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7월 18일 연중 제16주간 월요일
심판날이 오면 니느웨 사람들이
이 세대와 함께 일어나 이 세대를 단죄할 것이다.
그들은 요나의 설교만 듣고도 회개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요나보다 더 큰 사람이 있다.
(마태 12,38-42)
오늘의 묵상
어느 시장터에 “무슨 문이든지 다 열어 드립니다.”라고 써 붙인 열쇠 수리점이 있습니다. 정말이지 세상의 문이란 문은 사람의 기술로 다 열 수 있습니다. 그런데 못 여는 문이 있습니다. 바로 ‘마음의 문’입니다. 마음의 문은 천사가 와서 두드린다 하여도 스스로 열고 나오지 않으면 결코 열리지 않습니다.
회개는 스스로 마음의 빗장을 풀고 주님께 나오는 행위입니다. ‘마음 한 번 닫히면 바늘 하나 찔러 넣을 수 없다.’는 말이 있듯이, 회개가 어려운 것은 마음이 열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회개하지 않는 고집 센 사람들을 수없이 꾸짖으시지만 사람들의 마음은 도무지 열리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회개를 못 하는 이유가 몇 가지 있습니다. 첫째는 주님을 은연중에 얕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예언자가 “이스라엘이 거룩하신 분을 업신여겨 등을 돌리고 말았다.”(이사 1,4)라고 나무란 적이 있지요. 이처럼 우리도 자기 힘과 능력을 과신하고 세상 것이 주님보다 훨씬 뛰어나다고 생각하여 주님을 얕보는 것입니다.
둘째는 자기 죄에 대하여 무감각해졌기 때문입니다. 한 번 두 번 죄를 짓다 보면 그것에 익숙해져서 점차 감각이 무디어집니다. 죄를 짓고 살면서도 의식하지 못하거나, 주님께서 다 용서해 주시리라고 스스로 하느님 자리에서 판단을 내리는 경우입니다.
셋째는 회개하기를 뒤로 미루기 때문입니다. 회개하고 주님께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은 하지만 세상 것을 좀 더 즐긴 다음에 나중에 잘살겠다고 스스로 위로하며 삶의 변화를 미루는 경우입니다. 물론 이런 경우는 끝까지 회개하기 어렵습니다.
지금 주님께 가까이 있지 못하다면 이 가운데 어디에 해당하는지요? 마음으로 깊이 회개하지 않으면 주님께서는 내 삶 안으로 들어오시지 못합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주님에 대한 체험이 없고 기쁨이 없는 이유입니다.
요나 예언자는 이방인 도시 ‘니네베’를 회개시키라는 소명을 받습니다. 하지만 요나는 가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면 니네베 사람들이 회개하고 구원받을 것이 확실하기 때문입니다. 그는 니네베 반대 방향으로 배를 타고 도망을 칩니다.
그러나 거센 태풍을 만납니다. 배가 가라앉을 조짐이 보이자 요나는 고백합니다. 태풍의 원인은 자신이며 하느님의 분노라고 알린 것이지요. 선원들은 그를 바다에 던지고, 요나는 ‘물고기 배 속’에서 뉘우치게 됩니다. 이후 요나는 니네베로 돌아가 주님의 말씀을 전했고 사람들은 회개하였습니다.
요나 예언서의 내용입니다. 훗날 이 이야기에서 ‘요나 콤플렉스’라는 용어가 만들어집니다. 지나치게 폐쇄된 성격을 드러내거나 ‘유아기의 습관’을 버리지 못하는 행동을 뜻합니다. 아직도 어머니 배 속을 그리워해 현실에 적응하지 못한다는 표현이지요. 복음의 바리사이들은 영적으로 ‘요나 콤플렉스’에 젖어 있습니다. 율법에 안주해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방인인 니네베 사람들도 요나 이야기를 듣자 삶을 바꾸었습니다. 그런데 바리사이들은 주님의 말씀을 듣고도 움직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표징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바리사이의 모습이 없는지 돌아봐야겠습니다.
우리는 어려움을 겪을 때마다 하느님께서 어떤 기적을 일으켜 주시길 청할 때가 많습니다. 하느님에 대한 우리의 믿음을 확인받고 싶은 까닭입니다. 결국 우리의 믿음이 부족한 까닭입니다. 어떤 일본 신자가 “하느님, 저에게는 기적을 보이시지 마십시오. 저는 이미 충분히 주님을 믿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라고 고백한 글을 본 적이 있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신앙입니까? 우리가 세심하게 관찰하면 우리는 날마다 기적 속에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되는 순간이 있습니다. 수많은 질병과 악들 가운데 오늘 하루를 이렇게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놀라울 때가 있습니다. 아니,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난 사실 자체가 기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는 오늘날의 의학적 지식으로, 이 세상에 태어나기 위해서 수억 대 일의 경쟁을 거쳤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기적은 우리 가까이에서 늘 일어나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것을 보지 못할 뿐입니다.
