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7월 4일 연중 제14주간 월요일
“안심하여라,
네 믿음이 너를 낫게 하였다.”
(마태오 9,18-26)
"Courage, daughter! Your faith has saved you."

말씀의 초대
야곱은 하란으로 가는 길에 밤을 지내면서 꿈을 꾸었다. 그 꿈에서 하늘에 닿아 있는 층계에서 천사들이 오르내리는 것을 본다. 하늘에 닿아 있는 꼭대기에서, 하느님께서는 그를 축복하시고 지켜 주시겠다고 약속하신다. 야곱은 그곳을 성소로 삼고 ‘베텔’이라 부르는데, 그 이름의 뜻은 ‘하느님의 집’이다(제1독서). 바리사이들에게는 율법만 보이고 예수님께는 가난한 이들과 병든 이들이 보인다. 예수님께서는 회당장의 딸을 일으켜 주시고 혈루증으로 고통 받는 여인을 고쳐 주시며, 바리사이들에게 ‘희생 제물보다 사람들에게 베푸는 자비가 더 크다.’는 율법의 정신을 몸소 보여 주신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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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선생님은 아이들에게 가장 따뜻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그려 보라고 했습니다. 아이들은 모닥불을 비롯해서 난로, 이불 등 갖가지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런데 ‘손’을 그린 아이가 있었습니다. 누구의 손이냐고 물어 보자 아이는 수줍게 ‘선생님의 손’이라고 대답했습니다. 가난하지만 밝게 생활하는 그 아이를 선생님은 평소에 자주 쓰다듬어 주었고, 아이는 그 손길의 따뜻함을 마음으로 느껴 왔던 것입니다.”
어디에선가 읽은 아름다운 글입니다. 오늘 복음을 찬찬히 살펴보면 ‘손’에 대한 말이 참 많습니다. “손을 얹으시면 살아날 것입니다.” “손을 대기만 하여도 구원을 받겠지.” “소녀의 손을 잡으셨다.”에서 볼 수 있듯이, 손을 통해 치유되고 손을 통해 축복과 생명이 전해집니다.
어린 시절을 떠올려 보면, 어머니는 자주 배탈이 나는 저에게 “엄마 손은 약손!” 하시면서 손으로 배를 계속 쓸어 주셨습니다. 어머니의 따뜻한 사랑이 손을 통해 전달되어 아픈 배를 낫게 했습니다. 어머니의 손길이 닿아 있다는 것만으로 위안이 되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하느님께서는 누군가에게 따뜻한 손길을 주라고 손을 만드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에게 도구를 만들고 문명을 발전시키는 것만이 아니라, 이웃과 손잡고 다정하게 살며 서로 화해하고 축복해 주라고 손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서로 손가락질하고 못된 일을 꾸미라고 손을 만드신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손길이 되어 누군가를 보살펴 주라고 손을 주셨습니다. 내 손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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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루’란 피가 샌다는 한자 말입니다. 몸에서 피가 빠져나가니 분명 수치스러운 병입니다. 더구나 ‘사막 문화’에서 피는 신성한 것이었기에, 이 병에 걸리면 부정한 사람으로 간주되었습니다. 레위기 15장 25절 이하에는 ‘혈루증’을 앓는 사람과 가까이만 해도 부정하게 된다고 했습니다. 그의 옷이나 앉았던 자리에 닿기만 해도 부정이 옮겨 감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이렇듯 철저히 외면받았던 ‘한 여인’이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댑니다. ‘저분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해도 구원을 받겠지.’ 하고 여인은 애절하게 매달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알면 화를 낼 일입니다. 여인은 부정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말씀을 건네십니다. “딸아, 용기를 내어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율법을 뛰어넘는 말씀입니다. 몸에 닿기만 해도 부정해진다는 레위기의 기록을 무색케 하는 말씀입니다.
