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19주일 (마태오 14,22-33)물위를 걷다 빠져버린 베드로

2011. 8. 7. 오전 5:53:55

글자

2011년 8월 7일 연중 제19주일

그만 무서운 생각이 들어 물에 빠져 들게 되었다.

그는 “주님, 살려 주십시오!”하고 비명을 질렀다..
(마태오 14,22-33)

 

But when he saw how strong the wind was
he became frightened;
and, beginning to sink, he cried out,
"Lord, save me!"

 

 

 
말씀의 초대

엘리야가 하느님을 만난다. 그분께서는 강한 바람 가운데에도 지진 가운데에도 불 속에도 계시지 않았다. 그분께서는 조용하고 부드러운 소리로 현존하셨다. 주님께서는 바알과 같은 우상처럼 파괴적인 모습으로 오시는 것이 아니라 조용하고 부드럽게 현존하신다(제1독서). 바오로 사도는 이스라엘이 하느님의 선택과 함께 약속까지 받은 백성이지만, 그 약속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실현된다는 것을 깨닫지 못함을 안타까워한다(제2독서). 제자들이 탄 배가 풍랑 속에서 시달리자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다가오셔서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하고 말씀하신다. 예수님께서는 ‘주님께서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임마누엘’의 주님이심을 보여 주신다(복음).

 ☆☆☆

오늘의 묵상

혼자 기도하시던 예수님께서 무엇이 그리 급하셨는지요? 거센 폭풍우가 몰아치는 호수를 걸으시어 한숨에 제자들에게 다가가신 이유는 무엇인지요? 제자들이 깊은 밤에 호수 한가운데서 거센 바람에 시달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어둠 속에서 풍랑에 시달리며 두려움에 떨고 있자 물불을 가리지 않고 그들에게 달려가신 것입니다. 마치 위기에 놓인 자식을 보고 허둥지둥 달려가는 부모처럼 말입니다.
삶에서 우리를 두렵게 하는 것은 무엇인지요? 복음에서 보듯, 어둠과 폭풍우입니다. 칠흑 같은 캄캄한 어둠 속에서 우리는 나아갈 방향을 잃기 쉽습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 삶이 어디로 가는지 모를 때 두렵습니다. 또한 폭풍우처럼 불현듯 우리 삶에 위기와 어려움이 불어닥칠까 봐 두렵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더 큰 두려움은 아무 기댈 곳 없고, 어떤 희망도 보이지 않을 때 생깁니다.
오늘 복음에서 보듯,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위기가 닥치자 거센 바람을 뚫고 제자들에게 오십니다. 우리가 어떤 어려움에 놓이든지, 주님께서는 우리의 두려움보다 먼저 우리 곁에 와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 삶이 잔잔한 호수 위를 떠다니듯 평온할 때도, 폭풍우가 몰아치듯 고통스러운 순간에도 우리가 기대어 살 곳은 주님임을 늘 의식해야 합니다.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하신 주님의 말씀을 언제나 마음속 깊이 간직하며 살아야 합니다. 
 

심리학자인 에릭슨은 사람들은 너무 완벽한 사람보다 약간 빈틈이 있는 사람을 더
좋아한다고 말합니다. 너무 완벽한 사람은 다른 사람들에게 열등감을
느끼게 하고 다른 사람들을 피곤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또 결점을 드러내지 않는 사람은 왠지 위선적이고 인간미가 없을 것이라는
고정관념 때문에 친근감을 갖기 어렵다고 합니다. 그래서 빈틈을 보여주는
사람이 오히려 사람들에게 호감을 줍니다. 이는 누구나 자신의 결점을 숨기고 싶은
인간의 근본 욕구의 역반응이기에 그런 사람에게 진솔한 느낌이 듭니다.
또 결점을 드러내는 사람 앞에서는 자기도 모르게 우월감을 가질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유능한 사람이 실수할수록 그 사람에 대한 경계심을 풀고
마음의 문을 여는 것입니다. 우리 사회는 자기 자신과 자기 집안을
미화시키려는 분위기가 매우 강합니다. 그렇게 하면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더 인정해줄 것이라 기대하지만 그런 콤플렉스를 악용해서 오히려 정신적인
해를 끼치는 이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진솔하게
드러내는 삶이야말로 참으로 중요한 것이지요. 그런 면에서 보면
자신의 나약함마저도 늘 있는 그대로 진솔하게 드러내는 베드로 사도를
예수님께서 후계자로 삼으신 이유를 알 것 같습니다.

