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15주간 월요일(마태10,34-11,1)

2011. 7. 11. 오전 5:29:10

글자
 

 

2011년 7 11일 월요일 성 베네딕토 아빠스 기념일

 

 

베네딕토 성인은 480년 무렵 이탈리아 중부 누르시아에서 태어났다. 로마에서 학업을 마친 다음 스무 살이 되었을 때 수도 생활에 관심을 갖고 수비아코 동굴에 들어가 3년 동안 고행과 기도를 하며 은수 생활을 하였다. 성인의 성덕이 알려지며 많은 사람이 모여들었고, 마침내 공동생활을 하는 수도원을 창설하였다. 성인이 만든 수도 생활 규칙서는 서방 교회 수도 생활의 표준 규범서 구실을 할 정도로 수도 생활의 완덕을 실천하는 지침으로 활용되고 있다. 성인은 547년에 세상을 떠났고, 1966년 바오로 6세 교황이 성인을 유럽의 수호성인으로 선포하였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내 사람이 될 자격이 없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내 사람이 될 자격이 없다.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도 내 사람이 될 자격이 없다.
(마태 10, 34~11,1)

 

 

"Whoever loves father or mother more than me
is not worthy of me,
and whoever loves son or daughter more than me
is not worthy of me;
and whoever does not take up his cross
and follow after me is not worthy of me.

 

 

 

 

말씀의 초대

요셉을 알지 못하는 이집트의 새 임금은 이스라엘 백성이 큰 민족으로 불어나는 것을 두려워하여 그들을 억압하기 시작한다. 마침내 파라오는 히브리인들에게서 태어나는 남자 아이는 모두 강에 던져 버리라고 명령한다(제1독서). 주님께서 칼을 주러 오셨다고 하신다. 세상에 대한 집착을 잘라 내고 오로지 주님께만 마음을 바치라는 뜻이다. 참된 평화는 세상에 대한 온갖 집착과 욕망을 잘라 내고 거기서 해방되어야 누릴 수 있다(복음).

 

☆☆☆

오늘의 묵상

외유내강(外柔內剛)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겉으로는 부드러워 보이지만 속은 꿋꿋하고 곧다는 뜻입니다. 내적으로 강하다는 것은 고집이 세서 다른 사람과 타협할 줄 모르는 것과는 달리, 자신의 신념과 가치관에 따라 자신에게는 엄격하되, 타인에게는 부드럽고 남을 있는 그대로 이해할 줄 아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칼은 상대방을 향해 휘두르는 칼이 아니라 자신을 향해 있는 칼입니다. 마치 우리나라의 전통 검법(劍法)이 다른 사람을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지키고 호연지기(浩然之氣)를 기르려고 갈고 닦는 것처럼, 주님께서 주시는 칼은 신앙의 가치를 지키고 영적인 수련을 위해 필요한 내면의 칼입니다. 그 칼로 주님을 따르는 데 방해가 되는 세상에 대한 온갖 집착과 산란한 마음을 단호하게 잘라 내라는 뜻입니다. 심지어 가족마저도 예수님을 따르는 데 유혹이 된다면 거기서 벗어나라고 말씀하십니다. 삶 속에서 안주하는 거짓 평화를 단호히 거부하고 잘라 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요한 14,27)라고 하셨습니다. 날카로운 양심으로 자신의 내면을 갈고 닦는 영적 수련을 하지 않으면, 거짓 평화를 진짜 평화로 착각하며 살게 됩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주시는 참평화를 찾을 때까지 우리를 휘감고 있는 거짓 평화와 싸워야 합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우리에게 칼을 주신 이유입니다.

