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7월 31일 2011년 7월 31일(연중18주일)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손에 들고
하늘을 우러러 감사의 기도를 드리신 다음,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셨다
(마태오 14,13-21)
Taking the five loaves and the two fish,
and looking up to heaven,
he said the blessing, broke the loaves,
and gave them to the disciples,

말씀의 초대
하느님께서는 오래 전 다윗 임금에게 내리신 당신의 사랑이 변치 않았음을 전한다. 이스라엘 백성이 주님께 귀 기울이고 그분께 돌아가면 생명을 얻고 그분께서 베푸시는 풍요로운 잔치에 참여하게 된다(제1독서). 바오로 사도는 우리를 사랑해 주신 그리스도를 고백한다. 우리는 그분 사랑에 힘입어 세상의 어떤 환난이나 역경, 박해나 위협도 이겨 낼 수 있으며, 그 사랑은 세상의 무엇으로도 갈라놓을 수 없는 것이라고 전한다(제2독서). 예수님께서 물고기 두 마리와 빵 다섯 개로 군중을 배불리 먹이신다. 이것은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만나를 마련해 주신 것과 같은 장면을 떠올리게 하며, 오늘날 구원의 여정을 걷고 있는 신약의 하느님 백성에게 힘과 용기와 사랑을 주는 성체성사의 예표이기도 하다(복음).
☆☆☆
오늘의 묵상
“나눔이 결코 물질적인 것이 아님을 다시 깨달아 봅니다. / 내가 먼저 알고 있는 것을 가르쳐 주는 것, / 내가 할 줄 아는 것을 다른 이도 할 수 있게 도와주는 것, / 내가 먼저 얻은 것을 다른 이들과 함께 나누어 갖는 것…… / 나는 나눌 것이 없는 것만 같았는데 / 그러고 보니 나눌 것이 넘치도록 많았습니다. / <중략> / 나누면서 제가 더 풍요로워짐을 느낍니다. / 제 것을 나누어 주었는데도 아무것도 줄어들지 않고 / 자꾸만 자꾸만 나눌 것이 더 많이 생겨나는 것 같습니다.”
모든 이가 이 시대의 가장 아름다운 사제로 기억하는 이태석 신부님이 남기신 글입니다. 신부님은 아프리카 톤즈에서 가난한 이들을 도우시면서, 가진 것을 나눌수록 오히려 풍요로워지는 것을 깊이 체험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배고픈 군중을 보시고 제자들에게 먹을 것을 나누어 주라고 말씀하십니다. 제자들이 “여기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가진 것이 없습니다.” 하고 대답합니다. ‘우리가 먹을 것도 없는데 남 줄 것이 어디 있느냐.’는 볼멘 대답처럼 들립니다.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없습니다.’와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나 있습니다.’는 크게 다릅니다. 이것은 마치 사막을 건너는 사람이 ‘물이 반병밖에 없네.’ 하고 걱정하는 것과 ‘아직도 반병이나 남았네.’ 하고 여유를 갖는 것에서 느끼는 차이입니다. 지금 가진 것이 아니라 생각의 차이가 삶을 풍요롭게도 하고 빈곤하게도 합니다. 어떤 삶을 살지는 우리 자신에게 달렸습니다.

우리의 손을 빌어
-반영억신부-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의 필요를 채워주십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풍요롭게, 그러나 당신의 방법으로 주십니다. 우리의 마음을 열어 그분의 마음과 하나가 될 수 있는 은혜를 입으시기 바랍니다. 빵의 기적에 관해서 묵상하는 가운데 능력의 주님을 깊이 만나시길 희망합니다.
예수님께서 바쁜 하루를 보내시고 외딴 곳으로 몸을 피하셨지만 사람들은 예수님을 가만두지 않으셨습니다. 사람들은 어디에든 따라가서 자기들의 목적을 이루어야 했고, 예수님은 그들을 거절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던 중 저녁 때가되자 제자들이 예수께 와서 “여기는 외딴 곳이고 시간도 이미 늦었습니다. 그러니 군중을 헤쳐 제각기 음식을 사 먹도록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하고 말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그들을 보낼 것 없이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하시며 제자들과는 정반대되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입장에서 볼 때는 돌려보내야 할 장소, 돌려보내야 할 사람들이 아니라 제자들이 먹을 음식을 주어야 하는 장소요, 먹을 것을 주어야 할 사람입니다. 돌려보내야 할 늦은 시간이 아니라 함께 음식을 나누어 먹어야 할 시간입니다.
