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14주일/온유하고 겸손한 마음(마태오. 11,25-30)

2011. 7. 3. 오전 6:26:14

글자
 
 

2011 7 3일 연중 제14주일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마태오. 11,25-30)

 

 

Come to me,

all you who labor and are burdened,

and I will give you rest.
Take my yoke upon you and learn from me,
for I am meek and humble of heart;

 

 

 

말씀의 초대

주님께서는 의로우시고 승리하시는 분이시지만 겸손하시고 사랑이 넘치시는 분이시다. 그분께서는 더 이상 전쟁이 없는 평화의 세상을 선포하시고 온 민족들을 다스리러 오신다. 그분의 통치는 영원하다(제1독서). 우리가 육의 본성을 따라 살면 죽지만, 주님의 성령에 힘입어 육의 행실을 죽이면 구원을 얻는다. 그리스도의 영께서 우리를 도우시고 구원하시기 때문이다(제2독서). 주님께서는 어린이처럼 순수하고 단순한 마음으로 당신을 드러내시고 일하신다. 우리 삶의 멍에가 불편하고 무거운 것은 마음이 복잡하고 세상 근심에 짓눌려 있기 때문이다. 겸손하고 온유한 마음으로 주님께 내맡기면 우리의 등짐은 가볍고 멍에는 편해진다(복음).

 

☆☆☆

오늘의 묵상

김수환 추기경님이 선종하시기 몇 해 전, ‘동성 중고교 개교 100주년 전’에 직접 그리신 자화상을 ‘바보야’라는 제목으로 출품하셨습니다. 동성 중고교는 추기경님의 모교입니다. 추기경님의 자화상은 어린이가 그린 듯한 그림이지만, ‘바보야’라는 글과 함께 추기경님의 모습만큼이나 천진난만해 보입니다. 추기경님은 적어도 한 시대 한 사회를 이끌었던 가장 아름다운 정신적 지도자이셨으면서도, 당신 한평생을 ‘바보’라고 결론 지으셨습니다.
‘바보’는 ‘밥보’에서 나왔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 의견에 따르면, ‘밥’에 “그것을 특성으로 지닌 사람”의 뜻을 더하는 접미사 ‘보’가 붙어 ‘밥보’였던 것이 동음 ‘ㅂ’이 탈락하여 바보가 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곧 밥이나 축내면서 어리석고 미련스럽게 사는 사람을 가리킬 때 바보라고 하였다는 것입니다. 추기경님이 자신의 얼굴을 그려 놓으시고, 주님께 더 가까이 가지 못하고 더 잘살지 못했음을 스스로 꾸짖으시며 겸허한 마음으로 자신을 ‘바보’라고 표현했던 것입니다.
오늘날 영악하고 약삭빠른 사람이 잘나가는 시대가 되다 보니, ‘바보’라는 말이 오히려 그립습니다. 추기경님은 당신을 ‘밥보’처럼 겸손하게 표현하셨지만, 듣는 우리에게 바보는 시대에 영합하지 않고 가난한 이들을 사랑하셨던 한 어른의 순수하고 천진한 모습이 되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순수하고 천진한 철부지 같은 사람에게 드러나신다고 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추기경님의 겸손하고 천진하신 마음을 통하여 당신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못생긴 나무가 산을 지킨다.’는 말이 있듯, 하느님께서는 세상 곳곳에서 묵묵히 살아가는 ‘못나고 바보스러운 사람들’을 통하여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고 계십니다.