 

 

 

맞바람이 불어도

  -반영억 신부-

우리는 누구나 본능적인 종교심을 가지고 있고, 성장하면서 이성적인 믿음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가슴으로 받아들이고 마침내는 의지적으로 믿게 됩니다. 이 시간 믿음에 관하여 묵상하는 가운데 영적인 믿음의 소유자로 거듭나시길 바랍니다.

 

한 스님께서 돌다리를 건너다가 발을 잘못 디뎌 넘어질 뻔하자 ‘아이구, 하느님!’하셨답니다. 누구든지 급할 때에는 ‘하느님 맙소사!,‘아이구 하느님’을 찾게 되고 봉변을 당 할 때에는 ‘하늘이 노할 일이다’, 하늘 무서운 줄 알아라, ‘하늘만은 아신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사람은 본능적으로 자기 자신보다 큰 힘을 가진 어떤 것에 의지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사람은 본능적으로 하느님을 찾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종교심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믿는 사람일지라도 그가 종교심 차원에 머물러 있다면 영원한 생명을 얻는 구원에 이르는 것을 보장해 주지는 못합니다. 종교심을 승화시켜 신앙심으로 끌어올릴 때 비로소 그 사람은 구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정하권).

 

신앙심은 인간을 찾으시며 은총과 계시로 우리를 보호하시고 부르시는 인격적인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들이고 응답하는 자세를 일컫습니다. 하느님이 먼저 부르셨기에 그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이 바로 ‘신앙’(믿음)입니다(차동엽). 사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행실이 아니라 당신의 목적과 은총에 따라 우리를 구원하시고 거룩히 살게 하시려고 우리를 부르셨습니다.”(2디모1,9).

 

그러나 믿음은 아무래도 ‘머리’로 믿는 믿음에서 시작됩니다. 성경의 말씀을 수긍하고 받아들여 믿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느님의 진리에 동의하는 지성적 행위’입니다. 우리는 “하느님께 나아가는 사람은 그분께서 계시다는 것과 그분께서 당신을 찾는 이들에게 상을 주신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히브11,6).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머리에서 가슴으로 내려가야 합니다.

 

우리는 가슴으로 믿어야 합니다. 이것은 하느님의 현존, 사랑, 예수께서 주시는 용서와 평화 등을 마음으로 받아들여 느끼고 체험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 믿음의 모범으로 아브라함을 보면 되겠습니다. “믿음으로써,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이사악을 바쳤습니다.”(히브11,17). 하느님께 대한 신뢰와 의탁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을 해냈습니다. 이러한 믿음을 갖도록 성경은 말합니다.

 

“주님을 신뢰하며 선을 행하고 이 땅에 살며 신의를 지켜라.”(시편37,3). “너희 마음이 산란해 지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요한14,1). “결코 의심하는 일 없이 믿음을 가지고 청해야 합니다. 의심하는 사람은 바람에 밀려 출렁이는 바다 물결 같습니다.(야고1,6).

 

그리고 마침내 의지로 믿어야 합니다. 세상의 셈법을 따르지 않고 조건이 어떠하든지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철석같이 믿는 것입니다. 기도에 대한 응답, 신앙 안에 키워온 어떠한 꿈이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라는 확고한 신념을 갖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기도하며 청하는 것이 무엇이든 그것을 이미 받은 줄로 믿어라. 그러면 너희에게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마르11,23-24). “그대도 보다시피, 믿음이 그의 실천과 함께 작용하였고 실천으로 그의 믿음이 완전하게 된 것입니다.”(야고2,22). “너희가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산더러 ‘여기서 저기로 옮겨 가라.’ 하더라도 그대로 옮겨 갈 것이다.”(마태17,20). 결국 하느님의 약속을 확고히 믿고, 이미 받은 사람으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베드로의 모습을 봅니다.

