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7월 23일 연중 제16주간 토요일
가만두어라.
가라지를 뽑다가 밀까지 뽑으면 어떻게 하겠느냐?
추수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어라.
(마태오 13,24-30)
‘No, if you pull up the weeds
you might uproot the wheat along with them.
Let them grow together until harvest;
말씀의 초대
광야 생활을 하던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은 시나이 산에서 하느님께 친교 제물을 바치고 짐승의 피로 계약을 맺는다. 백성들은 주님께서 말씀하신 모든 것을 실천하고 따르겠다고 다짐한다(제1독서). 밀밭에 밀만이 아니라 가라지도 함께 돋는다. 처음에는 밀과 가라지를 구분하기 어렵지만 나중에 이삭이 패면 쉽게 구분할 수 있다. 세상에 선과 악이 공존하지만 마지막 날에 구별되어 드러나고 선이 승리한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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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밭에 좋은 밀 씨를 뿌렸는데 웬일인지 가라지가 섞여 있습니다. 가라지는 초기에는 밀과 비슷하여 구별하기 어려운데 이삭이 패면 밀과 분명히 구별됩니다. 그리고 가라지는 뿌리가 억세고 밀의 뿌리를 감고 있어서 가라지를 뽑는다는 것이 밀도 함께 뽑게 되어, 수확 때까지 밀과 함께 자라도록 그대로 두었다가 수확 때에 밀과 함께 거두고 가라지만 모아 땔감으로 씁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팔레스티나 지방의 농사짓는 모습을 보시고, 하느님 나라에 비유해서 말씀하십니다. 밭에 아무리 좋은 씨를 뿌려도 가라지가 있게 마련입니다. 우리가 하늘 나라를 건설하려면 가라지를 없애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가라지를 그대로 두라고 하십니다. 농부가 수확할 때 알곡은 곳간에 모아들이고 쭉정이는 땔감으로 쓰듯, 가라지를 없애는 것은 우리 몫이 아니라 당신 몫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살면서 남의 단점을 고쳐 주지 못해 애태우는 때가 많습니다. 백지 위에 검은 점 하나만 찍혀 있어도 그 점 하나에 온통 신경을 씁니다. 결국 점 하나 때문에 그 종이는 못 쓰는 종이가 되고 맙니다. 사람을 변화시키시는 분도 심판하시는 분도 주님이십니다. 농사지을 때 들판에 풍성한 밀을 보며 일을 해야지 가라지를 보며 일을 하면 힘이 빠지고 맙니다. 가라지를 뽑다가 들판을 완전히 망쳐 놓을 수 있습니다.
주님을 따르는 신앙인은 사람들의 단점과 문제점을 심판하고 고쳐 주는 사람이 아닙니다. 사람들 안에서 하느님의 은총을 발견하고 이를 가꾸는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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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람이 밀밭에 씨를 뿌립니다. 1970년대만 해도 밀밭은 보리밭과 더불어 우리나라 곳곳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밭입니다. 단오가 오기 전 망종 때가 되면, 푸르던 들판이 온통 황금빛이 됩니다. 밀과 보리가 익어 수확 때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이맘때가 되면 농민들의 얼굴에 넉넉한 미소가 돌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외국산 밀가루가 들어와 우리나라의 밀 시장을 점령해 버리는 통에, 우리나라 밀은 점차 사라져, 80년대엔 아예 구경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다행스럽게도 뜻 있는 사람들이 ‘우리 밀 살리기 운동’을 하여, 지금은 예전처럼 회복된 것은 아니지만, 이곳저곳에서 많이 볼 수 있게 되었지요.
예수님께서는 오늘, 하늘 나라는 자기 밭에 좋은 씨를 뿌리는 사람에 비유할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그 밀의 씨앗들 틈으로 가라지의 씨앗들이 함께합니다.
