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7월 28일 연중 제17주간 목요일
하늘나라는 바다에 그물을 쳐서 온갖 것을 끌러 올리는 것에 비길 수 있다.
어부들은 그물이 가득 차면 해변에 끌어올려 놓고 앉아서
좋은 것은 추려 그릇에 담고 나쁜 것은 내 버린다.
(마태오 13,47-53)
The Kingdom of heaven is
like a net thrown into the sea,
which collects fish of every kind.
When it is full they haul it ashore
and sit down to put what is good into buckets.
What is bad they throw away.
말씀의 초대
모세가 주님께서 명령하신 대로 성막을 짓고 그 안에는 증언판이 담긴 궤를 들여 놓고 휘장으로 증언 궤를 가렸다. 그러자 구름이 장막을 덮는다. 이스라엘 백성을 약속의 땅으로 이끄시는 주님께서는 광야에서 성막을 통해 당신의 현존을 드러내신다(제1독서). 밀밭에 가라지가 있는 것처럼 세상에는 종말 때까지 악인과 선인이 공존한다. 종말에 선인은 구원되고 악인은 멸망한다. 따라서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선을 택하고 악을 멀리하라고 가르치신다(복음).
☆☆☆
오늘의 묵상
우리는 누구나 약점과 한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신이 아니고 불완전한 피조물이기에 결핍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 누구도 자신의 약점과 한계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수없이 결심을 하고 다짐을 해도 작심삼일(作心三日)이라는 말이 있듯, 자신이 가진 악습이나 문제들을 고치기가 쉽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갖고 있는 문제를 없애려 하기보다 건강한 삶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우리 몸 안에는 수많은 해로운 바이러스들이 잠복해 있지만 몸이 건강하면 질병을 일으키지 못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수많은 결점들을 안고 살더라도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들이고 좋은 점들을 살려 나가면 우리의 결점들은 더 이상 문제 되지 않습니다.
자녀를 키울 때도, 배우자를 바라볼 때도, 이웃과 맺는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일수록 오히려 약점과 문제들이 더 잘 보입니다. 약점을 지적하고 고쳐 주려고 하다가 오히려 그 사람을 더 나쁘게 만드는 경우가 많습니다. 건강하고 아름다운 모습을 칭찬하고 용기를 북돋아 주어서 그 사람 안에서 악의 세력이 일을 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 안에 있는 선을 키워나가면 악은 저절로 힘을 잃고 맙니다. 우리가 이 땅에 하늘 나라를 세우려면 악을 없애려고 애쓰기보다는 선을 키워 나가려고 더욱 노력해야 합니다.
☆☆☆
복음 말씀은 하늘 나라에 대한 비유입니다. 공로가 많아야 간다고 배운 곳입니다. 틀린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완벽한 이론’도 아닙니다. 하늘 나라의 판가름은 ‘주님의 뜻’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분이 허락하셔야 가는 것이지, 우리가 정한 ‘법칙’에 의해 가는 것은 아니라는 견해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들은 그물의 비유는 두려운 가르침입니다. 바다의 그물을 끌어 올려 좋은 고기는 그릇에 담고 나쁜 것은 버린다고 하였습니다. 우리도 버려지는 고기와 같은 처지가 되지 않을까 두렵기도 합니다. 그러나 저만치 오는 비를 미리 뛰어가 맞을 필요는 없습니다. 종말의 선택은 우리 몫이 아닌 까닭입니다. 주님께서 선택하시도록 올바르게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오늘 복음의 교훈은 여기에 있습니다. 빈 콩깍지 -반영억신부- 저는 어린 시절을 시골에서 보냈습니다. 그리고 성모동산이 있는 아름다운 성당을 기억합니다. 지금은 아주 작게 느껴져도 그 멋스러움은 여전합니다. 지금은 운동장이 되어있지만 텃밭에는 콩도 심겨져 있었고 들깨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모퉁이에는 가로등이 밤새 켜 있었습니다. 가로등 가까이에 있는 콩과 들깨는 다른 것보다 훨씬 더 키가 크고 잎도 넓었습니다. 그러나 가을 추수 때에 보면 열매가 없었습니다. 겉은 화려했지만 정작 속은 빈 껍데기였습니다. 