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15주간 금요일 (마태12,1-8) 이웃에게 베푸는 자선이다.

2011. 7. 15. 오전 7:05:16

글자
 

2011 7 15일 금요일 성 보나벤투라 주교 학자 기념일

 

 나에게 동물을 잡아 바치는 제사가 아니라

이웃에게 베푸는 자선이다.
(
마태오 12,1-8)

 I desire mercy, not sacrifice,

보나벤투라 성인은 1218년 이탈리아 바뇨레아 근교에서 태어났다. 성인은 ‘작은 형제회’에 입회하였으며, 파리 대학교 교수를 지냈다. 훗날 알바노 교구의 추기경으로 활동한 성인은 그리스인들과 일치를 이루고자 열린 제2차 리옹 공의회(1274년)에 큰 도움을 주었으며, 신학과 철학 분야에서 많은 저술을 남겼다. 1482년 성인으로 시성되었고, 1588년에는 ‘교회 학자’로 선포되었다.

 

말씀의 초대

모세가 주님의 기적을 계속 보여 주며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에서 내보내도록 이끌지만 파라오의 마음은 완고하여 이를 듣지 않는다. 마침내 주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해 내시며 이집트의 맏아들과 맏배를 모조리 치시겠다고 말씀하신다. 이 사건이 이스라엘 백성의 파스카 축제의 기원이 된다(제1독서). 예수님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배가 고파서 밀 이삭을 뜯어 먹자, 바리사이들은 제자들이 율법을 어기고 있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율법의 근본정신이 사람을 위해 있음을 알려 주시며 자비와 사랑이 모든 법의 우선임을 가르치신다(복음).

☆☆☆

오늘의 묵상

예수님의 제자들이 안식일 규정을 어겼습니다. 제자들이 안식일에 밀밭 사이를 지나다가 배가 고파서 밀 이삭을 뜯어 먹었던 것입니다. 그랬더니 바리사이들이 당장 제자들이 안식일에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한다고 비난하고 나섰습니다. 바리사이들이 예수님의 제자들을 비난한 것은 남의 곡식에 손을 대거나 무엇을 먹었기 때문이 아니라 안식일에 일을 했기 때문입니다. 안식일 규정에 따르면, 밀 이삭을 딴 것은 곡식을 거두어들이는 추수 행위가 되고, 손으로 이삭을 비비는 행위는 곡식을 타작하는 것과 같았습니다. 바리사이들은 이렇게 제자들이 추수를 하고 타작을 했으니 율법의 규정을 어겼다는 것입니다. 당시 이런 사회의 분위기만 들어도 가슴이 답답해집니다.
사회도 사람도 여유 없이 형식에만 매달려 있으면 삶이 껍데기만 남게 됩니다. 자존감이 약하고 마음속에 두려움이 많은 사회나 사람은 이런 형식에 의존하기를 좋아합니다. 그런 사회나 사람에게는 사랑이 머물 자리가 없습니다. 사랑은 물이나 바람 같아서 늘 어디론가 흘러야 합니다. 어떤 틀에만 갇혀 있으면 사랑은 본질을 잃고 맙니다.
법과 규정은 우리가 사는 사회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마치 교통 신호가 질서를 만들어 주어 차들의 통행을 더욱 원활하게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구급차가 빨간 신호등이 켜져도 교차로를 건너갈 수 있는 것처럼, 사랑의 법은 모든 것에 앞섭니다. 예수님께서 때로 율법의 규정을 어기신 것은 바로 한 사람 한 사람이 참으로 소중하다는 이 사랑의 법을 가르쳐 주시려는 것입니다.

☆☆☆

 

