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17주간 토요일(마태오 14,1-12)

2011. 7. 30. 오전 7:1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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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7 30일 연중 제17주간 토요일

  

 세례자 요한의 죽음 

 

그 사람이 바로 세례자 요한이다. 죽은 요한이 다시 살아난 것이 틀림없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런 능력이 어디서 솟아나겠느냐?
(마태오 14,1-12)

  "This man is John the Baptist.
He has been raised from the dead;
that is why mighty powers are at work in him."

말씀의 초대

주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안식년과 희년을 제정해 주신다. 희년에는 어떤 사정으로 잃었던 소유지를 원래의 소유자에게 되돌려 주고, 종으로 팔려 간 사람들이 자유로운 몸이 되어 가족과 친척에게 돌아온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소유의 공평성을 회복시켜 주고, 묶인 이들을 해방시키는 것이 희년 정신이다(1독서). 헤로데의 비윤리적 생활을 두고 요한은 그에게 진심어린 말을 하다가 헤로데의 미움을 사고 감옥에 갇힌다. 헤로디아도 자신의 삶을 불안하게 하는 요한을 못마땅하게 여기다가 기회가 오자 간계를 부려 요한을 죽게 한다. 이는 의인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악의 세력이 어떻게 활동하는지를 보여 준다(복음).

 

오늘의 묵상

의인의 희생에는 반드시 누군가의 죄악이 따릅니다. 죄는 전염성이 강해서 주변을 오염시키고 어느새 그것이 정당성을 갖고 힘을 얻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의 죽음에 동참하는 세 인물, 헤로데와 필리포스의 아내 헤로디아와 헤로디아의 딸에게서도 악의 세력이 어떻게 일하는지 아주 잘 드러납니다.
헤로데는 동생의 아내를 데리고 사는 자신의 비윤리적 삶을 지적하는 요한에게 늘 불편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헤로데보다 더 불안하고 불편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던 인물은 사실 헤로디아였습니다. 헤로데에 붙어 권력을 누리며 살던 헤로디아는 이를 반대하는 요한 때문에 늘 불안해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결국 자신의 비윤리적 삶을 지키려고 임금의 마음을 사로잡은 딸을 이용하여 요한을 죽음으로 몰아넣습니다. 헤로디아에게서 발생한 악한 계략이 그녀의 딸을 오염시키고, 이것이 다시 헤로데의 권력의 힘을 움직여 의인을 죽게 만듭니다
.
예수님의 죽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들의 권위와 기득권을 지키려고 예수님을 죽일 계략을 꾸민 대사제와 원로들, 여기에 동조하는 유다의 배신, 영문도 모르고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치는 군중들, 정치적 이해관계로 무고한 이에게 사형 선고를 내린 빌라도, 약자를 조롱하는 병사들, 이 모든 사람이 예수님 수난과 죽음에 관여한 사람들입니다
.
의인을 희생시킨 이 모든 사람이 우리의 모습일 수 있습니다. 우리가 늘 자신을 돌아보고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식별하며 살지 않으면 의인을 죽게 하는 또 하나의 동조자가 될 수 있습니다. 지금도 우리의 말과 행동 때문에 누군가가 크고 작은 희생을 당하고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니 하루하루 잘 살피며 살아야 합니다.

☆☆☆

 세례자 요한의 죽음은 억울합니다. 그는 평생을 의롭게 살았고, 구세주의 오심을 준비했던 분입니다. 그런데 한 여인의 증오를 받아 어이없이 죽습니다. 어떻게 이해해야 할는지요? 예수님께서도 억울하게 운명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답답하고 안타까운 모습이 많을수록 예수님의 죽음을 닮는 것이 됩니다.
조선 시대의 유학자조광조는 중종 임금 때 등장합니다. 연산군으로 폐해가 심했던당시 사회를 바로 세우는 것이 그의 역할이었습니다. 이를 위해 그는 정치 개혁에 열정을 쏟습니다. 인맥을 끊고, 제도를 바로잡고, ‘임금의 중립을 위해 애썼습니다. 하지만 반대에 부딪혀, 전남능주에 유배되었다가 사약을 받습니다. ‘기묘사화입니다. 당시 37세로 한창 일할 나이에 누명을 쓰고 죽은 것이지요. 연산군을 몰아낸 공신 중에 가짜가 많다면서 가려낼 것을 주장한 것이 화근이었습니다
.
모든 죽음에는 조금씩 억울함이 있습니다. 애매하지 않은 죽음은 없습니다. 안타까움이 있기에 예수님을 따르는 죽음이 됩니다. 세례자의 죽음 역시이런 사실을 묵상하게 합니다. 억울함이 깊으면 희생도 깊은 것입니다. 자신의 억울함만 생각하면어린이의 신앙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억울함에서감사를 찾아낼 때 아름다운 신앙으로 승화될 수 있습니다.