낮에는 햇빛을 견디고 밤에는 어둠을 받아들여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탓입니다. 결국 곳간에 채워진 것들은 겉보기에는 초라했던 콩이고 들깨였습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아들이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천사들과 함께 올 터인데, 그때에 각자에게 그 행실대로 갚을 것이다.”(마태16,27)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겉모양으로 갚아주시는 것이 아니라 행한 대로 갚아주신다고 하였습니다. 인생여정 안에서 겪을 것을 겪으면서 견디고 받아들인 삶의 모양을 헤아려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인간의 삶 속에 감춰져 있는 악이 나타나지 않고 그 사람이 존경을 받는다 하더라도, 혹은 외적으로는 아무런 흠이 없고 유능한 사람으로 드러날지라도 그 사람의 참된 모습은 ‘마지막 날’ 추수 때에 밝히 드러나므로 지금누리는 것들이 헛된 기쁨이 아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지금 처한 시련과 어려움들이 풍성한 열매를 맺는 과정이라고 받아들이기를 희망합니다. 고기를 모아들인 그물을 끌어올려 “좋은 것들은 그릇에 담고 나쁜 것들은 밖으로 던져버렸다.”(마태13,48)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삶의 여정이 이미 좋은 것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것도 있는데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사실 이세상의 삶은 실패도 없고 성공도 없습니다. 실패가 없다는 것은 지금 정신을 차려 알곡의 삶을 살면 된다는 의미요, 성공이 없다는 것은 마지막 순간까지 하느님 마음에 들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세상 종말에 천사들이 의인들 가운데서 악한 자들을 가려내어, 불구덩이에 던져 버릴 것.’이라고 하신 말씀을 기억하며 지금 새 삶을 시작해야 하겠습니다. 추수라는 심판의 두려움에 주눅 들지 말고 새것도 꺼내고 낡은 것도 꺼내는 집주인과 같이 과거를 발판 삼아 오늘을 새롭게 하고 그리하여 복된 내일을 차지하시기 바랍니다. 어디든지 있는 것, 언제든지 있는 것, 얼마든지 있는 것은 희망입니다. 하느님 나라에 대한 희망을 놓치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사랑합니다.
천국은 사람의 영역이 아닙니다. 온전히 하느님께 속한 곳입니다. 그러므로 그분의 허락이 핵심입니다. 인간이 규칙을 정해 놓고 허락을 강요한다면 분명 잘못된 일입니다. 복음의 교훈은 이 사실을 묵상하는 데 있습니다. 하늘 나라는 쟁취가 아니라 주님의 선물임을 기억하라는 가르침입니다.
그러니 언제라도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은 ‘주님의 뜻’입니다. 그리고 그분의 뜻은 우선적으로 일치에 있습니다. 사람 사이의 일치가 ‘그분 가르침’의 기본을 이루고 있습니다. 특별히 가족 안의 일치는 ‘세상에서 천국을’ 시작하는 첫걸음입니다.
사회는 빠르게 변하고 있습니다. 지난날 옳았던 것이 부정되기도 하고, ‘지난 시절’ 멀리했던 것들이 새로운 가치관으로 등장하기도 합니다. ‘선택과 실천’에서 망설여지는 일들이 허다합니다. 그만큼 주님의 가르침이 절실한 시대입니다. ‘일치’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그분의 뜻은 우리를 인도합니다.☆☆☆
어떤 사람이 죽었는데 연옥 종신형을 받았습니다. 아무리 돌아보아도 자신에게 너무한 판결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계명도 잘 지켰고, 하느님을 모독하거나 사람을 괴롭힌 일도 기억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주님께 여쭈어 보았습니다. “저는 일생을 잘 살았다고 생각합니다. 기억나는 죄도 없습니다. 그런데 왜 연옥 종신형을 받아야 합니까?”
그에게 돌아온 답변은 이러하였습니다. “그래. 너는 네 말대로 일생 나쁜 일을 저지르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너는 사람들에게 있거나 없거나 마찬가지인 존재였다. 그게 네 잘못이다.”
하늘 나라는 자신의 선택에 달려 있습니다. 오늘의 삶을 어떻게 사느냐 하는 선택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가르침에 따라 기쁘게 살아야 합니다. 감사하며 살아야 합니다. 더 나아가 주님의 뜻을 찾는 적극적인 자세로 살아야 합니다. 그물이 끌어 올려졌을 때 우리가 그릇에 담겨지는 고기가 될지 버려지는 고기가 될지는 현실의 삶에 달려 있습니다.