 

 

 

 

 

칼을 주러 왔다

  -반영억신부-

칼은 좋은 것입니다. 꼭 필요합니다. 주방에서도, 과일이나 연필을 깎을 때에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사람을 위협하는 엉뚱한 일에 쓰이기도 합니다. 좋은 것이지만 잘못 쓰임을 받으면 좋지 않은 것이 되고 맙니다. 칼은 칼로 존재하는데 사용하는 사람에 따라서 좋기도 하고 나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만들어진 목적에 따라 잘 사용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를 당황하게 만듭니다. 더군다나 아들이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갈라서고 집안 식구가 바로 원수가 된다고 하니 정말 귀가 막힐 일입니다. 어찌 구원자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시나요? 사랑 자체이신 분이 이리 무서운 말씀을 하시나요?

 

그러나 하느님의 나라는 이렇게 옵니다. 죄악을 거부하는 결단의 칼을 써야 합니다. 매 순간 선을 선택하는 결단의 칼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운명은 분명 다르게 나타나게 마련입니다. 주님께서는 구원을 원하시지만 칼을 사용하는 사람에 따라서 좋기도 하고 나쁘기도 한 것과 같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칼의 의미를 잘 알아야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구원의 투구를 받아쓰고 성령의 칼을 받아 쥐십시오. 성령의 칼은 하느님의 말씀입니다.(에페6,17) 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히브리서 4장 12절에서는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 속을 꿰찔러 혼과 영을 가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 마음의 생각과 속셈을 가려냅니다. 하느님 앞에서는 어떠한 피조물도 감추어져 있을 수 없습니다. 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말씀 받아들여 참된 경외심과 두려움을 갖는 사람과 그릇된 욕망을 가진 사람을 갈라놓는다는 말씀으로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로 향할 것인가? 아니면 돌아설 것인가? 이에 대한 태도는 집안 식구가 다 각각일 수 있습니다. 그러니 서로의 견해가 다르고 받아들이는 믿음의 정도가 다르기 때문에 원수가 될 수도 있습니다. 특히 집안 식구는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집착’에 빠져 옭아맬 수 있어 서로의 마음이 상하고 적대감을 지닐 수 있으며 큰 원수가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할 것은 하고 아니오 할 것은 아니오 라고 해야 합니다. 갈라진 마음이나 어정쩡한 결단으로는 결코 아무것도 얻을 수 없습니다.

 

결국은 성령의 칼을 선택함으로써 그 모든 것이 하느님 안에서 열매 맺게 되고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로 넘쳐 나게 될 것입니다.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 지는 일도, 겁을 내는 일도 없도록 하여라.(요한 14,27) 하느님을 우선 선택하면 다른 모든 것은 덤으로 얻게 됩니다. 하느님을 얻으면 부모와 형제와 이웃을 새로운 양식으로 사랑하게 되고 결코 원수가 될 수 없습니다. 하느님 안에서 하느님을 위하여 더 큰 사랑으로 이웃을 사랑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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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우들과 잘 어울리는 자매님이 있었습니다. 성지 순례도 함께 가고 야외 행사 때도 가끔 눈에 띄었습니다. 그런데 성당에는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교우인 것은 확실한데 미사 참여는 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우연히 모임에서 만날 수 있었기에 사연을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뜻밖의 대답을 했습니다.
시어머니가 절에 다니는 관계로 잠시 쉬고 있다는 겁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나면 나올 것이라 했습니다. 전임 본당 신부님께는 말씀을 드리고 허락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미안한 표정을 역력히 드러냈습니다. 가정의 평화를 위해 시어머니에게 양보하고 있다는 말이었습니다.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예수님께서는 믿음을 양보의 대상으로 삼지 말라고 하십니다. 오히려 그런 처지를 십자가로 여기며 받아들이라고 하십니다. 자신이 양보하고 물러서면 훗날 자신의 며느리에게도 같은 조건을 요구하게 됩니다. 그 자매님은 시어머니에게 최선을 다해서로 공존하는 신앙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사회는 다양해졌습니다. 신앙인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고 싫어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노골적으로 공격하고 모멸하는 이들도 엄연히 존재합니다. 우리는 평화가 아니라 이 난무하는 현실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입니다. 무슨 뜻으로 이 말씀을 하셨을까요? 이 말씀을 예전에는 종말이나 박해 시대를 염두에 둔 해석으로 설명해 왔습니다. 그렇더라도 성경의 말씀으로 받아들이기에는 너무 힘이 듭니다.
두 사람이 길 하나를 가운데 두고 같은 장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자연히 그들은 라이벌 관계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어느 날 천사가 나타나 그중 한 사람에게 말했습니다. “네가 바라는 것이 무엇이냐? 다 들어주겠다. 대신 길 건너 상대방에겐 그 배를 주겠다. 말해 보라.”
한참을 생각한 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바라옵건대, 제 눈을 하나 뽑아 주십시오.” 자기 눈 하나를 뽑으면 상대방은 두 눈을 뽑히게 된다는 계산으로 그렇게 말한 것입니다.
우리 주위에는 이런 식으로 사는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유산 때문에 부모와 자식이 갈라지거나 형제간에 원수가 된 예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돈과 재물을 삶의 중심으로 여겼기에 나타나는 결과입니다. 우리는 마음속의 탐욕을 먼저 정화시켜야 합니다. 주님께로 가는 데 방해되는 일이라면 그 무슨 일도 한 발자국 물러나서 살펴보아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어떤 형태로든 복원시켜 주시기 때문입니다.