예수께서는 맞바람을 만나 파도에 시달리는 제자들에게 가셔서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하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베드로에게 ‘오너라.’ 하십니다. 베드로는 배에서 내려 물 위를 밟고 예수께로 걸어갔습니다. ‘저더러 물 위로 걸어오라고 명령하십시오.’ 하고 청한 자기의 소망이 이루어지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기쁨도 잠깐이었습니다. 거센 바람을 보자 그만 무서운 생각이 들어 물에 빠져 들게 되었습니다(마태14,30).

 

베드로가 예수님을 바라보았을 때는 물 위를 걸었지만 거센 바람을 보았을 때는 물에 빠졌습니다. 결국은 주님을 가슴으로 받아들였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의지가 약했습니다. 아무리 험한 상황이라 해도 그 속에 주님이 계시거늘 그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놓치고 만 것입니다. 이렇게 어려움이 생기면 믿음이 흔들리고 맙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믿음은 항구해야 합니다. 아브라함은 많은 시련과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그는 불신으로 하느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믿음으로 더욱 굳세어져 하느님을 찬양하였습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약속하신 것을 능히 이루실 수 있다고 확신 하였습니다.(로마4,20-21). 우리도 이러한 믿음의 소유자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많은 경우 ‘모든 일이 잘 풀린다면’, 내 사업이 잘 된다면, 내가 행복해 진다면, 건강이 좋아진다면, 성공한다면’, 그 때 하느님을 믿고 감사드리고 헌금도 많이 하겠다고 합니다. 소위 ‘……한다면’의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반면에 ‘비록 악한 사람이 선한 이들보다 잘 사는 듯이 보여도, 착하게 산 내가 억울한 일을 당해도, 사랑하는 이가 고통 안에 있어도 나는 그 순간에도 나를 창조하신 하느님을 신뢰할 것입니다.’하면서‘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한마디로 전천후 신앙을 소유한 사람입니다. 그는 십자가의 성 요한이 세상의 모든 것이 다 변해도 좋습니다. 주 하느님 당신 안에 뿌리내리면 했듯이 어떤 처지에서든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간직한 사람입니다. 변화무쌍하고 덧없는 세월에도 상관없이 소신을 지켜 나가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내가 궁핍해서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나는 어떤 처지에서도 만족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나는 비천하게 살줄도 알고 풍족하게 살줄도 압니다. 배부르거나 배고프거나 넉넉하거나 모자라거나 그 어떠한 경우에도 잘 지내는 비결을 알고 있습니다.”(필리4,11-12)하고 말했습니다.

 

 

사실 믿음을 생활 속에서 실천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믿지 않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우리의 믿음이 성장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실천적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야고보서 2장26절에 보면 “영이 없는 몸이 죽은 것이듯 실천이 없는 믿음도 죽은 것입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7장 21절에서도 “나더러 주님, 주님! 하고 부른다고 다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이라야 들어간다.”고 하며 믿음의 실천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예기치 않은 위기상황이 벌어진다 해도 급히 달려오는 주님이 계시다는 것을 믿고 굳건해 지시길 바랍니다. 어떤 불이익이나 비난이 거센 바람과 성난 물결로 밀려오더라도 아버지의 뜻을 행함에 있어서 주저하지 않으시길 빕니다.

