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6월 30일 연중 제13주간 목요일
“얘야, 용기를 내어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마태오 9,1-8)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시험해 보시려고 아들 이사악을 바치라고 하신다. 아브라함은 하느님의 명령에 온전히 복종한다. 하느님께서 하시는 시험은 당신 백성을 정화시키고 신앙을 단련시키는 데 목적이 있다. 아브라함은 혹독한 수련을 거치며 신앙의 선조로 거듭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들것에 실어 데리고 온 중풍 병자를 고쳐 주신다. 그분께서는 단순히 육체적 질병뿐 아니라 죄의식으로 짓눌려 있는 마음까지도 낫게 하신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영혼과 육신을 온전히 낫게 해 주시는 분이시다(복음).
오늘의 묵상
유다인들은 죄와 질병을 같은 차원에서 이해했습니다(요한 9,2 참조). 그들에게 질병은 죄의 결과이면서 또 죄의 처벌로 생각되었습니다. 그래서 질병에 걸리면 신체적 고통은 물론 죄인 취급을 당하는 정신적 고통까지도 함께 겪어야 했습니다. 중풍 병자는 그래서 몸만 움직이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까지 마비된 상태인 것입니다.
율법 학자나 바리사이처럼 이스라엘 전통과 율법에 충실한 사람일수록 병으로 고통 받는 사람들의 심정을 헤아려 주지 못했습니다. 병자들은 당연히 죄의 벌을 받는 것이기에 고통을 달게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안식일에는 율법을 지켜야 하므로 사람이 아무리 질병으로 고통스러워해도 어떤 치료도 해 주면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사랑보다는 법과 전통이 늘 먼저였습니다. 사람의 온기가 없는 법의 찬 기운만이 감돌 뿐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는 중풍 병자의 마음을 헤아리며 연민을 가진 사람들이 그 병자를 예수님께 데리고 옵니다. 어쩌면 그들은 가난을 함께 나누는 약한 처지의 이웃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법도 전통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오직 지금 고통 받고 있는 이웃이 더 중요합니다.
법과 제도를 앞세우며 사는 사람들은 그저 조직의 구성원일 뿐입니다. 이들은 신앙생활도 교회 규정만 잘 지키며 살면 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늘 냉정합니다. 그러나 공동체는 누군가 고통을 받으면 아픔을 함께 나누는 하나의 지체가 되어 사는 것을 말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볼 수 있듯이, 주님께서는 법과 제도로 일하시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의 믿음과 사랑으로 일하십니다.
이사악은 아브라함의 적자로, 정실부인 사라 사이에서 태어난 유일한 혈육이었습니다. 그것도 늘그막에 얻은 아들이었습니다. 아브라함 자신도 부인도 포기한 상태에서 하느님께서 주신 자식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그 아이를 제물로 하여 제사를 바치라고 하시다니……. 하느님의 걸 작품 -반영억신부- 성지 순례를 하면서 로마, 베니스, 피렌체, 피사, 나폴리, 바티칸의 여러 성당과 광장, 종탑, 문, 세례당 등은 신앙과 예술이 살아 숨 쉬는 박물관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유명 작가들의 손을 통해 이루어 졌기에 뛰어난 작품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하느님을 향한 신앙 안에서 이루어졌기에 걸 작품입니다. 걸 작품을 통하여 하느님을 바라볼 수 있는 은총이 더해지기를 기도하였습니다. 우리 성당 유물관도 신앙의 숨결이 살아날 수 있는 공간이 되기를 희망하며 보완작업을 하려고 합니다. 함께 기도해 주십시오. 성당은 그 안에 주님을 모시고 있느냐와 그 주님을 바라보고 찬미하는 이들에 의해 거룩함이 더 빛나게 됩니다. 아무리 웅장하고 멋진 예술작품으로 채워져 있다고 하더라도 기도하는 사람이 없다면 그 아름다움은 목적하는 바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많은 경우 옛 것을 보수하는데 급급해 하는 것을 보면서 우리의 믿음이 부족하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됩니다. 하느님의 혼을 살아나게 할 수 있는 믿음의 작품들이 오늘도 많이 만들어지길 희망합니다. 우리 성당에도 성 김대건 신부상을 복원하여 모실 계획인데 기도 안에서 걸 작품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중풍병자를 고쳐주셨습니다. 그런데 단순히 외적인 병을 고쳐 주신 것이 아니라 그의 죄까지 용서해 주셨습니다. 그야말로 영육의 치유를 이루어주신 것입니다. 