다시 제자들이 “우리에게 지금 있는 것이라고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뿐입니다”(마태14,15-17)하고 말했습니다.
주님께서 ‘먹을 것을 너희가 주어라’ 하시는데 제자들은 ‘지금 있는 것이라고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뿐입니다’ 하고 말한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한계입니다. ‘요것 밖에 없는데’….하는 것이 아니라 ‘이만큼이나 있는데’ 하는 새로운 생각이 없는 한 주님을 만난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믿는 이에게는 ‘이까짓 것’이 아니라‘이것이라도!’입니다.
주님과 함께 있으면서도 인간적인 생각 안에 머물러 있으면 인간을 뛰어넘는 주님을 만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아무 도움을 필요 없을 만큼 큰 부자도 없고, 도움을 줄 수 없을 만큼 가난한 사람도 없습니다.’턱없이 부족한 숫자이기는 하지만 나누어 줄 수 있는 최소한의 음식은 있습니다. 이것밖에 없는 것이 아니라, 있는 만큼만 내 놓으면 되는 것입니다. 가진 것이 없다고 불평할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의탁하여 내놓으면 풍요로워집니다.
호세아서 6장6절에 보면 “내가 반기는 것은 제물이 아니라 사랑이다. 이 하느님의 마음을 알아다오!”라고 호소하고 있습니다. ‘이것으로 저 많은 사람을 어떻게 배 불릴 수 있을까?’ 계산하지 말고 부족하다고 생각되는 모두를 내놓으면 주님의 손을 거쳐 풍요로워 집니다.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도 5천명이 먹고도 남는 넉넉함으로 채워 주십니다. 이렇게 그 풍요로움은 우리의 생각을 훨씬 뛰어넘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주님은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라는 우리의 손을 빌어 기적을 이루십니다.
미국에 있을 때 본당에서 자동차로 2시간 넘게 떨러져 있는 멕시코 수녀원에 매주 토요일 빵을 전달하였습니다. 한 주간 동안 여러 빵 집을 돌며 모아놓은 빵을 토요일에 가져가게 되는데 보관할 장소가 마땅찮고 모으는 것도 생각보다 손이 많이 필요하였습니다. 자동차도 오래되어 늘 불안하였습니다. 더군다나 국경을 넘어 그 일을 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러나 수녀원으로 모여드는 가난하고 고통받는 이들의 긴 행렬을 보면 그칠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 빵은 빵이 아니라 주님의 사랑을 전하는 표징이기 때문에 계속 해야만 하는 일이었습니다.
사실 빵을 받는 이들은 배고픔에 주려 있기도 하지만 그 보다는 우리의 사랑에 더 주려있습니다. 우리가 전하는 빵의 양이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정성과 사랑이 그 안에 얼마나 담겨 있느냐가 문제입니다. “가진 사람은 더 받아 넉넉해지고 가지지 못한 사람은 그 가진 것마저 빼앗기게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사랑을 가지고 일을 하면 더 넉넉해지고 사랑을 받는 이들도 머지않아 사랑을 실천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것이 사랑의 기적이요, 사랑의 승리입니다.
이제는 예수님께서 이루신 기적을 예수님의 이름으로 우리가 이루어내야 합니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는 말씀은 단순히 음식을 주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각자에게 필요로 하는 것을 주는 것을 뜻합니다. 사랑에 굶주린 사람, 인간적인 대우를 받고 싶은 사람, 인정받고 싶은 사람, 위로받기를 원하는 사람도 있고 이야기시간을 필요로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우리가 먹을 것을 주어야 할 사람은 사람이 참으로 많습니다. 쉽지는 않지만, 주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베풀면 주님께서 모두를 배 불리시고 먹고도 남게 하실 것입니다. 나눈다고 해서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이 감소되거나 소멸되지 않고 오히려 덤으로 더 많은 것을 받게 될 것입니다. 이웃을 향한 마음이 더 커지기를 희망합니다.