제자들은 밀 이삭을 잘라 먹었습니다. 밀 이삭을 비벼 껍질은 버리고 알맹이는 입에 털어 넣었을 것입니다. 심심해서 그랬을 것입니다. 우리 역시 어렸을 때 그런 경험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날이 안식일이었다고 바리사이들은 시비를 겁니다. 제자들의 행동을 추수 행위로 간주한 것입니다. 조금은 치사한 일입니다. 그 정도의 행동을 율법으로 운운하다니 쩨쩨한 모습입니다.
하지만 율법에 매여 살면 그렇게 됩니다. 외곬으로 파고들면 그렇게 됩니다. 숲은 못 보고나무만 보기 시작하면 그렇게 됩니다. 그렇게 해서 열심히 사는 것으로 착각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지도자들이 그렇게 생각하고 행동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막힌 생각을 고쳐 주고자 하십니다. 그러기에 반론을 제기하십니다. “다윗 임금도 배가 고팠을 때는 성전에 들어가 제사 빵을 먹은 예가 있다. 그 빵은 사제가 아니면 먹을 수 없는 빵이 아니었더냐?”
그래도 바리사이들은 굽히지 않습니다. 마침내 예수님께서는 폭탄 선언을 하십니다. “내가 바로 안식일의 주인이다.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우리 역시 잘 따집니다. 타인의 잘못을 심하게 몰아세우기도 합니다. 그런데 자비심을 지니라고 하십니다. 주님께서는 제물보다 자비를 더 원하신다고 하십니다. 마음이 서늘해지는 가르침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알려 주고 싶으셨던 것은 하느님의 자비, 자비로우신 하느님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계명도 예수님께서는 자비의 차원에서 이해하기를 바라십니다. 우리 주변에는 끊임없이 우리를 흠잡으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시편 작가는 일찍이 악인들의 못된 짓을 체험하고 다음과 같이 읊었습니다. “재앙을 모르는 그자, 저주만을 퍼붓습니다. 마을 으슥한 곳에 숨어 앉아 죄 없는 사람을 몰래 죽이려 그의 눈은 힘없는 이를 살핍니다. 그는 덤불 속의 사자처럼 은밀한 곳에서 노립니다. 가련한 이를 잡아채려 노리다가 그물로 끌어당겨 잡아챕니다. 이렇듯 가련한 이는 두들겨 맞아 쓰러지고, 힘없는 이들은 그의 폭력에 넘어집니다.” 오늘날 우리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악한 사람들이 선한 사람들을 곳곳에서 노리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악에서 벗어나려면 하느님의 자비와 은총이 필요합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저희를 악에서 구하소서.”

 

        

 

번데기 앞에서 주름잡는다

  -반영억 신부-

가끔은 많은 것을 아는 척 하는 사람을 만납니다. 그러면 반박하고 싶은 마음이 생깁니다. 무안을 주면 다음부터는 좀 겸손해 질까? 하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결국은 마음의 상처를 줄 수도 있다는 결론을 내고 넘어갑니다. 그야말로 시쳇말로 번데기 앞에서 주름잡는 그를 코를 납작하게 해 주고 싶은 마음은 지울 수가 없습니다. 어떤 이는 성경공부를 많이 했다고 뽐내며 본당신부와 맞서기도 합니다. 성경공부를 많이 하면 뭐합니까? 말씀대로 살지 않고 오히려 교만함이 커가고 있으니 말입니다.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배가 고파서 밀 이삭을 뜯어 먹은 행위에 대해서 못마땅해 하였습니다. 당시 안식일 법에 의하면 ‘안식일에 일을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해서는 안 되는 노동을 하고 있다는 것에 대해 예수님께 항의하자“성전 보다 더 큰이가 여기에 있다”하시고“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까 번데기 앞에서 주름 잡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밀이삭을 잘랐다는 것은 안식일에 추수를 하지 말라는 규정을 어긴 것이고, 손으로 비벼서 먹었다면 타작하지 말라는 조항에 어긋납니다. 그리고 손으로 비벼서 후후 불어 껍질을 털어냈다면 키질을 하지 말라는 법을 지키지 않은 것입니다. 편지를 뜯는 것도 불을 지피는 행위도 금지사항입니다. 닭이 안식일에 알을 낳았다면 그 역시 먹을 수 없습니다. 바리사이들은 주일을 거룩히 지내야 한다는 명분으로 이렇게 철저히 규정을 만들었습니다. 그러니 주님과 함께 하기 위한 법이 오히려 올가미가 되고 말았습니다.

유다인이 살고 있는 이웃에 계신 분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문을 두드려서 나갔더니 자기 집의 가스 불을 꺼 달라고 부탁을 하더랍니다. 가스 불! 자기가 끄면 되지 그런 부탁을 하러 오나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안식일이 되기 전 불을 켰는데 끄기도 전에 안식일이 온 것입니다. 불을 지피는 일을 금지하고 있으니 안식일이 다 가기까지 켜 놓을 수도 없고……..

예수님은 이런 겉모양에 묶여있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당신은 안식일의 주인이시고 법조문을 지키기에 앞서 법의 의미와 내용을 살리기를 바라십니다.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고 이웃에게 자선을 베푼 다음 의식상의 규정을 준수하라는 것입니다. 바리사이들은 알맹이 보다는 껍데기에 충실해서 야단을 맞았다면 오늘 우리는 알맹이를 빌미 삼아 규정을 무시하고 소홀히 하여 꾸중을 들어야 하는 것은 아닌가 합니다. 주님의 날에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찾기 보다는 내 취미와 즐기는 일을 더 우선시 하고 기도와 미사는 뒤로 미루고 있으니 말입니다. 

