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15주간 수요일(마태오 11,25-27)

2011. 7. 13. 오전 6:14: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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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7 13일 연중 제15주간 수요일 

하늘과 땅의 주인이신 아버지,

안다는 사람들과 똑똑하다는 사람들에게는 이 모든 것을 감추시고

오히려 철부지 어린아이들에게 나타내 보이시니 감사합니다.
(마태오 11,25-27)

 

 

"I give praise to you, Father, Lord of heaven and earth,
for although you have hidden these things
from the wise and the learned
you have revealed them to the childlike.

말씀의 초대

모세가 미디안 땅으로 도망가서 양 떼를 치다가 거룩한 산 호렙에서 불타는 떨기나무의 모습으로 나타나신 하느님의 현존을 체험하고 부르심을 받는다. 이제 모세는 하느님의 부르심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 지도자로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 기쁨에 넘쳐 기도하신다. 아버지 하느님께서 안다는 사람, 똑똑하다는 사람들에게가 아니라 철부지 같은 제자들에게 당신의 권능을 드러내셨음을 감사드린다. 하느님의 일은 이렇게 주님께 온전히 의지하는 천진한 어린이 같은 사람들에게서 이루어진다(복음). 

☆☆☆

오늘의 묵상

제자들이 파견되어 나갔다가 싱글벙글 기뻐하며 돌아왔습니다.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없이 빈 몸으로 파견되었지만, 제자들은 주님의 능력으로 복음을 선포하고 마귀들을 복종시켰기 때문입니다(루카 10,17 참조). 오늘날로 말하면 제자들이 ‘사목 실습’을 하고 돌아와서 어린이처럼 행복해하며 자신들의 체험을 예수님께 말씀드리는 것과 같습니다.
철부지 같았던 제자들을 현장으로 파견하시면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 보내는 것과 같다고 걱정하셨지만, 이제 그들이 아무 일 없이 사명을 마치고 돌아오자 예수님께서는 기쁨에 넘쳐 하느님 아버지께 이렇게 기도하십니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철부지처럼 주님께 의지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은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지만, 자신이 잘났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자신을 드러냅니다. 그들은 말할 때마다 “주님께서 하셨다.”라는 말 대신에, “내가”라는 말을 자주 하며 틈만 나면 자신을 내세웁니다. 우스갯소리지만 이런 사람들이 가지고 다니는 『성경』에는 4복음서는 없고 오로지 자신이 만든 제5복음서만 있다고 합니다. 바로 ‘내가 복음’입니다.
우리가 언제나 조심해야 할 것은 이렇게 자신의 ‘덫’에 걸려드는 것입니다. 결국 주님의 일을 하는 것이 ‘내’ 일을 하는 것이 되고 맙니다. 그럴 때 주님께서는 그곳에 안 계시고 오로지 나만 남게 됩니다. 주님의 일을 한다고 하지만 기쁨이 없고 공허한 마음이 드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기쁜 소식’을 선포하는 일을 하면서도 기쁨이 없다면, 스스로 주님의 일을 하는지 내 일을 하는지 정직하게 물어보면 됩니다.

 

  

 
 

 

아는 게 병이 되어서는 안 된다

  -반영억신부-

컴퓨터 인터넷을 통한 가상공간에서의 부작용이 만만치 않습니다. 남의 개인 정보를 훔치고 사기 치며 익명을 이용하여 어이없는 글을 올리고 비난하며, 하고 싶은 대로 하는 사람들이 늘어갑니다. 상처를 주고 좌절하게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컴퓨터를 사용할 줄 아는 것이 병입니다. 차라리 모르기나 하면 남에게 피해는 주지 않으련만. 아는 것이 좋은데 쓰여 힘이 될 수 있고, 능력이 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노자는 알면서도 모르는 게 으뜸이요, 모르면서 아는 게 병통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이 당시에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고 자처하는 사람들에게는 배척을 당하였습니다. 소위 잘나고 똑똑한 내로라하는 사람에는 쉽게 받아들여 지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자기가 안다고 생각하는 것이 최고였기 때문에 주님의 가르침이 들어갈 곳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철부지들에게는 받아들여졌습니다. 그야말로 촌놈들, 상것들, 별 볼일 없는 못난이들은 주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들에게는 겸손과 단순함이 있었고 그것이 사실 세상의 희망입니다.