많은 경우 사람들은 외적인 질병의 치유에 매달립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근원적인 치유의 손길을 펼치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러한 능력을 지니신 주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병의 치유는 그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하느님의 지극한 사랑과 구원을 보여주는 표징일 따름입니다. 눈으로 보이는 현상에 매달리는 것보다 언제든지 그러한 은총을 베풀어 주실 수 있는 주님을 만나는 것이 더 소중합니다. 그리고 그분께 대한 믿음을 간직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또한 환자 자신이 갖는 믿음도 중요하지만 중풍병자를 평상에 뉘어 주님께 데려온 이웃의 믿음도 그에 못지않습니다. 사실 중풍병이 문제가 아니라 영적인 무지와 껍데기 믿음이 더 큰 문제입니다. 미국 남북 전쟁시에 링컨의 참모가 “하느님께서 우리의 편이 되시게 하기위해 기도합시다.”라고 하였을 때 링컨은 “하느님이 우리 편에 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느님 편에 서기위하여 기도하도록 합시다.”라고 답변하였다고 합니다. 하느님 마음에 드는 사람이 된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지만 믿음의 사람은 생각하는 차원이 다릅니다. 하느님께서 나의 편이 되어주시고 나의 기도를 들어주시길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나의 편이 되어주셨고 죄를 용서해 주시며 마음의 자유를 주셨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주님께 대한 믿음을 다지고 새롭게 해야겠습니다. 우리가 하느님 앞에 신실하지 못하더라도 하느님은 언제나 나에게 잘해주고 계십니다. 왜냐하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이미 하느님의 걸 작품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그렇게 느끼지 못하는 것은 나의 우둔한 믿음 탓입니다. 따라서 주님께 대한 믿음에 눈뜨는 오늘이기를 기도합니다. 사랑합니다. 닫힌 마음 -홍금표 신부- 오늘 복음은 사죄권을 놓고 벌어지는 율법 학자들과의 대립입니다. 예수님의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라는 말씀에 율법 학자들은 “하느님을 모독하는군” 하며 반감을 표시합니다. 여기에 예수님은 ‘너는 죄를 용서 받았다’ 하는 것과 ‘일어나 걸어가라’하는 것 중 어느 편이 더 쉽겠는가? 하고 질문합니다.
이에 대한 사라의 이야기는 성경에 나오지 않으나 아브라함은 어떤 식으로든지 부인에게 귀띔했을 것입니다. 그녀의 성격으로 보아 펄쩍 뛰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겁니까? 이 아이가 어떤 아이인데 그렇게 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어쩌면 사라가 잠든 사이에 이사악을 데리고 나왔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아브라함은 밤새 잠 못 이루며 고뇌했을 것입니다. 하느님에 대한 야속함이 참으로 대단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아들을 바치기로 마음을 굳힙니다. 그분께서 주셨다가 그분께서 거두어 가신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 순간 제사는 이루어진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이사악을 제물로 바친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의 목숨보다 귀하게 여긴 아들을 바치려 했습니다. 내 자식이기에 앞서 주님께서 주신 아들이라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 믿음만으로 모든 아픔과 유혹을 물리쳤던 것입니다. 참으로 위대한 우리 신앙인의 조상 아브라함입니다.
두 가지 모두 사람의 힘으로는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일어나 네 평상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가거라”는 말씀으로 중풍병자를 치유함으로써 당신의 능력과 함께 사죄권을 보여줍니다. 그러면 여기서 문제가 되는 율법 학자들과의 대립의 원인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그들의 닫힌 마음입니다. 당시의 논리로는 메시아도 사죄를 선언할 수 없었기에 하느님을 모독한다는 율법 학자들의 항변도 이유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론과 논리는 실제적인 사실에 의해 재해석 될 때 의미를 가지는데, 율법 학자들은 과거의 논리를 가지고 현재의 실재를 해석하는 우를 범합니다. 예수님의 언행을 자신들의 논리로 판단합니다.