어릴 때 가라지는 밀과 비슷해서 잘 구별할 수 없지만, 자라서 열매를 맺을 때쯤이면 확연히 드러납니다. 가라지는 강아지풀처럼 생겼습니다. 가라지는 성장 속도가 밀과 비슷하지만, 그 열매는 가히 천문학적이라 할 만큼 많습니다. 게다가 손을 대면 그 씨앗들이 떨어져 그 이듬해는 손을 쓸 수 없을 정도로 밭을 지배해 버리고 말지요. 밀밭을 가라지가 차지해 버립니다.
말하자면, 세상은 하느님의 것인데, 하느님의 권위를 빼앗으려는 자들이 득세하고 있기 때문에, 하느님 나라는 더디게 세워질 수밖에 없습니다. 하느님 나라의 시민이며 일꾼인 우리가 그 가라지들을 청산해야 합니다. 그 방법은 가라지들과 관계를 끊어 버리고, 주님께 돌아서는 길밖에 없습니다.
원수는 악의 세력입니다. 그들이 밭에 가라지가 생겨나게 했다는 겁니다. 그렇습니다. 나쁜 사람들은 분명 존재합니다. 우리 삶을 둘러봐도 공평하지 못한 면이 많습니다. 특별한 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 불안감이 떠나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원수가 그렇게 하였구나.” 오늘 복음에 나오는 주인의 이 말씀에 답이 있습니다. 주인은 악의 세력을 인정하였습니다. 그들의 존재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우리도 인정해야 합니다. 그래야 불안의 본질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막연한 두려움은 그들이 뿌려 놓은 가라지일 뿐 다른 무엇이 아닙니다.
“저희가 가서 그것들을 거두어 낼까요?” 종들의 이 말에 주인은 기다리라고 합니다. 종들은 순간을 보지만 주인은 멀리 내다봅니다. 주인의 인내입니다. 그러니 종말까지 선과 악은 공존합니다. 어둠의 요소는 우리 곁을 떠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주인은 처음부터 좋은 씨를 뿌렸습니다. 이 점을 늘 기억해야 합니다. 원수는 자꾸 가라지가 생겨나게 하지만, 그래도 좋은 씨가 더 많은 법입니다.
<가라지의 비유>
송영진 모세 신부
7월 26일의 복음 말씀은 '가라지의 비유'(마태 13,24-30)입니다.
'가라지의 비유'를 공동체의 관점에서 생각할 수도 있고, 개인의 신앙생활의 관점에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공동체의 관점에서 생각한다면,
공동체 안에는 밀 같은 사람도 있고, 가라지 같은 사람도 있는데, 다른 사람을 함부로 가라지 같은 사람이라고 판단하지 말고 하느님의 심판에 맡기라는 가르침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개인의 신앙생활의 관점에서 생각한다면,
가라지 같은 사람이 되지 말고 밀 같은 사람이 되라는 가르침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 내용을 지금은 가라지 같은 신앙생활을 하고 있어도 회개한다면 밀이 될 수 있다는 격려로,
또 밀과 같은 신앙생활을 하고 있어도 방심하거나 자만하면 가라지로 전락할 수도 있다는
경고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격려하시는 말씀이든 경고하시는 말씀이든 간에 어떻든 하느님의 심판 때에 '가라지'로서 심판대에 서는 일이 없도록 하라는 가르침입니다.
그런데 처음부터 끝까지 충실하게 밀과 같은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도 있지만,
많은 사람들이 밀과 가라지 사이를 왔다 갔다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런 고백을 합니다.
"여기에서 나는 법칙을 발견합니다. 내가 좋은 것을 하기를 바라는데도 악이 바로 내 곁에 있다는 것입니다. 나의 내적 인간은 하느님의 법을 두고 기뻐합니다.
그러나 내 지체 안에는 다른 법이 있어 내 이성의 법과 대결하고 있음을 나는 봅니다.
그 다른 법이 나를 내 지체 안에 있는 죄의 법에 사로잡히게 합니다.
나는 과연 비참한 인간입니다. 누가 이 죽음에 빠진 몸에서 나를 구해 줄 수 있습니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를 구해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이렇게 나 자신이 이성으로는 하느님의 법을 섬기지만, 육으로는 죄의 법을 섬깁니다(로마 7,21-25)."