 

잘난 사람은 남을 등쳐먹으려 애를 쓰고 기득권을 잃지 않으려 서로를 헐뜯고 깎아 내리지만 때 묻지 않은 철부지들은 새로운 가르침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따라서 주님께서는 머리로 계산하지 않고 마음을 열고 겸허하게 받아들이는 단순한 사람을 미덥게 여기십니다. 그러므로 아는 것이 결코 병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성경에서 안다는 것은 단순히 지식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보다 훨씬 더 깊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사물을 꿰뚫는 통찰력을 가리키며 친숙해 지는 것, 그리고 감정을 이해하며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 결국 알기 때문에 달라지는 것을 포함합니다. 또한 남녀가 결혼을 통해 가장 깊이 만나는 것을 안다라는 말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을 안다고 하는 것은 당신의 사랑으로 충만히 채워주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안다는 것은 곧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외에는 아무도 아들을 알지 못한다. 고 하셨고 또 아들 외에는, 그리고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 주려는 사람 외에는 아무도 아들을 알지 못한다.(마태11,27) 고 말씀하심으로써 예수님과 하느님과의 긴밀한 관계를 알려주셨습니다.

 

이제 그 아버지에 관해서 아들인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알려주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예수님을 그리고 그분이 알려준 아버지를 세상에 알려야 합니다. 그분을 알리기 위해서 그분을 알아야 하는데 그 첫 자세가 어린이와 같이(마르10,15)단순한 마음으로 주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어린이는 잔머리를 굴리지 않습니다. 온전히 부모에게 의존합니다. 계산하지 않고 부모를 따릅니다. 단순하면 할수록 하느님의 뜻을 더욱 잘 깨닫게 될 것입니다. 사랑합니다.

 

 

 

  

 

 

주님이 사람 뽑는 법

-남상근 신부-

 

예수님과 우리의 인선 조건은 많이 다릅니다.
우리는 똑똑한 사람을 선호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부족해도 겸손한 이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세상일에 유능한 사람을 선호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복음에 유능한 이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스스로 빛나는 사람을 선호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남을 빛내주는 이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과감하게 결단하는 사람을 선호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일이 더디더라도 이웃의 마음을 헤아리는 이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철부지 어린아이들이 아무것도 모른다고 생각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아버지 하느님으로부터 모든 것을 다 알게 되었노라고 감탄하십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 아버지께 감사하십니다. 세상의 지혜는 하느님의 돌보심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기에 감사하십니다.
무릇 비어 있어야 생명이 자라고, 빈틈없이 빽빽하면 숨쉴 수 없는데, 가득 차서 너무 똑똑하기만 한 나는 세상이 선호하는 사람일까요,
아니면 주님께서 원하시는 철부지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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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를 통하여

-노성호 신부-


예수께서는 하느님아버지를 찾고 간절히 원했던 많은 사람에게 ‘나를 보면 아버지를 보는 것이고, 내가 하는 일이 곧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이기 때문에 나를 알면 아버지를 알게 되는 것이다.’는 말씀을 하시면서 아버지와 당신의 관계를 정확하게 말씀해 주신다.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들조차 하느님 아버지와 함께 살고 있으면서도 그분을 느끼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여 자신들 앞에 계신 하느님을 두고도 저 멀리서 하느님을 찾으려고 했고, 하느님을 바라보면서도 하느님을 뵙게 해 달라고 청했다. 그때 예수님의 심정이 얼마나 답답하셨을지 짐작이 간다. 마음을 열면 우리 앞에 계신 하느님을 마주 뵐 수 있을 텐데, 마음이라는 것이 그렇게 쉽사리 열리는 것은 아닌가 보다.
어느 날 우연히 아버지의 중학교 졸업 앨범을 봤다. 이곳저곳 펼치면서 아버지의 얼굴을 찾고 있는데, 이게 웬일인가? 그렇게 찾았던 아버지 얼굴은 없고 그 안에 내 얼굴이 있는 것이 아닌가? 나와 똑같은 아버지의 중학교 때 모습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하긴 아버지가 나를 닮으신 것이 아니라 내가 아버지를 닮은 것이라고 해야 맞는 말이겠지만`…. 그래서 옛 어른들이 하는 말은 하나도 틀린 게 없나 보다. ‘아들을 보면 그 아버지를 알 수 있다.’는 말이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계속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전하고, 그 아들이 또다시 태어날 아들에게 무엇인가를 전하고 이렇게 아버지는 세상에 당신 모습을 드러내신다. 마찬가지로 하느님이 예수께 전하신 모든 것이 이제 예수님을 통하여 우리 모두에게 전해지고 있다. 그러므로 그분의 자녀들인 우리도 그분을 세상에 드러낼 수 있도록 해야 하지 않을까?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라는 말이 있습니다.

