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인대장의 믿음 (마태8,5-17)

2011. 6. 25. 오전 6:0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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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6 25일 연중 제12주간 토요일

 

주님, 저는 주님을 제 집에 모실 만한 자격이 없습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하시면 제 하인이 낫겠습니다.
(마태오 8,5-17)
 

"Lord, I am not worthy to have you enter under my roof;
only say the word and my servant will be healed.

  

 

 

 

말씀의 초대

아브라함은 자기 앞에 나타난 세 사람에게 정성을 다한다. 아브라함의 이러한 대?? 아브라함과 사라가 늙은 나이임에도 주님께서 후손에 대한 약속이 성취되리라는 예고로 보상받는다. 주님께서는 이렇게 뜻밖에 찾아오시어 축복해 주시고 당신께서 하신 약속에 충실하시다(제1독서). 백인대장이 예수님께 다가와 중풍이 든 자신의 종을 고쳐 달라고 간청한다. 백인대장은 주님의 ‘한 말씀’이면 자신의 종이 낫게 될 것이라는 믿음을 고백한다. 예수님께서는 믿음을 칭찬하시며 그의 믿음대로 중풍 병자를 고쳐 주신다(복음).

 

☆☆☆

오늘의 묵상

미사 때 성체를 모시기 전, “주님, 제 안에 주님을 모시기에 합당치 않사오나 한 말씀만 하소서. 제가 곧 나으리이다.” 하고 신앙을 고백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백인대장이 주님 앞에서 했던 내용과 같은 신앙 고백입니다. 백인대장은 중풍으로 고통 받는 자신의 종을 위해, 감히 주님을 자신의 집에 모실 자격조차 없음을 고백하며 그저 한 말씀만 하시면 자신의 종이 나을 것이라고 고백합니다.
백인대장을 통해 우리는 세 가지 신앙 태도를 볼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자신의 종에 대한 지극한 사랑입니다. 당시 종은 사고파는 물건일 따름이었습니다. 사람을 이용 가치로만 평가하는 당시의 관점으로 ‘병든 종’은 그야말로 ‘쓸모없는 종’입니다. 그러나 백인대장은 종을 인격체로서 바라보며 그에게 연민과 사랑을 가지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두 번째는 겸손입니다. 주님 앞에 스스로 몸을 낮추어 자신이 종의 모습이 됩니다. 감히 예수님을 자신의 집에 모실 자격조차 없으니, 자신이 부하나 종한테 하는 것처럼 그저 한 말씀만 하시면 된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믿음입니다. 로마의 백인대장이 황제를 대신해서 그 권위로 부하들을 통솔하는 것처럼, 예수님께서 하느님을 대신해서 일하신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한 말씀만 해 주셔도 자신의 종이 나을 수 있음을 믿고 고백한 것입니다.
주님의 마음을 움직이는 기도는 이렇듯 백인대장의 마음과 태도를 가지면 됩니다. 그것은 기도를 해 주는 대상에 대한 진정한 사랑, 자신을 온전히 낮추는 겸손, 그리고 주님의 권능에 대한 믿음입니다.

☆☆☆

 

