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14주간 토요일 (마태10,24-33)

2011. 7. 9. 오전 6:5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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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7 9일 연중 제14주간 토요일

  

제자가 스승보다 더 높을 수 없고 종이 주인보다 더 높을 수 없다.

제자가 스승만 해지고 종이 주인만 해지면 그것으로 넉넉하다.
(10,24-33)

 "No disciple is above his teacher,no slave above his master.
It is enough for the disciple
that he become like his teacher,for the slave
that he become like his master.

 

 

말씀의 초대

야곱이 하느님 말씀대로 요셉이 있는 곳에서 숨을 거둔다. 형제들은 아버지가 죽고 자신들이 요셉에게 저지른 죄를 생각하고는 요셉이 자신들에게 보복할까 봐 두려워하지만, 요셉은 모든 것을 선으로 이끄시는 분은 주님이심을 전하며 오히려 형제들을 위로한다(제1독서). 우리의 모든 것은 주님 안에 있다. 머리카락 하나까지도 주님께서 다 세어 두셨을 정도로 우리는 주님의 소중한 존재이다. 우리가 참으로 두려워해야 할 것은 세상의 박해가 아니라 우리의 모든 것을 낱낱이 아시는 주님이시다(복음). 

☆☆☆

오늘의 묵상

투시경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나를 속속들이 들여다보는 사람을 만난다면 어떤 마음이 들까요? 아무리 정직하게 사는 사람이라도 그 사람과 마주치는 것만으로도 두려울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나의 약점과 아픈 비밀까지도 다 알지만, 있는 그대로의 나를 진심으로 이해해 주고 지극히 사랑해 준다면 어떻겠습니까? 그렇다면 오히려 그 사람 앞에서 우리가 가진 모든 두려움은 사라지고 오히려 평화로울 것입니다. 바로 그분이 주님이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너희의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 두셨다.”라고 하셨습니다. 나의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시지만 있는 그대로의 나를 사랑하시는 분이시라는 뜻입니다. 우리의 눈에는 차등이 있어 보일지 모르지만, 주님 안에서 인간 존재는 머리카락 하나까지도 소중한,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귀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사랑받고 싶어 합니다. 우리가 두려움을 안고 사는 것도 누군가에게 외면당하고 내쳐질까 봐 염려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남에게 사랑받으려고 끊임없이 자신을 과장하며 왜곡된 자기를 만들어 가게 됩니다. 자신의 삶이 진실에서 멀어질수록 뿌리내릴 곳이 없어지며, 내면에는 더욱더 두려움이 쌓이게 됩니다.
그래서 내 모든 것을 아시는 주님과 정직하게 대면하는 연습이 필요합니다. 과장되고 왜곡된 내가 아니라 비천하고 죄스러운 있는 그대로의 내 모습이 주님께는 더 아름답습니다. 주님께서는 잘나고 죄가 없는 나를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라, 죄인임을 고백하는 나를 사랑하십니다. 이러한 주님 사랑을 만나면 두려움은 사라질 것입니다.

☆☆☆

 

예수님께서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하찮은 참새도 주님의 허락이 있어야 땅에 떨어진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너무 두려워합니다. 정체도 모르는 막연한 두려움에 열정을 빼앗기고 있습니다. 대부분은 몰라도 되는 정보를 너무 많이 알고 있는 탓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머리카락까지도 다 세어 두셨다고 했습니다. 그만큼 관심을 갖고 계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만큼 나의 모든 것을 알고 계신다는 말씀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 아버지이시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는 자식이 아무리 짜증 내고 불평해도 마음속을 뚫어 보고 계십니다. 우리는 주님 앞의 어린이일 뿐입니다
.
그러니 사람들 앞에서 주님을 증언해야 합니다. ‘두려움 없이 사는 것이 그분을 증언하는 길입니다. 세상은 경쟁하듯 불안을 부추기고 있습니다. 앞날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고 외쳐 대고 있습니다. 그럴수록 주님께 맡겨야 아버지를 드러내는 삶이 됩니다
.
그러면 주님께서도 우리를 증언해 주신다고 했습니다. 우리의 앞날을 책임져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언제라도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인생은 본래 우리 것이 아니고 주님께서 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기쁨으로 살다가 당신께 돌아오라며 맡기신 것이지요. 이제는 우리 삶에서 사는 것이 두렵다.’는 표현은 더 이상 등장하지 않도록 해야겠습니다.