누구에게나 병이 있습니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누구나 조금씩은 병을 안고 살아갑니다. 여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가혹한 ‘혈루증’이었지만 자기 몸의 일부분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축복의 여인이 되었습니다. 그 병으로 인해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여인은 어떤 일이 있어도 예수님의 음성과 눈빛을 기억하며 살아갈 것입니다. 여인의 감격에 우리도 동참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복음의 숨은 가르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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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에 나오는 야이로는 유다교의 회당장입니다. 예배를 주관하고 행정 업무를 책임진 사람입니다. 그러한 그가 체면을 버리고 예수님 앞에 엎드립니다. 딸을 잃은 아버지였기에 애절하기 짝이 없었을 것입니다. “제 딸이 방금 죽었습니다. 그러나 가셔서 아이에게 손을 얹으시면 살아날 것입니다.” 아마 그는 울고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없이 그를 일으키십니다. 그의 겸손과 열정을 보시고 방문을 결심하신 겁니다. 그때의 장면을 우리는 상상할 수 있습니다.
오랫동안 하혈하는 병에 걸린 여자도 예수님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그녀 역시 부끄러운 병으로 고생하고 있었습니다. ‘저분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해도 병이 나을 테지.’ 이론이 필요 없는 순간입니다. 믿음만이 힘을 발휘하는 순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여인에게 당신의 능력을 드러내셨습니다. 그분의 따뜻함입니다. 그녀는 평생 감사하며 살았을 것입니다.
죽은 소녀를 지키던 사람들은 예수님의 출현을 달가워하지 않았습니다. 모든 게 끝났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처음부터 회당장을 만류했을 것입니다. 이미 끝났는데 무엇 때문에 예수님께 가느냐며 붙잡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기적은 일어났습니다. 끝났다고 믿지 않은 사람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끝났다고 체념하면 기적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인정해줘요
-반영억신부-
어느 한 수도원이 있는 깊은 산속에 한 랍비가 은거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수도원의 원장이 그를 찾아왔습니다. 그 이유는 한창 번성하였던 수도원이 쇠퇴의 길로 들어섰기 때문입니다. 원장은 수도원을 어떻게 다시 일으킬 수 있을까 랍비에게 조언을 구하였습니다. 그랬더니 랍비는 “죄송합니다. 저는 아무런 조언도 드릴게 없습니다. 다만 한 가지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당신들 가운데 메시아가 있다는 것입니다.”
수도원장은 이 수수께끼 같은 말의 의미를 도무지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겨우 다섯 명 밖에 남지 않은 수도원에 “메시아가 있다”는 랍비의 말을 모두가 곰곰이 생각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우리들 중에 메시아가 있다고?’ 다섯 중에 누가 메시아란 말인가? 그 날부터 수도자들은 메시아일지도 모르는 서로를 깊은 존경심과 사랑을 가지고 대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자 이 수도원의 분위기는 전과는 사뭇 다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더욱 놀라운 것은 점차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그 수도원을 찾아와 그 수도자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하였고 수도자가 되겠다고 지원하는 젊은이들도 많아져 옛날처럼 번창한 수도원이 되었답니다. 서로 상대를 인정하고 그 안에 계신 그리스도를 볼 수 있는 눈이 열렸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열두 해 동안 혈루증을 앓던 여자가 “내가 저분의 옷에 손을 대개만 하여도 구원을 받겠지.”하는 생각을 가지고 당신의 옷자락에 손을 댄 것을 아시고 “딸아, 용기를 내어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마태9,22) 하고 이르시며 구원을 허락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능력으로 불치병을 낫게 하셨지만 ‘내가 너를 낫게 하였다.’고 하지 않으시고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하시며 인간의 믿음을 인정해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주님의 능력의 손길에 협력하면서 ‘내 믿음이 나를 구원 하였다.’고 하지 않고 ‘주님께서 저를 구원해 주셨습니다.’하고 말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가지고 계시면서도 결코 인간을 무시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인간의 협력을 간절히 원하시는 분이십니다. 어떤 결과는 하느님의 은총과 인간의 협력이라는 합작품입니다.