화수분재물이 자꾸 생겨서 아무리 써도 줄지 않는 보물단지라는 뜻을 지닌 말입니다. 그런 화수분 하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는지요? 얼마든지 남을 도울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마음먹으면 화수분을 만날 수 있습니다. 살 수는 없지만 얻을 수는 있습니다.
화수분은 중국 진나라 때 만들어진 말입니다. 진시황은 만리장성을 쌓을 때 강물을 길어다 구리로 만든 동이에 채우게 했습니다. 그 물동이가 얼마나 컸던지 한 번 채우면 아무리 써도 없어지지 않았다고 합니다. ‘황하수 강물을 채운 동이라는 뜻에서 화수분이란 말이 나왔습니다
.
주님, 제 종이 중풍으로 집에 드러누워 있는데 몹시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백인대장은 예수님 앞에 엎드렸습니다. 자신의 종을 살려 주시길 청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칭찬하십니다. 부하를 위해 자신을 숙이며 간청하는 그의 마음을 보셨던 것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이스라엘의 그 누구에게서도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 예수님께서 감동을 받으셨던 것입니다
.
누군가를 감동시키면 그와 특별한 관계를 맺게 됩니다. 인생의 화수분 하나를 만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백인대장의 믿음을 보시고 그의 부하를 낫게 하셨습니다. 그들에게 삶을 바꾸는 감동을 주셨던 겁니다. 주님께서는 지금도 수많은 사람에게 화수분을 만들어 주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많은 병자들을 고쳐 주셨습니다. 당신에게 그러한 능력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에도 많은 이가 믿음만으로 병이 나았다고 이야기합니다. 그것을 사람들 앞에서 증언하기도 합니다. 물론 의심이 되는 사람들도 있지만 치유는 분명한 사실입니다. 누구든지 그러한 은혜를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예수님과, 지금 우리가 성체 안에서 만나는 예수님은 같은 분이십니다. 그러니 성경에 나오는 일들이 지금이라고 일어나지 말라는 법은 없습니다. 이천 년이라는 세월은 인간의 시간이지 하느님께 적용되는 시간은 아닙니다. 성경 말씀처럼 ‘그분께는 천 년이 하루 같고, 하루가 천 년 같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왜 병자들을 낫게 하셨는지요? 답변은 간단합니다. 하느님의 능력을 보여 주시려는 것입니다. 병자들을 낫게 하심으로써 질병도 주님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님을 보여 주고자 하셨습니다. 그러니 치유는 은총입니다. 그분의 능력을 믿는 이들에게 주어지는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병을 낫겠다는 마음보다 주님의 권능을 믿고 신뢰하는 마음이 앞서야 합니다. 그러면 치유는 이미 시작된 것입니다

 

 ☆☆☆

우리 지구촌에는 아직도 비참한 곳이 많습니다. 전쟁과 재난으로, 질병으로, 그 밖의 여러 가지 이유로 많은 사람이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대부분 인간의 욕심에서 빚어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일찍이 그러한 악의 세력들과 싸우셨습니다. 질병, 기아, 고독, 소외를 악의 세력으로 간주하셨습니다. “이 여자를 사탄이 무려 열여덟 해 동안이나 묶어 놓았는데, 안식일일지라도 그 속박에서 풀어 주어야 하지 않느냐?”(루카 13,16) 주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병자들에게 의사가 필요하듯이, 비참한 사람들에게 필요한 주님으로 자처하셨습니다. “건강한 이들이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루카 5,31-32). 또한 예수님께서는 배고픈 사람에게 배고픔을 면하게 하고, 소외된 사람을 찾아가고, 병든 사람을 고쳐 주시며 하느님 나라가 다가온다고 가르치십니다. “내가 하느님의 영으로 마귀들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와 있는 것이다”(마태 12,28).

  

네가 믿은 대로 될 것이다

 -반영억신부-

오래도록 위암으로 고통 받고 계신 형제님이 계셨습니다. 그러나 언제나 밝은 웃음을 가지고 미사참례를 하고 구역모임에도 빠지지 않으시려 애를 쓰셨는데 기력이 많이 약해지셨습니다. 늘 맑고 밝은 모습이 그리워 요즘 어떤 생각을 하시느냐? 고 여쭈었습니다. 그랬더니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자유를 누릴 때가 곧 오겠구나! 생각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러시면서 꿈 얘기를 해 주셨습니다. 좋은 꿈도 있고 그렇지 않은 꿈도 있는데 요즘은 아주 나를 옴싹 달싹 못하게 하는 꿈에 시달리셨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좋은 꿈이란 것을 가톨릭 성가29번 주 예수 따르기로 1절에 비유해 주셨습니다. 주 예수 따르기로 나 약속했으니 내 친구 되신 주여 늘 함께하소서. 주 함께 계시오면 나 든든 하옵고 주 나를 이끄시면 바른 길 가리다. 그리고 좋지 않은 꿈은 2절 이 세상 온갖 유혹 내 맘을 흔들고 내 모든 원수들이 늘 괴롭히오니 주 나를 돌아 보사 내 방패 되시고 내 옆에 계시옴을 깨닫게 하소서. 에 빗대시며 3절은 주님께 맡기고 또 주님의 고유권한이시라고. 저 영광 빛나는 곳 주 내게 보이니 그 아름다운 곳을 사모합니다. 주 예수 섬기기로 나 약속 했으니 끝까지 따라가게 용기를 주소서.