-남을우-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라는 말이 있습니다. 나이가 든 사람들은 자신들이 쌓은 경험과 사회 통념으로 형성된 고정관념이 있습니다. 그러나 어린이들에게는 아직 그런 사고가 형성되어 있지 않아 사물 그대로, 본 그대로 마치 해면처럼 받아들입니다. 그러므로 시야가 언제나 신선하지요.

주님께 “하늘과 땅의 주인이신 아버지, 안다는 사람들과 똑똑하다는 사람들에게는 이 모든 것을 감추시고 오히려 철부지 어린아이들에게 나타내 보이시니 감사합니다”(마태 11,25) 하신 말씀의 의미를 생각해 봅니다. 배웠다는 사람, 똑똑하다는 사람은 자신의 주장이 제일이라고 생각할 뿐 아니라 부와 권세를 모두 가졌기 때문에 어렵고 힘든 사람, 자신의 주장을 선뜻 펼치지 못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어린이들은 순수하여 가장 바른 것을 압니다. 그리고 표현은 서투르지만 자신의 의사를 표현할 줄 압니다. 주님께서 하느님의 섭리를 이 세상에 펼치실 때 겉으로는 보잘것없고 가난하고 무력해 보이지만 마음이 어린이처럼 순수한 사람들을 택하신 뜻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가진 자의 오만이 없고 담담히 더 나은 세상을 희망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을 묵상하며 무궁무진한 주님의 세계를 알지도 못하면서 아는 척 나댄 일은 없었는지, 이 세상에 사랑과 정의를 실천하러 오신 주님을 내 세속적인 사고와 아집 안에 품고 주님을 모신다고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닌지 반성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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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의 공간 복음의 공간

-조성숙 수녀-

 

예수님께서는 이 짧은 단락 안에서 “아버지”라고 몇 번이나 부르며 환희의
찬가를 노래하십니다. 그 흥분된 기쁨이 말씀을 듣는 우리에게 그대로
전달됩니다. 지혜롭다는 자들보다 오히려 철부지들이 하느님을 안다는 것이
예수님께도 그토록 놀라운 일이었을까요? 언젠가부터 깨닫게 된 사실 중에
하나는 제 안에 두 세상이 있다는 것입니다. 현실의 공간과 복음의
공간입니다. 복음의 공간 속에서는 예수님 말씀대로 작은 자, 섬기는 자가 되고
싶어 하지만, 현실로 돌아오면 즉시 다른 세상 버전으로 옮겨가 버립니다.
똑똑한 사람, 능력 있는 자가 되어 사람들 위에 서고 싶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깨주시는 스승 같은 분을 만났습니다. 초등학교도
졸업하지 못한 그분은 사람들이 인정해주는 소위 내놓을 만한 ‘메이커’는
거의 갖지 못한 분이십니다. 작은 신앙 공동체를 이끌고 있는 그분을
처음 만났을 때 철부지 같은 말투와 어린아이와 같은 그분의 눈빛에
저는 당황했습니다. 그리고 그 공동체에서 며칠을 머물면서
제 안에 “복음 말씀이 진짜구나!” 하는 놀라움이 커져갔습니다.
책을 통해 배워 안다는 사람에게서는 결코 배울 수 없었던 말씀들이
그제야 “아하!” 하면서 들려왔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2천 년이
지난 지금도 보잘것없어 보이는 사람들 안에서 여전히 힘 있고,
우리의 모순을 꿰뚫으며, 진리를 외치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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