![]()
그물의 비유
-임문철 신부-
어릴 적 새벽미사에 참례했다가 돌아오는 길에 바닷가에 들르면 밤새 수고한
어부들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따치돔의 가시에 손을 찔려가며 그물에
걸린 물고기들을 떼어내는 일을 도와드리면 싱싱한 물고기 몇 마리를
아침 반찬으로 집에 가져갈 수가 있었습니다. 그물에서 물고기를 다 떼어내면
어부들은 고급 어종들은 상자에 가지런히 담아 놓고, 잡어들은 다시 바다에
던져 버렸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그 잡어들이 상한가를 칩니다. 제주 바다의
자랑이었던 다금바리, 북바리들도 다 양식을 하니, 웰빙을 찾는 이들은 이제
항생제 안 먹은 잡어들을 일부러 찾습니다. 예전엔 맛이 없다고,
걸리면 재수 없다고 투덜대며 버렸던 물고기들인데 요즘은 없어서 못 먹을
정도입니다. 마지막 날, 주님께서 그물에 걸린 저를 보시면서 어떤 생각을
하실까요? 하느님의 식탁에 오를 싱싱한 회 한 접시는 못 될지언정
쓰레기통으로 가서는 안 되지 않을까요? 오염 안 된 자연산 잡어는 못 되어도,
최소한 어묵공장으로는 보내져야 할 텐데 말입니다.
![]()
선택받지 못한 생명을 어떻게 구할 것인가?
-이인주 신부-
선택받은 생명이라 하면 마치 누구는 구원되고 누구는 안 되는 것인가 하고 의아해하겠지만, 생명은 다 귀하다. 다만 그 용도와 삶의 질에 따라 그 영역이 구분되는 것이라고 본다. 근본적으로 결정론이 있다 해도 그것은 하느님이 하시는 일이지 인간이 왈가왈부할 사항은 아니라고 본다.
젊은 시절 필리핀에서 선교를 한 적이 있다. 갈릴래아 호수처럼 아름다운 호수가 있는 민다나오 섬의 이필이란 교구였는데, 지금도 그곳을 떠올리면 마음이 설렌다. 그곳 사람들의 대부분은 가난했고 생계를 위해 물고기를 잡았다. 물고기는 하느님이 주신 일용할 양식이었다.
한번은 그곳 사람들과 함께 고기를 잡으러 나갔다. 바다 한가운데서 밤을 보낸다길래 나도 그렇게 하겠노라고 공소 회장님과 약속했다. 공소 회장님은 예수님 시대의 베드로 사도 같은 분이었다. 그런데 내 복장을 본 공소 회장님이 머리를 갸우뚱하시며 안 되겠다는 사인을 보냈다. 가만있으면 중간이나 하지, 바닷가에서 살아본 경험이 없는 나는 ‘도대체 무엇이 문제인데?’ 하며 오히려 난색을 표했다. 섬사람들의 행색은 초겨울 산행을 나가는 차림이었다. 도톰한 점퍼에 모자까지 쓴 것을 보며 ‘이 사람들이 한여름에 무슨 일이람?’ 하고 이상하게 생각했다.
카누(쪽배)를 타고 바다로 나갔다. 뭍이 희미하게 보일락 말락 하는 곳에 코코넛나무로 만든 그물이 있었고, 우리는 배에서 내려 코코넛 기둥을 타고 올라가 약 50센티미터 될까 말까 한 공간에서 일을 했다. 곧 어둠이 내렸고, 그물을 내리자 제법 많은 고기가 잡혀 무척 신이 났다. 그렇게 여섯, 일곱 차례 그물을 내렸는데, 자정이 넘자 바닷바람이 여간 매서운 게 아니었다. ‘아! 이거였구나.’ 하면서도 말도 못하고 몸을 웅숭거리자 공소 회장님이 웃으며 입고 있던 외투 하나를 벗어주었다. 열대의 나라 바다 한가운데서 추위에 떨며 새벽이 오길 얼마나 기다렸는지 모른다. 그런 와중에도 그물을 올릴 때면 상황은 백팔십도 달라졌고, 파닥거리는 싱싱한 멸치에 코코넛술 한 잔은 추위를 잊게 했다. “요놈은 구원받은 놈, 요놈은 저주받은 놈.” 하는 공소 회장님의 물고기 감별 솜씨는 베드로 사도를 능가하는 것이 아닌가 싶었다. 그래도 버림 받는 물고기들을 보며 바로 저들을 구원하는 방법을 찾아야 하는데, 하며 중얼거리는데 동이 트고 있었다. ‘오! 하느님 감사합니다. 다 구원해 주십시오.’ 하며 마음속 깊은 곳에서 감사를 드렸다.
