결실이 돌아올 것입니다. 보좌신부는 이미 보상을 다 받았습니다. 사랑과 정성으로 결실을 기대하면서 기쁨으로 지냈으니 이미 받을 것은 다 받은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이나 과일 나무나 좋은 결실을 얻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또한 햇빛과 비, 그리고 밑거름이 있어야 합니다. 좋은 열매를 보면서 필요한 것들을 제대로 취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사람의 행동거지를 보면서 그 사람을 알게 됩니다. 그 사람이 큰 사람이었는지는 입술로 하는 말에서가 아니라 그의 삶의 여정을 통해서 드러나게 됩니다. 지금 당장은 어리석어 보이는 사람도 그 끝을 보면 놀라워할 사람도 있습니다. 또 그 반대의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때를 기다리며 햇빛과 비, 거름을 주는 것에 게을러서는 안되겠습니다.
보면 볼수록 정감이 가고 괜찮은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처음에는 멋있었는데 시간이 갈수록 매력이 없어지면 힘이 듭니다.
따라서 처음이나 끝이나 변함이 없어야겠지만 기왕이면 갈수록 깊어지는 멋을 담아야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거짓 예언자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은 양의 옷차림을 하고 너희에게 오지만 속은 게걸 든 이리들이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외견상으로는 열심해 보여도 속으로는 그렇지 않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겉만 보아서는 그 사람이 사심이 있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행실을 보면 그 속을 알 수 있게 되고 속아넘어가지 않게 됩니다. 따라서 생각과 말과 행동의 일치를 통해서 좋은 열매를 맺기 바랍니다.
성 그레고리오 주교는 “우리의 전체 생활은 그리스도를 드러내야 합니다…... 자신의 생각과 말과 행동을 주의 깊게 살펴보아 이 세가지 각각이 그리스도를 향하고 있는지 도는 그분에게서 떨어져 나가 있는지 판단해 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하고 말했습니다. 그리스도를 향할 때 좋은 열매는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나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모두 잘려 불에 던져진다” 고 했습니다. 결국 신앙과 사랑으로 무르익은 삶만이 심판의 불을 면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잘 익은 좋은 열매가 되십시오! 혹 시들한 열매가 보이거든 햇빛을 보게 하고 비를 맞을 수 있게 하며 그리고 거름을 주십시오. 사랑합니다.

좋은 나무는 좋은 열매를
-김경식 몬시뇰-
거짓 예언자는 초대교회부터 교회의 골칫거리로 있어왔습니다. 거짓 예언자들을 구분해내는 일은 어려운 일입니다. 양의 탈을 쓰고 있기 때문입니다. 겉으로는 그리스도교적 신앙과 생활을 하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사나운 이리가 양떼의 천적이면서도 양인 것처럼 양떼 속에 섞여 있습니다. 이리는 양들의 순진한 믿음을 이용하여 양들을 잡아먹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을 가려내는 방법을 가르쳐주십니다. “행위를 보고 그들을 알게 된다”(16)는 것입니다. 양떼가 그들의 설교에는 쉽게 넘어갈 수 있겠지만, 그들의 행실을 보면 쉽게 가려낼 수 있습니다.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나쁜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기”(18) 때문입니다. 한두 번은 속일 수 있어도 오래 속이지는 못합니다. 사고방식이 나쁘면 그 행동이나 성향이 나쁘게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사람들을 가르치고 있는 사람입니다. 누구를 가르친다는 것은 말로써 되는 것이 아닙니다. 말로 가르치는 것을 행동으로 보일 때 비로소 배웁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로만 가르치고 십자가에 죽지 않으셨다면, 그분의 말씀을 그렇게 좋아하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는 그분의 사랑의 행동에 감복되어 그 말씀이 모두 진리라 믿고 그분을 따릅니다. 예수께서 짧은 시간에 모든 것을 다 가르치신 것은 당신의 온 생명을 다 바쳐 가르쳐주셨기 때문입니다. 죽음보다 더 강한 가르침은 없습니다. 순교자들의 죽음을 보고서 많은 이들이 진리를 깨치지 않았습니까!
좋은 모범은 몸에서 배어나야 하는 것이지 만들어내는 것이 아닙니다. 이웃이 나를 좋은 사람으로 안다면, 우리는 좋은 스승으로서 좋은 행동을 보여줄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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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열매
-김찬선신부-
“너희들은 그들이 맺은 열매를 보고 그들을 알아볼 수 있다.”
이 말씀을 몇 겹으로 뒤집어 이해하면 “수도복을 입었다고 다 수도자냐.”입니다.
또는 “세례를 받았다고 다 신자냐.”입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것은 몇 십 년 수도생활을 했는데도 아직도 행복하지 않다면 수도생활을 한 것이 아닙니다.
수도생활의 열매는 행복이기 때문입니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신자로 살았는데도 아직도 사랑할 줄 모른다면 그것도 신자로서 산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교무금 잘 내고 열심히 성당을 다녔어도 첫째가는 계명을 충실히 살지 못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열매를 보고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 알 수 있습니다.
자유로움은 없고 방종만 있다면 참으로 순종 잘 하는 수도자가 아닙니다.
풍요로움은 없고 탐욕만 있다면 참으로 가난한 수도자가 아닙니다.
눈치만 보고 모두를 사랑할 줄 모른다면 참으로 하느님을 사랑한 정결한 수도자가 아닙니다.
같은 맥락에서 나이를 먹을수록 고집만 세고 너그러움이 없다면,
일은 많이 하지만 기도하지 못한다면,
완덕 대신 변덕만이 쌓였다면 일생의 수도생활을 잘 못한 것입니다.
열매는 한 순간에 맺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봄의 생기와 여름의 열기를 머금고, 인내와 끈기로 비바람을 견뎌내야 나무가 열매를 맺듯이
기도로 끊임없이 하느님 사랑을 먹으며 자기를 잃고 십자가를 지는 인고의 시간을 견디어내야
사랑과 행복의 열매가 우리에게 달릴 것입니다.