이 말은 '해야 하는 일'과 '하면 안 되는 일' 사이에서 갈등을 겪는 일이 많다는 것을 고백한 말입니다.
이성으로는 '해야 하는 일'만 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 일만 충실하게 한다면 그것은 '밀'과 같은 신앙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면 안 되는 일'을 하고 싶어 할 때가 많습니다. 그런 일을 하게 되면 그것은 '가라지'가 되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해야 하는 일'은 '하고 싶은 일', 즉 '하면 기뻐하게 되는 일'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사실, '하면 안 되는 일'도 '하고 싶은 일'입니다. 그러나 그 일은 '하고 나면 후회하게 되는 일'입니다.
그렇게 된다는 것을 다 알고 있지만, 마음과 몸이 자기 뜻대로 통제되지 않을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자신이 '비참한 인간'이라고 말합니다.
갈등을 겪는 상황 자체가 비참하다는 것이 아니라, 선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행하지 않고,
악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행하는 자신의 모습이 마치 '죄의 노예'가 된 것 같은 모습이어서 비참하다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 같은 위대한 분도 이런 정도이니...평범한 보통 사람들은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악의 화신 같은 사람이 등장하는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 그런 사람은 갈등을 겪기는커녕 범죄를 즐기는 것으로 묘사됩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보통 사람들(착한 사람들)은 자기의 행위가 죄라는 것을 알게 되면 양심의 가책을 느끼게 되고 내적 갈등을 겪게 됩니다.
바로 그런 때에(자기 힘으로 안 될 때에)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바로 하느님께 도움을 청하는 '기도'입니다.
'회개'는 우리 자신이 하는 일이지만 회개가 완성되려면 하느님의 은총이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가라지가 밀로 변화되려면 자기 자신이 노력해야 하고, 동시에 하느님께서 자비를 베풀어 주셔야 합니다.
루카복음 15장의 '되찾은 아들의 비유'에서 작은아들이 뉘우치고 집으로 돌아간 것은 회개의 시작입니다. 그는 집에 도착해서 아버지에게 자기의 잘못을 고백했습니다(루카 15,21).
만일에 그때 아버지가 아들을 받아들이지 않고 다시 내쫓았다면? 그러면 아들의 회개는 물거품이 됩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는 원래는 순서를 바꿔서 생각해야 할 이야기입니다.
아들이 회개하기 전부터 아버지는 이미 그를 용서했고,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고,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아들의 회개는 아버지의 용서와 사랑에 대한 응답입니다.
하느님은 당신의 권능으로 가라지를 밀로 바꾸실 수 있는 분이지만, 죄인 자신이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사실상 밀이 되기를 거부하고 가라지로 남아 있겠다고 고집을 부리는 것과 같습니다.
하느님(예수님)은 우리가 모두 예외 없이 밀이 되기를 바라시는 분이고, 지금 가라지 같은 생활을 하고 있더라도 밀로 바뀔 수 있다고 격려해 주시는 분이고, 밀이 될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시는 분입니다. 우리의 회개와 충실한 신앙생활은 그 자비와 사랑에 대한 응답입니다.
단순히 심판이 무서우니까 회개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잡초는 없다
- 이동훈 신부-
관행농법에 길들여진 이들에게 잡초는 없애야 할 적이다. 그래서 전쟁을 하듯 독한 제초제를 마구 뿌려댄다. 제초제가 편리하긴 하지만, 전쟁은 언제나 그렇듯 후유증을 남긴다. 작물들이 제초제를 흡수하고,개울과 강과 바다로 흘러 물을 오염시키고 그곳에 사는 생물들을 오염시킨다.
흔히 잡초라고 불리는 풀들은 이름이 없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관심이 부족해서 그들의 이름을 모르는 것이고, 어떤 풀도 약효를 가지지 않은 것은 없다. 그러니 어떠한 풀도 잡초라고 불러서는 안 된다.
