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14주간 금요일 (마태10,16-23)

2011. 7. 8. 오전 7:04:08

글자

 

2011 7 8일 연중 제14주간 금요일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성령이시다.
(마태오 10,16-23 )

 

You will be given at that moment
what you are to say.
For it will not be you who speak
but the Spirit of your Father speaking through you.

 

 

 

 말씀의 초대

요셉은 자신을 이집트로 팔아넘긴 형제들과 화해한다. 이스라엘의 온 가족이 새로운 터전인 이집트로 간다. 이때 하느님께서 야곱을 부르시고, 큰 민족을 만들어서 다시 데리고 올라오시겠다고 약속하신다. 요셉은 아버지 이스라엘을 만나 함께 기쁨의 눈물을 흘린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당신 이름 때문에 제자들이 박해를 받을 것을 예고하신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총독들과 임금들에게 끌려가더라도 무엇을 말할지 아버지의 영께서 일러 주시리라고 말씀하신다. 박해를 견디고 이겨 낼 수 있는 힘은 주님에게서 나온다(복음). 

☆☆☆

오늘의 묵상

분명한 가치관을 가지고 인생을 사는 사람과 그러지 못한 사람은 크게 다릅니다. 자기 안에 가치관이 정립된 사람은 어떤 문제에 부딪혔을 때 가치에 따라 자신을 식별하고 어떻게 대응할지를 선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가치관이 정립되지 않은 사람은 감정에 따라 반응하기 때문에 늘 환경에 끌려다니게 됩니다. 『성공하는 사람들의 일곱 가지 습관』을 쓴 스티븐 코비 박사는 이를 ‘주도적인 사람’과 ‘대응적인 사람’으로 구분하여 표현합니다.
‘신앙인’은 주도적인 사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르쳐 주신 가치를 중심에 두고 사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앙인은 어떤 문제에 부딪힐 때 감정과 분위기에 휩쓸리지 않고 신앙의 가치로 식별하고 주도적으로 대응하는 사람입니다. 곧 자신에게 닥친 문제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대응하실까?’를 마음속으로 물으며 예수님의 방식으로 대응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어떤 박해가 있더라도 무엇을 말할지 걱정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무엇을 말해야 할지 성령께서 일러 주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도 무슨 일이 닥칠 때마다 마음속으로 “주님, 주님께서는 이 문제를 제가 어떻게 하길 바라십니까?” 하고 묻는 기도를 하면 도움이 됩니다. 평소에도 이런 훈련을 하고 성령께 귀 기울이는 연습을 하면 주도적인 사람이 됩니다. 이런 사람은 어떤 일에서나 늘 평상심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 박해 때가 아니지만 새겨야 할 말씀입니다. 신앙생활이 귀찮다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믿음이 발목을 잡아 일상이 힘들다는 이들도 있습니다. 남들은 놀고 있는데 성당 가는 것이 쉽지 않다는 하소연입니다.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변명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어떻게 말할까,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라고 하십니다. 신앙 때문에 손해 보도록 내버려 두지 않으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믿음의 길을 무겁게 생각할 이유가 없습니다. 주님께서 한 번만 봐 주셔도 우리 인생은 얼마나 달라질는지요? 결코 독선의 하느님은 아니십니다. 좋은 결론으로 이끌어 줄 분이십니다. 그러니 언제라도 조용히 주님의 길을 걸어야 합니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다.” 그분의 영은 그분의 입니다. 주님의 힘이 우리 안에 머물러 계시면 우리의 삶은 바뀝니다. 어떤 경우에도 두려워하지 않는 삶으로 변화됩니다.
하느님의 힘을 느끼는 것이 신앙생활의 열쇠입니다. 믿음이 힘겨운 것은 그분의 영을 깨닫지 못한 탓입니다. 걱정 속에서도 걱정 없는 듯이기도하면 그렇게 이루어 주십니다. 두려움 속에서도 두려움 없는 듯이믿으면 주님의 영께서는 당신을 드러내십니다.