꿈은 꿈입니다. 아무리 좋아도 꿈이고, 아무리 나빠도 꿈입니다.

그러나 그 꿈을 주님의 눈으로 보고, 더 큰 주님의 은총 안에 머물 수 있는 기회로 삼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꿈에 휘둘릴 것이 아니라 신앙의 눈으로 보고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마음이 귀합니다. 

한 백인대장이 예수님께 자기 하인이 중풍으로 누워 몹시 괴로워하고 있다고 말씀 드리며 도움을 청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내가 가서 고쳐 주마하셨습니다. 이에 백인대장은 주님, 저는 주님을 제 지붕 아래로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 그러면 제 종이 나을 것입니다 하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네가 믿은 대로 될 것이다 하시며 백인대장의 종을 고쳐 주셨습니다. 참으로 믿음이 어떤 것인지를 이방인 군인이 보여주었습니다. 주님의 능력은 언제 어디서나 한결같으셨지만 당신을 의심하는 고향 사람들 앞에서는 “별로 기적을 베풀지 않으셨습니다.”(마태13,58)

세례를 먼저 받고 나중에 받고의 문제가 아닙니다. 오래된 신자, 새 신자를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오직 주님을 바라보고 얼마나 의탁하느냐가 관건입니다. 믿음은 세상을 충만케 하시는 하느님을 바라보는 것을 뜻합니다.(까롤로 까레또) 분명, 말씀이 살아서 힘을 내느냐 못 내느냐는 그 말씀을 듣는 이에게도 달려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에 대하여 마땅히 할 바는 머리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복종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확고한 믿음을 가진 사람은 자기가 구하는 바를 넘치게 받고 또 다른 것도 더 받을 것이지만 믿음이 부족한 사람은 감히 청하지도 못하고 그럼으로써 얻지도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은 믿음에 믿음을 더하여 믿는 대로 이루시길 바랍니다.

‘주님, 제가 당신을 생각하고 당신의 현존을 깨닫기도 전에 당신께서 먼저 저를 사랑하고 찾으셨다는 사실을 온전히 믿는 오늘이 되게 하여 주소서.’ 아멘. 사랑합니다. 

 

<네가 최고란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갓 난 아기 때부터 우리 뇌리 속에 자리 잡고 있는 ‘원초적 믿음’이 하나 있습니다.     엄마는 무조건 내편이다. 엄마는 부르면 언제나 달려와 주는 해결사다. 엄마는 절대로 날 내버려두고 떠나지 않는다. 엄마는 언제나 내게 좋은 것만 해주신다. 우리의 믿음이 성장해나가기 위해서는 이런 ‘원초적 믿음’이 하느님께도 적용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하느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성경 여러 곳에서 잘 설명되고 있습니다.  시편 23장을 천천히 읽다보면 세파에 흔들리며 불안하던 마음이 어느새 잔잔해지며 자상한 목자이신 주님의 포근한 품에 안기는 체험을 하게 됩니다.  “주님은 나의 목자, 나는 아쉬울 것 없어라. 푸른 풀밭에 나를 쉬게 하시고 잔잔한 물가로 나를 이끄시어 내 영혼에 생기를 돋우어 주시고 바른 길로 나를 끌어주시니 당신의 이름 때문이어라. 제가 비록 어둠의 골짜기를 간다 하여도 재앙을 두려워하지 않으리니 당신께서 저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사야서 43장은 또 어떻습니까? 큰 산처럼 든든한 보호자이자 큰 ‘빽’이신 하느님 때문에 우리 마음까지 든든해지고 편안해집니다.   “네가 물 한가운데를 지난다 해도 나 너와 함께 있고 강을 지난다 해도 너를 덮치지 않게 하리라. 네가 불 한가운데를 걷는다 해도 너는 타지 않고 불꽃이 너를 태우지 못하리라. 나는 주 너의 하느님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 너의 구원자이다.”(이사야 43장)

    이토록 부족한 나, 너무도 심하게 흔들리는 나, 참으로 볼품없는 나를 보며 자책도 많이 했는데,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는데, 이런 나를 향해 하느님께서는 깜짝 놀랄 말씀을 하십니다.  “너는 내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귀염둥이 나의 사랑이다.”