우리가 하는 일이 비록 미약하지만 주님의 이름으로 더욱 큰 풍요로움을 이룰 수 있다는 믿음으로 작은 사랑의 실천에 마음을 쓰시기 바랍니다.
마더 데레사는 “사람들이 기아로 죽어가는 것은 하느님이 그들을 돌보시지 않아서가 아니라 바로 당신과 내가 너그럽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손 안에 있는 그 사랑을 나누어 주는 도구가 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도구로 써 주소서” 하고 기도했습니다. 또한 톨스토이는 “모든 재물은 똥오줌과 같아 그것이 쌓여 있을 때에는 냄새를 피우고 뿌려졌을 때에는 땅을 기름지게 한다.”고 말했습니다. 우리도 주님의 도구로 거름을 뿌리고 기적을 이루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내가 얼마나 많이 가지고 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떤 마음을 갖고 있느냐가 중요합니다. 소유하려고 하는 사람은 아무리 많은 것을 가지고 있어도 더 가지려고만 하지 내어 놓을 생각은 하지 않습니다. 아홉을 가지고 있으면 열을 채우려 하는 욕심이 있습니다. 반면에 나누어 주려고 하는 사람은 아무리 작은 것을 가지고 있어도 나누어 주려는 생각을 합니다. 소유가 아니라 나눔을 더 기뻐했으면 좋겠습니다.
마태복음 14장19절에는 “예수님께서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손에 들고 하늘을 우러러 찬미를 드리신 다음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니, 제자들이 그것을 군중에게 나누어 주었다.”고 적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손에 들린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는 결코 작은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손에 들려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우리가 가진 것을 주님의 손에 갖다 드리면 엄청난 기적을 이루게 됩니다. 내가 가진 것이 무엇이든 기적의 재료가 되기를 바랍니다. 나의 손에 무엇이 들려 있는지 보십시오. 무엇을 하려고 쥐고 있는지 보십시오. 주님의 손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잊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사랑합니다.
일 더하기 일은 막노동 이랍니다.
이 빼기 이는 틀니고요, 삼 더하기 삼은 인삼 두 뿌리래요.
그럼 100 배기 1 은 무엇일까요? 0 입니다.
100번 잘 하다가 한 번 잘못하면 말 장 헛일이라는 것이죠.
주님의 일은 처음부터 끝까지 사랑으로 해야 합니다.
어려움이 있더라도 끝까지 참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마태10,22).
“자선으로 씨를 뿌릴 때 거기서 거두는 열매로 천국의 곳간이 가득 채워질 것입니다”-성베드로 크리솔로고-
‘적게 뿌리는 사람은 적게 거두고 많이 뿌리는 사람은 많이 거둡니다”(2고린9,6) 그러니 많이 많이 뿌리십시요, 사랑의 씨앗을!
뻥이요~~~!!
- 안성철 마조리노 신부(성바오로수도회 준관구장) -
튀밥 장수가 뻥튀기할 준비를 합니다. 주변의 아이들은 귀를 막고 기다립니다. 튀밥 장수의 외침과 함께 아이들이 모여듭니다. 예전 장터에서 주전부리를 위해 튀밥을 튀기던 흔하게 보던 풍경입니다.
쌀이나 강냉이를 넣어 뻥튀기 기계를 빙빙 돌리다가 어느 정도 달궈져 적당한 시간이 되면 뻥이요~~ 라는 외침과 함께 쌀, 강냉이가 몇 배나 부풀려져 사람들을 놀라게 만들었지요. 그것이 그렇게 신기할 수가 없었습니다. 자그마한 봉지에 담겨져 뻥튀기 기계에 들어간 쌀이 요술 상자 같은 뻥튀기 기계 안에서 어느새 큰 부대에 담아야만 할 만큼 커진 것이 마냥 놀라웠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을 일으키셨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기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오천 명이 먹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작은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예수님의 손을 거치자 오천 명이 먹고도 남을 만큼 불어났습니다. 그 적은 양의 음식이 어떻게 그렇게 많이 불어났는지 도무지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그 누군가가 봉헌한 작지만 소중한 빵과 물고기가 예수님의 손을 거쳐 엄청나게 불어났음은 확실합니다.