과학적인 눈으로 볼 때도 우리가 잡초라고 부르는 그것들은 인간이 재배하려는 식물들의 영양을 빼앗아 먹는 도둑이 아니다. 밭에 난 풀들은 흙의 입자를 덩어리지게 하여 땅을 비옥하게 해준다. 깊은 곳까지 뿌리를 내리고 양분을 흡수하여 토양에 모세관을 만들어 줌으로써 식물의 뿌리가 호흡하는 것을 돕는다. 또한 식물들끼리의 경쟁은 식물의 자생력을 높여 오히려 더 튼튼한 식물을 만들어 낸다고 한다. 태풍이 오면 벼들이 쓰러지는 것도 결국 경쟁관계가 없이 거름과 물을 공급받아 편하게 자라서 자생력이 떨어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예수님도 잡초를 뽑지 말라고 하신다. 그렇듯 주변 사람들을 우리의 잣대로 필요, 불필요한 사람으로 재단하지도 말고, 그들을 제거하려 들지 말라고 하신다. 전쟁이 언제나 후유증을 만들듯, 제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을 제거하면 서로가 편치 않다. 평화를 잃는다. 세상의 모든 것, 악마저도 필요 없는 것은 없다. 일찍이 유다가 그것을 보여주지 않았던가 ?
예레미야는 말한다. “너희가 참으로 너희 길과 너희 행실을 고치고 이웃끼리 서로 올바른 일을 실천한다면, 너희가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를 억누르지 않고 무죄한 이들의 피를 이곳에서 흘리지 않으며 다른 신들을 따라가 스스로 재앙을 불러들이지 않는다면, 내가 너희를 이곳에, 예로부터 영원히 너희 조상들에게 준 이 땅에 살게 하겠다.” (7,5–7) 잡초라고 여기며 멀리했던 이웃 (자연을 포함한)을 포용할 때, 우린 이 땅에서 영원히 함께 살 수 있을 것이다.
늘 좋은 씨를 뿌리는 사람
-김 맛세오 수사-
봄이 오면 농부의 마음은 바빠집니다. 한 해의 수확이 잘 되기를 기대하는 부푼 마음으로 새벽부터 저녁까지 부지런히 농사일에 전념합니다.
그런 농부에게 자신의 밭이 기름지기를 바라고 좋은 씨를 골라 뿌리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좋은 땅에 좋은 씨를 뿌리는 것은 그만큼 수확에 대한 기대가 크기 때문이지요.
예수님의 말씀은 너무나 자연스럽고 평범한 듯한 말씀 같지만, 그 속에는 하느님의 진리가 담겨 있기에 그냥 섣불리 지나칠 수가 없습니다.
단 한 번뿐인 이 세상에 태어나서 쭉정이 같은 나쁜 씨를 뿌려 아무런 수확도 거두지 못하는 미련한 농부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을 닮은 내 마음 밭에 뿌릴 좋은 씨는 어떤 것이겠습니까? 평화, 사랑, 온유, 절제, 따뜻한 배려, 기쁨, 감사….
이런 것들이 우리 삶에서 성령의 열매를 맺도록 하는 좋은 지향들입니다.
평화라는 씨를 뿌려 보십시오. 평화가 무럭무럭 자랄 것입니다.
기쁨의 미소를 뿌리십시오. 나와 관계 맺는 많은 이들이 기쁨으로 타인에게도 사랑을 베풀 것입니다.
가라지를 참아주는 영성
- 남상근 신부-
‘내버려두어라.’ 악한 것들은 싹 다 제거해야 직성이 풀릴 것 같은데 그게 그렇지 않답니다. 밀밭에 밀만 무성하게 자라면 좋을 듯한데 불쑥 치솟는 가라지를 참아주신답니다. 농부가 김매기가 싫어서도 게으른 탓도 아닐 텐데, 그냥 두신다 하십니다.
교각살우(矯角殺牛)란 고사성어가 연상됩니다. 소뿔을 바로잡으려다 멀쩡한 소까지 다친다는 겁니다.
그러니 때가 무르익기까지는 무던히 참아주시겠답니다. 생각해보면, 가라지를 내버려두심이 은총입니다.