 

마음의 시험과 환경의 풍파가 다가와도 끄떡하지 않는 굳건한 믿음이 있을 때 하느님께서는 그 믿음만큼 우리를 축복해 주십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믿음이 깊지 못한 사람에게 은총을 주시면 그가 은총을 간수하지 못하고 잃어버리고 맙니다. 그는 은총을 주시는 주님은 생각 않고 은총의 결과물에만 매달리게 되고 결국 타락하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은 은총을 주실 때 시련을 통해서 주십니다. 시련의 “환난은 인내를 자아내고 인내는 수양을, 수양은 희망을 자아냅니다, 그리고 희망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습니다.”(로마5,3-4). 그러므로 더 많은 시련과 단련을 통해서 그만한 은총을 준비하시는 주님을 만나시길 바랍니다.

 

베드로도 실패를 통해서 더 큰 제자가 되었고,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도 25년동안 수많은 시련과 환난 속에 단련을 받았고, 야곱도 20여년간 머슴살이를 하면서 시련을 겪었습니다. 요셉도 도덕적으로나 윤리적으로 깨끗하고 충실한 사람었으나 하느님의 축복을 받기 위해서는 13년 동안 종으로 팔려가서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에 들어가 생명의 위협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한 번도 하느님을 거역하지 않고 인내를 통하여 그의 영적 믿음을 성장시켰고 마침내 이집트의 국무총리가 되는 은총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은총은 시련을 통해서 다가오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베드로에게 닥친 세찬 바람이 은총이었습니다. 주님을 바라보지 않고 바람을 바라볼 때 어떻게 되는지를 그는 확실히 체험했습니다. 믿음의 소중함을 일깨우는 순간이었습니다.

 

우리 인생항로에서도 역풍을 언제든지 만날 수 있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남편을 통해서, 아내를 통해서 오기도 하고, 자식을 통해서 오기도 합니다. 공동체를 통해서도 이웃을 통해서도 옵니다. 물론 직장을 통해서도 오고, 주변 환경과 생활을 통해서도 견딜 수 없는 큰 아픔이 옵니다. 그러나 그때야 말로 우리의 믿음을 성장시킬 수 있는 기회요, 더 큰 은총을 받을 수 있는 순간 이라는 것을 잊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어둠 속에 있어도 믿음과 희망 안에 사십시오. 어둠 속에서도 하느님은 당신을 지켜 주시니 말입니다. 걱정일랑 하느님께 떠맡기십시오, 당신은 그분의 것이고 그분은 당신을 잊지 않으십니다.”(십자가의 성 요한)

 

사랑에는 의심이 암이래요, 항암제는 오직 믿음뿐이고요.

그러니 사랑 자체이신 주님을 확실하게 믿으십시오.

우리 믿음의 대상은 오로지 주님 뿐,

그분이 사랑하시는 사람은 사랑의 대상,

그러므로 사람을 믿어서 발등 찍히지 말고

오로지 주님을 믿으십시오.

사랑합니다.

 
 
 
왜 의심을 품었느냐?

-맹석철 신부-

 

샌프란시스코의 금문교는 건설된 지 한 세기가 지난 오늘도 장엄하고 견고하게 그 자리에 버티고 있다. 교량이 건설될 때부터 숱한 일화를 남겼는데, 그중 하나를 소개한다.

교량의 높이가 워낙 높고 그 밑으로 지나가는 검푸른 바다 물결이 험난하여 공사 중에 인부가 실족하여 추락하는 일이 자주 발생했다. 그리고 그 높은 공사현장에서 떨어져서 생존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러자 시공자 측에서 내놓은 궁여지책이 건설 중인 다리의 난간 아래로 그물을 쳐 놓자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물을 쳐 놓자 실족하거나 추락하는 일이 대폭으로 감소하고 더 이상 같은 재해가 재발되지 않는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난 것이다.