☆☆☆

 

 

 

 

오늘 복음 말씀 가운데 한 구절의 옛날 번역에는 “부모나 자식을 미워하지 않으면 나를 따를 수 없다.”고 되어 있었던 것으로 어렴풋이 기억됩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참으로 모질다고 여겨졌습니다. 훗날 이것은 히브리 말의 비교급으로, 부모님을 사랑해야 하지만 그보다 주님을 더 사랑하지 않으면 그분을 따를 수 없다는 의미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과 생사고락을 함께하려면 그만한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와 생사고락을 함께하고자 하십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주님을 그 누구보다 사랑하여야 합니다.

 

 

버림과 따름의 미학

-이훈 신부-

 

예수님은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왔다고 선언하십니다. 전쟁의 역사를
살아온 인류는 칼을 향해서 죽음을 떠올릴지 모릅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선언하시는 칼은 생명의 칼, 진리의 칼, 믿음의 칼, 신앙의 칼입니다.
복음은 집안 식구가 원수가 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가족이
내 신앙의 걸림돌이며, 나 또한 가족들의 믿음에 걸림돌이 되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렇듯 걸림돌로 작용하면서, 탓을 남에게 전가하고 있지는 않은지 질문할 때입니다.
원조의 죄를 사랑의 측면에서 보자면, 아담이 지은 죄는
하느님보다도 하와를 더 사랑한 죄일 것입니다. 예수님도 또한 하느님보다
아들이나 딸을 더 사랑하는 사람은 합당하지 않다고 선언하십니다.
예수님은 복음을 선포하는 것이 지상목표였고, 복음을 선포하기 위해서
떠나가고 계십니다. 복음은 무엇인가요. 기쁨의 말씀입니다. 따라서 복음을
믿는 사람은 기뻐야 하고, 복음을 사는 사람은 애착이나 집착이 아닌
하느님을 향해 열린 자유스러움을 가져야 합니다. 만일 우리에게
기쁨이 없다면 우리의 신앙은 헛된 믿음이 될 것입니다.

 

 

 

 

 

 

형제자매로 대접하기

-임원지 수녀-

 