믿음은 인간의 능력이상을 체험케 합니다. 인간은 끝이라고 생각할 때 하느님께서는 시작하십니다. 사람들은 회당장의 딸이 죽었다고 소란을 피웠지만 예수님께서는 소녀의 손을 잡아 일으키셨습니다. 그리하여 당신이 곧 하느님이심을 드러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음을 몰아내시고 슬픔을 기쁨으로,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어 놓으십니다. 사실 기적이나 치유는 문제가 있는 곳에서, 절망 안에서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그 주변에는 믿음을 가진 사람도 있었지만 그를 비웃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마음이 한번 비딱해지면 기적을 보고도 또 비웃을 것이며 쓸데없는 소문을 퍼뜨리게 됩니다.
주님의 능력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 이웃 안에 계신 주님을 섬기고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이 가득한 오늘이기를 희망합니다.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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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손한 믿음
-홍금표 신부-
오늘 복음은 회당장의 딸을 살리는 기적입니다. 엘리야(1열왕 17,19) 예언자와 엘리사(2열왕 4,33) 예언자도 사람을 살리는 기적을 합니다만 잡다한 행동으로 소생이적을 행하는데 반해 예수님은 아이의 손을 잡고
소녀를 일으키십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묵상해야 할 사실은 회당장의 행동입니다. 회당장은 많은 사람들이 있는 개방된 장소에서 예수님께 엎드려 절합니다.
이 행위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회당장이 어떤 사람인지를 알 필요가 있습니다.
회당은 성전 예배에 참여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전례가 진행되는 종교적 장소였습니다만 그 역할은 여기에만 그치지 않습니다.
율법을 가르치고 교육하는 교육의 장소가 회당의 주된 임무였고, 더 나아가 마을의 공적인 일들을 결정하는 회의소와 집회소의 역할을 하던 곳이 회당입니다. 이러한 회당에서 회당장은 예배를 집전할 뿐 아니라 마을 전체의 행정을 관장하는 인물이었기에 큰 존경을 받고 사회적 지위를 누리던 사람입니다.
이러한 회당장이 많은 군중 앞에서 엎드립니다. 당시의 관습과 체면 그리고 다른 사람의 눈을 의식하지 않은 겸손의 행위로서, 바로 딸에 대한 사랑과 예수님께 대한 온전한 신뢰가 그러한 행동을 가능하게 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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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 상황에서
- 강석진 신부-
오늘 복음은 두 여자의 이야기입니다 . 한 여자는 야이로라는 회당장의 죽은 딸이며 , 다른 사람은 열두 해 동안 혈루증을 앓은 여자입니다 . 외적으로 죽은 딸은 아버지의 애원으로 살아나고, 내적으로 죽은 여인은 예수님에 대한 믿음으로 살아납니다. 외적으로 죽은 딸은 예수님께서 손을 잡으시자 일어났고, 내적으로 죽은 여인은 예수님 옷자락 술에 손을 대면서 살아납니다.
이야기의 발단은 야이로라는 회당장입니다. 딸이 죽자, 예수님께 달려가서 딸을 살려 달라 애원하는 모습! “제 딸이 방금 죽었습니다. 그러나 가셔서 아이에게 손을 얹으시면 살아날 것입니다.” 흡사 이 애원은 혈루증을 앓던 여인이 ‘내가 저분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구원을 받겠지. ’ 하는 간절한 바람과 같을 것입니다. 아무튼 신앙생활 안에서 가끔은 확고한 믿음의 바탕 위에 진정한 애원, 진심을 담은 애원의 기도도 필요한 듯합니다. 그분의 마음을 움직일 정도로 말입니다.