 

 걱정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없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께서는 걱정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텔레비전과 신문은 연일 살기 힘든 세상을 전해 줍니다. 그럼에도 예수님께서는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사실 마음 졸이고 안달한다고 내일이 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힘든 미래가 바뀌는 것도 아닙니다. 저만치 내리는 비를 미리 뛰어가서 맞을 이유는 없습니다.
예전에는 의식주에 관한 걱정이 많았습니다. 먹고 입고 잠자는 걱정이었습니다. 오늘날에는 그 걱정의 질이 많이 달라졌습니다. 삶의 폭이 넓어진 만큼 걱정도 다양해졌습니다. 그러기에 능력 밖의 걱정거리가 생겨납니다. 자신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근심거리를 만나기도 합니다.
“어떻게 말할까,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너희가 무엇을 말해야 할지, 그때에 너희에게 일러 주실 것이다.” 오늘 복음에서 들은 예수님의 이 말씀은 당신께 철저하게 맡기며 살라는 뜻입니다. 미리 대비한다고 두려움이 없어지는 세상도 아닙니다. 주님의 보호를 느껴야 두려움은 사라집니다. 걱정도 습관입니다. 습관이 굳어지면 작은 걱정이 어느새 큰 걱정으로 바뀝니다.
순교자들은 모든 것을 포기했기에 걱정하지 않았습니다. 더 잃을 것이 없는 처지로 몰렸기에 자유로웠습니다. 지금은 박해 시대가 아닙니다. 하지만 순교의 삶을 살 수는 있습니다. 맡기는 생활의 훈련입니다. 작은 걱정부터 맡기는 실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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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서 뱀은 지혜로운 동물로 인정되고 있습니다. 지혜롭다 못해 간교한 동물로 표현됩니다. 창세기 3장에서 하와와 대화하는 장면에서 이러한 모습이 잘 드러납니다. 비둘기는 양순함을 상징합니다. 세상에 복음을 전하려고 예수님을 뒤따르는 사람들은 지혜로워야 합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간곡히 당부하시는 것입니다.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하게 되어라.” 그런데 걱정입니다. 비둘기처럼 멍청하고 뱀처럼 교활하지 않을까 염려스럽습니다. 슬기롭지 못하면 몸이 고생하기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미련하여 자기 몸이 고단한 것은 그렇다손 치더라도, 안타깝게도 함께 일하는 사람들이 고생하기 때문입니다.

☆☆☆ 

중세 때부터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 하나입니다.
소년 마리오와 안셀모는 아주 가까운 친구였습니다. 마리오가 수도원에 들어가자 안셀모는 친구에게 말하였습니다. “위대한 설교가가 될 수 있도록 기도할게.” 그 뒤로 안셀모는 마리오를 위하여 정성을 다해 기도하다가 결국 마리오가 있는 수도원에 들어갔습니다. 매일 마리오를 보면서 그를 위해 기도하는 것이 안셀모의 즐거움이었습니다.
세월이 흘러 마리오는 사제가 되어 첫 설교를 하였습니다. 안셀모는 떨리는 가슴으로 기도하고 또 기도했습니다. 마리오 역시 군중 속의 안셀모를 보는 순간 용기가 솟았습니다. 수도원이 생긴 이래 최고의 설교라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청중은 감동했고, 마리오는 단박에 위대한 설교가로 떠올랐습니다. 여러 곳에서 설교 요청이 들어왔고, 가는 곳마다 그림자처럼 안셀모 수사가 있었습니다.
마침내 마리오는 명성이 자자한 주교가 되었습니다. 어느 날 그는 안셀모 수사를 우연히 만났으나 너무 바쁜 나머지 그냥 지나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면서 마리오 주교는 안셀모를 조금씩 잊어 가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마리오 주교는 여느 때처럼 설교를 시작했는데 어쩐 일인지 불안한 느낌이 들면서 마음이 공허해졌습니다. 지난날의 습관처럼 안셀모 수사를 찾았으나 그 자리에 없었습니다. 알고 보니, 안셀모가 몹쓸 병을 얻어 바로 전날 숨을 거둔 것입니다. 그는 운명하면서도 마리오 주교가 걱정할까 봐 소식을 전하지 못하게 한 것입니다.
그 뒤로 마리오 주교의 설교는 번번이 청중에게 별 감동을 주지 못하였습니다. 청중의 실망스러운 눈빛에 마리오 주교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무리 애써 보아도 예전처럼 영혼을 휘어잡는 강렬한 설교가 나오지를 않았습니다.
결국 마리오 주교는 ‘안셀모의 기도를 들어주시는 하느님께서 말씀의 주체이시고 자신은 그분의 말씀을 전하는 목소리’임을 깨달으면서 예전의 모습을 되찾았습니다.