☆☆☆

 

 

멍에는 소나 말의 목덜미에 얹는 구부러진 막대기입니다. 그곳에 줄을 달아 수레나 쟁기를 끌게 합니다. 소의 입장에서는 귀찮은 것이지요. 그러나 멍에가 있어야 소를 제대로 부릴 수 있습니다. 사람에게도 그 멍에가 있습니다. 살면서 만나는 ‘귀찮은 그 무엇’입니다. 그것을 완전히 버릴 수 없는 게 인생살이입니다. 일생 지고 가야 하는 짐들이지요. 하지만 그것 때문에 주님께서 이끌어 주심을 깨닫게 됩니다.
가벼운 멍에가 있을는지요? 멍에는 본질적으로 귀찮은 것입니다. 그럼에도 주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고 하십니다. 그렇게 되기까지에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고통이 은총임을 아는 데에는 숱한 좌절과 일어섬이 요구됩니다. 끝없는 시행착오 끝에 깨닫게 되는 것이지요.
신앙 안에 머물면 결국은 고통을 은총으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아픈 만큼 성숙해지기 때문입니다. 그런 뒤에야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는 주님의 말씀이 가슴에 깊이 와 닿습니다. 그때가 언제쯤 될는지요? 기다려야 합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주님의 이 말씀은 어리광 부리고 투정 부리라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삶의 아픔을 ‘자신의 몫으로 받아들이라.’는 말씀으로 해석해 봅니다.
우리는 가끔 잘못 생각합니다. 이 사고 때문에, 이 일 때문에 힘들고 불행한 미래를 살게 되지 않을까 하고 말입니다. 하지만 아닙니다. 미래는 주님께서 이끌어 주십니다.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

-최인각신부-

 

고생하는 이들아, 나에게 오너라

오늘 복음에서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라고 하신 말씀을 묵상하며,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것이안식’(安息)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그 안식은 우리가 지고 가야할멍에를 없앰으로써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시는 방법을 통해서 얻는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그 방법은 바로당신께 다가가, 당신의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을 배우는 것입니다.

특별히 오늘 복음말씀을 묵상하면서, 지난주에 있었던전국 신학교 교수 신부 협의회에서 교회 안팎에서 일어나는 여러 종류의중독에 대해 논의하며, 중독에 빠져 있는 이들을 도와주는 방법을 찾으려고 고민했던 것이 기억났습니다. 이 시대에 많은 이들이 중독에 걸려있고, 아니 그 사실조차 모르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중독에 걸린 사람에게 먼저 해야 할 일은 스스로 빠져나오도록 도와주는 것이고, 그것이 불가능할 때에는 약물, 격리 등의 방법으로 치료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것들을 나누며 알코올, 마약, 도박, 인터넷, 게임 등의 중독에 빠진 사람들이야말로, 이 시대에 또 다른 모습의 무거운 짐을 고생스럽게 짊어지고 가는 사람들임을 느꼈습니다. 그들이 그 힘든멍에의 무게로 자유롭지 못한 모습을 생각하니 가슴이 아팠습니다
.

이러한멍에의 고통을 느끼면서 중독에 빠진 이들에게 예수님께서그동안 고생 많았다. 이제 그 고생에서 벗어나 네 인생을 다시금 멋지게 살아가도록 내가 도와주겠다. 너희는 스스로 중독에서 벗어나지 못하지만, 나는 너희를 도울 수 있다. 걱정하지 마라. 나는 너희를 구원하는 하느님이다. 어서 오너라. 그리고 아직 나에게 오지 못하고 중독의 고통에 빠져 있는 이들이 있다면, 함께 나에게 데리고 오너라. 내가 그들을 고쳐주겠다. 너희들이 정말 낫고자 하면, 나의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을 배워라. 그러면 나을 것이다라고 하시는 음성이 들리는 듯했습니다. 그러면서 중독에 빠지더라도 예수님께서 주시는 멍에를 메고 배우면, 중독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

오늘 말씀을 묵상하며 중독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하는 그 힘이 무엇인지 알았습니다. 바로예수님의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이고, 이를 간직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치유의 여정임을 깨달았습니다. 즉 예수님의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을 간직하는 것이 중독을 치유할 수 있는 약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는 중독자에는 참으로 귀한 처방입니다
.