바로 지금
-황지원 신부-
예수님과 함께한 제자들의 면면을 바라보면, 세상에서 크게 출세할 수 있었던
사람들은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그분의 말씀을 듣던 사람들 역시 대부분은
참으로 가난한 사람들, 세상에서 희망을 가질 수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분의 말씀은 그들에게 기쁜 소식이 되고 있고, 또한 하늘 나라의
시작은 그들에게 희망이 됩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지금의 우리에게도
그분께서 선포하신 하늘 나라는 우리의 이상이며 희망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그 기쁨의 하늘 나라가 바로 지금입니까? 혹시 그 하늘 나라가 지금이 아닌,
언젠가 올 미래의 일로만 생각하고 바라보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하늘 나라는 온갖 물고기를 모아들이는 그물과 같습니다. 내가 기대하고
바라보는 그 순간에 우리에게 오는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시작하고, 결정하시는
순간에 우리에게 다가오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순간을 항상 미루며
준비하지 못한 채 그분 앞에 다가서게 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내가
참으로 사랑하고 기다리던 그분의 손에 모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미련을 버리지 못한 채 그분 앞에 끌려가 서게 될지도 모릅니다. 하늘 나라는
나중에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지금 그분의 그물이 우리를
모아들이고 이끌어줍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 그분의 말씀이 지금의
우리에게 희망이 되고 기쁨이 되는 것, 그것이 하늘 나라의 그물 안에서
기쁨을 누리는 것이고, 지금 이곳에서 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사는 방법입니다.
종말은 끝판입니다. 한 단락이 끝나고 새판이 시작되는 날입니다. 그러기에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천사들이 나가 의인들 가운데에서 악한 자들을 가려내어, 불구덩이에 져 버릴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누가 의인이겠습니까? 문제는 여기에 있습니다. 어부는 그물에서 ‘좋은 것들은 그릇에 담고 나쁜 것들은 밖으로 던져 버린다.’고 하셨습니다. 결정은 어부가 합니다. 종말의 결정권은 주님께 있다는 가르침입니다.
좋은 고기는 싱싱한 고기입니다. 어부에게 만족감을 주는 고기입니다. 이웃에게 기쁨을 주는 이가 주님께도 기쁨을 드립니다.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이가 주님께도 사랑받습니다. 사람들에게 손가락질받는 이가 마지막 날에 의인이 되는 것은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종말은 점검의 날입니다. 사랑과 기쁨을 점검받는 날입니다. 얼마나 사랑하며 살았는지, 얼마나 기쁘게 살았는지 점검받는 날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종말을 통하여 당신의 가르침을 마무리하실 것입니다. 세상에 가득 찬 당신의 뜻을 매듭짓고 새로운 세상을 여실 것입니다.
마무리를 위협적으로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 두려움과 공포는 종말의 본질적인 요소가 아닙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이것들을 다 깨달았느냐?” 하고 물으셨습니다. 우리 역시 제자들처럼 “예!” 하고 대답해야 합니다. 종말이 완성임을 고백하는 행동입니다
☆☆☆
하느님과 우리 사이는 창조주와 창조물의 관계입니다. 옹기장이와 옹기의 관계와 비슷합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는 우리에 대한 권한을 모두 장악하고 계십니다.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의 권리를 이렇게 옹호합니다. “작품이 제작자에게 ‘나를 왜 이렇게 만들었소?’ 하고 말할 수 있습니까? 또는, 옹기장이가 진흙을 가지고 한 덩이는 귀한 데 쓰는 그릇으로, 한 덩이는 천한 데 쓰는 그릇으로 만들 권한이 없습니까?”(로마 9,20-21) 그렇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제 재주로 만들기를 마음대로 해서, 만들고자 하면 만들고, 말려고 하면 말고, 크게 하려면 크게 하고, 작게 하려면 작게 하는’ 장인과도 같습니다(정약종의 ‘주교 요지’ 참조). 그러나 장난감을 가지고 놀다가 쉽게 부수어 버리는 어린아이와 같은 분은 아니십니다. 오히려 당신께서 창조하신 것을 좋게 보시는 분이십니다. 무엇보다 당신께서 창조하신 인간을 사랑하시는 분이십니다. 여기에 우리의 희망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