 

 

걱정

- 홍금표 신부-

 

걱정하지 말고 박해를 견디라! 한동안 우리 사회는 아이들의 성공적인 삶을
위해 지능지수(IQ)를 강조했습니다. 그러나 이후 감성지수가 관심의 대상이
되던 시대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인생에는 지능이나 감성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있는데 그것은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도덕지수와 고통을 견디는
능력들이 성공적인 삶을 위해 필요하다는 사실입니다. 교육현장에서 도덕지수(MQ)
용어가 사용되고 유행처럼 번졌던 극기훈련도 이러한 이론을 바탕에 두고
있습니다. 구원도 같은 이치입니다. 박해라는 고통스런 상황을 어떻게
견디느냐에 따라 구원의 열쇠가 거기에 있다는 말씀입니다.
걱정하지 말라는 말도 같은 의미입니다. 이 말은 걱정해야 할 상황에서
걱정하지 말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성경에 나오는 걱정이란 말은 해야 할
일이나 사명을 위하여 기울이는 적극적인 관심을 말합니다. ‘한 가지 필요한
(하늘 나라)’을 위해 현세에 대한 모든 걱정을 포기하라고 요구하는 것이
걱정에 대한 성경의 정의입니다. 때문에 걱정하지 마라는 말씀의 요지는
성령에 대한 믿음 안에서 미래에 일어날 일에 대한 관심으로 마음의 중심을
잃어서는 안 된다는 말씀과 함께, 미래에 대한 걱정으로 현재 나에게 부여한
중요한 사명, 즉 복음 선포를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예수님 때문에

- 강석진 신부-

 

대체로 사람들은마음의 평안을 얻고참된 사랑과 진정한 행복을 추구하며’, 또는잘살고 싶은 마음에서 신앙을 갖는다고 합니다. 유한 (有限)한 세상에서 무한 (無限)을 꿈꿀 수 있는 신앙의 가치, 모든 것이 다 변한다 할지라도 절대자인 그분의 변함없는 사랑에 대한 온전한 의탁 등은 신앙 안에서만 맛볼 수 있는 행복이기에 그러한 생각을 할수록 마음 한편에 잔잔한 기쁨이 젖어드는 듯합니다.

바로 그때, 복음에서 예수님은 우리에게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말씀의 배경은 예수님을 믿고 따랐던 초대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심각한 박해 상황에 대한 긴박한 묘사와 그 당시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현실을 한마디로 말해 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순교 역사가 지나가고 오늘날 대부분의 나라가 종교의 자유를 표방하는 이 시점에서 이 말씀을 과연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지나온 교회 역사에서예수님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았다면, 이제 우리는예수님때문에 모든 사람들에게 미움 받을 짓 (?) 을 오히려 더 충실히 해야 하는 존재가 아닐까 합니다. 물질만능이 팽배한 세상에서 비움과 나눔의 삶을 살아가면서 그것이 참으로 아름다운 삶임을 보여줄 때, 성적인 문란과 인간 생명이 경시되는 세상에서 배우자에 대한 진실한 사랑과 성가정이 누리는 행복, 그리고 인간 생명에 대한 소중함이 무엇보다 우선적 가치가 되는 삶을 살아갈 때, 이 세상에 하느님이 없는 것처럼 사는 이들에게 그분의 사랑이 얼마나 인생을 긍정적으로 살게 해주며, 그 어떤 어려움과 고통, 고난과 슬픔 속에서도 다시금 의연히 딛고 일어설 수 있는 힘이 있음을 보여줄 때!