주님의 날을 주님과 함께 쉬어야 하겠습니다. 주님의 마음에 드는 일을 하면서 하루를 보낸다면 거룩함이 넘쳐나게 되고 이웃도 우리 안에서 주님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어느 누구 앞에서도 폼 잡지 말고 주님의 날을 거룩하게 지내야 하겠습니다. “저는 이들을 위하여 저 자신을 거룩하게 합니다. 이들도 진리로 거룩해지게 하려는 것입니다.”(요한17,19) 사랑합니다.

  

 

율법의 정신

- 이훈 신부-

 

오늘 복음을 읽으면 참으로 의미심장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배가 고파서 밀 이삭을 뜯어 먹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밀 이삭을 뜯어 먹을 정도로 배고픈 길인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을 따라 살 것인지 질문하도록 만들고 있습니다. 배가 고파 쓰러질 지경의 사람들 앞에서 들이대는 잣대는 율법이라는 잣대입니다. 우리가 쉽게 걸려 넘어지는 논리입니다.
사랑은 사라지고, 의무와 책임으로 점철되어버린 신자생활에 대한 도전입니다
.
안식일의 정신, 주일의 의미는 사라지고, 의무를 실천하는 데 급급한
우리들에게 던지는 예수님의 말씀은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제물이 아니라 자비다라는 말씀입니다. 신앙 안에서 우리가 최고의 겸손을 살고자 하는 것은 나의 삶을 고통으로 옭아매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의 희생을 통한 사랑을 나누고자 하는 것입니다. 아쉽게도 우리는 사랑의 의무를 다하기보다는 심판자가 되어 타인의 행동과 타인의 신앙생활을 평가하고 단죄하기에 급급하지는 않는지 돌아볼 때입니다. 진정한 예배는 하느님의 사랑이 나를 통해 세상으로 퍼져나가도록 하는 것입니다.

 

 자비한 마음

- 임원지 수녀-

 

서울 본원에서 잠시 머물며 현관을 본 일이 있다. 지방에 사는 자매들이 다녀간 어느 날, 누군가 약식 성무일도를 현관에 놓고 떠났다. 중요하지 않아서 놓고 갔나보다 싶었고, 여행할 때 안성마춤이다 싶어 내가 가졌다. 그 후, 책을 찾는 알림이 나왔을 때 나는 부끄러워서 잡아떼었다가 못내 부끄러워 이실직고를 했다. 또 한 번은 모임차 본원에 갔는데 로션이 떨어졌다. 마침 복도에 로션이 나와 있길래 잘 되었다 하고 들고 오다가, 지난 부끄러움이 생각나서 다시 제 자리에 놓으며 하느님은 보시겠지 하면서 도망치듯 방으로 돌아왔다. 잠시 후 경리수녀님에게 가서 한 병을 청하니 바로 그 복도에 있는 것을 가져가란다. 허락으로 만사 평안.

우리 수련원에 온 아이들이 물건을 분실하고 자기 것인 줄도 몰라 안 찾아가기도 하고, 남의 것을 가져가도 그것이 왜 잘못인지를 모르는 아이도 있다고 한 자매는 말했다. 몇 해 전에 로마 총본부에 가서 1년을 산 일이 있다. 한국에 전화를 하려면 동전이 딸칵딸칵 쉽게도 내려갔다. 어느 날 재무총평의 원 아스페시 수녀님이 나를 부르셨다. “집으로 전화하고 싶으면, 주일에 내 방에 와서 하세요.” 수도회 재화는 이렇게 쓰는 것이지! 나는 언제 이렇게 감격스러운 관대함을 베풀었을까 싶다. 지구상에 기아로 죽는 이들이 있는 것은 재화를 나누는 손, 하느님 섭리를 대신 베풀고 나눌 사람이 부족해서라고 마더 데레사는 말했다.

뜻 아니한 허물을 누가 알겠습니까? 숨겨진 잘못에서 저를 깨끗이 해주소서. ”(시편 19, 13)기도하며, 안식일의 주인답게 두루두루 넉넉하고 싶다. 나의 인색함으로, 나의 권위로 하마 누가 죄를 짓는 일은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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