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6월 20일 연중 제12주간 월요일
너희가 심판하는 그대로 너희도 심판받고,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받을 것이다.
(마태오 7,1-5)
For as you judge, so will you be judged,
and the measure with which you measure will be measured out to you.

말씀의 초대
하느님께서는 아브람을 부르시고 앞으로 보여 줄 미지의 땅으로 떠나라고 명령하신다. 아브람이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고 길을 떠남으로써 신앙의 역사가 시작된다. 주님께서는 아브람에게 큰 민족이 될 것을 약속하시며 복을 내리시고 모든 이의 축복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제1독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을 기준으로 남을 판단하고 평가한다. 남의 눈 속에 있는 티는 잘 보지만 자신의 눈 속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한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남을 심판하지 말라고 명령하신다. 남을 판단하고 심판하는 것은 교만에서 나온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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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우리가 살아가면서 평생 동안 직접 보지 못하는 얼굴이 있습니다. 늘 함께 있지만 오로지 거울을 통해서 볼 수 있습니다. 바로 자신의 얼굴입니다. 다른 사람의 얼굴은 직접 이리저리 살펴볼 수 있지만 자신의 얼굴은 반사경에 비추어 보아야만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듯, 사람들이 형제의 눈 속에 든 티는 잘 보면서 자신의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고 사는지 모르겠습니다.
『논어』에 우리가 잘 아는 ‘일일 삼성’(一日三省)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비교적 잘 알면서도 자신에 대해서는 의외로 잘 모르고 삽니다. 남의 마음이나 행동은 무엇이 옳은지 평가를 잘하면서도 정작 자신의 마음이나 행동은 주관적 편견에 빠져 제대로 보지 못합니다. 그래서 자신을 객관화하여 하루에 적어도 세 번은 자신을 돌아보고 살피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하루에도 수없이 거울을 들여다보며 삽니다. 그렇다면 우리 내면의 얼굴은 얼마나 자주 살펴보고 있는지요? 우리는 만나는 사람들을 잘도 평가하고 판단합니다. 그렇다면 우리 내면의 행동과 태도는 얼마나 자주 올바르게 식별하고 반성하는지요? 우리가 하루에 거울을 들여다보는 횟수만큼만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아도 우리의 내면은 아름다워질 것입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평가하고 판단하는 만큼만 자신을 되돌아보고 올바르게 행동하여도 우리는 누구보다도 성숙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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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물을 지을 때 넘어가는 것을 막으려 바닥이나 천장에 대는 지지대를 ‘들보’라고 합니다. 금방 눈에 뜨입니다. 하지만 티끌은 잘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남의 눈의 티끌’은 쉽게 찾아냅니다. 그러면서 ‘자기 눈의 들보’는 보지 못합니다. 어떤 사람이 ‘눈 속에 들보’가 있는 사람인지요?
남을 심판하는 사람이라고 하십니다. “너희가 심판하는 그대로 너희도 심판받을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타인을 심판하기는 쉽습니다. 본인이 없는 곳에서 허물을 말하기는 정말 쉬운 일입니다. 순간적으로 방심하면 누구나 빠지는 실수입니다. 하지만 그런 행위가 자신의 눈에 들보를 채우는 일이라고 하십니다.
‘저 사람은 왜 저렇게 말할까?’ ‘어찌하여 저런 식으로 행동할까?’ 무의식중에 이렇게 말합니다. 본인도 모르게 ‘비판의 시각’을 갖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꾸려면 ‘긍정의 시각’을 훈련해야 합니다. ‘아, 그렇게 말할 수도 있구나.’ ‘그렇게 행동할 수도 있구나.’ 이렇게 받아들이는 자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기쁨을 갖고 살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기에 만나는 이들에게 ‘당신의 힘’을 주셨습니다. 병자들은 병이 나았고, 악한 기운에 붙잡힌 이들은 자유를 선물받았습니다. 그러한 주님께서 심판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남을 판단하는 자체가 ‘삶의 기쁨’을 감소시키는 행동이기 때문입니다.