가라지도 밭에서 자라게 하심은 인내하시는 당신의 사랑입니다.
주님 보시기에 혹시라도 내가 밀이 아니라 가라지라면 어쩌시겠습니까?
설마 누가 뭐래도 난 밀이라고 과신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가라지임에도 내버려두시고 기다리시기에 아직 가능성이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잃어버린 양의 비유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아흔아홉 마리 양을 제쳐두고 말 안 듣는 한 마리에게 쏟는 목자의 관심이 너무하다 싶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혹시 나는 우리 안의 아흔아홉 마리 중 하나라고 착각하고 있지 않습니까? 내가 길 잃은 양이기에 목자가 찾아주지 않는다면 돌아갈 길이 없습니다.
밀밭의 가라지인 내게, 길 잃은 양인 내게 기다려주시고 찾아주시는 사랑이 아니라면 기댈 곳이 없습니다.
고해성사의 기쁨
-임인자-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세례를 받고 첫 고해를 하던 날이 생각납니다. 나의 죄가 깨끗하게 씻어져 순결해진 느낌을 받고 감동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견진성사까지 받고도 어떤 죄를 고백해야 할까 고민하게 되고 한편으론 ‘난 잘살고 있는데 꼭 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어 결국 제대로 못할 때가 많았습니다.
올해 부활절 판공성사 보속으로 십자가의 길을 받았습니다. 아직 묵주기도도 익숙하지 않은데 십자가의 길을 혼자서 하라니 참 난감했습니다. 같이 해 본 적은 있지만 혼자서 묵상하면서 해본 적은 한번도 없었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망설이다 부활절 이틀 전 밤 11시가 넘어서 혼자 했습니다. 천천히 한 처 한 처 묵상하면서 참으로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매 처를 옮길 때마다, 예수님이 넘어질 때마다 눈물이 났습니다. 무엇이 저를 그렇게 아프게 했는지, 무엇이 저를 그렇게 힘들게 했는지, 자신도 모르고 있었던 것이 끝없이 솟아오르고 또 솟아올랐습니다. ‘내가 익명의 사람들을 위해 일하고자 하면서 가장 가까이 있는 가족에게, 이웃에게 잘하지 못한다면 무슨 소용이겠는가?’ 그것은 남에게 보이기 위한 것일 뿐 진정한 사랑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새로운 일을 시작하는 부담감으로 가족에게 소홀하고 극도로 예민해져 있던 저에게 휴식의 시간, 참회의 시간이 되었습니다. “왜 우느냐? 누구를 찾느냐?”(요한 20,15)라는 말씀에 답하듯이 눈앞의 안개가 걷히고 가슴 밑바닥에서 차오르는 고해성사의 기쁨을 느끼게 된 것입니다.
살아가면서 큰 죄를 지은 일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고해성사를 볼 때도 자잘한 일상에서 오는 것들을 중심으로 보게 됩니다. 그러나 가장 큰 죄는 과연 내가 하느님 안에서 모든 일을 행하고 있는지 생각하지 않고 무심하게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것입니다. 미사에 가고 성당에서 중요한 직책을 맡아 봉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진정 중요한 것은 주님의 모든 말씀을 실행하려고 노력하고 있는지 성찰하는 것, 그것이 고해성사이며 보속의 길입니다.
'가라지의 비유'를 통해 하늘나라를 계시
- 박규환 신부-
어제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에 이어 오늘 예수님께서는 ‘가라지의 비유’를 통해 하느님 나라에 대해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예전에 제가 신학교에서 교회론은 배울 때 ‘교회-순결한 창녀’라는 책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그 책은 ‘교회를 순결한 창녀’라고 정의하고 있었습니다. 순결하다와 창녀라는 전혀 상반된 의미의 두 단어가 어떻게 교회를 설명하는가! 그 논리는 다음과 같습니다.