세상의 사고와 판단에 맞서 주님 안에서 누리는 건강한 양심과 아름다운 가치를 믿고 살아가는 우리의 미움 받을 짓 (?) 이 어쩌면 세상을 사랑하는 삶이며, 이 세상이 바로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된 세상임을 용기 있게 드러내는 삶이 아닐까 합니다. 문득 세상의 미움을 더 많이 받을 수 있도록, 내가 내 가족과 이웃 안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드러내는 삶을 살아간다면! 그런 미움, 매일 매일 받아도 좋겠네.

 

나를 싫어하게 하라

-남상근 신부-

 

모두가 나를 좋아한다면 문제가 있습니다. 아무도 나를 꺼리지 않는다면
수상한 것입니다. 마냥 좋기만 한 평가를 받는다면 조심하십시오
.
세상에서 인정받는 것이 주님께서 인정하시는 것과 일치하지만은 않는

법입니다. 독불장군처럼 살라는 것은 아닙니다만,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라는 말씀을 새겨보면 그렇습니다
.
그리스도인이기에 세상으로부터 받을 수밖에 없는 미움이

반드시 있어야만 합니다. 복음을 내 삶에서 온전히 지켜내기 위해서

더러 미움받기를 원해야 합니다. ‘왜 그렇게 사람이 꽉 막혔어’ 내지는

‘융통성이라곤 도무지 없네’, ‘혼자서만 거룩한 척하네’, ‘다들 그렇게 사는데

왜 튀게 살아.’ 누군가로부터 이런 말을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면

그것은 아마도 나의 삶이 복음과 무관하게 흘러가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
그분의 이름 때문에 미움받지 못함을 부끄러워해야 마땅합니다
.
그러니 모두로부터 받는 인정을 구할 것이 아니라, 미움받을 것을

불사하고라도 마냥 좋은 사람이 되려는 환상에서 벗어나

주님 보시기에 충실한 믿음의 사람이 되기를 청합니다.

 

주님은 언변의 마술사

-노성호 신부-

 

말주변도 없고, 사람들 앞에만 서면 얼굴부터 붉어지는 인물의 전형이 바로 나다. 왜 그리 멋쩍고 창피하던지 뭐라 말할 수가 없었다. 무엇인가 발표할라치면 원고를 준비하고 충분히 연습한 끝에 시도하는데, 그래도 그 시간이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학창시절에는 ‘어떻게 이다음에 사제가 되어 강론을 할 수 있을까?’ 하고 내심 걱정도 많이 했다.
그런데 참으로 놀라운 일은 부제가 된 이후에 벌어지기 시작했다. 부제품을 받고 처음 강론하던 날,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원고를 준비하고 강론대에 섰는데 긴장한 탓에 신자석에 앉은 교우들의 얼굴은 고사하고 강론 원고도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마음을 가다듬고 무작정 입을 열었다. 시작 부분은 좀 얼버무리고 주제에서 어긋나는가 싶었는데, 이게 어찌 된 일인가? 점점 교우들의 얼굴이 눈에 들어오고 원고 없이도 강론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놀라웠다
.
사제가 된 후에 하느님의 은총이 나에게 내리고 있다는 것을 가장 크게 느끼는 때는 강론할 때인 것 같다. 강론 준비를 잘하는 날도 있지만 때로는 이런저런 일들에 치이다가 그만 준비도 못하고 미사를 봉헌하는 경우도 있다. 처음에는 좀 당황스럽고 어떤 말을 해야 좋을지 막막하기만 했는데, 요즘엔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다. 하느님께서 그때마다 내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일러주실 거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믿음을 빌미로 강론 준비를 게을리하는 것은 아니지만, 나한테는 하느님께서 참으로 살아 계시며 당신 일을 하실 때 나를 당신 도구로 쓰고 계신다는 것에 대한 깊은 확신이 생겼다
.
신앙인은 주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실천하면서 세상에 복음을 전해야 할 책임과 의무가 있다. 때로는 복음을 전할 때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하고 두려울 때도 있을 것이다. 또한 그들의 냉대와 무관심 속에서 의기소침할 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걱정할 필요가 없다. 끝까지 견디는 이한테는 구원이 따를 것이고, 주님은 우리의 커다란 힘이 되어주실 것이며 하느님의 영이 우리 안에서 우리 대신 말씀해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연중 제14주간 금요일