예수님은 어릴 적 신기하게만 보였던 튀밥 장수 같습니다. 우리의 작은 봉헌물을 받으셔서 그것을 많은 사람들이 나누어 받을 수 있도록 부풀려 주십니다. 우리가 보기엔 너무나 하찮고 작은 봉헌물이지만 예수님은 그 미약한 제물을 풍성하게 만들어 주십니다. 마더 데레사의 작은 희생, 아프리카 톤즈라는 작은 마을에서의 이태석신부님의 보이지 않는 봉헌의 삶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키고 주님께로 이끌었습니까?
예수님께서는 “하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어떤 사람이 그것을 가져다가 자기 밭에 뿌렸다. 겨자씨는 어떤 씨앗보다도 작지만, 자라면 어떤 풀보다도 커져 나무가 되고 하늘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인다.”(마태13,31-32)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그분께 드리는 것은 작은 겨자씨이지만 그분의 다스림 안에 들어가면 하늘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일 만큼 큰 나무가 되는 것이 바로 하늘 나라의 신비입니다.
비록 작고 비천한 모습이라 할지라도 있는 그대로의 우리를 온전히 그분께 봉헌할 때 그분은 우리를 한없이 큰 당신의 도구로 써주실 것입니다. 가난한 과부의 작은 헌금을 크게 보아주신 주님께서는 우리의 화려하고 큰 봉헌을 바라지 않으시고 초라하고 작지만 정성스럽고 온전하게 봉헌한 우리의 제물을 어여삐 보아주십니다.
오늘도 나는 턱없이 부족한 나의 제물을 가지고 그분께로 가서 봉헌합니다. 그리고 그분은 당신 손에 나의 작은 제물을 받으시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사람들에게 넘치도록 나누어 주실 것입니다. 어릴 적 들었던 튀밥 장수의 외침이 오늘은 예수님의 목소리로 들리는 듯합니다. 뻥이요~~!!!
풍성하게 베푸시는 하느님
- 강길웅 신부-
배부르게 먹는다는 것은 먹을 것이 변변치 못했던 유대인들에게 는 하나의 커다란 꿈이요 이상이었습니다. 그들은 정말 배가 고팠습니다. 하느님께 대한 계속적인 불신과 그리고 역대 왕들의 썩은 정치 탓으로 나라는 피폐할 대로 피폐되었고 앗시리아와 바빌론, 그리고 그리스와 로마에 차례로 멸망당하면서 나라와 백성은 허탈과 절망 상태에 빠지게 됩니다.
오늘 1독서의 내용은 바빌론에게 망한 뒤의 처참한 현실 앞에 백성들이 망연자실할 때 하느님께서 들려주시는 희망의 메시지입니다. 그때는 나라만 망한 것이 아니라 백성들 거의 모두도 바빌론에 끌려가서 노예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비참했는지 모릅니다. 죽느니만도 못한 참혹한 생활을 했습니다.
그러나 현실적인 시련은 축복입니다. 고난은 다 높으신 분의 뜻이 담겨져 있는 사랑의 섭리입니다. 왜냐하면 바로 그때 유대인들이 자신들을 성찰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을 등지고 멀리했을 때 과연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낳게 되었던가를 뼈저리게 체험하고 반성하게 됩니다. 바로 그때 예언자가 나타나서 하느님께서 초대하시는 잔칫상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너희 목마른 자들아, 오너라. 너희 먹을 것 없는 자들아, 오너라. 맛좋은 음식을 먹으며 기름진 것을 푸짐하게 먹으리라." 하느님께서 무엇을 주실 때는 항상 넉넉하게 주십니다. 결코 인색하거나 째째하시지 않습니다. 그리고 값싼 것도 아닙니다. 돈으로도 결코 살 수 없는 아주 귀한 것이면서도 돈도 받지 않습니다.
그냥 주시는데 그것도 후하게 넘치도록 주십니다. 옛날 광야에서의 만나도 그랬습니다. 모든 사람이 모자라지 않게 넉넉하게 주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는 남자만도 5천 명이나 되는 아주 많은 사람들이 모두 배불리 먹고도 열 두 광주리가 남도록 그렇게 후하게 베푸셨습니다. 성서의 내용을 읽어보면 예수님은 아주 계획적으로 오늘 사건을 만드셨습니다. 백성들을 이끄시고 일부러 먼 곳으로 데리고 가셔서 식사 때가 되어도 먹을 것을 구할 수 없도록 안배하신 것입니다.