 

사람이 두려운 세상입니다. 생명을 위협하고 남의 목숨을 빼앗는 일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예전에는 짐승이나 자연재해가 무서웠지만 지금은 사람이 더 무서운 세상이 되었습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영화와 컴퓨터 게임에서 사람의 죽음을 너무 쉽게 다루고 있습니다. 생명의 존엄성이 무시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참새 한 마리마저도 아버지의 허락 없이는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이렇듯 생명은 우리 것이 아닙니다. 움직이는 모든 것의 목숨은 주님께서 좌우하십니다. 그분께 생명의 비밀과 열쇠가 있습니다. 오늘의 복음 말씀은 이런 의미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러니 그분의 뜻을 인간적 판단 기준으로만 해석할 수는 없습니다
.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영혼을 어루만질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십니다. 우리의 머리카락까지도 헤아려 두셨다고 성경은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깊은 관심과 사랑으로 사람들을 생각하신다는 표현입니다. 그러니 언제 어디서라도 하느님을 경외하여야 합니다.

☆☆☆

 

☆☆☆

 

 

나라든 교회든 또는 회사든 인재를 발굴하는 일은 매우 중요합니다. 또한 그 인재를 적재적소에 등용하는 일도 중요합니다. 오늘날 교회에는 많은 일이 있습니다. 어린이에서 노인에 이르기까지 그 대상도다양합니다. 가난한 사람도, 부자도, 많이 배운 사람도, 적게 배운 사람도 있습니다. 따라서 사목의 양상도 다양합니다. 그때마다 필요한 사목자가 부족합니다. 많은 인재가 필요합니다. “제가 있지 않습니까? 저를 보내십시오.” 하고 선뜻 나서는 지원자가 필요합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반영억신부-

하느님께 대한 두려움은 다른 모든 두려움을 몰아내고 하느님의 말씀을 따르는 삶을 살게 합니다.

 

사도행전 9장 26절 이하를 보면 사울은 예루살렘에 이르러 제자들과 어울리려고 하였지만 모두 그를 두려워하였습니다. 그가 제자라는 것을 믿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그리스도인을 박해하던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르나바는 사울을 받아들여 그가 어떻게 길에서 주님을 뵈었고 어떻게 다마스쿠스에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담대히 설교하였는지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사울을 없애 버리려고 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지역을 떠나 타르수스로 가야했습니다. 그리고 교회는 유다와 갈릴래아와 사마리아 온 지방에 평화를 누리며 굳건히 세워지고, 주님을 경외하며 살아가면서 성령의 격려를 받아 그 수가 늘어났습니다.

 

오늘 독서의 말씀을 보면 요셉의 형제들은 “요셉이 우리에게 적개심을 품고, 우리가 그에게 저지른 모든 악을 되갚을지도 모르지.” 하면서 불안해합니다. 그러나 요셉은 자기를 팔아먹었던 형제들에게 말합니다. “두려워하지들 마십시오. 내가 하느님의 자리에라도 있다는 말입니까? 형님들은 나에게 악을 꾸몄지만, 하느님께서는 그것을 선으로 바꾸셨습니다. 그것은 오늘 그분께서 이루신 것처럼, 큰 백성을 살리시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두려워하지들 마십시오. 내가 여러분과 여러분의 아이들을 부양하겠습니다.”(창세49,19-21) 이렇듯 죄는 인간적인 무서움을 가져오지만 하느님을 경외함에서 오는 두려움은 인간적인 생각을 뛰어넘어 용서와 자비로 드러납니다.