그런 가운데 야이로라는 회당장을 생각하며 묵상해 봅니다. 자신의 자녀가 금방 죽었다는 소식을 통보 받거나, 혹은 그 죽음을 지켜보는 부모의 마음! 여러 말이 필요 없을 정도입니다. 그런데 그 순간, 오로지 ‘예수님’만을 생각하며 예수님께 달려와 애원하던 회당장의 모습! 사실 그는 예수님의 정체를 분명하게 알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복음의 앞부분을 읽어보면 나병환자나 중풍병자, 그 밖의 아픈 이들을 고쳐주었다는 소식은 들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죽은 딸을 살리는 기적은 인간적인 생각에서 불가능하다 는 것을 알고 있었을 회당장! 그 어떤 계산도 없이, 그냥 단지 예수님, 그분만이 자신의 딸을 살릴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으로 달려온 회당장!
우리를 돌아보게 합니다. 위기상황에서 인간적인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찾아 인간의 머리로 계산하고 상황을 넘기는 것이 바람직한 순서인지, 혹은 정신적으로 혼미한 상태에서도 오로지 예수님, 그분께 진정한 애원의 마음을 가지고 기도 안에서 그분께 먼저 의탁하는 삶을 사는 것이 바람직한 순서인지…. 결론은 각자가 내려야 할 것입니다. 마음 가는 곳에 몸이 따라갈테니까요!
오직 믿음만이
-남상근 신부-
믿음입니다. 이미 죽은 딸이라도 예수님께서 손을 얹어주시기만 하면 다시 살 수 있으리라는 회당장의 마음은 믿음입니다.
믿음입니다. 열두 해 동안 별별 방법을 다 써보았건만 도무지 나을 기미가 없어 보이는 지독한 병일지라도 예수님의 옷자락만 만질 수 있다면 다시 나을 수 있다는 한 여인의 마음은 믿음입니다.
믿음입니다. 다 끝나버렸을지라도, 이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지라도 내가 아니라 하느님께서는 아직 무엇인가 하실 것이 있다는 고백이 믿음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믿음을 보시고, 믿음을 확인하신 후에 놀라운 기적을 보여주십니다. 우리 주위에 왜 기적이 없을까요?
이천 년 전 예수님 안에서 보여지던 그 많은 기적들이 왜 우리에게는 보이지 않을까요? 이제는 예수님의 능력이 없으신 것일까요?
이제는 우리에게 기적이 필요하지 않기 때문일까요?
기적이 없는 이유는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믿음이 없기 때문이 아닐까요.
그 기적을 볼 수 있을 만한 믿음의 사람들이 없기 때문은 아닐까요.
회당장과 여인의 믿음을 생각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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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인의 믿음
-김순중 수녀-
많은 군중이 예수님을 따라가고 있었다. 오랜 병마에 시달려 온 한 여인이 예수님의 옷자락에 손을 대기만 해도 병이 나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여인의 생각대로 되었다. 바로 그 순간에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는 예수님의 질문을 받는다. “아니, 이렇게 많은 군중이 당신을 에워싸고 있는데, 누가 손을 대었다고 하시나요?”
이 여인의 마음과 예수님의 마음을 관상하면서 나는 가슴이 뛰는 것을 느낀다. 아마도 이 여인의 마음도 마구 뛰었을 것이고, 예수님의 마음 또한 감 동되셨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병마로 지치고 가난해진 마음이 예수님을 알아보자마자 깊은 확신이 들었다. ‘저 어른의 옷자락에 손을 대기만 하면 나으리라.’ 옷자락에 손을 대는 순간 어떤 힘이 자신의 상처를 어루만지는 것을 느낀 것이다. “여인아 네 믿음이 너를 구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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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믿음이 너를 살렸다
-장경선 수사-
우리가 어떤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는 경우, 특히 생사의 갈림길에 서 있을 때 지푸라기 하나라도 잡고 싶은 심정으로 그 절망에서 빠져나오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아주 실낱같은 희망에도 큰 기대를 겁니다.
수치심을 자극해도 아랑곳 하지 않고 자신의 딸을 살려달라고 담대하게 외치던 가나안 여인과는 다르게, 오늘 복음의 이 여인은 용기없고 가냘픈 심정으로 군중 사이에서 떼밀려가시던 예수님의 옷깃 한 자락이라도 잡고자 했습니다.