이 모습이 예수님을 통해 이루어지는 구원의 기쁜 소식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게 하는 원인이 됩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이유는 욕심입니다.
예수님께 쏠린 백성들의 관심과 예수님 때문에 잃어버릴지도 모를 자신들의 권위와 명예, 그리고 예수님의 등장으로 드러날 자신들의 허례허식이 예수님과 대립의 각을 세우도록 만드는 원인이 되었던 것입니다.

중풍 병자를 고치시다
- 강석진 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중풍 병자를 치유해 주시며 ,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라고 말씀하시자 율법학자들이 속으로 ‘이자가 하느님을 모독하는군’ 하고 생각합니다 . 이러한 생각을 아시는 예수님 , “너희는 어찌하여 마음속에 악한 생각을 품느냐?” 하고 말씀하십니다 . 여기서 말씀하고 계신 ‘ 너희 ’ 는 누구일까요? 그건 바로 예수님이 사시던 ‘고을의 율법학자들’임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율법학자’들이라! 아시다시피 예루살렘 성전의 멸망을 통해 삶의 구심점을 잃은 이스라엘 백성은 고장에서 소규모로 집회를 하던 ‘회당’의 기능을 강화했기에, 그곳에서 율법을 해석하던 율법학자들의 역할 역시 무척 중요했습니다. 그런 권한을 가진 율법학자들은 안식일이 되면 늘 아버지 하느님과 하나가 되고자, 회당에서 충실히 토라를 읽으면서 생활하셨던 예수님을 몰랐을 리 없을 테지요.
자신에게 어떤 권한이 주어지면 사람들이 그 권한 안에서 행복할 수 있도록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지만 자신에게 부여된 권한을 독재나 힘의 상징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부류 사람들은 권한을 얻기 전에는 겸손한 척, 열심한 척, 소신 있는 척하며 살다가 권한을 취득하면 바로 그 권한으로 사람을 잔인하게 희생시킵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인에게 주어지는 권한은 하느님의 사랑에서 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율법학자들처럼 겉으로는 하느님 이름으로 권한을 행세하는 듯하지만, 그 권한이 자기 것인 양 궁극적으로 자신의 힘과 권력을 휘두르는 권한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악한 것’이 됩니다.
문득 성직자든 수도자든 또 본당에서 어떤 역할을 맡은 사람이든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이 사람을 살리는 역할인지, 아니면 사람을 죽이는 역할인지 제대로 묵상하고 싶어집니다. 무더운 7월의 여름, 왠지 내 삶을 돌아보며 나는 나에게 주어진 그 어떤 권한이든 ‘악한 것’으로 사용하지 않았는지 묵상해 보니, 등골이 오싹해집니다. 하느님의 자비에 겸손의 덕을 청해 봅니다.
중풍은 뇌혈관이 막히거나 터지는 질환입니다. 그 결과 한쪽 팔다리가 마비되거나 발음이 힘들어집니다. 본인에게는 청천벽력입니다. 충격으로 한동안은 삶의 많은 부분이 흔들리게 됩니다. 새롭게 인생을 받아들이는 이들도 많지만 저항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들도 많습니다.
복음의 중풍 병자는 예수님을 찾아왔다가 기적을 체험하고 돌아갑니다. 자신을 태우고 왔던 평상을 본인이 들고 나간 것입니다. 그의 표정이 어떠했을지 우리는 상상할 수 있습니다. 놀람과 환희와 감사로 빛나는 얼굴이었을 것입니다. “얘야, 용기를 내어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주님께서는 그의 죄까지도 용서해 주셨습니다.
유다인들은 원인 모를 질병은 죄의 결과라고 생각했습니다. 누군가 지은 ‘죄의 벌’이 그 사람에게 나타난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지요.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네 죄를 용서한다.’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죄를 용서해 주었기에 죄의 결과인 중풍도 사라질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율법 학자들은 따지고 있습니다. 한 사람의 ‘운명이 바뀌는 사건’을 자신들의 지식만으로 판단하고 있습니다. 사랑의 눈길로 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몸이 건강하다고 마음도 ‘자동적으로’ 건강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몸의 건강과 마음의 건강은 전혀 다른 차원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마음은 절대로 건강해지지 않습니다.
"Courage, child, your sins are forgiven."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