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마태오 16,13-19)

2011. 6. 29. 오전 6:35:58

글자

2011 6 29일 수요일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선생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
(마태오 16,13-19)

  

말씀의 초대

요한의 형 야고보는 헤로데에게 순교를 당하고 베드로는 다시 감옥에 갇히게 된다. 그런데 주님의 천사가 나타나 감옥에 갇힌 베드로를 구해 낸다. 하느님의 일을 하는 사람은 때가 될 때까지 주님께서 보호해 주신다(제1독서). 바오로 사도는 순교의 때가 다가오고 있음을 직감하며 자신은 달릴 길을 다 달렸으며 믿음을 지켰다고 술회한다. 이러한 고백에서 바오로 사도가 얼마나 주님만을 위해 자신을 온전히 바치며 살았는지를 알 수 있다(제2독서). 예수님께서 시몬 바르요나에게 베드로라는 이름을 주시고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우신다. 그 반석은 영웅적인 인간의 능력이 아니라, 나약한 한 인간을 떠받치고 계시는 성령이시다. 성령께서 약한 사람들을 통하여 우리 교회를 떠받치고 계시는 것이다(복음).

 

☆☆☆

오늘의 묵상

“나는 성경을 읽으면 읽을수록 얼마나 정직하게 쓰여 있는 책인가 하고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결코 번드르르하게 좋은 것만 쓰고 있지 않다. 오히려 약점, 치사한 점, 인간적으로 불리한 점까지도 낱낱이 쓰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나는 이것만 봐도 성경이 진실한 책이라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에게 소설 『빙점』의 저자로 잘 알려진 미우라 아야코가 쓴 『빛 속에서』라는 책에서 인용한 글입니다. 미우라 아야코는 그리스도교를 싫어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투병 생활을 하면서 세례를 받습니다. 그는 약하고 허무한 우리 인간이 하느님의 존재를 알고 성경 말씀으로 힘을 얻어야 새롭게 살 수 있다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이 성경 말씀이 얼마나 진실한지 제자들의 모든 약점을 성경 속에 적나라하게 드러낸 것으로도 알 수 있다고 증언합니다.
사실 사도들은 한 사람도 남김없이 예수님을 배신하고 달아난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 가운데는 얼마나 겁쟁이였으면 그야말로 알몸으로 달아난 사람도 있었습니다(마르 14,52 참조). 특별히 교회의 두 기둥이라고 할 수 있는 베드로 사도와 바오로 사도는 어떻습니까? 베드로 사도는 자신의 무지와 무식, 배신을 적나라하게 드러냅니다. 바오로 사도 또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박해하는 데 선봉에 섰던 부끄러운 과거를 고백합니다.
어쩌면 『성경』이 집필될 무렵 초대 교회의 사도들과 목격 증인들은 교회 안에서 갖는 위치와 권위로 볼 때 자신들의 부끄러운 과거는 적당히 숨길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들의 약점은 하느님의 일을 하는 데는 오히려 자랑으로 여겨졌습니다(2코린 11,30 참조).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은 교회의 초석을 놓은 인간의 위대함을 기억하는 날이 아닙니다. 인간의 약함을 통해 일하시는 하느님의 위대하심을 찬양하는 날입니다. 보잘것없는 나를 통해서도 하느님께서는 일하고 계시다는 것을 깨닫는 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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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을 어떤 이들은 세례자 요한이라 하고, 어떤 이들은 엘리야라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예레미야나 예언자들 가운데 한 분이라 하기도 합니다. 그러면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살아가는 우리는 주님을 누구라고 말합니까? 어떤 이들은 공자나 석가모니라 하고, 어떤 이들은 단군 할아버지나 계백 장군 또는 강감찬 장군이라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제갈공명이나 관우 장군 또는 정 도령이나 미륵불이 환생했다고 말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 이러한 베드로의 고백에 주님께서는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바오로도주님께서는 내 곁에 계시면서 나를 굳세게 해 주셨습니다. 나를 통하여 복음 선포가 완수되고, 모든 민족들이 그것을 듣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라고 자신이 한 모든 일을 주님께 돌려 드립니다
.
그렇다면 우리는 주님을 누구라고 생각합니까? 베드로처럼 주님을 하느님의 아드님으로 고백하고, 바오로처럼 자신이 한 모든 일을 주님께 돌려 드린다면, 주님께서는 우리 하나하나의 어깨 위에 당신의 교회를 세우실 것입니다. 주님을 고백하고 증언하는 것은 우리의 사명이며, 동시에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은총입니다.