그 엉성한 그물이 자신을 지켜줄 것이라는 믿음이 실제로 인부들의 생명을 구해주었던 것이다. 그래서 사람은 믿어야 하고 반드시 믿는 데가 있어야 한다. 사람은 그렇게 믿고 살아가도록 설계된 존재이기 때문이다. 믿을 데가 없거나 믿는 것이 없는 사람은 매사가 불안하고 두렵다. 지속되는 불안과 두려움은 끝내 인간을 절망과 좌절의 나락으로 밀어낸다. 계속되는 경제 불황과 사회의 혼란 속에서 많은 사람들이 다리 위에서 몸을 던지거나 말없이 집을 나가 목을 매는 일이 점점 증가하고 있다. 철석같이 믿던 것을 하루 아침에 잃었거나 믿는 도끼에 발등을 찍힌 때문이다. 믿되 누구를 믿고 무엇을 믿느냐 하는 것도 중차대한 문제이다. 많은 사람들이 믿음의 대상과 그 번지수를 잘못 찾아가고 있다. 실로 아쉽고 안타까운 일이다.

한 때 잘 나가던 베드로 사도가 물속 깊은 심연으로 빠져 들어간 것은 거센 바람과 물결에 그만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잃고 불안과 두려움에 빠져 들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자기의 힘이나 재물을 믿는 사람 또한 자신이 믿던 밧줄이 썩어 끊어지는 날, 검고 푸른 죽음의 심연으로 추락할 것이다. “주님, 살려 주십시오.”

  
 
주님 구해주십시오
-곽승룡신부-

예수님은 제자들을 재촉하여 먼저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보내십니다. 당신 홀로 군중을 헤쳐보내시고 기도하러 산에 올라가십니다. 주님은 분주한 중에도 산에서 고요한 기도의 시간을 가지십니다.

우리도 하루의 삶에서 하느님 안에 휴식을 취하는 기도시간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저녁이 되어 호수에 있는 배는 마주 불어오는 바람과 파도에 몹시 시달리고 있습니다.

주님은 새벽이 돼서야 호수 위를 걸어 제자들에게 갔습니다. 제자들은 바람, 파도에 시달리면서 또 물위를 걸어오시는 주님을 보고 당황하여 "유령이다!"하며 무서워했습니다.

우리도 어려운 상황에 처할 때, 주님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오히려 주님을 보고 무서워 비명을 지를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정신을 바짝 차리고 "힘내시오, 나요. 무서워하지 마시오."하는 주님의 음성과 위로의 말씀을 제대로 깨달아야 합니다. 그런데 뜬 금 없이 베드로는 자기도 물위를 걸어가도록 주님께 청합니다. 오라는 주님 말씀으로 베드로가 물위를 걸어 예수님께 갑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주님과 함께, 그분 말씀이라면 못할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주님을 신뢰하면서도 거센 유혹의 바람을 보고 겁을 먹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물에 빠집니다. 그러나 그는 "주님 구해주십시오!"하자. 손을 내미시며 "믿음이 약한 사람! 왜 의심했습니까?"하며, 주님과 베드로가 함께 배에 오르니 바람이 그쳤습니다. 배는 가정이고 교회 공동체입니다. 어떤 어려움에도 주님과 함께 가정과 교회는 온갖 풍랑을 헤쳐나가는 믿음의 공동체호가 됩시다.

 

고통의 바다에서 건져주시는 주님

-허영엽신부-

 아버지와 약속을 잘 지키지 않은 어린 아들에게 아버지가 말했다.“한번만 더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너를 추운 다락방으로 보내겠다.” 그러나 아들은 또 다시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아버지는 약속대로 추운 다락방에서 자게 했다. 아들을 다락방으로 보내고 잠자리에 든 부부는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어머니가 먼저 입을 열었다.「우리가 괴롭더라도 참읍시다. 아이를 데려오면, 오히려 그 아이를 망치는 것입니다.」 한참을 괴로워하던 아버지가 입을 열었다. 「당신말이 옳아요. 그러나 지금 혼자 추운 방에 떨고 있는 아들을 생각하니 마음이 아프오, 내가 그 아이에게 가야겠오?」