    하느님에게서 원초적 믿음을 체험한 사람들이 지니게 되는 특징이 한 가지 있습니다.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틀립니다. 이웃을 바라보는 눈도 틀립니다. 하느님을 바라보는 눈도 틀립니다. 불신과 의혹의 눈이 아니라 신뢰와 사랑의 눈입니다. 

    하느님을 향한 우리의 믿음을 키워나가는 일, 이보다 더 중요한 일은 다시 또 없습니다. 내 안에 하느님께서 확고히 자리하고 계심을 확신해야겠습니다.   그분께서 내 안에 든든히 자리 잡고 계심으로 인해 나란 존재 역시 이 세상 그 누구보다도 사랑스럽고 가치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굳게 믿어야겠습니다.

    더 이상 자신을 비하하고, 자신을 미워하고, 자신을 천대하지 말아야겠습니다. 왜냐하면 오늘 아침에도 하느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던지시며 우리에게 다가오시기 때문입니다.    “내게 있어 너처럼 소중한 존재는 이 세상에 아무도 없단다. 내게 있어 너와 같이 아름다운 존재는 이 세상에 아무도 없단다. 내게 있어 지금 이 순간 네가 최고란다.”

  

마음속 그물망

-정명숙 수녀-

오늘 복음에서는 제한도 구분도 차이도 없는 예수님의 사랑을 만납니다.
하인도 베드로의 장모도 악령 들린 사람도 모두 병을 고쳐주십니다. 당신께
찾아오는 누구라도 차별 없는 마음으로 맞습니다. 그 사랑은 국경도 부자도 가난한 사람도 높은 사람도 낮은 사람도 죄인도 의인도 흑인도 백인도 그 어떤 인종차별도 뛰어 넘습니다. 당신께는 모두가 사랑받는 하느님의 자녀들입니다.
그 누구도 배제함이 없이 부드러움과 연민으로 사람들을 대하시는 주님의
모습입니다. 병든 이들을 고치시는 기적의 힘은 어쩌면 사람들을 향한 당신의 한없는 연민에서 나온 부드러운 눈길, 손길, 말씀 한마디가 아니겠는지요.
이 마음이야말로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며 따르는 우리가 닮아야 하는
모습이 아닐는지요. 내 마음속을 들여다봅니다. 그 안에는 수많은 경계선이 그물처럼 그어져 있습니다. 좋은 사람, 싫은 사람, 나쁜 사람, 선한 사람 ….
내 편 네 편으로 가르며 선택적인 관심과 사랑을 하느라 머리도 마음도
어지럽습니다. 선택적 사랑이란 허울 좋은 이름입니다. 우리 역시 내가 만나는 이들을 살릴 수 있습니다. 어느 누구도 배제하지 않고 건네는 내 부드러운 말 한마디, 관심어린 시선과 온유하고 친절한 몸짓 하나. 이 작은 사랑의 시작이 폭력적인 말과 반응으로 서로를 죽이는 세상에서 생명을 살리고 키웁니다.
 

앞뒤가 뒤바뀐 기도

- 김현정-

 