☆☆☆

기원후 64 7 18일 여름밤이었습니다. 로마 경기장 인근 가게에서 작은 불길이 솟았습니다. 그러더니 걷잡을 수 없는 화마가 되어 9일 동안 로마의 절반을 태웠습니다. 27세의 젊은 황제네로는 뒤늦게 화재 진압과 이재민 구제를 진두지휘했지만황제가 방화를 사주했다.’는 소문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다급해진 네로는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불을 질렀다며 체포령을 내립니다. 이렇게 해서 초대 교회는 박해에 휩싸입니다. 많은 교우들이 붙잡혔고 재산을 잃었습니다. 원형 경기장으로 끌려가 십자가에 달린 채 불에 타 죽었습니다. 굶주린 사자 앞에서 맨몸으로 저항하다 사라졌습니다. 베드로 사도와 바오로 사도 역시 이때 순교합니다. 초대 교회는 바람 앞의 등불이었습니다. 하지만 순교자들의 피는 교회를 지켰고거름이 되어거대한 나무로 자라게 했습니다
.
박해자 네로는 이듬해인 65년 자신을 독살하려는 음모에 정치적 불안을 느낍니다. 66년에는 재혼한 아내마저 처형하며 주변 사람들을 극도로 경계합니다. 의심과 두려움에 시달린 그는 68년에 자살하고 맙니다. 31세의 한창나이였습니다
.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 베드로 사도는 자신의 응답을 증언하고자 순교했습니다. 초대 교회 교우들 역시 살아 계시는 예수님을 깨달았기에 박해 앞에서도 의연했습니다.

아픈 과거 때문에 더 큰 사람

  -반영억신부-

축일을 맞이한 모든 분들께 주님의 은총을 기원합니다. 성인의 삶을 본받고 복음전파의 열정에 목말라하시길 기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하고 물으셨습니다. 그때 베드로가 스승님은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대답하였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당신의 정체를 아느냐고 묻는 질문이 아니라 너에게 나는 어떤 존재이냐를 묻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에 대한 베드로의 대답은 신앙의 고백입니다. 그리고 이 고백은 오늘 우리가 해야 할 고백이기도 합니다. 오늘 나에게 있어서 예수님은 어떤 존재인가?

 

오늘 기억하는 베드로와 바오로는 주님을 등졌던 기억이 있습니다. 베드로는 모두 떨어져 나갈 지라도 저는 그러지 않을 것입니다(마르14,29)하고 말한 그 밤에 예수님을 세 번이나 배반했습니다. 바오로는 예수님을 알기 전에는 그리스도교 신자들을 박해했고 첫 순교자 스테파노가 돌에 맞아 죽는 현장에 함께했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주님을 새롭게 발견하고 주님을 증거하며 마지막 삶을 봉헌했습니다.