- 전열 신부

 

1.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에게는 자신에 맞는 처세술이 있습니다. 이 모든 처세술은 결국 세상을 성공적으로 살아가기 위한 지침과도 같습니다. 세상의 가치관으로 세상을 성공적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도 이처럼 치열한데, 그리스도인으로서 세상을 살아가는 데야 오죽하겠습니까! 오늘 복음의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을 세상에 파견하시면서 몹시 걱정이 되었나 봅니다. “이제 내가 너희를 보내는 것이 마치 양들을 이리떼 가운데 보내는 것과 같다”하십니다. 그러면서 목자 예수님은 양들에게 닥쳐올 위험을 말씀하십니다... 의회에 넘겨져서 매질을 당할 것이요 채찍질 당할 것이며 총독과 왕들에게 끌려가 재판을 받을 것이며 서로 고발하여 죽게 할 것이며 예수님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런 어려움을 이겨내기 위해 처세술을 가르쳐 주십니다.
“뱀같이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서에서 뱀은 교활합니다. 그것은 자기의 생명을 지키기 위하여 많은 수단을 가지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와는 반대로 비둘기는 솔직함과 소박함의 상징이며, 하느님 말씀에 대한 인간의 예지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마치 이리떼 가운데로 가는 그리스도인들은 자기를 보호하는 데 뱀같이 슬기로와야 합니다. , 슬기로움으로 미움을 사거나 원망을 사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복음을 선포하는 데는 비둘기처럼 하느님의 말씀에 대한 정직함과 소박한 마음으로 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2. 이와같은 이치는 오늘을 사는 신앙인에게도 해당됩니다.
신앙인은 예수님의 사명을 받아 우상 가득한 세상에 파견된 양입니다. 우상은 신앙인을 유혹합니다. 자신을 따르라고, 그것이 참된 삶이요 행복의 지름길이라고 온갖 감언이설과 협박을 동원하면서 유혹합니다. , 자본, 권력, 지위 등등 온갖 우상들이 날뛰면서 하느님이 아니라 자신들을 섬기라고 달려듭니다. 자신을 통해서만 하느님을 섬길 수 있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껄여댑니다. 신앙인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두 가지입니다. 하느님을 섬기기 위해서 우상들을 단호히 거부할 것이냐? 아니면 은근 슬쩍 우상에게 자기 몸을 맡기면서 적당히 살아갈 것이냐? 우상을 거부하면 현실에서 살아가는 것이 험난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상이 판치는 세상의 변두리로 쫓겨날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쫓겨남으로써 참 기쁨과 희망의 삶을 살아갈 수 있지만 인간적으로는 감수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안타깝게도 많은 신앙인들이 우상에 몸을 팔아 세상에서 부귀영화를 누리며 살아가면서, 한술 더 떠 우상의 선전부대가 되어 '우상' '참된 하느님'이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이것이 오늘을 사는 우리 신앙인에게 ‘박해’가 아니겠습니까! 양을 이리 떼 가운데 보내는 심정으로, 우리를 세상에 파견하신 예수님의 마음을 되새겨 봅니다. 우리에 대한 예수님의 믿음을 생각합니다. 우리가 우상의 늪에 허우적대고 때때로 우상과 함께 놀아나는 모습을 안타깝게 지켜보고 계실 예수님의 상처받은 마음을 떠올려 봅니다.
'
내가 너와 함께 있지 않느냐? 하느님의 성령이 너를 지켜주지 않느냐? 두려워하지 말아라.'라고 간절히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양이 이리가 될 수 없듯이, 하느님의 자녀인 우리가 결코 우상의 노예가 될 수 없음을 생각합니다. 신앙의 자유를 얻기까지 수많은 순교자들이 ‘신앙 때문에’ 목숨을 바쳤음을 생각하며, 다시 한번 굳은 다짐이 필요한 시간입니다.

