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15주간 토요일 (마태12,14-21)
그때에 14 바리사이들은 나가서 예수님을 어떻게 없앨까 모의를 하였다.
15 예수님께서는 그 일을 아시고 그곳에서 물러가셨다. 그런데도 많은 군중이 그분을 따랐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모두 고쳐 주시면서도, 16 당신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엄중히 이르셨다.
17 이사야 예언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그리된 것이다. 18 “보아라, 내가 선택한 나의 종, 내가 사랑하는 이, 내 마음에 드는 이다. 내가 그에게 내 영을 주리니 그는 민족들에게 올바름을 선포하리라.
19 그는 다투지도 않고 소리치지도 않으리니 거리에서 아무도 그의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 20 그는 올바름을 승리로 이끌 때까지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연기 나는 심지를 끄지 않으리니 21 민족들이 그의 이름에 희망을 걸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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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백삼십 년의 이집트 생활을 끝낸 이스라엘 백성에게 탈출과 광야 생활의 서막이 오른다. 그들을 기다리는 것은 노예 생활에서 해방이 아니라, 노예 생활에서 완전히 해방될 때까지 거쳐야 하는 긴 정화의 시간이다(제1독서). 주님께서는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연기 나는 심지를 끄지 않는 분이시다. 우리가 어떤 처지에 있어도 우리를 결코 포기하시지 않고 희망을 주시는 분이시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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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넬슨 만델라 대통령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백인 정권의 인종 차별에 맞서 싸우다가 반역죄로 체포되어 종신형을 선고받고 27년 동안 감옥살이를 했습니다. 당시 그는 최악의 정치범으로 분류되어 면회는 6개월에 한 번만 허용되었고 편지를 주고받는 것도 매우 제한되었습니다. 미래가 전혀 보이지 않는 어둠과 바깥세상과 철저하게 단절된 고독 속에서 한 인간이 겪을 수 있는 모든 무력감을 견뎌야 했습니다. 그야말로 ‘부러진 갈대’나 ‘깜박이는 심지’처럼 희망이라고는 좀처럼 보이지 않는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넬슨 대통령은 그런 상황에서도 할아버지가 손자의 이름을 지어 주는 그들 나라의 풍습에 따라 딸이 낳은 손자의 이름을 ‘희망’이라고 지어 주었습니다. 절망스러운 자신의 삶 속에서도 그는 결코 희망을 놓지 않았습니다. 결국 일흔이 넘은 백발의 나이에 석방되었고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그가 꿈꾸던 흑백 화합의 꿈은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현실이 되어 가고 있습니다.
안셀름 그륀 신부님은 ‘희망은 인간의 모든 행위를 움직이는 진정한 원동력’이라고 했습니다. 희망은 이렇게 끝이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도 살게 하는 힘입니다. 이사야 예언자가 말씀하셨지요. “그는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리라”(이사 42,3).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그분이 바로 지금 우리가 믿는 주님이십니다. 주님께서 이렇게 부러진 갈대처럼 좌절하며 살아가는 우리의 상처를 동여매 주십니다. 깜박이는 등불처럼 힘없이 살아가는 우리에게 빛을 밝힐 수 있는 등경의 기름을 채워 주십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포기할지언정 주님께서는 결코 우리를 포기하시지 않습니다. 우리가 부러진 갈대 같은 삶을 살지라도 희망을 놓치시지 않습니다. 그분께서 우리에게 희망을 두시기에 우리도 그분에게 희망을 두며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의 마지막 흐르는 눈물을 닦아 주실 분은 오로지 주님뿐이십니다. 그분 말고 우리가 어디에 희망을 두고 살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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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을 보면, 바리사이들이 예수님을 없애려 모의합니다. 그러나 그분은 피하십니다. 그들과 투쟁하러 오신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토론하고 따져도 당신을 위한 일에는 침묵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많은 군중이 그분을 따릅니다. 예수님께서도 그들은 받아 주십니다. 병자를 고쳐 주시고 악한 영에 사로잡힌 이들을 해방시켜 주십니다. 지도자들이 당신을 모함해도 예수님께서는 개의치 않고 당신의 일을 수행하신 것입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일찍이 이를 예언하였습니다. “보아라, 내가 사랑하는 이, 그는 다투지도 않고 소리치지도 않으리니, 민족들이 그의 이름에 희망을 걸리라.” 하느님에게서 온 사람은 묵묵히 자신의 일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변명하지 않으십니다. 성경 어디에도 그분의 변명은 없습니다.