백성들은 뭣도 모르고 그냥 따라간 것입니다. 그분께서 하시는 모든 일들이 그저 감탄스럽기 때문에 다른 것은 보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무조건 따라간 것입니다. 그러다가 황송스럽 게도 예수님께서 마련하신 잔칫상에 초대받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주 치밀하면서도 극적으로 일을 계획하셨습니다. 당신께서 누구시라는 것을 알리실 필요가 있으셨던 것입니다.
그것은 백 마디 말보다 한 가지 이적이면 충분했습니다. 바로 그들의 굶주린 배를 채워 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백성들이 배부른 것을 느낄 때 예수님이 어떤 사명을 가지고 그들 앞에 등장하셨는지를 알 것이기 때문입니다. 메시아가 오면 그들의 굶주린 배가 가득 채워진다는 것을 그들은 너무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메시아로서 오셨지만 백성들의 현실적인 배를 채워 주기 위해서 오신 것은 아닙니다. 절대로 아닙니다. 다른 복음 에 보면 배부르게 먹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려 하자 예수님이 슬그머니 피하신 것만 봐도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현실 문제를 지금 당장 해결하시는 그런 식의 메시아는 원치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이 광야에서 단식을 하실 때도 사탄으로부터 받은 유혹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네가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이 돌을 빵으로 만들어 봐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단호하게 거절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세상의 왕이 되는 것을 원치 않으셨고 또 썩어 없어질 양식에는 별 관심이 없으셨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더 위대한 포부가 계셨습니다.
오늘 독서에서처럼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을 초대하신 잔칫상이 나 또는 광야에서 모자라지 않게 40년 동안 후하게 내려 주셨던 만나, 그리고 오늘 복음에서 오천 명을 배부르게 먹이신 사건은 다 성체성사에 그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다른 양식은 다 어떤 징표요 상징에 불과합니다. 오직 생명의 양식이 그 핵심이요 포인트입니다.
우리는 그래서 성체의 그 진정한 의미를 잘 알아야 합니다. 성서가 지향하고 가르치는 빵과 잔치는 영원히 죽지 않는 그 성사의 양식을 말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정말 썩는 양식에만 치사하게 묶여 살 것이 아니라 썩지 않는 양식에 보다 관심을 갖고 감사한 마음으로 그 음식을 모셔야 합니다. 세상에 이보다 더 위대하고 값진 음식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잔칫상에 감히 나설 수도 없는 자격 없는 인생들입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아무런 돈 없이 원하는 대로 먹을 수 있도록 베푸셨습니다. 여기서 하느님을 모시면 세상을 다 얻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내주지 못하고 베풀지 못할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우리도 나누고 베풀도록 합시다.
나눔, 모두 함께 행복해지는 길
- 배광하 신부-
어서 와서 먹어라
한국 초대 교회의 신앙은 그야말로 공동체 정신으로 뭉쳐진 신앙이었습니다. 특히 교우촌의 삶은 나눔의 삶이었습니다. 많은 백성이 굶어죽는 보릿고개 때에도 산중의 교우촌 신자들은 콩 반 쪽이라도 나누어 먹었기 때문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었다고 합니다.
농사와 옹기 만드는 일과 숯을 굽고 장작을 패는 일은 평생 해보지 않았던 양반 교우들도 사랑하는 가족과 출세의 영욕을 모두 버리고 스스로 그 고단한 길을 택했습니다. 세속에서 멋들어진 풍류와 산해진미를 맛보았을 그들이 천국의 영원한 생명을 위하여 가시밭길을 걸었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순교의 때가 오면 이제야 천국을 간다는 기쁨에 기꺼이 목을 내놓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날, 그 기쁨과 영광의 날에 사랑했던 주님께서 천국 잔치를 열어주시어 ‘술 한 잔 주시겠지’라는 작은 소망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분들 역시 오늘 이사야 예언자의 축복의 예언을 기억하고 계셨을 것입니다.