 

다윗은 아들 솔로몬에게 말하였습니다. “힘과 용기를 내어 일을 해 나가라. 두려워하지도 말고 당황하지도 마라. 주 하느님이신 나의 하느님께서 너와 함께 계실 것이다. 그분께서는 주님의 집에서 예배하는 데에 필요한 모든 일을 마칠 때까지, 너를 떠나지도 버리지도 않으실 것이다.”(1역대28,20)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육신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오히려 영혼도 육신도 지옥에서 멸망시킬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하여라."하시며 우리의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 두셨다. 너희는 수많은 참새보다도 더 귀하다고 하셨습니다. 그만큼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쫓아냅니다.”(1요한4,18) 세상의 것에 매이지 않고 사랑이신 하느님을 차지하는 한 두려워할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셔서 힘을 주신다는 것을 믿고 주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일에 주저함이 없어야 하겠습니다. 주님을 전하고 말씀대로 살고자 할 때 예기치 않은 어려움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세상의 가치관과 천상의 것은 서로를 거스르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적당히 타협하면서 살기를 원하지만 하느님의 뜻은 할 것은 하고 아니오 할 것은 분명 아니오 하고 답하기를 원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부르시고 때로는 침묵하시고 때로는 어떤 일을 우리를 통해 이루시고자 합니다. 그러나 결코 그것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그분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힘이시니 주님을 경외하고 세상 것에 두려워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사람을 무서워하면 그것이 올가미가 되지만 주님을 신뢰하면 안전해집니다.”(잠언29,25) 사랑합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이훈 신부-

 

예수님은 두려워하지 마라하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 앞에서 혹시 내가
두려워하는 것이 있는지 돌아볼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만일 우리에게 두려움이

있다면 주님께 의탁하지 못하는 무엇이 있기 때문은 아닌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
우리에게 두려움이 있다면 그것은 예수님이 아닌 감추어진 내 욕심이나

욕망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만물의 주재자인 그분은 나의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두셨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분은 나에 대해 알지 못하는 것이

없으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 하느님마저 속이고 싶어 하고
,
나아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나 자신마저도 속이고 살아갑니다. 진정 우리가

두려워할 것이 있다면, 주님이시며 아버지이신 하느님의 현존과 사랑을

깨닫지 못하고 사는 나의 현실일 것입니다. 나를 사랑해주시고, 나를 부르시는

그 하느님의 목소리를 들을 수만 있다면, 분명 참새보다 더 귀한 나의 존재를

깨달을 것이고, 두려움 없이 찬미의 노래를 그분께 올릴 수 있게 됩니다
.
오늘 나의 두려움은 어디서 오는지 스스로에게 질문해봅시다. 우리의 두려움은

일어날 수도,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는 미래를 오늘에 끌어다 놓음으로써

생기는 걱정이 그 실체일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세상의 주인이신 하느님의

마음을 닮으려고 노력하고, 스승이신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산다면 충분합니다.

창조주 하느님 아버지

-임원지 수녀-

 

오늘도 말씀을 앞에 두고 하루를 시작하는 이는 복되다. 중심 없이 휩쓸려 하루를 건너가지 않도록 방향 잡아주시는 말씀이 있는 줄 아는 이는 행복하다. 참새 두 마리가 한 닢에 팔리고 그런 값싼 참새 한 마리도 아버지 허락 없이는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고 하신다. 이 여리신 분이 영혼도 육신도 가혹하게 지옥에서 멸망시킨다고 하신다. 이 양면성의 아버지 하느님의 이미지는 잠시 당혹스럽다. 나의 머리카락 한 올마저 다 세어두신 나의 창조주 하느님 아버지, 참새보다 귀하지 못한 어느 순간이 내게 그분의 마음을 거슬러, 영혼도 육신도 멸망받아야 하는가 생각하니 도시 안심할 일이 아니다 싶다.

옛날 국제수련소에서 수련할 때, 나의 과테말라 동료 수련자 마리아 돌로레스 수녀는 어느 날 시편 84저의 임금님, 저의 하느님, 당신 제단 곁에 참새도 집을 마련하고 제비도 제 둥지가 있어 그곳에 새끼들을 칩니다. 행복합니다, 당신의 집에 사는 이들!”을 펴들고 내게 왔다. 마음속 하느님의 집에 제비도 참새도 우리와 함께 하느님 품 안에서 한자리 나누어 가지는 정겨운 모습을 그리면서, 우리는 감격하며 눈물을 글썽이던 적이 있다
.

그 하느님의 집 안뜰에는 나의 강아지도 있지만 음악도 시도 있으리라. 오늘 하루의 걱정은 오늘 하루로 족하다고도 하셨다. 오늘의 양식을 청하며 오늘 하루만을 위해 기도하며 살아보자. 귀하게 알아주시는 분의 현존 있으니, 우리는 언제나 가치롭지 않는가
!