왕은 알고 싶어 합니다, 나라를 다스리는 데 가장 중요한 사람은 누구인지. 가장 중요한 일이 무엇인지 알고 싶어 합니다. 왕은 은수자를 찾아갑니다. 그러나 은수자는 왕을 보고도 하던 일을 계속합니다. 왕은 그가 일을 빨리 마치고 자신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도록 거들어 줍니다.
숲 속에서 부상자가 비틀거리며 나왔습니다. 왕은 그를 돌보아 주었고, 다음날 부상자가 자신의 정적임을 알게 되자 화해합니다.
은수자와 지내면서 왕은 스스로 깨닫습니다. ‘가장 중요한 사람은 이 순간, 내 앞에 있는 사람이며, 가장 중요한 일은 그에게 착한 일을 하는 것이구나.’ 톨스토이의 예화집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멀리 있는 사람을 탓하지 않습니다. 매일 만나는 사람을 탓합니다. 모르는 사람을 심판하지 않습니다. 잘 아는 사람을 심판합니다. 서먹한 사람을 공격하지 않습니다. 친한 사람을 몰아붙입니다. 그러기에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사랑하는 이의 허물을 덮어 주어야 사랑이 완성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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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다른 사람을 쉽게 판단합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일은 참으로 조심해야 합니다. 그 사람을 정확하게 판단하려면 많은 정보와 자료가 필요합니다. 그것으로도 그 사람을 정확하게 판단할 수 있다고 확신할 수 없습니다. 일찍이 사형수들의 대부였던 김홍섭 판사는 자신의 판결이 항상 100점이라고 할 수 없으며 70점일 때도 있고 60점일 때도 있다고 고백하였습니다. 우리는 실제로 잘못된 재판을 종종 봅니다. 예수님 역시 빌라도의 오판으로 사형을 당하셨습니다. 소크라테스도 아테네의 시민 법정에서 잘못된 재판으로 사형이 언도되었습니다. 잘못된 판단은 참으로 무서운 일입니다. 무고한 사람을 죽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느 날 우리가 아무런 죄가 없는데 죄인이 된다고 합시다. 얼마나 끔찍한 일입니까? 주님께서는 그런 뜻에서 판단하지 않기를 당부하십니다. 판단은 하느님께서만 정확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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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람은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습니다. 그의 고향과 친족과 아버지 등 모든 것을 포기하라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하느님의 명령대로 그는 먼 길을 떠납니다. 위험도 확률도 결과도 따지지 않고 오로지 주님께 순종할 뿐입니다. 그러기에 믿음의 사람으로 바뀌었던 것입니다.
약속의 땅은 이렇게 시작되었습니다. 아브람의 결단과 순종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아브람만이 아니라 주님의 부르심에 순응하고 살면 누구에게나 약속의 땅은 주어집니다. 그러나 우리는 약속의 땅을 자주 청하면서도 정작 주어질 순간에는 망설이고 맙니다. 아브람처럼 떠나야 합니다. 망설이지 말고 출발해야 합니다.
그때 아브람의 나이가 75세였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떠났습니다. 나이의 불리한 여건을 극복한 것입니다. 우리는 너무 늦었다고, 고통이 너무 많다고, 십자가가 너무 무겁다고 주저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봅시다.
오늘 복음 말씀대로, 우리는 남의 약점은 쉽게 보면서 자신의 부족함은 잘 깨닫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 빼내라고 하시는 들보 가운데 가장 흔한 들보는 남의 탓으로 돌리려는 마음입니다. 먼저 내 탓으로 보고 내 몫으로 돌리는 것이 자신의 앞날을 새롭게 바꿀 수 있는 길입니다.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 나무란다
-반영억신부-
열심히 살아가려고 하면 남의 단점이 유난히 잘 보입니다. 남의 보기 싫은 모습 때문에 마음이 혼란스럽기까지 합니다. 그럭저럭 살아갈 때가 이 꼴, 저 꼴 안보고 마음이 편했습니다. 차라리 옛날처럼 살아가고픈 마음이 가득합니다. ‘저 사람은 왜 저 모양일까?’하는 마음에서 언제나 자유로울 수 있을까? 걱정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남을 심판하지 말고 남을 되질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남을 판단하기에 앞서 자신의 들보를 빼내야 남의 눈에 있는 티를 빼낼 수 있으니 먼저 자신을 점검하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등잔 밑이 어두운지라 여전히 자신의 부족한 점을 보지 못하고 남의 약점을 들추어내곤 합니다. 자신은 완벽하고 다른 사람은 허물투성이처럼 생각합니다. 그야말로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 나무라는 격입니다. 이러다가 결국 누군가에게 똑같이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더더욱 하느님께로부터 그렇게 심판을 받는다면 지금은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할 때입니다.