나는 구교 집안에 대대로 이어진 천주교 문화에 길들여 자랐다. 하지만 남편은 대학 시절 운동(?)을 한 유물론자에다 종교에 대한 거부감이 심했다. 그런 그가 오로지 결혼 조건은세례뿐이라는 친정 아버지 앞에서 대꾸도 못하고 그러겠다고 약속을 했다. 미안한 마음에 예비신자 교리에 매번 함께 참석했다. 그의 교리서에는 수업 내내 의심과 의문과 냉소와 비판의 낙서가 빼곡하게 채워졌다. 옆에 앉은 나도 가시방석이었다.
수업 첫날 교리선생님의무조건 믿으세요. 믿으면 신앙이 생깁니다.”라는 말에 남편의 머릿속은 온통 의문투성이였다. ‘왜 예수님의 희생과 부활을 무조건 믿으라고만 할까? 예수님이 행했다는 기적이 진짜인가? 그저 한 말씀만 하셔도 제 하인이 낫겠다고 고백하는 유다 백성의 절대적인 믿음에 무엇이 생략되어 있는걸까? ‘이성적으로 따지고 들면 신앙이 아니라고, 무조건 믿으라.’고 가르치는 것은 너무 전근대적 이지 않나
? ’
남편은 결혼이라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세례를 받았다. 나도 남편을 설득할 만큼 예수님을 제대로 전하지 못해 미안했다. 다행히 함께 공부한예수전을 통해 예수님의 광팬이 되었지만 처음 느낀 실망은 회복이 안 되었는지 남편은 성경은 가끔 읽는데 성당에는 나가지 않고 있다. 그래서 내 기도는 요즘 자주 남편을 향하고 있다.

 

믿는다는 것

-박영봉 신부-

 

‘믿는다’는 것은 하느님의 말씀과 약속과 계명에 대하여 ‘아멘’이라고 말하는 것이며, 무한한 사랑과 완전한 성실성의 ‘아멘’이신 분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매일 매일의 그리스도인의 삶은 세례 때
‘저는 믿나이다’라고 한 신앙고백에 대한 ‘아멘’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신앙이란 당신 자신을 드러내보이고 내주시며 동시에 삶의 궁극적인 의미를 찾는 인간에게 풍요한 빛을 주시는 하느님에 대한 인간의 응답입니다.
믿는다는 것은 성령의 은총과 내적인 도움으로만 가능합니다. 그렇지만 믿는 것이 참으로 인간적 행위라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인간관계에서 우리는 상호 일치를 위해 타인이나 그 의향을 믿고, 그 약속을 믿습니다. 우리는 계시하시는 하느님께 대한 우리 지성과 의지의 완전한 순종을 신앙을 통하여 드러내고, 하느님과 친밀한 일치를 이루어야 합니다.


치유받은 자의 사명

-엄재중-

오늘의 세상은 병들어 있다. 이렇게 말하면 사람들은 세상에 대해서 너무나 비관적이라고 말할지 모르지만 난 그렇게 생각한다. 가끔 몇몇 사건이 우리가 얼마나 병든 세상에 살고 있는지 알려줄 뿐, 우리는 이미 많은 면에서 병들어 있음에도 자각 증세가 없다. 병을 자각하지 못하는 사람은 의사를 찾지 않는다. 그는 스스로 건강하다고 생각하고 계속해서 자신의 생활 습관을 유지한다. 이렇게 되면 병은 더욱더 속절없는 것이 된다.
마태오복음 8장은 예수께서 병자들을 어떻게 만나셨고 치유해 주셨는지 보여주고 있다. 여기서 예수님은 세 가지 방식으로 병자들을 만나신다. 먼저, 주님은 스스로 다가와 치유해 달라고 호소하는 나병환자의 병을 고쳐주신다. 이어서 병든 종을 대신해서 온 백인대장의 청을 들어주신다. 마지막으로 아무 요청도 없었지만 예수께서 직접 베드로의 집으로 가서 그의 병든 장모를 고쳐주신다. 처음에는 병자가 예수께 왔지만 나중에는 예수님이 병자를 직접 찾아가시는 것으로 나타난다.
주님은 우리가 당신께 직접 청하든 그렇지 않든 아픈 우리에게 오신다. 오셔서 우리 몸에 있는 온갖 독을 뽑아내시고, 우리를 새롭게 하신다. 환자인 우리가 할 일은 위대한 치유자이신 그분께 온전히 의탁하는 것뿐이다. 그분에 의해 병이 나은 우리는 베드로의 장모처럼 그분의 시중을 들게 된다. 더 많은 사람들이 참된 의사이신 그분에 의해 치유받도록 알리고, 백인대장처럼 앓는 이들의 아픔을 주님께 말씀드린다. 이것이야말로 그분한테서 무상으로 치유받은 자가 감당해야 할 마땅한 사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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