아버지가 다락방으로 올라갔다. 아들은 추운 다락방에서 베개도 없이 구부린 자세로 잠들어 있었다. 아버지는 아들 옆에 누워 꼭 안아주었다. 아버지 품에 안긴 아들은 한참 후에 가만히 아버지의 볼을 비벼댔다. 아들의 눈물이 양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아들은, 잠깐 동안이지만 춥고 어두운 다락방에서 부모님 곁을 떠났다는 것, 자신의 곁에 아무도 없다는 것이 얼마나 외로운 것인지를 알았다. 그리고 추운 방에서 자신과 함께 누운 아버지가 그렇게 고맙고 믿음직할 수가 없었다. 아무리 춥고 어두워도 아버지가 그와 함께 한다는 것이 큰 위로와 힘이 되었다.

물위를 걷다 빠져버린 베드로

오늘 복음은 두 가지의 장면을 묵상할 수 있다. 우선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물위를 걷다가 의심이 생겨 물에 빠져 허우적대는 베드로의 모습이다. 다른 하나는 물에 빠져 허덕이는 베드로의 손을 잡아주시는 예수님의 자비로운 행동이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무엇보다「믿음이 무엇인가」하는 것을 생각할 수 있다. 물위를 걷는다는 것은 인간의 능력으로 불가능한 것이다. 예수님이 기도하러 산에 오르신 동안 제자들이 탄 배는 역풍에 시달려 위험에 처해진다. 마태오 복음서에서 배는 자주 교회를 상징한다. 어떻게 보면 곤경과 수난에 처한 교회를 가르치고 있다.

교회가 위험과 고통을 당할 때, 가장 큰 위로와 힘은 무엇일까? 믿음이다. 믿음이란 하느님의 능력을 믿는 것이다. 풍랑에 허덕이는 제자들의 배에 예수님은 다가오셨다. 그리고 겁에질린 제자들에게 “나다. 안심하여라” 라고 말씀하신다. 그러자 베드로는「주님이십니까? 그러면 저더러 물위를 걸어오라고 하십시오」라고 간청한다. 예수님께서「오너라」하시자 베드로는 물위를 걷는다. 그러나 거센 바람이 불자 무서운 생각이 들어 물에 빠지게 된다.

베드로에겐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있었다. 그러기에 물위를 걸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의 믿음은 완전한 것이 아니었다. 물에 빠진 베드로는 다시 예수님께 구조 요청을 한다.「주님, 살려주십시오」그가 위기 상황에서 예수님을 찾고 살려달라고 요청하는 것도 믿음의 행위이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손을 잡아주셨다.「왜 의심을 품었느냐? 그렇게 믿음이 약하냐?」예수님의 이 말씀은 질책이라기보다 격려의 말씀으로 들린다. 예수님이 배에 오르시자 비로소 풍랑은 그친다.

예수님께서는 교회가 위험하고 어려운 상황에 빠져도 결국 지켜주신다는 것이 신앙인에게는 큰 위로가 된다.

흔들리는 신앙, 손 잡아주시는 주님

물위를 걷다가 물에 빠져 허덕이는 모습은 우리 자신의 모습이다. 어쩌면 우리는 물위를 걷는 것은 시도조차 못할지도 모른다. 쉽게 유혹에 빠지고, 늘 흔들리고, 좌절하고, 쓰러지는 것이 우리의 약한 모습이다. 사실 주님이 우리의 손을 잡아주시지 않으면, 우리는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다. 우리의 주위에는 믿음을 해치는 요소가 너무 많다. 또한 내 자신 안에도 늘 부족함이 존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주님, 도와주십시오, 살려주십시오」하고 주님께 손을 내미는 것이 바로 믿음이다.

오히려 우리는 물에 빠졌을 때, 비로소 주님께 손을 내밀게 된다. 역경과 고통 중에 주님을 더 간절히 원하고, 그분의 도움을 절실하게 찾는다. 어려움이나 고통이 와도 좌절할 필요가 없다. 나 혼자 힘으로 해결하려고 발버둥쳐서도 안 된다. 손을 내밀기만 하면 잡아주시는 주님이 늘 우리와 함께 하기 때문이다.