신앙의 열매
-김민수 신부-
본당의 한 자매가 안타깝게도 정월 초하룻날 암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자녀들을 두지 못한 채 전신마비가 된 남편을 18년간 정성과 사랑을 다해 간병을 하다 암에 걸린 것도 몰랐습니다. 몇 개월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고 임종 때가 이르자 구역 신자들은 그를 위해 54일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 자매는 자신의 임종이 가까이 온 것을 알고 주위에 부모가 없는 아이들에게 주라며 성금을 내놓았습니다. 자신도 부모없이 자랐기 때문에 늘 마음속에 한이 맺혀 있었습니다. 놀랍게도 54일 기도가 끝난 후 그녀는 행복한 표정을 지으며 눈을 감았습니다.
구역 신자들이 적극적으로 나서서 너나 할 것 없이 상주가 되었고, 음식을 차리며, 장례 미사를 정성껏 봉헌했습니다.
인간적인 면에서는 장애인 남편만을 위해 희생한 삶이었고, 자식없이 세상을 떠난 불쌍한 여인이었을지 모르지만, 그는 보잘것없는 한 인간에게 하느님의 사랑을 실천한 진정한 신앙인이었습니다. 구역 신자들도
한마음이 되어 그의 장례를 치러 주면서 교회가 공동체임을 보여 주었습니다.
신앙인은 하느님의 뜻을 실천할 때 성령의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이라는 씨앗을 뿌릴 때 사랑, 기쁨, 평화, 인내, 호의, 선의, 성실, 온유, 절제라는 결실을 거둘 수 있게 됩니다.
우리가 이러한 결실을 맺을 때 세상은 우리를 하느님의 자녀로 알게 될 것입니다.

조심하여라
- 전봉순 수녀-
내가 살고 있는 수녀원 분원 공동체는 일반 주택가에 자리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종종 종교단체에서 대문을 두드리며 전교하러 온다. 전날 문을 열어주지 않으면 다음날 같은 사람이 또 찾아온다. 그들은 주로 낮 시간에 오는데, 초인종 소리를 듣고 누구냐고 물으면 “…`교회에서 왔습니다.” 하거나 “…`절에서 왔습니다.” 한다.
그러면 나는 “우리는 천주교 신자입니다.” 하고 말한다. 그래도 문을 좀 열어 달라고 하면서,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는 이야기를 하겠다는 것이다.
이미 신앙이 있는 신자라고 해도 인정하려 들지 않고 끈질기게 조른다. 그러면 나도 더 말하기에 지쳐버려 초인종 인터폰을 끊어버린다. 그들은 꼭 두 명씩 짝을 지어 다닌다. 그래서 화면을 통해 현관 앞에 두 사람이 있는 것을 보면 아예 대꾸도 하지 않는다.
지난해 성지순례를 하면서 젊은 개신교 신자를 만났다. 그 자매는 임신 중에 교통사고로 남편을 잃었다고 했다. 혼자서 딸 하나를 키우고 있는 자매에게 측은한 마음이 들었고, 개신교 신자든 천주교 신자든 모두 하느님을 믿기에 그분과 편하게 대화했다. 그 자매는 교회에서 ‘천주교는 이단’이라고 배웠는데 수녀님은 어떤 분을 믿느냐고 물었다. 역시 일부 개신교 신자들의 틀에 박힌 질문이라 놀랄 것은 없었지만 현대 젊은이마저도 이런 식인가 싶어서 당장 그 자리를 피하고 싶었다.
그래도 인내하면서 그의 말을 들어보고자 했다. 자매는 교회에서 그렇게 배웠다면서 예전에 직장 생활을 할 때도 천주교 신자인 동료에게`‘천주교는 이단이야.’라고 해서 동료를 울린 적이 있단다. 그 천주교 신자는 열성적인 개신교 신자 앞에서 대꾸할 방도가 없었는지, 아니면 너무 어이가 없어서 그랬는지 그냥 울기만 했다는 것이다. 그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천주교 신자를 자기들의 교회에 끌어들이려고 한다. 그럴 때마다 꼭 성경 구절을 인용한다. 그 자매의 말을 듣고 있자니 씁쓸해서 “개신교의 하나님과 천주교의 하느님이 다른 분인가 보군요?” 하고 말했다.
교회의 역사나 그리스도교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지 않고 자기들의 신앙이 전부인 양 떠드는 이들이 있다. 그들은 현대의 신자들이 조심해야 할 대상이다. 우리가 제대로 교회 전통과 성경을 알지 못하면 우리는 진리를 잃어버린다. 종교다원주의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는 제대로 알고 믿어야 하며 늘 ‘조심해야’ 한다. 열매라고 다 좋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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