 

그들은 인간은 연약하지만 주님의 은총이 함께할 때 모든 것을 이겨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사실 아픈 과거 때문에 더 큰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연약함 때문에 실망하거나 좌절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오히려 연약함 때문에 주님의 손길이 필요하고 그 안에서 주님을 체험케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한 영원한 생명을 향한 길에서 흔들림 없기를 기도합니다. 도대체 나에게 주님은 어떤 존재인가? 묻고, “당신은 저의 모두입니다.”하고 고백하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저는 사제수품을 받으면서 “그리스도 예수께서 지니셨던 마음을 여러분의 마음으로 간직하십시오.”(필리2,5) 라는 성경구절을 선택하였습니다. 혼자 힘으로 신부가 된 것도 아니요, 예수님께서 원하신 것 또한 홀로 서 있기를 바람이 아니니 더불어 함께 살아가는 삶이 되도록 노력하고자 하는 마음을 담았습니다. 우리를 위하여 죽음에 이르기까지 아버지 하느님의 뜻에 순명하신 주님의 마음을 간직하고 주님께서 기뻐하시고, 마음에 들어 하시는 것을 용기 있게 선택하는 삶을 살고자 하는 희망을 간직하였습니다. 그러나 허물로 누벼놓은 날들이 많았고 세상에 걸려 넘어지기를 반복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주님께서는 여전히 저를 도구로 삼고 계시다는 것에 감사합니다. “주님 부족합니다. 그러나 당신을 닮고 싶습니다. 당신을 살고 싶습니다. 도와주십시오.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사랑합니다.

 

                       이 강론은 양성중인 수도자들에게 한 강론 입니다. (문호영신부)

  

천국의 열쇠

- 남궁영미 수녀-

 ◆‘열쇠라는 말 속에는 뭔가 문제의 해결책, 정답이 들어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열쇠만 있다면 삶의 모든 문제를 어렵지 않게 해결해 갈 수 있으리라는 막연한 기대도 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베드로는 단순하고 우직하고 벌컥 화도 잘 내고, 덤벙대며 말보다 행동이 앞서는 사람으로 느껴집니다. 그런 베드로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맡기시는 예수님의 마음과 눈빛을 상상해 보니 묘한 감동이 느껴집니다. 오래전에 읽은 J. 크로닌의 「천국의 열쇠」
가 떠오르는 이유와 같은 감동입니다. 주인공 치셤 신부의 삶을 통해 뚜렷이 기억하는 감동은 진정한 구원에 이르는 길이 무엇인지에 대한 깊은 통찰이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잘 안다고 착각합니다. 그러나 그 앎이란 우리 머릿속 이해이거나 왜곡된 앎일 때가 많습니다
.
구원에 대한 앎도 그렇습니다. 마치 구원이 우리의 행동에 달린 것처럼 때론 죄책감으로, 때론 비장함과 엄격함으로 자신을 몰아세울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것은 정의가 아니라 사랑입니다. 정의를 우리의 행위라 한다면 사랑은 우리의 지향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물론 정의도 사랑의 한 부분이지만 종종 우리는 이분법적인 생각을 하는 듯합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안다는 것은 하느님은 사랑이시라는 깊은 고백입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행위가 아니라 지향을 보시며, 우리 구원은 하느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에 기인한다는 믿음의 고백입니다. 우리도 치셤 신부처럼나는 내 인생의 평판을 하느님께 맡기겠소.”
라고 말할 수 있어야겠습니다.

일상생활 안에서 우리는 명민하지도 너그럽지도 못한 때가 많습니다. 말이 행동에 앞서고 다른 사람의 아픔에 무관심하며 편협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베드로가 인간적 약점 가운데서도 천국의 열쇠를 받았듯 흔들리는 신앙의 여정 가운데서 우리도 천국의 열쇠를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천국의 열쇠는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앞에 선 인간

-김민수 신부-

 