자기성찰을 한다는 것은 삶의 지혜입니다. 자신을 살펴본 후에야 남을 도와줄 수 있고 또 그렇게 해야만 남을 업신여기지 않고 진정한 사랑으로 도와줄 수 있습니다. 혹 남보다 내가 낫다는 마음을 가지고 누구를 돕는다면 받는 사람은 고마움보다는 비참함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또한 다른 사람이 잘 될 수 있도록 충고하는 것은 마땅히 해야 할 일입니다. 그러나 이 역시 내 삶의 모범 없이 강요하는 가르침이라면 상처만 더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먼저 자기성찰을 한 후 행동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말합니다. “충고를 한다는 것은 사람이 할 수 있는 가장 어렵고 힘든 일입니다. 자기 자신에게 먼저 충고해서 바꾸고 변화시키는 일부터 하십시오.”
그리고 그러한 도움은 기꺼이 받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좋은 충고를 현명하게 판단하고 수행하십시오. 충고는 하느님의 소리요, 하느님의 뜻입니다.”(성녀 안젤라 메리치)
오늘 우리 모두에게 자기성찰에 충실한 열심과 정열이 주어지길 기대합니다. 잘못된 열심은 영혼을 상처 나게 합니다. 그러므로 열심이 더할수록 하느님 앞에 나를 비추는 일에도 소홀함이 없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주머니 속에 작은 거울을 준비해 두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자주 당신을 들여다보고 당신의 얼굴이 주위 사람들에게 밝은 빛을 발산하는지를 살펴보십시오. 손거을 못지않게 영혼의 거울도 자주 닦아야 잘 보입니다.” (필립보 리날디) 사랑합니다.

긍정 혹은 부정
-김대선 신부-
우리는 남의 이야기를 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런데 그 남의 이야기가
긍정적인 것보다는 부정적인 경우가 더 많습니다. 타인의 불행이나
잘못을 이야기합니다. 그 대상이 공인일수록 더 그렇습니다. 결국 그러한
이야기들은 억측과 오해를 불러일으키고 상대에게 큰 상처를 남겨주게 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인터넷이 발달한 오늘날 이러한 모습은 ‘댓글’이라는
형태로 나타납니다. 댓글은 누군가의 의견이나 사건에 대해 자신의 객관적인
입장을 이야기하는 것인데, 우리들의 인터넷 문화는 지극히 주관적이고
부정적인 모습입니다. 그것은 내 얘기가 아니라 남의 얘기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남을 심판하지 말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언젠가는
나도 남의 심판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사랑을
주셨고 이웃을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다른 이들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것은 나 자신을 긍정적이고 밝은 사람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스스로가 긍정적일 때 우리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도 긍정적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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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판하지 마라
- 전봉순 수녀-
어렸을 때 고향집에는 감나무 몇 그루가 있었다. 가을이면 어머니는 잘 익은 감을 읍내 시장에 가지고 가서 소매상인에게 내다 파셨다. 상인에게는 한 접(100개)씩 넘겼기 때문에 미리 숫자를 세어야 했다. 나는 감을 셀 때마다 신이 났다. 그래서 어머니께서 “이제 그만 됐다.” 하실 때까지 몇 번이고 100개가 맞는지 세고 또 세었다.