“자, 목마른 자들아, 모두 물가로 오너라. 돈이 없는 자들도 와서 사 먹어라. 와서 돈 없이 값 없이 술과 젖을 사라”(이태 55, 1).
성경은 자주 하느님 나라를 잔치와 축제가 열리는 곳으로 묘사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자주 하느님 나라를 잔칫집으로 비유하셨습니다. 특별히 가난한 이들과 장애인들과 눈먼 이들과 다리 저는 이들을 그 잔치에 초대하셨습니다(루카 14, 21 참조).
한국 초대 교회의 교우들 역시 예수님의 이 같은 사랑을 그대로 실천하였습니다. 그들 공동체에 굶는 사람이 오면 받아들여 함께 먹었고, 온갖 장애와 서러움을 안고 찾아오는 이들을 형제로 여기고 극진히 대접하였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결코 굶주리지 않았습니다. 주님께서 부족함 없이 채워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 교회의 모습은 선배 신앙인들의 믿음은 물론, 애덕의 실천에도 턱없이 부족한 모습을 보입니다. 주님께서는 분명 겨우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이 넘는 사람을 먹이신 분임을 우리는 자주 잊고 살았던 것입니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오늘 복음에서 우리가 주의해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복음의 예수님 기적 뒤에는 분명 기적을 보았던 이들의 깜짝 놀람이 뒤 따르는 법인데,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 이야기 뒤에는 아무도 놀라는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제자들도 군중도 그저 덤덤할 뿐입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빵을 남산만큼, 물고기를 고래만큼 크게 하셨고, 그것을 군중에게 나누셨다면, 분명 제자들과 군중은 깜짝 놀랐을 것이고, 그 기적은 복음에 기록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4복음서에 모두 기록되어 있는 이 기적의 이야기엔 모든 목격자들이 놀라지 않고 있습니다.
이는 분명 예수님께서 인간의 이성과 과학적 논리로 증명할 수 없는 신비한 기적을 일으키신 것이 아님을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평범한 인간도 할 수 있는 일로 오천 명을 먹이신 것입니다. 그래야 훗날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도 그 일을 행할 수 있을 것이고, 당신만이 하실 수 있는 기적보다는 그것이 더욱 효과적인 가르침이 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모든 복음사가가 기억하고 있는 이 기적에 앞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그 많은 군중을 먹이라고 하십니다. 제자들의 공통된 반응은 불가능이었고, 이구동성 군중을 돌려보내는 것이 좋겠다고 예수님께 말씀을 드립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적은 양이라도 그것을 나누라고 가르치십니다. 나누면 모두가 먹을 수 있게 됩니다. 그것이 오늘 복음의 핵심입니다.
저마다 가지고 있는 것을 모아 모두가 함께 나누는 것, 그것이 예수님의 기적이었고, 사도행전 초대 교회의 모습(사도 4, 32~35)이었으며, 한국 초대 교회의 모습이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의 기적은 당대의 일회성 기적으로 그쳐버린 것이 아니라, 세상이 끝나는 그날까지 이어질 기적이 된 것입니다. 그 같은 나눔의 기적을 우리는 오늘도 우리 주변에서, 세계 도처에서 목격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기적은 오늘 우리도 그렇게 살아야 할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나눔의 기적을 살아야 훗날 영원한 천국 잔치에 초대 받을 수 있음을 깨우치고 있는 것입니다.
살아있는 성자라 일컬어졌던 프랑스의 ‘아베 피에르’(1912~2007) 신부는 삶의 목적을 묻는 이들에게 분명히 말합니다. “삶의 목적은 바로 사랑하는 법을 배우는 데 있다”고, 그리고 말합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타인인 당신이 행복해야 나도 행복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타인인 당신이 불행하고 괴로우면 나도 아픈 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돌려보냄이 아니라, 배고픈 군중과 함께 나눔이 진실한 사랑인 것입니다.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
-서울대교구 주보-
오늘 마태오 복음(14,13-21)은 예수께서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신 이적사화(異蹟史話)이다. 네 복음서의 이적사화를 크게 둘로 나누면 사람을 구제하신 치유․구마 이적사화와 자연을 상대로 한 이적사화이다. 오천 명을 먹이신 이야기는 자연 이적사화에 속한다. 특히 자연 이적사화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능력을 나타내는데 오천 명을 먹이신 이야기의 전례(前例)가 구약성서에도 있다.