서로 사랑하라 하시고, 또 가장 중요한 것은 지금 그리고 여기라 하시고서, 사랑하라고 내 지금과 내 여기를 주시며, 가장 가까운 이들부터 미워하라고 하시는 그 말씀은 사랑이 참으로 맹목적일 수 있음을 가르치시는 것 아닌가. 그리고 이웃 사랑은 쉬운가. 십자가가 따로 없다. 그런 말이 있다. “잘들 지내 시나요?” “, 잘들 지내지요, 개와 고양이처럼.” 개와 고양이가 만나 함께 살고 있으니 무슨 설명이 필요하랴. 취향이 다르고 말이 통하지 않을 때 견뎌내기만도 고역이다. 평생을 해로하는 부부들은 얼마나 훌륭한가. 주님께 합당하
려면 우선 나를 참아주는 이들의 노력부터 생각하고 감사해야 하리라.
예언자를 예언자로 대접하면 예언자가 받을 상을 주신다 하신다. 지학순 주교님이 북한에도 사람이 살더라 하시던 말씀이 충격적인 시절이 있었다. 월드컵이나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이나 김연아의 경기 때는 하나가 되다가도 정치나 사상, 이념이 개입되면 이 작은 나라가 4 5열 되니 부끄럽다. 우리는, 교회는 얼마나 수시로 기도로 정화되어야 하는가. 수하든 장상이든, 노인이든 어린이든, 남이든 북이든, 서로 갈리지 말고 형제로 자매로 대접하면 그 상을 주신단다. “자주 의무를 소홀히 하였나이다.” 하고 미사 때마다 가슴 치는 일이 그냥 형식에 그치고 있음을 자주 나에게서 남에게서 빤히 드러나 보인다. 내가 하느님과 어떤 관계인지 확인하고 싶으면, 내 이웃을 내가 어떻게 만나고 있는지 보라시던 어느 신부님 말씀은 사실 무섭다.

 

 

모든 이에게서 주님을 만날 수 있기를

-상지종신부-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내 사람이 될 자격이 없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내 사람이 될 자격이 없다.

 

누군가 나의 손을 잡아주며 일으켜 줄 때,  주님의 손길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은...

 

누군가 나의 어깨 두드리며 '힘 내'라고 말 건넬 때주님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사람은...

 

누군가 나의 슬픔에 함께 눈물을 흘릴 때,  주님의 위로에 감사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군가 나의 외로움을 환한 웃음으로 달랠 때주님의 넉넉함에 기뻐할 수 있는 사람은...

 

언제나 주님과 함께 하는 사람입니다 모든 이 안에서 주님을 만나기 때문입니다.

 

누구보다 주님을 먼저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모든 이가 곧 주님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누구보다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자신의 것 모두가 곧 주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이기는 승리의 길은 곧 우리의 믿음입니다."(1요한 5,4)

받아들임

-남상근 신부-


어릴 적 그리도 좋던 친구들, 그냥 같이만 있어도 좋던 친구들이었는데 이젠
친구들을 믿지 못하는 내가 되었습니다. 지난번에 나한테 한 그 친구의 날카로운
말 한마디가 아직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웃기지도 않은 이야기에도
친구이기 때문에 웃어주곤 했는데, 이제는 아무리 그가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도 ‘별 싱거운 녀석 같으니’ 하면서 면박을 주기도 합니다. 그러다 보니 언제라도
불러서 시간을 지낼 수 있는 소중한 친구를 잃어버렸습니다. 사람을 그냥
그 사람으로 받아들이는 것, 쉬운 듯 어렵습니다. 친구임에도 친구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이런 저런 온갖 생각을 하게 됩니다. 친구 사이에 끼어든 그 많은
‘친구’답지 못한 것들이 우리들 사이를 어렵게 만든 것이지요.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주님으로 받아들이는 이에게 상을 주시겠답니다.
받아들이십시오. 그리고 상대에게 주십시오. 나도 받아들여집니다.
내게도 주어집니다. 할 수 있었음에도 손해나는 일이기에 마다한 일이 혹시
있지 않은지요? 억울해하며 억지로 하지 않았는지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물 한 잔에도 댓가가 있을 것이며, 환한 미소 한 모금에도 반드시
상이 따를 것이라 하십니다. 하여 그 어떤 것도 손해가 아닙니다.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로 갚아주신다니 모든 착한 일은 그냥 흩어지지 않습니다.