주님, 믿음이 약해 세속과 유혹의 바다에서 허덕이는 저희를 버리지 말고 건져주소서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새벽녘에 물 위를 걸어 제자들에게 다가가십니다. 누군가 소리 질렀습니다. “유령이다!” 제자들은 놀라 일어납니다. 기적의 음식인 물고기 두 마리와 빵 다섯 개를 먹은 것이 어저께의 일입니다. 그러한 그들이 스승님을 알아보지 못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안심시키십니다.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그러자 베드로는 확인을 시도합니다. “주님이시거든 저더러 물 위를 걸어오라고 명령하십시오.” 황당한 반응이었지만 스승님께서는 받아 주십니다. 그러나 물 위를 걷던 베드로는 조금 가다 빠져 듭니다.
예수님께서는 물 위를 걸으셨습니다. 하느님의 능력을 지니셨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도 처음에는 물 위를 걸었습니다. 그러나 바람이 불자 겁을 먹었고 결국은 물에 빠져 듭니다. 너무 쉽게 하느님의 기운을 의심했기 때문입니다.
누구나 하느님의 능력을 지니면 물 위를 걸을 수 있습니다. 불가능하다고 포기한 일도 주님의 기운을 지니면 해낼 수 있습니다. 이것이 오늘 복음의 교훈입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그분의 힘을 지니는 것이 되겠는지요?
물에 빠진 베드로에게 스승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이 믿음이 약한 자야, 왜 의심하였느냐?” 그러니 일차적으로 의심을 버려야 합니다. 자유롭게 믿어야 합니다. 의심에서 자유로워야 물 위를 걸을 수 있습니다.

 

시련은 하느님의 발자국 소리

-강길웅신부-

 

사람은 자신의 생애를 통해서 올라가는 때와 내려가는 때를 만나게 됩니다. 순풍에 돛단 듯이 일이 순조롭게 풀려서 평탄할 때가 있는가 하면 역풍을 만나서 사나운 풍랑과 힘겹게 싸우는 고달픈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인생의 여정에서 중요한 것은 올라갈 때보다도 오히려 내려갈 때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가 성공할 때보다도 실패할 때가 실은 하느님을 더 깊이 체험할 수 있는 은혜로운 시기입니다.

오늘 1독서에 나오는 엘리야는 갈멜산에서 바알의 숭배자들과 싸워서 그들의 예언자 450명을 모조리 쳐죽였습니다. 아주 통쾌하고도 멋진 승리의 장면이었으며 이때 엘리야의 놀라운 기세는 아무도 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바알의 광신자였던 왕후 이세벨이 엘리야에게 복수를 다짐하자 그는 이제 거꾸로 무서움에 떨며 죽어라고 도망치는 신세가 됩니다. 하늘을 찌를 듯한 그 믿음의 기운이 한 순간에 꺾여서 이제는 모두 끝장이 났다고 하느님께 죽여 달라는 온전치 못한 애원도 했습니다.

어제의 당당한 승리자가 오늘은 완전한 패배자가 되어 자기 몸 하나 숨길 수가 없었고 놀라운 신앙을 증거하였던 그도 하느님은 자기를 버렸다고 판단했습니다. 일종의 신앙의 위기를 만난 것이며 이제 더 이상의 탈출구가 없었습니다. 막다른 코너에 몰렸으니 희망이 절벽이었습니다. 바로 이때 엘리야가 하느님을 새롭게 만납니다. 하느님은 그를 버린 것이 아니었으며 새로운 차원에서 그를 만나기를 원하셨습니다. 마치 어제의 승리로 오만해질 수도 있는 엘리야를 역시 하느님이 아니시고는 스스로는 벌레만도 못한 인생이라는 사실을 깊이 깨닫게 하시면서 '조용하고 여린 소리'에서 당신을 드러내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비슷한 현상이 나옵니다. 5천 명을 배불리 먹이신 빵의 기적 다음에 예수님께서는 의도적으로 제자들을 배에 먼저 태워 보내십니다. 풍랑이 그들을 괴롭힐 줄을 뻔히 아시면서도 당신은 한적한 곳에 가시어 기도를 하시는데 새벽 4시까지 기다리십니다. 마치 당신이 없는 세상을 어디 좀 살아 보거라 하는 식으로 버려두셨다가 나중에 물 위를 걸어서 가시는데 제자들은 이때 가까이 오시는 주님을 유령으로 착각하여 더 큰 두려움에 떱니다. 그러나 바로 그때 주님은 "나다, 안심하여라."하시며 배에 오르시자 바람은 그치고 풍랑은 잔잔해졌습니다.