1. 구약성서의 빵 기적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과 가장 비슷한 이야기는 엘리야 예언자가 사렙다 과부에게 밀가루와 기름이 떨어지지 않도록 해주었다는 이야기(1열왕 17,8-16)와 엘리사가 보리떡 스무 개로 백 명을 먹였다는 이야기(2열왕 4,42-44)이다. 엘리사의 이적 이야기는 “어떤 사람이 바알살리사에서 왔다. 그는 맏물로 만든 보리떡 스무 개와 햇곡식 이삭을 하느님의 사람에게 가져왔다. 엘리사는 그것을 같이 있는 사람들에게 나누어 먹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의 제자가 ‘어떻게 이것을 백 명이나 되는 사람들 앞에 내놓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물었다. 엘리사가 다시 말하였다. ‘이 사람들이 먹도록 나누어 주어라. 야훼께서, 이들이 먹고도 남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리하여 그것을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니, 과연 야훼께서 말씀하신 대로 그들이 먹고도 남았다”는 것이다.
2. 신약성서에서의 빵 기적
따라서 마태오 복음에 나오는 오천 명을 먹이신 이적사화에 담긴 뜻인즉, 엘리사 예언자도 위대하지만 예수님이 더 위대하다는 것이다. 엘리사는 빵 스무 개로 고작 백 명을 먹였지만 예수님은 빵 다섯 개로 무려 오천 명을 먹이셨다. 아무리 엘리사가 능력있고 위대한 예언자라 해도 어찌 주님이신 예수님과 비교할 수 있겠는가? 오로지 예수님만이 그리스도이시고 구원자이시다. 이것이 바로 오천 명을 먹이신 이적사화에 담긴 뜻이다.
3. 기적에 담긴 의미
오천 명을 먹이신 이적사화에는 성만찬례(聖晩餐禮), 곧 미사의 풍요함이라는 또 다른 의미가 담겨있다.
“예수께서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손에 들고 하늘을 우러러 감사의 기도를 드리신 다음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셨다. 제자들은 그것을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마태 14,19)는 말씀은 예수께서 최후 만찬 때 하신 말씀(마태 26,26; 마르 14,22; 루가 22,19; 1고린 11,23)과 흡사하다. 따라서 예수님의 최후 만찬을 되새기며 토요일 밤이나 일요일에 성만찬례를 지내던 초대교회 교우들은 틀림없이 성만찬례 때마다 오천 명을 먹이신 말씀을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오천 명을 먹이신 이적사화는 성만찬례, 곧 미사의 풍요함을 밝히는 이야기라 하겠다. 이 성만찬의 의미와 아름다움은 ‘나눔’에 있다. 따라서 우리 그리스도인은 먹을 것을 배고픈 이들과 나누어야 한다. 그러면 모두 배불리 먹고도 남을 것이다. 양식이 적어 부족할 것 같지만 나누어 주니까 모두 배불리 먹고도 남았다는 아름다운 뜻이 오늘 이적사화에 담겨있다.
매일 빵의 기적을 일으키는 사람들
- 이기양 신부-
'예수님께서 오천 명을 먹이신 빵의 기적이 우리 시대에도 일어난다면 얼마나 좋을까? 전 세계의 굶주리고 헐벗은 사람들이 모두 사라지고 다시는 기아에 허덕이는 사람도 생기지 않을 테니까!'하는 생각과 함께 '정말 굶주리는 모든 사람이 사라질 수 있다!'에는 일말의 의문이 듭니다. 왜냐면 먹을 것이 모자라서 굶주리는 사람들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움켜쥐고 나눌 줄 모르는 사람들 때문에 구조적 가난이 생겨난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성경학자는 오천 명을 먹이신 빵의 기적을 두고 여러 가지를 연구하다가 장소적인 측면으로 이러한 풀이를 하기도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빵의 기적을 일으킨 장소는 일반적으로 사람이 사는 마을에서 한 오십 리 정도 떨어진 거리로 왕복 백 리 되는 거리임이 밝혀졌는데 그 당시 이 정도의 거리를 이동하는 사람들은 한 끼 정도의 식사를 가지고 다녔다고 합니다.