 

채우기 위해서는 비워야 한다

-노성호 신부-


텔레비전 드라마를 즐기는 편은 아니지만 간혹 채널을 돌리다 보면 시선이 고정되는 드라마를 만나게 된다. ‘주몽’이 그 중 하나였다. 여러 명장면 중 기억에 남는 것은 주몽과 비류의 군장 송양이 만나는 부분이다. 피를 흘려가면서까지 새로운 나라의 건국을 도모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한 주몽이 송양을 찾아갔다. 송양은 주몽에게 독배와 술잔을 내놓으며, 이 둘을 가려내야만 졸본의 통합을 이루기 위해 하늘이 선택한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하겠다고 했다. 주몽은 자신의 안위나 목숨은 생각하지 않고 과감하게 두 잔 술을 모두 마셔버린다. 만일 주몽이 그 상황을 모면하려 했다든지 다른 이유를 대면서 주저했더라면 결코 송양의 마음을 얻지 못했을 것이고, 졸본의 통합을 기점으로 이루어진 천하대업은 꿈도 꾸지 못했을 것이다.
무엇인가를 얻고자 하면 반드시 수고나 노력, 희생이 수반되어야 한다. 가만히 있어도 얻게 되는 것은 그만큼 의미도 없을 것이고, 얻으려는 것에 대한 소중함도 모르게 될 것이다. 결국 ‘얻기 위해서는 버려야 한다.’는 역설적인 등식이 성립하는데, 오늘 예수님의 말씀이 이 진리를 뼈저리게 느낄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신다.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아집·집착·욕심·시기·질투·탐욕으로 얼룩져 있는 자신을 버리면서 예수님을 증거하고, 그분의 삶에 동참하면서 새로운 모습으로 거듭 나야 한다. ‘과거의 나’가 가지고 있던 목숨을 버리면 ‘새로운 나’는 새 생명을 간직하고 주님과 하나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주몽의 무모해 보이면서도 과감했던 행동은 더 큰 것을 얻기 위한 작은 버림의 모습으로 비춰지게 되고, 인류 구원을 위한 예수님의 자기 희생이 세상 사람한테는 의미 없는 죽음처럼 여겨지지만 우리한테는 그 무엇과도 비교될 수 없는 위대한 업적이 된다. 얻기 위해서는 버릴 줄 알아야 하고, 더 많은 것을 채우기 위해서는 지금 가지고 있는 것을 버릴 줄 알아야 하며, 도약하기 위해서는 잠시 몸의 힘을 빼고 긴장을 풀면서 쉬어야 한다.

 

생명있는 언어, 생명있는 진리가 존재한다면

-남을우-

 

 

요사이 세상살이를 보고 있노라면 참 요지경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내 비위에 맞으면 좋은 사람이고, 내 비위에 맞지 않으면 옳지 않다고 떠들어 댑니다. 그러다 보면 목청 큰 사람이 겉으로는 승리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어느 편이 옳고 그른가는 각자의 입장에서 이야기하게 되는 것이니 어느 편이 진리인지, 어느 것이 옳은 것인지 분간하기 어려워집니다. 더구나 인터넷에 뜨고 지는 네티즌들의 언어가 점점 메마르고 공격적으로 되어가고, 자신의 진리만을 고집하고 타인에게 강요하는 오만함까지 보입니다.

여기서 잠깐 상념에 젖어봅니다. 생명있는 언어, 생명있는 진리가 존재한다면 이러한 몰이해적인 반응은 일어나지도 존재하지도 않을 텐데.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아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마태 10,34)고 하신 말씀이 떠오릅니다. 칼은 옳고 그름의 바른 잣대를 상징하지요. 정의가 바로 설 때 진리가 살고 평화가 온다는 것을 우리에게 일깨워 주신 말씀입니다.

그런데 그 진리의 기준이 무엇이냐가 문제겠지요. 그것은 인간이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세상을 창조하신 하느님의 태초적인 가르침에서 온 것이 아닐까 합니다. 하느님으로부터 온 생명의 언어, 생명이 담긴 진리, 이것이 우리에게는 가장 소중한 재산이며, 현실에서 펼쳐야 할 우리의 소중한 몫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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