나와 잠자리의 갈등이라는 안도현 시인의 시가 기억납니다.
다른 곳은 다 놔두고/ 굳이 수숫대 끝에/ 그 아슬아슬한 곳에 내려앉는
이유가 뭐냐?/ 내가 그렇게 따지듯이 물으면/ 잠자리가 나에게 되묻는다
너는 지금 어디에 서 있느냐
!”
매우 짧은 시지만 깊은 화두 하나를 던져 줍니다. 잠자리에게 던진 물음이
다시 자신에게 돌아옵니다. 타자에게 던진 질문인데 곧 나를 돌아보게 하는 질문으로 되돌아오는 것입니다.
너는 지금 어디에 서 있느냐?”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질문을 던지십니다.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기 위해 우리는 먼저나는 누구인가?”를 생각하고 성찰할 수밖에 없습니다.
나 자신에 대한 성찰과 반성은 창세기 이래 인간에게 향한
하느님의 원초적 질문입니다. “너 어디 있느냐?”(창세 3,9)
인간은 자신이 흙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피조물임을 아는 순간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하느님 앞에 선 인간으로 이해하게 됩니다.

 

 “나는 훌륭히 싸웠고 달릴 길을 다 달렸으며 믿음을 지켰습니다.

-양승국신부-

 <기막힌 반전>

많은 신앙인들이 꿈꿉니다. 지지부진한 현재의 신앙생활로부터의 탈출, 신앙여정의 대반전, 제대로 된 회심, 180도 유턴...

그러나 웬만해서는 바뀌지 않는 것이 사람입니다. 혹시 모르겠습니다. 어쩌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 놓인 커다란 강을 한번 건너갔다 돌아오면 크게 바뀐다고 하는데...

오늘 우리가 경축하는 베드로와 바오로 두 사도의 인생여정을 묵상하다보면 하느님의 놀라운 사랑을 찬미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신앙 여정 안에서는 기막힌 반전이 있었습니다. 목숨을 건 회개, 믿기 어려울 정도로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두 사도 인생 안에 펼쳐진 정말 드라마틱했던 대역전 드라마는 우연히, 거저 일어난 것이 절대 아니었습니다.

다시 한 번 새롭게 출발해보기 위한, 다시 태어나기 위한 뼈를 깎는 자기성찰의 시간이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극심한 고통을 수반한 끔찍한 바닥체험의 순간이 있었습니다. 그 위에 하느님의 은총이 함께 했던 것입니다.

그 결과가 그리스도의 갑옷으로 재무장한 새 인간 바오로였습니다. 예수님만이 인생의 전부였던 새 인간 베드로였습니다.

삶의 가장 밑바닥에 앉아있던 그들을 가장 높은 정상까지 오르게 하신 하느님이십니다. 너무나도 나약해서 쉴 새 없이 흔들리던 그들이었지만, 이 세상 그 어떤 사람보다도 강건하게 재창조하신 은총의 하느님이십니다.

하루 온종일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발버둥 치던 사람, 자신의 인생에 특별히 기대할 것이 없음을 알고 거의 자포자기해서 살아가던 사람, 출세의 눈이 멀어 뭐든 다 하던 사람을 당신 제자로 선택하신 파격의 하느님이십니다.

자비의 손을 펼치시어 그들을 일으켜 세우신 하느님, 보잘 것 없게 생각했던 자신이 인생이 얼마나 큰 축복이며 은총임을 알게 하신 하느님, 보다 높은 곳을 향해, 광활한 목장을 가리키시며 인생의 지평을 넓혀주신 크신 하느님이십니다.

과거의 옷을 거두어가시고, 옛 인간을 사라지게 하시고, 새 인간이 되게 하신 하느님, 새 인생을 시작하게 하신 사랑의 하느님이십니다.

새 삶을 주신 하느님께 감사하며 훌륭히 싸운 두 사도, 최선을 다해 달릴 길을 다 달린 두 사도, 목숨을 걸고 그리스도를 전파한 두 사도는 지금 밤하늘의 큰 별이 되셔서 우리 앞길을 환히 밝히고 있습니다.

그 옛날 베드로와 바오로 사도를 일으켜 세우셨던 하느님께서 오늘 똑같은 방식으로 우리를 일으켜 세우시기 위해 다가오십니다.