오늘은 성 베네딕토 아빠스의 기념일. 노동의 고귀함을 알아 수도회 규칙에 노동을 넣은 성인을 생각하며, 부질없는 오만을 부수어 일하고, 저녁 어스름에 서로의 땀을 씻으며 찬미 노래를 부르고 싶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는 수많은 참새보다 훨씬 더 귀하다."

-양승국신부-

 <두려움>

 우리 인간이 지니게 되는 두려움이 무조건 부정적인 의미만을 띠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때로 두려움은 우리 자신의 생명을 보호하고 지속시키는 중요한 한 축을 구성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이란 존재는 참으로 미묘한 존재여서 생명을 위협하는 절박한 상황 앞에 서게 되면 거의 본능적으로 두려움을 느끼게 되고, 그로 인해서 자기 방어의 조치를 취하게 됩니다.

 우리에서 뛰쳐나온 호랑이를 길에서 만난다면 우리는 어떤 반응을 보입니까? 은행에 갔다가 총을 든 은행강도를 만났다면 우리는 어떤 반응을 보이겠습니까? 칠흑같이 어두운 밤, 양쪽이 낭떠러지인 벼랑길을 걸어갈 때 우리는 어떤 느낌을 갖겠습니까?

 다른 생각은 하나도 없지요. 오로지 두려움뿐입니다. 생명의 위협을 느끼는 두려움의 순간 우리 인간들은 자동적으로 위기 상황에서 벗어나고자 최선을 다합니다. 호랑이를 피해 시속 100 Km로 줄행랑을 치겠지요. 권총을 든 은행강도 앞에서는 다른 길이 없겠지요. 무조건 바닥에 엎드리는 수밖에. 한밤중에 벼랑 끝에 난 길을 걸을 때는 아주 조심해서 조금씩 앞으로 나아갈 것입니다.

 결국 두려움은 우리 인간을 쫀쫀하게 만들기도 하지만 생명의 위협이나 위기 상황 앞에서 생명을 지속시켜나가는 원동력이 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하느님 두려워하는 마음은 우리의 영적인 삶을 질적으로 향상시킵니다. 우리를 보다 영적으로 쇄신된 인간으로 만들어 갑니다.

 이렇게 두려움이란 우리의 영적인 생활을 위해서, 그리고 인간 존재 그 자체를 위해서 꼭 필요한 감정입니다.

 그러나 때로 너무 지나친 두려움은 우리들의 삶을 속박시킬 뿐만 아니라 기도 제대로 못 피고 위축된 삶을 살아가게 만듭니다.

 가끔씩 아직 벌어지지도 않은 상태에서 무조건 비관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아 안타깝습니다. 일이 의외로 쉽게 잘 풀릴 수도 있을텐데, 꼭 최악의 상황만 예견하면서 고민하고 괴로워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부정적인 의미의 두려움은 우리의 존재 자체를 부정적으로 이끌어 갑니다. 그러면서 겪게 되는 고통은 또 얼마나 심한 것인지요.

 때로 한번 스쳐 지나가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때로 정말 아주 시시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소화해내지 못하고 밤잠도 제대로 못 이루면서 괴로움과 좌절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도대체 왜 그럴까요?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겠습니다만 다른 무엇에 앞서 "하느님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 지난 과거 안에서 아직 치유되지 않은 상처들, 분노 등등이 우리 삶을 짓누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죽어도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 맺힌 마음이 우리 마음 안에 자리잡고 있는 한 자기 쇄신의 길, 자기 정화의 길은 요원하기만 합니다.

 두려움에 대한 가장 좋은 처방전은 사랑입니다. 이유를 묻지 말고 감싸주는 것입니다. 또한 두려움에 대한 가장 좋은 처방전은 "당당한 직면"입니다. 그것이 힘들다면 깨끗한 포기입니다.

 "결국 한번은 죽을 목숨인데" 하는 마음, "가보는데 까지 한번 가보자"는 담대한 마음이 의외로 좋은 결과를 가져오기도 합니다.

 오늘 하루 하느님 그분 앞에 송두리째 우리 자신을 봉헌하는 하루가 되면 좋겠습니다. 길고 짧고 따지지 말고 무조건 그분을 한번 믿어보는 오늘 하루가 되시길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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