그 여린 믿음을 알아채신 예수님께서는 “꺼져가는 심지처럼 깜박인 듯한 그 작은 믿음을 알아보겠다”라는 듯 여인에게 용기를 내라고 하십니다.
남에게 드러내기조차 부끄럽고 변변찮은 믿음. 마치 어느 깊은 산골 바위틈 사이에 피여 있는 이름모를 작은 야생초이지만 그를 외면하지 않으신 주님의 눈길로 인하여 한 생명이 살아 있고 또한 살 수 있다는 용기를 주십니다.
주위에 수많은 군중이 있었지만 그들 눈에 드러나 보이지 않던 그 여인에게 예수님은 속삭여줍니다. “너 안에 담긴 그 작은 희망의 불씨, 그 믿음이 너를 살렸다. 나에겐 그것도 소중하기 그지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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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의 손
-송동림 신부-
지난해 돌아가신 할머니가 살아 계실 때의 이야기입니다. 거동이 불편하신 할머니는 누워 계실 때가 많았는데, 제가 방학 때 인사를 드리면 가만히 웃으며 제 손을 잡아주셨습니다. 그리고 한동안 놓지 않으셨습니다. 건강에 관한 이야기 등 이러저러한 이야기를 건네면서 제가 방을 나설 때까지 손을 잡고 계셨습니다. 이러한 모습을 제가 찾아뵐 때마다 변함없이 보여주셨습니다. 지금도 여전히 그 느낌이 남아 있는데, 아흔이 지난 할머니의 손이 거칠어도 저는 그 손에서 늘 할머니의 따스한 마음을 읽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한 회당장이 예수님께 와서 “제 딸이 방금 죽었습니다. 그러나 가셔서 아이에게 손을 얹으시면 살아날 것입니다.”라고 간청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회당장의 집으로 가 누워 있는 소녀의 손을 잡으시자 소녀가 일어납니다. 예수님의 손길이 소녀를 살린 것입니다. 죽음으로 인해 힘없이 축 늘어진 연약한 손에 예수님의 생명의 손길이 닿자 소녀가 살아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손을 잡는 행위를 통해 생명의 기운을 불어넣어 주십니다. 인간에 의해 십자가에 못 박히실 그 손으로 인간을 치유하십니다.
손은 능력입니다. 사랑을 전달하고 눈으로 보지 못하는 것을 느끼게 해주며 말을 못하는 사람에게는 언어가 되어줍니다. 영국의 과학 잡지 「네이처」는 ‘어머니의 따뜻한 손길과 손은 자녀의 신경조직을 자극하여 정서적 안정과 신체적 발육을 촉진한다.’고 했습니다. 특히 어머니가 아이의 머리나 얼굴 등 몸을 쓰다듬는 신체적 접촉이 피부의 신경세포를 따라 대뇌에 전달되어 아이들의 정상적인 발육에 긍정적인 도움을 준다고 합니다.
태초의 하느님의 손을 생각해 봅니다. 아담과 하와는 그들의 손으로 생명나무 열매를 따먹음으로써 세상에 죄를 가져왔고, 카인은 아우 아벨을 그의 손으로 죽임으로써 이 땅에 폭력과 살인이 발생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손을 들어 자손을 축복하셨고, 모세의 손을 들어 전쟁에서 승리하게 하셨으며 사무엘의 손을 들어 기름을 부어 왕을 세우게 하셨습니다. 종종 인간의 손은 상처를 주지만 하느님의 손은 상처를 치유해 줍니다.
주님의 따스한 손길이 사람들의 폭력적인 손을 붙잡아 주시고, 우리 손을 축복의 도구가 되게 하시며 우리 손이 주님의 손처럼 쓰일 수 있도록 우리의 손을 만져주시기를 간구합니다. 그리고 그 누구의 손이 아닌, 주님의 손에 의지하며 사는 사람들이 많아지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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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아, 용기를 내어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불행 앞에서>
-양승국신부-
거듭되는 탈선과 비행으로 갈 데 까지 간 청소년의 어머니들이나 고질적인 알콜 중독자 남편을 마지못해 견뎌내고 있는 자매님들을 만나게 되면 참으로 괴롭습니다. 뭐라고 위로의 말도 건네기 힘듭니다.