교회는 순결합니다. 그 이유는 순결하고 거룩한 하느님께서 그 중심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교회는 또한 창녀입니다. 죄 많고 부족한 우리가 그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죄 많고 부족한 우리이지만 순결하고 거룩한 하느님의 말씀과 그 삶을 지향하기에 교회의 일원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의 비유말씀은 이러한 교회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밭에 밀과 가라지가 함께 자라듯이 모든 공동체, 그리고 교회 안에도 선인과 죄인, 참 제자와 거짓 제자는 공존을 합니다. 즉 하느님의 말씀을 잘 듣고 실천하는 사람들과 그 말씀을 거부하는 사람들이 함께 살고 있습니다. 복음에서 종은 주인에게 “밭에 자라난 가라지를 저희가 뽑아버릴까요?”라며 죄인을 거짓 제자를 쫓아낼 것을 제안하지만 주인은 추수 때-마지막 날-를 기약하며 자비와 관용으로 참을성 있게 기다릴 것을 이야기합니다.
죄를 향해 열려있는 마음, 죄를 향해 열수 있는 마음, 죄를 녹게 하고 위안을 얻게 해 주는 그 마음은 거룩하고 순결합니다. 바로 이 마음이 하느님의 마음입니다. 하느님은 정의로우신 분이시지만 그 모든 것을 감쌀 수 있는 큰 사랑과 자비의 마음을 가지신 분입니다. 교회가 거룩한 것은 죄인들과 거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바로 그들의 마음 안에 녹아 들어가 자신은 물론 하느님의 마음-사랑과 자비-을 통해 그들을 변화시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이신 성자 예수님께서 육화의 신비를 통해 죄 많은 인간들에게 녹아 들어오시어 ‘십자가의 삶’을 살아가신 것처럼 예수님의 교회는 죄 많은 창녀에게 녹아들어갈 수 있어야 합니다. 이 녹아 들어간 마음은 거룩하고 순결합니다.
우리는 밭에 심겨진 아무런 쓸모없는 가라지일까요?
아니면 알찬 밀일까요? 나의 모습을 되돌아 봅시다.
밭의 주인이 밀과 가라지를 가려 뽑아버리지 않고 추수할 때를 기다린것처럼 우리는 하느님 나라가 이루어지기까지 끊음없는 사랑과 이해와 용서로서 죄인들의 회개를 기다릴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 기다림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마지막 날에 가서 우리는 회개의 모습에 따라 심판대에 판결을 받게 될 것입니다. 은총과 자비가 하느님의 소관인 것처럼 마지막 심판 역시 하느님께 속해 있습니다. 우리가 행해야 할 것은 오직 하느님의 은총을 겸허하게 받아들이고 오늘을 성실하게 살아가면서 마지막 날을 준비하는 것뿐입니다.
추수 때까지 다함께 자라도록 내 버려두어라
-하화식 신부 -
사람의 마음 안에는 늘 선과 악이 공존한다. 바로 그래서 가라지가 문제가 되는 것이다. 내 안에 있는 가라지는 무엇일까? 또한 다른 사람들을 바라볼 때 밀보다는 가라지를 더 자세히 바라보는 이유는 무엇일까? 주님은 현재의 모습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지 않고 완성되는 마지막에 모든 것을 선별하신다고 말씀하신다. 그렇다면 우리는 지나치게 현재의 시점에서만 사람들을 바라보고 한 번의 잘못이 마치 내 모든 삶이 그런 것처럼 바라보는 시각이 내 안에도 있는가 보다.
좀더 긍정적인 눈으로 바라보면 내 안의 가라지도 그렇지만 특히 다른 사람들 안에 있는 가라지를 볼 때 밀과 가라지를 함께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인정할 줄 아는 마음자세가 필요하다.
사람들과 관계에서 생기는 모든 불편함은 이 가라지 문제, 곧 자신이 얽매여 있기 때문에 일어나는 결과일 수도 있다. “추수 때까지 다함께 자라도록 내버려두어라”는 말씀은 우리 삶에 참으로 좋은 교훈이라고 생각된다. 누구에게나 있는 그 가라지를 어떻게 몽땅 뽑아버릴 수 있겠는가? 하느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을 우리 인간이 해결하려는 어리석은 짓을 하지 않도록 하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