☆☆☆ 

바른말을 하기가 쉽지 않은 세상입니다. 많은 사람이 바른말보다 ‘듣기 좋은 말’을 더 바라는 까닭입니다. “입에 쓴 약이 몸에 좋다.”는 말도 있지만 우선은 입에 단 것을 좋아하는 것이 인지상정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아첨과 아부를 일삼는 간신들로 둘러싸인 통치자를 둔 백성은 얼마나 불행하겠습니까? 그런 통치자에게서 백성을 위한 좋은 정치를 기대하는 것은 무리입니다. 바른말, 옳은 말은 통치자만이 아니라 우리 자신을 위해서도 필요합니다. 아첨과 아부는 우리를 자만하게 만들고 삶을 망치게 하는 지름길이기 때문입니다. 바른말로 충고하는 친구를 둔 사람은 행복합니다.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자신의 의견과 자주 충돌해 온 추기경을 국무원장으로 임명하였습니다. 그래야만 서로 조화를 이룰 수 있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국가 권력

- 최영균 신부-

 

군주의 욕망은 정의와 진리를 무참히 자신의 권력 밑으로 끌어내리려고 시도하였고 그의 칼날 아래 하느님의 선구자는 자신의 피를 예수님에 앞서 길 위에 뿌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국가 권력이라는 것이 국가 권력 자체만을 위해서 그 힘을 작용할 때 그 힘은 폭력으로 작용하고 죄 없는 백성의 피를 요구합니다.

국가 권력(권력자)은 자신을 살 찌우기 위해서 진리, 정의 그리고 평화 등은 안중에도 두지 않습니다.

역사 안에서 드러나는 이 권력의 힘을 우리가 관심을 가지고 지켜본다면 백성들을 위해서 존재한다고 말하는 권력이 얼마나 이기적인지 알 수 있습니다.

자신의 배고픔을 채우기 위해서 자신의 구성원조차 그 먹잇감으로 삼기 때문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이런 이기적 욕망을 끊임없이 추구하고자 하는 헤로데 안티파스라는 권력자에게 제거해야 할 장애물이었던 것입니다.
진리를 마음에 새기고 정의를 외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래도 진리를 말하고 정의를 실천해야 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면서 하느님의 길과 국가 권력의 길을 잘 구분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소신과 고집

  -반영억신부-

세례자 요한을 죽인 헤로데 안티파스는 예수님을 두려워하였습니다.

당시 사람들이 예수님을 두고 죽었던 요한이 되살아 왔다고 생각했는데

헤로데도 그 소문을 받아들였습니다. 의인이 죽으면 반드시 다시 살아 돌아온다고 생각하였으니 죄짓고는 불안을 떨쳐버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사실 요한은 억울하게 죽임을 당했지만 다른 면으로 보면 죽을 짓을 했습니다.

당시 왕의 불의에 대해서 많은 지도자들이 입을 다물고 있었는데 요한은

거듭 거듭 잘못을 지적 했습니다. “예 할 것은 ‘예’ 하고, ‘아니오’ 할 것은 아니오”라고 확실히 한 것입니다. 그것이 죽음을 가져 왔습니다. 소신 있는 죽음입니다.

 

그러나 헤로데는 “괴로웠지만 이미 맹세까지 하였고 또 손님들 앞이어서”(마태14,9) 요한의 목을 베는 불의를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잘못인 줄을 알면서도 위신이나 체면 때문에 불의를 돌이키지 않는다면 그것은 그야말로 똥고집이 아닐까요? 홀로 정의를 외치며 장엄하게 죽어간 예언자의 죽음 앞에 모든 권력을 소유하고 있으면서도 불안해하는 나약한 헤로데가 있습니다.

 

요한의 질책에 자존심이 상해 그를 감옥에 가두고 결국은 알량한 체면 때문에 의인의 목을 베어버린 헤로데의 모습이 우리 안에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이웃의 진정 어린 충고를 무시하고 내 고집을 피울 때가 얼마나 많은지요?. 부모를, 아내를, 남편을, 자식을 존중하고 사랑하는 마음이 회복되기를 기도합니다.

 

요한의 제자들은 요한이 죽은 뒤에도 명예롭게 매장해 주고(마태14,12),

끝까지 그에게 충성을 다합니다. 우리도 어려울 때야말로 그 믿음을 확인할 때입니다. 성녀 김루시아는 “저도 죽는 것은 무섭습니다. 그러나 살려면 하느님을 배반하라 하시니 비록 죽음을 무서워하면서도 오히려 죽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고백하며 주님을 선택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도 “오 하느님, 죽어서 당신의 그 아름다운 얼굴을 마주 대할 수 있다면 무엇이든 하겠습니다. 어떤 고통도 달게 받겠습니다. 죽음도 서러워하거나 두려워하지 않겠습니다.” 하고 믿음을 고백했습니다.

 

일상 안에서 소신 있는 믿음의 고백과 행동이 요구됩니다.