어느 장날, 감을 팔러 시장에 가시는 어머니를 처음으로 따라 갔다. 어머니는 감을 소매상인에게 넘길 때마다 항상 몇 개를 더 가져가셨다. 그날도 다름없이 여유분을 가지고 가셨다. 나는 어머니가 후하셔서 소매상인에게 인정상 더 주시는 것이라 믿었다. 그날 나는 어머니의 시장주머니가 두툼해지는 것을 보면서 신이 났다. 게다가 우리 물건을 사 주는 사람이 있어서 좋았고 어른들이 거래하는 모습도 참 신기했다. 나는 소매상인이 어머니의 감을 셈하는 것도 유심히 지켜보았다. 내가 이미 세어놓은 것이기에 확인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상인을 전혀 의심하지도 않았고 숫자를 헤아리는 데도 신경을 쓰지 않았다. 내 생각에 어머니는 그저 그 상인을 믿는 것 같았다.
그런데 그 상인은 다섯 개씩 헤아리면서 어떨 때는 큰 손으로 여섯 개를 쥐고도 다섯이라고 했다. 나는 어린 마음에 너무 화가 났다. 속임수라는 것을 그 상인한테서 처음 경험한 것이다. 무엇보다도 우리 어머니가 속고 있으면서 그것을 모른다는 사실이 부끄럽고 억울했다. 어머니는 “내가 잘못 헤아렸나?” 하시고는, 그 상인이 말하는 대로 확인해 보지도 않고 여유분으로 가지고 온 것을 더 주셨다. 나는 어린 마음에 꽤 억울하기도 하고, 상인의 정직하지 못한 태도에 실망해서 내가 본 사실을 그 자리에서도 나중에도 말씀드리지 못했다. 어머니가 속았다는 사실을 알면 얼마나 속상하실까 싶었기 때문이다.
그때 나는 새로운 것을 알았다, 어머니는 항상 여분의 농작물을 넉넉히 가지고 가시면서 속임수를 당할 때마다 그냥 말없이 채워주신다는 것을. 어머니가 사실을 알면서 그렇게 하셨는지, 아니면 정말 모르고 그렇게 하셨는지 나는 지금도 모른다. 하지만 그때 일이 가끔 떠오르는 것을 보면, 그 상인의 속임수를 보고 어린 내가 느낀 분노가 꽤 컸던 모양이다. 그 이후로도 나는 어머니께서 항상 개수는 넉넉하게, 곡식 되는 넘치게 되시던 것을 보았다. 그런 어머니의 모습이 오늘 내가 복음을 사는 밑거름이 되었음을 깨닫는다. 따지지 않고 후하게 베풀고 그저 너그럽게 대하는 것! 그것이 ‘남을 심판하지 않는’ 삶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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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보기
-오상선신부-
예수님의 이 말씀은 사실 당연한 말씀이 아니겠는가!
사람의 눈은 밖을 내다보게 되어 있지
안을 들여야보도록 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나이가 들수록 눈이 침침해져
그 바깥도 더 잘 볼 수 없으니...
요즘이야 흔해빠진 것이 거울이지만
예수님 당시에는 거울도 없었으니
제 눈에 뭐가 있는지 어찌 볼 수 있었으랴!
따라서 예수님의 말씀을 이렇게 해석해보면 어떨까?
내가 말하는 것은 육신의 눈으로 보라는 것이 아니다(肉眼).
마음으로 보라는 것이고(心眼),
영으로 보라는 것이다(靈眼).
마음의 눈으로
영의 눈으로 바라보면
상대방의 눈이 보이는 것이 아니라
너의 눈이 보이게 된다.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는
거의 장님이 되고나서야
참으로 피조물의 아름다움이 무엇인지를 노래할 수 있게 되었다.
그냥 육신의 눈으로
꽃이 아름답고 자연이 아름답다고 노래한 것이 아니라
심안으로, 영안으로
하느님께서 만드신 이 세상만물이
모두 하느님을 찬미하고 있음을 깊이 바라보게 됨으로써
그 신비에 놀라 <태양의 노래>를 만들게 된 것이다.
오늘부터
육신의 눈에 의존하여 거울만 바라보기보다
심안으로, 영안으로
사람을 보고, 세상을 보는 노력을 하면 어떨까?
그래야 영이신 하느님도 볼 수 있지 않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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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단의 기준
-최성우신부-
남을 판단하지 말라는 오늘의 복음 말씀은 남을 판단하지 말아야 하듯이 자신에게도 그런 잣대를 들이대지 말라는 말씀으로 들린다. 자신을 판단하고 비난하는 것은 자신을 부정하고 거부하는 또 다른 표현이다. 특히 인간관계에서 어려운 일이 생기면 겸손한 양 자신을 비하시키기가 쉽다.