순교자들도 변명하는 이들이 아니었습니다. 말없이 고통당하면서 고문과 회유를 견디어 냈습니다. 죽는 날까지 심문을 받았지만 모든 고통을 수용하였습니다. 변명하고 억울함을 토로한 이들은 교회를 떠나갔습니다. 배교했던 것이지요. 순교자들에게 견딜 수 없었던 것은 육체적 아픔이 아니라 정신적 고뇌였습니다. 그때마다 그들의 힘이 된 것은 예수님의 모습이었습니다. 모함과 억울함을 말없이 받아들이시는 그분의 모습이었습니다.
시기질투는 어디에나
-반영억 신부-
세상을 살아가면서 좋은 일을 하는 사람은 하느님의 복을 받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복을 받기 때문에 좋은 일을 끊임없이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좋은 일을 한다고 해서 반드시 환영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시기와 질투의 대상이 되고 미움을 사기도 합니다. 선한 일을 하는데도 선망의 대상이 되기보다는 견제의 대상이 된다는 것이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고통 받는 사람들의 마음을 헤아리시고 병을 고쳐주시며 당신의 소명에 충실 하셨습니다. 그런데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을 어떻게 없앨까를 모의 하였습니다. 지금 있는 그대로를 봐 주면 좋으련마는 눈엣가시로 보았습니다. 그들은 기득권을 잃을까 두려워하는 사람, 사촌이 땅을 사면 배를 앓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반대에 대응하지 않으시고 한 발 물러서는 지혜와 인내를 보여주셨습니다. 우리도 인내를 가지고 기다리며 모두를 품을 수 있는 넉넉함을 키웠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많은 사람들의 다양한 생각들을 품으셨습니다. 다투거나 큰 소리를 내지 않으시고 자비로운 손길로 버림 받은 사람들을 일으켜 세우셨습니다. 상처 받은 사람들을 치유 시켜 주시고 낙담한 사람들에게 용기를 주시며 구원해 주셨습니다. 병을 고쳐 주시면서도 스스로를 내세우지 않으시고 오히려 그 공을 감추시고 결코 기적을 위한 기적을 행하시는 것이 아님을 확인해 주셨습니다. 주님은 언제나 철저히 아버지 하느님의 뜻 안에서 구원사업을 이루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무슨 좋은 일을 해 놓고는 생색을 내다가 그 공을 다 잃고 맙니다. 선한 지향을 갖다가도 이내 시기와 질투심에 그 좋은 뜻을 놓치기도 합니다. 주님께서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의로운 일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마태6,1) 고 하셨건만 그 말씀을 잊고 살아갈 때가 많습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숨은 일도 보시는 아버지께서 갚아주실 것을 믿고, 하늘을 바라보고 살아갈 수 있는 은총이 함께하기를 서로 기도해 주면 좋겠습니다.
아무리 어진 사람도 미워하는 무리가 있습니다. “봄비가 기름 같지만 행인은 그 진창길을 싫어하고, 가을 달은 밝고 아름답지만 도둑은 그 밝게 비추는 것을 싫어합니다.” 자기에게 이익이 되지 않으면 거부하고, 시기하고 질투하는 것이 우리의 연약함입니다. 주님께서 열어 주신 길을 흔들리지 않고 걸어가시기 바랍니다.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