그런데 식사 시간이 됐는데도 사람들은 음식을 먹지 못했습니다. 혼자 먹을 수도 없고 나눠 먹기에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엄두를 못 내는 상황이었던 것이지요. 이런 상황에서 예수님께서 먼저 먹을 것을 내놓고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손에 들고 하늘을 우러러 찬미를 드리신 다음"(마태 14,19) 나누기 시작하자 조그만 조각을 받아든 사람들이 하나 둘 슬그머니 자신의 것을 내놓기 시작합니다. 이렇게 여기저기에서 많은 사람들이 음식을 나눠 먹기 시작했고, 내놓은 음식은 그 많은 사람들이 실컷 먹고도 남았다는 것입니다.
즉, 나누고 함께할 줄 아는 공동체는 결코 모자라지 않고 풍요로워진다는 것을 가르쳐 주시려고 오늘 예수님께서 오천 명을 먹이신 빵의 기적을 보여 주신 것이라는 설명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시대에 오셔서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을 다시 한 번 일으키신다 해도 세계 각국에서 만연되고 있는 빈곤과 기아는 해소될 수 없을 것입니다. 왜냐면 내일을 위하고 미래를 준비한다는 이유로 또 탐욕스러운 자들이 끝없이 움켜쥐고 이웃이야 굶든 말든 쌓아두기 경쟁을 할 것이 뻔하기 때문입니다.
오천 명을 먹이신 빵의 기적은 산더미 같은 빵이나 엄청난 재물이 만들어낸 결과가 아닙니다.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는 나 혼자 먹기에도 부족한 양이었지만 함께 나누려는 마음이 있었기에 오천 명이 먹는 빵의 기적이 일어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역시 우리 시대에도 나눌 줄 아는 마음이 우선일 때 기적은 일어납니다.
1998년 IMF가 시작 되고 많은 사람들이 가난에 시달리고 있을 때 한 신부님이 어느 조그만 본당에 새로 부임을 했습니다. 그런데 전임 신부님이 매주 목요일 저녁에 지역의 홀몸노인들을 식사에 초대한다는 프로그램을 만들고 딱 한 주를 하고 다른 곳으로 발령을 받아 떠난 것을 알게 됐지요. 새로 부임한 신부님은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목요일이 되자 150여 명이 넘는 노인들이 몰려들었습니다. 알아보니 성당 마당 한쪽을 유료 주차장으로 내놓고 그 수익금으로 운영을 한다는 것이 유일한 대책이었습니다. 새로 온 신부는 성당을 어떻게 유료 주차장으로 사용할 수 있겠는가 하고 고민하다가 유료 주차장을 다 없애고 과감하게 '사랑의 쌀통'과 '사랑의 헌금함'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신자들에게 말했습니다.
"매일 한 끼 밥을 할 때마다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서 한 숟가락씩 쌀을 모으고 한 주일이 지나면 '사랑의 쌀통'에 넣으십시오. 또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서 조금만 덜 쓰고 1000원씩만이라도 모아서 '사랑의 헌금함'에 넣어주십시오."
이렇게 신자들을 설득하기 시작했지요. 매 주 목요일마다 150명에서 200명까지 몰려오는 사람들을 보고 넉넉하지도 않은 작은 성당에서 그 많은 식구들을 어떻게 다 먹일 수 있겠느냐고 신자들의 걱정은 이만저만 커져가는 게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사랑의 식사는 단 한 번도 중단된 적이 없었습니다. 그 신부님이 있었던 임기 내내 수많은 노인들에게 따뜻한 밥을 해드릴 수 있었지요.
여러분, 모두가 놀란 그 큰 은총을 체험한 신부가 바로 저입니다. 그 본당에 있을 때 저는 이렇게 '오천 명을 먹이신 빵의 기적'을 체험했습니다. 우리 시대에도 예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기만 한다면 '오천 명을 먹이신 빵의 기적'은 사방 어디에서든 계속되리라는 것을 저는 확신합니다.
빵의 기적을 일으키는 사람이 바로 여러분 자신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