그럼, 예수님의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이란 어떤 것일까요? 하느님 아버지께 온전히 순명하는 마음, 자신의 뜻보다는 아버지의 뜻을 헤아리는 마음,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놓고 십자가 상 죽음을 맞이하는 마음,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음에도 인간에게 순명하는 마음, 배고프고 지친 이들과 병든 이들, 죽어가는 이들을 살려내시고도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마음, 죽을죄를 지은 이들을 용서하시며 새사람으로 만들어주는 마음, 제자들에게 마지막 순간에 당신의 살과 피를 내어주는 예수님의 온화하고 부드러운 마음, 하느님과 다른 사람을 향한 순명과 사랑의 마음, 자기보다 더 큰 가치를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그 마음을 자신의멍에로 여기고 받아들인다면, 중독에서 해방될 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

중독으로 고생하고 있는 이가 예수님의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을 간직하려고 목숨 걸고 노력한다면, 그는 반드시 승리할 것이라 확신합니다. 중독의 증세가 보일 때, 예수님께서 가지셨던 마음을 가지려고 5분만 온전히 노력하면, 이미 치유는 시작된 것이고, 이를 반복하면 중독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치유의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40년 동안 담배를 끊지 못하던 사람이 성경을 읽기 시작하면서 끊는 모습, 불륜을 끊지 못하던 사람이 성체조배를 매일 하며 정리하는 모습을 저는 실제로 보았습니다
.

우리는 살아가면서 알게 모르게 여러 가지 중독에 빠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중독에서 빠져나올 방법 또한 알고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의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을 배우는 것입니다. 그 방법을 따르지 않는 이들은 매우 고생스럽고 무거운 짐을 지고 가며 힘든 인생을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주위에서 이러한 짐과 멍에로 힘들고 버겁게 살아가는 이들이 예수님의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을 배우며, 편하고 행복한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함께 도와주며 기도합시다.

 

 

 

겸손하고 후덕한 임금을 우리는 갈망한다
-김찬선신부-

촛불 행진을 하는 시국을 보며 생각해봅니다.

위정자가 

국민과 맞서서는 안 된다. 국민을 가르치려 해서는 안 된다. 국민을 다스리려 해서는 안 된다.
국민을 억압하려 해서는 더더욱 안 된다. 국민이 서로 경쟁하고 다투게 해서는 안 된다.

그래서
국민을 화나게 해서는 안 된다. 국민을 격하게 해서는 안 된다. 국민을 거리로 나오게 해서는 안 된다.

德이 아니라 術로 정치를 할 때
정치는 천박해지고 그래서는 안 되는 것들이 마구 행해지게 된다.
德은 겸손에서 나오고,  厚德함은 사랑에서 나온다.
겸손이 부족할 때 입을 경박하게 놀리고  사랑이 부족할 때 힘을 함부로 사용한다.
그에 비해
겸손하고 국민을 사랑하는 후덕한 정치가는  몽매한 국민이니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국민의 소리를 듣고,  국민과 절대로 힘으로 맞서는 법이 없이 국민의 고단한 삶을 이해하고 위무한다.

대충 이런 생각들을 하면서 오늘 독서와 복음을 묵상하였습니다.
오늘 즈카르야 예언서가 얘기하는 임금님은 이런 면에서 정답입니다.
요즘 대통령이  국민들에게 다가가지 못하는 것은 물론, 쳐들어가는 국민들을 컨테이너로 장벽을 쌓아 막는 것과는 달리 즈카르야서의 임금은 백성들에게 다가가고 백성들은 임금이 오시자 기뻐하고 환호합니다.
의로우시고 승리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승리하시는 그 임금이 백성에게 올 때는 권위주의적으로 오시는 것이 아니라 겸손하게 나귀, 어린 나귀를 타고 오시고, 오셔서는  에프라임에서 병거를, 예루살렘에서 군마를 없애시고  전쟁에서 쓰는 활을 꺾으시어 민족들에게 평화를 선포하십니다.
그리하여 그분의 통치는 바다에서 바다까지, 강에서 땅 끝까지 이릅니다.
이런 임금과 백성의 관계는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당신에게 와서 배우라 하십니다.
우리 모두 그러해야겠지만  특히 요즘 위정자들이 주님께 가서 배웠으면 좋겠습니다.
그리하여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한 사람이 되어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여러분 모두 제게 오십시오.
제가 여러분에게 안식을 드리겠습니다.”하고  백성들을 초대하고  위무하고 그들이 모두 편한 멍에로 가볍게 짐을 짐으로써 안식을 얻을 수 있게 하였으면 좋겠습니다.
너무 야무진 꿈이겠지요?!