한 술꾼은 술만 마시면 가족을 괴롭혔습니다. 동네 사람들에게도 심술을 부리는 그를 마을에서는 아예 사람 취급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아들 중에 주일 학교에 열심히 다니는 초등학생이 있었는데, 하루는 이 아들이 아버지에게 말했습니다. “아빠, 어젯밤 꿈에 예수님을 봤어요.”
이에 아버지는 피곤한 듯이 대답했습니다. “이 녀석아, 예수가 어디 있냐? 오늘 밤에 또 나타나면 한번 물어봐라, 네 아비가 지은 죄를 낱낱이 말해 보라고. 그럼 진짜인지 가짜인지 알 수 있어.”
날이 새자 아들이 아버지께 다시 말했습니다. “아빠, 어젯밤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어. ‘얘야, 아빠한테 이렇게 이야기하려무나. 나는 네 아빠가 지은 죄를 벌써 다 잊었다고 말이다.’” 아들의 이 말에 아버지는 큰 충격을 받고 술을 끊었다는 이야기입니다.
말 한마디가 사람을 바꿀 수 있습니다. 따뜻한 눈빛 하나에 원한이 풀릴 수도 있습니다. 사람들은 기적을 어마어마한 것으로 생각하지만 사실은 작은 것에서 시작됩니다. 오늘날의 기적은 흔하디흔한 행위 속에서 나타납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랑을 위한 행위에는 언제나 능력을 주셨지만, 사랑이 빠지면 침묵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요구하는 기적은 사랑을 위한 기적이 아니라 차디찬 증거를 위한 기적입니다. 그들 마음 어디에도 따뜻함이 없습니다. 기적을 단순히 초능력으로 여겼던 것입니다.

많이 자랑하라
-반영억 라파엘신부-
미국 있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개신교 신자분과 얘기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교회자랑을 하셨습니다. 시작한지 1년이 되었는데 젊은 교회라고 하셨습니다. 예배참여 가족이 성인40명에 주일학교 참석어린이가 30명이나 되는 것을 보면 그 젊음이 드러납니다. 주일 헌금도 40명 참석에 1,000불이나 됩니다. 목사님 설교도 좋고 아주 자상하시고…그 교회는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교회, 가슴 벅찬 만남이 있는 교회, 항상 웃음과 축제가 있는 교회, 은혜와 진리가 넘치는 교회, 주님의 음성을 듣는 교회를 표방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교회 자랑을 열심히 하시라’고 했습니다. 자기 자랑은 하지 말고 남을 자랑할 수 있다면 그 교회는 정말 부흥하는 교회가 틀림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분이 제가 신부라는 것을 알고 천주교에 관심을 가지신 분을 소개해 주셨습니다. 우리 신자라면 목사님 앞에서 성당자랑, 신부님 자랑을 그렇게 기쁘게 할 수 있을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내 즐길 것 다 즐기고 시간이 남아야 겨우 미사참례하고는 할 것을 다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믿음의 사람이 지녀야 할 모습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이 많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신앙생활은 누가 대신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하루아침에 완성되는 것이 아니니 만큼 성장 과정 안에서의 진통을 감수해야만 합니다. 그러나 모든 것을 쉽게 이루려는 어리석음이 우리의 성장을 오히려 더디게 하고 맙니다.
예나 지금이나 많은 사람들이 어떤 기적이나 표징을 요구합니다. 그것을 보면 믿음이 성장하고 굳게 다져지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기적이 믿음을 가져오기보다 믿음이 기적을 낳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어떤 표징을 요구하기에 앞서 믿음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이 복됩니다.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고 행하기보다는 오히려 하느님을 자기 뜻에 맞추려 하는 한 어떤 표징도 받지 못할 것입니다.
따라서 기적을 멀리 찾지 말고 내 삶의 자리를 기적의 자리로 만들기 바랍니다. 내 삶의 터를 믿음의 자리로 만들어 주님을 자랑하기를 바랍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어떠한 것도 자랑하고 싶지 않습니다.”(갈라6,14)
사람들이 지혜롭고 명철하다는 솔로몬의 지혜를 들으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러나 그 솔로몬보다도 더 큰 이, 곧 예수님을 눈앞에 두고도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이미 주신 표징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그들의 선입견과 고정관념, 그리고 자기들 나름대로의 표징을 요구하고 그 틀에 꿰맞추려는 무지 때문이었습니다. 귀를 막으면 비오는 소리뿐 아니라 천둥치는 소리도 들리지 않는 법입니다. 그러므로 내 중심으로 생각하고 판단하던 마음을 돌려 주님을 자랑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마음을 열어 우리 성당을 자랑하고 신자들의 열정을 자랑했으면 좋겠습니다. 사랑합니다.