인생이라는 배를 저어 가는 호수에는 언제나 사나운 바람과 성난 물결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마치 갈릴리 호수의 변덕 많은 바람처럼 갑자기 불어왔다가는 갑자기 사라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시련의 어려움에 처해 있을 때 “나다, 안심하여라."하시는 그분의 목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마치 유령처럼 두렵게 다가오시는 그분의 손길을 바라보며 겁내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은 진정 우리가 내려갔을 때 그 밑바닥에서 만날 수가 있습니다.

오래 전의 얘기입니다. 어떤 형제가 몇천만 원을 가지고 사업을 하다가 폭삭 망해서 다 날리고는 수중에 꼭 7만원이 남더랍니다. 집까지 다 팔아서 빚을 갚았으니 오갈 데도 없었고 남은 것은 처자식과 오직 그 돈뿐이었습니다. 너무도 허망하고 답답했던 그는 문득 성당을 찾아가 신부님의 조언을 청했더니 신부님은 의외로 껄껄 웃으시며 "그 7만원은 뭐하러 가지고 있노. 내 3만원을 더 줄 테니까 10만원을 채워서 하느님께 봉헌하고 진짜 빈주먹으로 다시 시작해 보거라." 하시더랍니다.

형제가 처음엔 그 말씀을 듣고 참으로 기막힌 생각이 들더랍니다. 없는 사람 도와줄 생각은 않고 겨우 몇푼 남은 '벼룩의 간'마저도 뺏으려 하는구나 하는 착각도 들었답니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니 어차피 망한 것, 7만원이 있어도 그만이고 없어도 그만이라는 판단이 들더랍니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에 자기가 거꾸로 살았던 사실을 깨닫고는 신부님 말씀대로 무일푼으로 다시 시작했는데 지금은 크게 성공했습니다. 하느님은 참으로 짓궂은 분 같아서 인간이 시련을 통해 '여린 소리'처럼 순수해질 때 바로 그때 당신을 드러내십니다.

오늘 물 속에 빠졌던 베드로의 주책(?)도 가히 일품입니다. 소위 첫째가는 제자라는 그가 그 모양이니 다른 사람들이야 오죽 하겠습니까마는 물 속에 빠지는 인간의 그 허망한 현실에서 주님께 온전히 매달렸기 때문에 베드로는 자기를 잡아 일으키시는 그분의 손길을 체험하게 됩니다. 역설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내려가는 때가 바로 그분을 만나는 때요 새롭게 크게 일어서는 때입니다. 엘리야도 그랬고 베드로도 그랬습니다.

마음에 풍랑이 심하고 분노의 불길이 크게 솟구칠 때는 하느님이 보이지 않습니다. 또는 마음이 지진처럼 갈라지고 어둠에 휩싸일 때 우리는 자기 자신의 허망함밖에는 아무 것도 만날 수 없습니다.

어떤 경우에도 그렇습니다. 그러나 그 시기를 인내로이 참고 견디면 하느님의 '여린 소리'를 진실로 체험하게 됩니다. 실패해서 고생할 때나 시련으로 몸부림칠 때는 하느님이 우릴 찾아오시는 발자국 소리입니다.

 

할수있다하신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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