진실이 받아들여지지 않을 때도, 사랑의 표현이 무시당할 때도 자신을 비난하면 상처만 입을 뿐이다. 물론 다른 이에게 화살을 돌린다고 해도 남는 건 상처뿐이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매번 경험하는 일이다. 다른 사람이나 자신을 비난하거나 판단하는 건 어떤 면에선 상처받지 않으려는 방어에서 나오는 태도이기 때문이다. 방어를 하고 자신을 지킬 수 있다면 좋을 테지만 그렇게 한다고 자신을 지킬 수 있는 건 아니다.
못났으면 못난 대로 독특한 무엇이 있음을 감사하고 자연스럽게 살 수 있었으면 한다. 쉽지는 않겠지만 한계를 인정하면 소유와 집착에서 벗어나게 되고 겉꾸미거나 자신을 속이지 않아도 되니 얼마나 자유로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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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선만을'을 버리면
-김찬선신부-
어제는 어떤 형제님이 저를 보고 더 건강해진 것 같고
행복해 보인다고 하셨습니다.
남자들은 이런 표현을 잘 안 하는데 예사롭지 않아서 그랬는지
전에는 지나치던 그 말을 생각해보았습니다.
정말 그런가?
더 건강해질 것은 없을 것 같고, 그러면
더 행복한가?
뭐 더 행복할 이유도 없는데.......
한 달 전에 비하면 별 차이가 없는 삶이지만, 그러나
옛날과 비하면 분명 저는 행복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것은 미흡했던 행복의 조건이 이제 충족되었기 때문도
외부 상황이 바뀌었기 때문도 아닙니다.
제가 서서히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전에는 보이는 것이 온통 나쁜 것,
잘못된 것들뿐이었습니다.
남이든 저든 나쁜 것과 잘못된 것들만 보이고
그 잘못도 크게만 느껴졌습니다.
그러던 것이 서서히 바뀌더니 언제부턴가
좋은 점이,
잘하고 있는 것이,
애쓰는 것이,
예쁜 짓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최선만을 고집하지 않게 된 결과입니다.
남이든 저든 이렇게 긍정하고 칭찬하니
칭찬을 하면 고래도 춤을 춘다는 말처럼
사람들이 기쁘고 행복해지고
무엇보다도 제가 행복해졌습니다.
물론
여전히 나쁜 점이 많이 남아 있고
잘못하는 것은 여전히 잘못하고
또 그것을 보지만
이제는 티만 보거나,
티를 대들보로 보는 어리석음이,
티만 보고 사람은 보지 못하는 그런 어리석음이
줄어든 것이 다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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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탓이요, 제 탓이요, 저의 큰 탓이옵니다
-이기양 신부-
?말 한 마디에 천냥 빚을 갚는다.?는 속담이 있지요. 우리는 말 한 마디로 천냥 빚을 갚기도 하지만 또 반대로 말 한 마디로 원수 관계를 만들기도 합니다. 주변에서 일어나는 대부분의 갈등과 싸움이 ?말?에서 시작이 되는 것을 쉽게 볼 수가 있습니다. 어떠한 말을 하느냐에 따라서 싸움으로 치닫기도 하고 또 화해의 계기가 만들어지기도 하지요. 사람과의 관계 대부분이 언어로 시작되고 언어로 끝난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입니다. 어떤 말을 하느냐에 따라서 위로가 되기도 하고 상처가 되기도 하며, 한 마디의 말이 사람을 일으켜 세우기도 하고 쓰러뜨리기도 하지요.
지혜로운 말과 어리석은 말은 어떻게 다른 것일까요? 간단합니다. 남을 감싸주고 칭찬하는 말들은 지혜로운 말이지요. 남을 비난하고 헐뜯는 말들은 어리석은 말입니다. 어떤 말을 하느냐에 따라서 사람을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하지요. 큰 전쟁이 일어날 뻔한 일을 막은 한 줄의 글을 소개합니다.