봐서 뭐하려고?
-남상근 신부-
언제부터인가 가톨릭 신앙 공동체도 기적을 보고 싶어하는 호기심이
만연하다고 합니다. 한국 교회 전체 차원의 장엄미사가 있거나 큰 규모의
행사가 벌어지면 공연히 하늘을 쳐다보느라 고개를 쳐들고
두리번거리는 모습들이 목격된다는 것이지요. 오늘은 하늘에 십자가 구름이
나타나지 않나, 이번에는 신기한 햇무리나 무지개가 보이지 않나 하는 기대로
그렇게 한다는 것입니다. 피눈물을 흘린다는 전라도 어디의 성모상을
‘친견’하기 위해 버스를 대절해서 내려가는 이들도 있다고 하니
표징을 요구하는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닌 모양입니다.
그것을 목격해야만 직성이 풀리고 은혜받았다고 하는 약하고 어긋난
신앙의 모습들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보여주신 표징은 사람을 살리는
것이었습니다. 어둠의 세력에 묶인 이들, 부자유한 이들, 질병의 고통에
시달리는 이들, 버림받은 이들을 해방하고 온전하게 하시려고 그분은 기적을
보여주셨습니다. 십자가 구름이 나타난들 그것이 우리에게 구원이
될 수 없습니다. 피가 스며나는 성상을 보고 온들 그것이 우리에게
치유가 될 리 만무입니다. 보이는 것을 보는 것이 믿음이 아니라
보이지 않지만 여전히 보는 그 사람이 믿음의 사람입니다.
한 사람
-임인자-
우리 부부는 동갑내기로 결혼한 지 꼭 20년이 되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우리한테 잉꼬부부라느니, 닭살이라느니 하며 놀립니다. 그러나 우리 부부는 지나고 보면 별 문제도 아닌데 서로 지지 않으려고 부부싸움을 할 때가 많습니다.
주일 아침 성당으로 가는 차 안에서 작은 다툼이 일어날 때도 있습니다. 그러면 미사를 시작하기 전까지도 마음 정리가 안 되어 분심으로 가득 차서 미사 시간을 보냅니다. 남편은 눈이 마주칠 때마다 화해의 눈빛을 보내지만 전 원망하는 마음이 너무 커서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영성체도 못하고 미사가 끝나 집으로 오는 길은 슬픔이 가슴까지 차올라 어떤 것으로도 위안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일주일을 보내면 너무나 고통스럽습니다.
그리고 부모님을 원망할 때가 있습니다. 늦은 나이에 공부를 하다 보니 힘들 때가 많습니다. 그때마다 학교 가고 싶을 때 보내주지 않은 아버지가 밉고, 다른 아버지처럼 쉬지 않고 일했다면 이렇게 힘들지는 않을 텐데 왜 우리 아버지는 그렇게 세월을 보냈을까 원망하고 또 원망합니다. 그러나 바꾸어 생각해 보면 가난했지만 최선을 다해 키워주신 부모님께 감사의 마음이 생깁니다. 그리고 내가 하는 일이라면 무조건 지지해 주고 기뻐해 주는 남편이 고맙기만 합니다. 손 안에 보물을 들고도 감사할 줄 모르고 남의 탓만 하는 자신이 한없이 부끄러워집니다.
미사 때마다 우리는 “제 탓이오. 제 탓이오. 저의 큰 탓이옵니다.” 하고 고백합니다. 모든 것을 돌아보면 내 안에 문제가 있을 때가 더 많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느님을 원망하듯이 저도 남의 탓을 할 때가 많습니다. 남의 탓을 하는 사람은 무슨 문제든 다른 사람에게 잘못이 있으며 자신은 아무 문제가 없다고 합니다. 그런 사람은 세상 살기가 편할 것 같지만 오히려 괴로울 때가 많습니다. 언제나 다른 사람을 미워하고 증오해야 하니 그 마음이 얼마나 불편하겠습니까?
‘악하고 절개 없는 세대가 무엇일까?’ 생각해 봅니다. “남이 너희에게 해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주어라.”(마태 7,12)는 말씀처럼 다른 사람 탓만 하지 말고, 자신을 성찰하고 자신의 문제를 들여다보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주님께서는 어떤 문제든 해결할 힘을 우리에게 주셨고 그 힘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