진리로 허리에 띠를 두르라고 권고하십니다. 의로움의 갑옷을 입으라고 당부하십니다. 믿음의 방패, 구원의 투구, 성령의 칼을 우리에게 건네주십니다

 

 

정체성

-정명숙 수녀-

 

길을 가시던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물으십니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겠다고 나선 제자들이 확고한 정체성을 갖도록 초대하십니다.

베드로 사도는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마태 16,16)라는 엄청난 고백을 합니다. 성령의 힘을 받아 이 고백을 한 이후 베드로 사도는 그분을 따르는 제자로서의 정체성을 찾는 여정이 시작됩니다

정체성은 그리스도를 주님이라 믿고 따르는 우리의 인격 전체를 통해 이루어야 할 존재적 소명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누구이신지를 아는 것이야말로 곧 내 정체성을 아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자기 정체성을 하느님 안에서 찾습니다. “하느님 당신은
누구시고 저는 누구입니까?”

주님께 오상의 은총을 받은 프란치스코 성인께서 끊임없이 던지신 질문입니다.

내 존재의 근원이신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제대로 알 때 사람은 자기 정체성에 따라 자기다운 삶을 살아갑니다.
그리스도인이면 그리스도인답게, 하느님의 자녀라면 하느님의 자녀답게
생각하고 행동합니다.

문제는 세례를 받고 하느님의 자녀로 새롭게 태어났지만 아직 우리가 누구인지를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아무리 오랜 신앙생활을 했다 해도 아직 그리스도인으로 시작도 하지 못한 것입니다.

주님을 진실로 원하지도 찾지도 체험하지도 못하고 살아온 것이지오.

 

  

가장 하고 싶은 말

- 김현정-

 

고기 잡다 말고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어 주겠다. ”는 예수님 말씀에 모든것을 뒤로하고 예수님을 따라나서는 제자들의 모습을 보면 경이롭기까지 하다. 지금 나는 내가 소유한 모든 관계와 이익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나설 수 있을까?

그만큼 유다 백성에게그리스도는 간절히 기다리던 구원자였을 것이다.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지배자 로마와 그들의 앞잡이로부터 핍박받는 현실에서 해방될 거라는 희망으로 참혹한 삶을 버텨가고 있었으니까. 유다 백성이 간절히 바라던해방은 어떤 것이었을까? 밥을 배불리 먹는 것? 부자가 되는 것? 성경에서는 구원을한평생 당신 앞에서 거룩하고 의롭게 당신을 섬기도록 해주시려는 것입니다.”(루카 1, 75)라는 말로 표현했다. · 권력· 계급이라는 이름으로 사람이 사람을 억압하지 않고 주님 앞에서 거룩하고 올바르게 사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얼마 전 인터넷에서 읽은 칼럼이다. 하루아침에 전원 해고된 국립오페라단 단원들의 복직운동에 동참한 어떤 운동가가 음악 분야에서 최고 권위자인 지휘자 모씨를 찾아가 동참을 호소했다고 한다. “한국은 합창단 해체해도 다음날이면 노래 잘하는 사람 500명 금방 모입니다. … 당신들이 나서서 지금 뭐하는 거예요? … 그거(서명운동) 백날 해봐야 아무 소용 없어요. … 그렇게 불쌍한 사람들 돕고 싶으면 저기 아프리카나 가서 도와줘요. 아프리카에나 가라고. 기도하라고, 기도!!” 단편적인 몇 마디만 옮긴 것이지만 평소 그에게 갖고 있던 이미지와 달리 너무나 실망스러운 반응이었다.
잘난 사람만 잘 살 권리가 있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은 가난하고 아픈 이들, 소외받는 이들의 편이셨다. 물론 아프리카에서 굶는 사람들을 도와야겠지만 그들보다 사는 처지가 낫다고 불평등과 부당한 대우를 참고 살아야 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주님
이 우리에게 약속하신구원이 무엇인지, 우리가 꿈꾸어야 할해방된 세상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 곰곰이 생각해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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