남미의 아르헨티나와 칠레는 양국의 우호를 다지기 위해 국경에 예수 그리스도의 동상을 세웠습니다. 그런데 이 동상으로 인해 오히려 두 나라는 전쟁이 일어날지도 모르는 위기를 맞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동상이 완성 단계에 이르렀을 때 칠레의 어떤 사람들이 ?예수님 동상이 칠레에 등을 돌리고 계신다.?고 주장했기 때문입니다.
사실 동상 전면은 아르헨티나를 향했고 뒷면은 칠레 쪽을 향하고 있었습니다. 이 일은 칠레인들의 마음을 상하게 하고 분노케 했습니다. 사람들의 감정은 점점 거칠어갔지요. 양국간의 감정이 나쁜 방향으로 치닫고 있을 때 이를 명쾌하게 극복하는 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칠레의 한 기자가 신문에 쓴 재치 있는 기사였다.
?예수님의 얼굴이 아르헨티나를 향하여 서 계시는 이유는 아르헨티나가 칠레보다 더 예수님의 보살핌이 필요한 나라이기 때문이다.?
이 기사는 칠레인의 고조된 감정을 가라앉힐 만큼 큰 감동을 주었습니다. 한 사람의 긍정적이고 평화적인 글이 두 나라의 엄청난 비극을 막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따뜻하고 긍정적인 마음을 담은 지혜로운 말은 세상에 평화를 가져옵니다. 불에 기름을 끼얹듯 성난 국민을 선동하는 모난 기사가 실렸다면 아마도 전쟁이 일어났을지도 모를 일이지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래야 너희도 심판받지 않는다.?(마태7,1)
여기서 판단한다는 것은 나쁘게 보고 생각하고 말하는 것을 말합니다. 나쁘게 보고 말하고 생각하면 그 사람 또한 그대로 다른 사람들로부터 나쁜 말과 행동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에서 제일 어리석은 사람이 ?누워서 침 뱉는 사람?이지요. 누워서 침을 뱉으면 그 침이 어디로 떨어집니까? 바로 내 얼굴로 떨어지지요. 남에 대해서 나쁘게 말하면 나에게는 더 고약한 말이 돌아오는 법입니다. 참으로 어리석은 사람이지요. 남을 판단하고 나쁘게 말하는 것은 참으로 지혜롭지 못한 태도입니다.
특히 오늘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지요.
?너희가 심판하는 그대로 너희도 심판받고,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받을 것이다.?(마태7,2)
그렇습니다. 내가 이러쿵저러쿵 이웃을 욕하고 저울질하면 하느님께서 나를 저울질하시기 전에 벌써 이 세상에서 그와 똑같이, 어쩌면 그 이상으로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바오로 사도 역시 말을 조심하고 지혜로운 말로써 공동체가 함께 살아갈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여러번 말씀하셨지요.
?여러분의 입에서는 어떠한 나쁜 말도 나와서는 안 됩니다. 필요할 때에 다른 이의 성장에 좋은 말을 하여, 그 말이 듣는 이들에게 은총을 가져다줄 수 있도록 하십시오.?(에페4,29)
오늘 예수님께서는 남을 판단하지 말고 먼저 자기 자신을 돌아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네 눈 속에는 들보가 있는데, 어떻게 형제에게 ?가만, 네 눈에서 티를 빼내 주겠다.?하고 말할 수 있느냐??(마태7,3-4)
오늘도 우리는 부정적이고 비판적이며 공격적인 말들과 사건들로 넘쳐나는 세상에 나가 살아야 합니다. 거기에 휩쓸리면 같이 그렇게 될 수밖에 없지요. 그 와중에서도 이웃을 살리고 희망을 주는 긍정적인 말들을 생각하고 행하는 것, 이것이 복음을 사는 방법입니다. 위로와 격려의 내 말 한 마디가 깨어지고 상처가 나서 보복하고 싶은 감정들을 누그러뜨리고 새로운 계기를 만드는 바탕이 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남을 판단하기에 앞서 먼저 자신을 돌아보고, 이웃에 대해서 함부로 말하기보다는 칭찬하고 격려하며 사랑의 언어만을 세상에 심는 복된 하루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