 

 

‘철부지들’

-서공석신부-

 오늘 우리가 들은 복음은 예수님이 하신 기도입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시고 부활하셔서 하느님 안에 살아 계시다는 깨달음이 생기면서 흩어졌던 제자들은 예루살렘으로 모여 들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에 대해 함께 회상하면서 그분이 그들에게 남긴 말씀들을 실천합니다. 그들은 그 실천 안에 부활하신 예수님이 그들과 함께 살아 계시다고 믿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제자들이 중심이 된 공동체의 수는 늘어나고, 예수님에 대한 회상도 다양해졌습니다. 그리고 그 회상한 바가 글로 정착되어 교회 안에 전달된 것이 복음서들입니다. 제자들이 회상하여 복음서들 안에 남긴 기록은 예수님에 대한 정확한 사실 보도만이 아닙니다. 그들 안에 살아 계신 예수님은 그들을 통해 새롭게 말씀하신다고 그들은 믿었습니다. 따라서 복음서들 안에는 그들이 회상하여 기억해 낸 예수님의 말씀이 있고, 또한 신앙인들이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깨닫고 믿게 된 바를 표현한 내용들도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복음에서 예수님의 기도 내용을 들었습니다. 예수님이 하신 기도로 소개되었지만, 사실은 초기 교회가 예수님에 대해 회상하면서 그들이 바치는 기도이기도 합니다.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예수님 안에 하느님의 일을 보는 그리스도 신앙은 인간 지혜와 슬기의 산물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초기 교회 신앙인들은 예수님에 대해 회상하면서 그분 안에 하느님의 생명이 일하셨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예수님이 병을 고치고 죄를 용서하신 것은 모두 하느님이 하시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유대교 당국은 예수님 안에 그 하느님의 일을 알아보지 못하고 그분을 거짓 예언자로 죽였습니다.

하느님이 함께 계신다는 깨달음이 모세와 더불어 시작하였고, 그 체험을 중심으로 시작한 유대교였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유대교의 실세들은 율법 준수와 제물 봉헌을 절대적이라 믿고, 기원의 신앙을 왜곡하였습니다. 그들에게 지혜가 없거나 그들이 슬기롭지 못하여서 일어난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율법과 성전의 제사의례를 절대적인 것으로 만든 나머지, 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잃은 것이었습니다. 하느님을 잃으면서 그들은 율법과 제사 의례에 충실하지 못한 사람들을 모두 죄인으로 판단하였습니다. 그들의 지혜가 만들어낸 종교는 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추방하고 사람들을 죄인으로 만드는 장치로 전락하였습니다.

제물 봉헌은 하느님이 함께 계시기에 사람이 얻은 산물(産物)을 먼저 하느님의 시선에 가져다 놓는 행위입니다. 그들은 맏자식, 농사의 맏물, 사육하는 동물의 맏배 등, 자기들이 얻은 것을 먼저 하느님 앞에 가져와서 봉헌합니다. 봉헌된 것은 하느님이 가져가시지 않습니다. 하느님에게 바치면, 하느님의 시선이 그 위에 내려오고, 그때부터 사람은 하느님의 시선으로 자기가 얻은 것을 봅니다. 하느님은 모든 사람의 하느님이십니다. 따라서 하느님의 시선은 인간의 이기적 시선을 교정해 줍니다. 따라서 제물 봉헌은 사람을 나눔으로 초대하고, 나눔을 거룩한 것으로 해 주는 의례입니다. 그것은 나눔의 성사라고 할 것입니다.