 

"세상을 이기는 승리의 길은 곧 우리의 믿음입니다."(1요한 5,4)

 

끝까지 견디는 이

  -반영억신부-

이탈리아의 폼페이는 아름다운 공공의 건물과 화려한 개인의 집들이 있었으며 산니티와의 전쟁도 치렀던 곳으로 로마의 속국이 되었고 그 후에는 그리스와 산니티의 영향을 받기도 하였으나 그 도시공학과 건축술은 그리스 신전 양식과 이탈리아 양식의 복합이라고 합니다. 기원후 79년 8월24일 이전에는 상업에 종사하는 3 만여 명의 시민들이 생활하던 전성기의 도시였으나 거대한 화산 폭발로 화산재와 자갈들로 뒤덮여 버렸습니다. 그래서 여러 세기 동안 잊혀진 도시였으나 1700년대의 첫 발굴이 있었고 1800년대에 와서 과학적인 정리로써 발굴이 지속되고 있습니다. 지금은 60ha의 페허가 펼쳐져 당시의 삶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페허가 된 폼페이는 고대 로마의 귀한 예술을 이해하는데 근거가 되고 건축공학은 바로크 풍의 화려한 모자이크, 대리석 조각들과 청동상 토기들은 헬레니즘의 영향을 받았음을 증명합니다. 폼페이의 정치와 종교와 경제의 중심인 공회장과 아름다운 회당, 거의 모든 기둥이 남아 있는 아폴로 신전, 제우스신전, 놀라울 정도로 과학적인 목욕탕, 술의 신 디오니소쓰를 즐겁게 하려는 벌거벗은 이들의 모습이 담긴 그림, 대극장과 소극장, 잘 정리된 길들과 상점, 가재도구, 앉은 채로 또는 누워있는 채로 화석이 된 인간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 시대에도 성을 파는 곳이 있었고 목욕문화와 술이 뛰어나게 발달했으니 그 어둠의 그림자가 멸망을 자초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엎드려 화석이 되어버린 산모를 보면서 모성애가 얼마나 강한가를 생각하였습니다. 그리고 아무리 화려하고 웅장한 인간의 작품도 한 순간에 사라질 수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하느님의 섭리 앞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하루 한 순간을 깨어 있지 않으면 안 된다는 가르침을 줍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마태10,22)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끝까지 견딘다는 것은 단순히 인내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앞에 부끄러움이 없다는 것입니다. 세상이 불의하면 할수록 더 큰 의로움을 살아야 하고 세상이 나를 속이고 불이익을 준다 하더라도 주님께서 보여주신 희생과 봉헌의 길을 걸어가는 것입니다. 어느 한 순간 법과 질서가 무너지고 혼돈과 마지막이 오더라도 그때야말로 주님의 사람임을 증거 할 때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말합니다. “불의하게 고난을 겪으면서도, 하느님을 생각하는 양심 때문에 그 괴로움을 참아 내면 그것이 바로 은총입니다.”(1베드2,19)

  폼페이의 아름다운 문명이 한 순간에 묻혀버리듯 이 세상의 화려함도 한 순간에 사라질 수 있습니다. 가까이 일본의 방사능 누출 사고와 쓰나미를 보아도 그렇습니다. 설사 내 인생의 마지막이 온다 해도 주님께서 약속해 주신 영원한 생명을 바라보면서 진리 안에 자유로워야 하겠습니다. 사실 오늘 한 순간 순간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 마지막 순간입니다. 그러므로 오늘을 마지막처럼 그리고 약속해 주신 영원한 생명이 있으니 오늘서부터 영원을 살아야겠습니다.

  인생여정이 어렵고 힘들더라도 방심하지 말고 끝까지 견딜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우리는 인생여정의 여러 상황 안에서 실망과 실패에 직면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끝까지 낙담하지 않고 충실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면 반드시 열매를 얻게 될 것입니다. 현세의 축복뿐 아니라 천상의 열매를 맛보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낙심하지 말고 계속 좋은 일을 합시다. 포기하지 않으면 제때에 수확을 거두게 될 것입니다.”(갈라6,9) 바오로 사도의 말씀을 기억합니다. “여러분이 하느님의 뜻을 이루어 약속된 것을 얻으려면 인내가 필요합니다.”(히브10,36)사랑합니다.

2018평창동계올림픽유치성공 63:25 <2011.7.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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