만일 제가 이런 말로 위로를 했다면 잘 했다고 생각하십니까? “자매님, 참으로 대단하십니다. 자매님께서 겪고 계신 지금의 고통은 하느님께서 자매님에게 주신 십자가입니다. 힘들 때 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십시오. 인내와 사랑으로 그저 묵묵히 십자가를 지고 가시기 바랍니다.” 한편으로 제대로 된 충고 같기도 하지만, 최선의 충고는 아니리라 생각합니다.
내가, 그리고 이웃이 겪고 있는 견딜 수 없는 고통, 인간의 모순, 구조적인 악 앞에서 어떻게 처신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모습이며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바일까요? 물론 때로 체념, 포기, 수용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자세가 있습니다. 고통과 악과 모순을 퇴치하기 위한 적극적 대응입니다.
그 자매님께서 문제 청소년 자녀나 알콜 중독자 남편을 인내와 사랑으로 감싸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자세가 있습니다. 그들을 그 고통에서 벗어나도록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 해보는 것입니다. 그 뒤에 예수님의 십자가와 연결시켜야 할 것입니다.
많은 분들, 자신에게 다가온 불행이나 기막힌 사건 앞에서 원인을 분석하고, 적극적으로 대처하기보다는 넋 잃고 앉아 있다가 최종적으로 하시는 말씀, “이 모든 게 다 하느님의 뜻이겠지.”
인류 역사상 가장 정직하고 소신 있었던 신학자 중에 한분이셨던 본 회퍼 목사님은 폭군 히틀러의 명령을 거부했기에 나치들에 의해 교수형에 처해졌습니다. 산살바도르의 로메로 대주교님은 군부독재 체제 아래서 끔찍한 고통에 시달리던 민중 편에 서셨기에 제단에 서신 채로 암살당하셨습니다. 이해할 수 없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인류의 고통 앞에서 적극적으로 대처하신 분들입니다.
하느님은 우리 각자의 행복을 원하시는 분이시지, 우리가 끔찍한 고통 아래 짓눌려 살아가기를 원하시는 분이 절대로 아니십니다. 하느님이 고통을 통해 우리를 징벌하실 하등의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에게 다가오는 갖가지 고통 앞에 인내와 포기, 수용도 때로 필요하지만, 그에 앞서 더욱 필요한 자세는 적극적인 대응입니다.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다하는 자세입니다.
난 데 없이 다가온 고통 앞에서 우리는 끝없이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이 고통이 내 힘으로 극복할 수 있는 고통인가, 지금 이 지옥 같은 상황이 내 능력으로 바꿀 수 있는 상황인가, 지금 이 상처가 우리의 사랑으로 치유할 수 있는 상처인가?’ 그리고 어쩔 수 없는 것들은 우리 주님께서 지신 신비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이미 죽은 회당장의 딸과 오랜 세월 혈루증으로 죽어가고 있는 한 여인을 되살려주시는 예수님의 치유활동을 목격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 치유의 배경을 한번 눈 여겨 보시기 바랍니다.
오늘 날도 마찬가지겠지만 예수님 시대 당시 셀 수도 없이 많은 사람들이 매일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갖은 병고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두 사람은 어떻게 치유를 받았습니까? 이미 딸이 죽었지만 한번 살려보겠다는 회당장의 적극성으로 인해 딸은 죽음의 세계에서 생명의 세계로 건너왔습니다. 그분은 반드시 해낼 수 있을 거야, 라는 굳은 확신으로 인해 살아났습니다.
나도 병에서 말끔히 치유되어 사람답게 한번 살아보겠다는 간절한 마음, 적극적 의지가 혈루증 환자의 말끔한 치유와 구원으로 이어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