쓸데없는 고집부리지 않는, 소신 있는 하루를 축복해 주시길 기도합니다.

사랑합니다.

 

 

하느님을 왜 믿어야 하는가?

-이인주 신부-

 

하느님도 인간 세상은 어떻게 못하는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많다. 역사에 등장하는 폭군들의 모습을 보면 ‘하느님은 왜 저런 사람들을 그냥 내버려 두셨는가?’ 하고는 회의를 품지 않을 수 없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래도 하느님이 계시니 이만하겠지 싶다.
필리핀의 가난한 가정에서 일어나는 비극을 보면 인간이 얼마나 잔인할 수 있는가를 알 수 있다. “여러 아이들을 둔 엄마가 생계를 위해 남편에게 아이들을 맡기고 가정부로 취직해서 먼 곳으로 떠났다. 아이들은 엄마가 보고 싶다고 울고, 아버지는 아이들의 등살에 꼼짝도 못하니 당연히 일을 할 수가 없다. 남편은 이렇게 사느니 차라리 먼저 죽고 싶다는 생각을 했고, 마지막으로 아내에게 돌아올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아내는 그곳의 삶이 좋은지 못 오겠다며 버텼다. 그러자 남편은 애들을 다 죽이고 자신도 끝장을 내겠다고 했다. 설마하지만 결국 남편은 피비린내를 내고 말았다. 누구의 잘못인가? 구조적인 잘못이다. 나라·사회·개인 등 잘못된 구조에서 비롯된 깊은 상처들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 사회를 건전하게 만들어야 하고 늘 하느님께 여쭤가며 우리의 삶을 좋게 만들어 가야 한다.”(탐 오골만 신부의 이야기 기록)
오늘 복음에 나오는 세례자 요한의 최후도 끔찍하기는 마찬가지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 이것이 그 시대의 현실이었다. 그들이 어떤 생각을 하며 살았는가를 얼마든지 짐작할 수 있다. 물론 최고 권력자에게 정면 도전을 했으니 그 뒷일은 이미 각오하고 있었겠지만, 그렇다고 연회장에서 예언자의 목을 벨 줄이야`…. 그들이 요한만 그렇게 죽였을까?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들은 다 그런 식으로 죽였을 것이다. 하느님은 왜 악한 사람들은 두고 애꿎은 사람들만 죽게 하실까?
그러나 기도하며 그분을 만나다 보면 답이 나온다. 착한 사람은 먼저 하늘나라에 간다는 말이 있다. 맞는 말이다. 연옥도 안 거치고 바로 천국에 가기도 하겠지만, 이 더럽고 지저분한 세상을 빨리 하직하게끔 배려하는 것이라면 좀 위로가 되려나. 그리 간단한 문제는 아니라고 본다. 그러기에 우린 이런 세상이 되지 않도록 미리 미리 하느님 나라에 접근해 가는 사람들이 많도록 만들어야 한다. 그러면 이 땅도 바로 하느님 나라에 가깝기에 밝고 맑고 아름다운 세상이 되도록 배려해 주지 않겠는가. 이런 차원에서 나는 다시 한 번 말하고 싶다. ‘사람들이여, 하느님을 온전히 믿자.’고 말이다.

 

죄를 낳는 죄

-서현승 신부-

 창세기에 등장하는 첫 인간의 범죄이야기는 원인론적으로 모든 인류가 저지르는 죄의 행태를 상징적으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즉 죄를 지으면 부끄러움을 느끼고, 가리고, 숨고 싶어지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숨어 있는 첫 인간을 몸소 찾아가셔서 “너 어디 있느냐?” 하고 부르십니다. 이왕 지은 죄야 돌이킬 수 없지만, 죄의 멍에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다시 한 번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결론은 비극적입니다. 끝까지 핑계를 대며 자기의 죄를 합리화하려던 그들은 결국 낙원의 은총을 송두리째 잃어버리고, 절망의 늪에 빠지고 맙니다.
헤로데 역시 첫 단추를 잘못 끼우더니 훨씬 심한 죄의 나락에 떨어집니다.
동생의 아내를 차지하였다가 그 잘못을 지적하는 요한을 감옥에 가두고, 사람들 앞에서 헛된 맹세를 한 결과로 무죄한 요한의 목을 베는 지경에까지 이릅니다. 문제는 자기의 죄를 인정하지 않고 고집스럽게 합리화하려는 태도에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마지막 왕 헤로데는 이스라엘 왕국의 창시자 다윗의 모범을 따라야 했습니다. 그는 무수히 많은 죄를 짓고도 하느님의 축복을 넘치도록 받지 않았습니까?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하느님께 용서를 청하는 겸손함으로 말입니다. 첫 번째 죄가 낳는 두 번째의 더 큰 죄를 두려워할 일입니다. 하느님 앞에서의 솔직함이 우리를 살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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