율사들은 인간이 율법을 완벽하게 지키게 하기 위해 그들의 지식과 그들의 지혜를 동원하였습니다. 그들은 인간의 모든 상황을 가상하여 지켜야 하는 행동 지침을 율법으로 만들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율법 조항은 많아지고 그것을 지키지 못하여 죄인이 되는 이들도 많아졌습니다. 제관들은 성전에 많이 바칠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그들은 많이 바쳐야 하느님으로부터 많은 축복을 받는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이 주장은 우리의 관행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는 인과응보(因果應報)의 관행입니다. 그런 우리의 관행을 하느님에게 적용한 것입니다. 지혜롭고 슬기로운 일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지혜는 하느님을 사라지게 하였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상상하는 하느님일 수는 있어도 예수님이 아버지라 부르신 자비하신 하느님은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지혜롭고 슬기롭기를 원합니다. 그런 사람이 행세하는 세상입니다. 지혜와 슬기는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에 대한 깨달음은 우리의 지혜와 슬기의 결과가 아니라는 오늘 복음의 말씀입니다. 오늘 복음은 ‘철부지들’을 말하였습니다. 하느님은 그런 사람들에게 나타내 보이셨다고 말합니다. ‘철부지’는 어린이를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였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이런 어린이들의 것입니다...어린이처럼 하느님 나라를 받아들여야 합니다.”(마르 10,14-15). “이 작은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않도록 주의하시오.”(마태 18,10). 예수님은 이렇게 철부지 어린이를 하느님의 나라와 연결해 자주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물론 어린이와 같이 유치한 사람이 되라는 뜻이 아닙니다. 자기의 지혜와 슬기에 의존하여 하느님에 대해 생각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철부지 어린이는 부모에 대해 판단하지 않고 부모와 함께 있어서 행복합니다. 그리고 어린이는 부모의 말을 듣고 따르며 부모로부터 배워서 사람 노릇을 합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을 아버지로 부르셨습니다. 하느님으로부터 배워서 그분의 뜻을 실천하며 살겠다는 결심이 담긴 호칭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는 신앙인도 하느님을 아버지로 부르라고 가르치셨습니다. 하느님의 생명이 하는 일, 곧 자비와 용서를 배워서 하느님의 자녀가 되어 살라는 가르침이었습니다. 신앙인의 그런 실천 안에 하느님은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우리의 지혜와 슬기가 우리를 하느님의 자녀 되게 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 신앙은 빈틈없는 수행으로 하느님을 감동시키는 데에 있지 않습니다. 많은 것을 하느님에게 봉헌하여 그분으로부터 그 대가를 얻어내려는 것도 아닙니다. 그리스도 신앙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하느님의 생명을 배우고 그 생명을 자기의 삶 안에 살아 있게 합니다. 예수님이 사람들을 가르치실 때 그 주제는 항상 하느님의 나라였습니다. 하느님이 우리의 실천 안에 살아계시면, 그것이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이 아니기에 하느님의 생명이 하시는 일을 단편적으로만 실천합니다. 우리는 어쩌다 한 번씩 이웃을 돕고 사랑하며 용서합니다. 오늘 복음은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서 배워라.’는 말씀으로 끝맺었습니다. 지혜와 슬기를 위해 ‘수고하고 짐을 진’ 우리는 예수님이 열어주신 하느님 나라의 실천을 배워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이기심과 욕심을 벗어나는 자비의 길이고, 이웃을 돕고 사랑하고 용서하는 온유하고 겸손한 길입니다. 그것은 또한 우리를 참으로 자유롭게 하는 구원의 길이기도 합니다.

 

 

댓글 0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

매일말씀묵상

목록 전체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