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8월 5일 연중 제18주간 금요일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
(마태오 16,24-28)
"Whoever wishes to come after me
must deny himself,
take up his cross, and follow me.
말씀의 초대
신명기 저자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보여 주신 하느님의 위대하신 일들을 떠올리게 한다. 이스라엘의 모든 축복의 역사는 창조주이신 하느님의 손길로 이루어졌음을 새겨 준다(제1독서). 예수님을 따르는 삶은 자신의 모든 것을 비우고 버리는 삶이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자신의 생명마저도 주님을 위해서 온전히 바칠 수 있는 희생적인 사랑이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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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신부들은 죽고 저는 살아남았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죽은 자는 저고, 산 자는 그들입니다. 왜냐하면 언제나 그렇듯 죽은 자의 정신은 산 자의 기억 속에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영화 “미션”의 마지막 장면에서 흘러나오는 아름다운 대사입니다. 누구나 한번쯤 보았을 이 영화는 1750년 파라과이와 브라질 국경 부근의 과라니 부족에 있었던 이야기를 배경으로 하여 만든 영화입니다.
그 마을에는 예수회에 소속된 가브리엘 신부와 로드리고 신부가 원주민들에게 신앙을 심어 주며 선교사로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영토 분계선이 새롭게 그어지면서 과라니족 마을이 노예 제도를 합법화하는 포르투갈 의 식민지로 편입됩니다. 교회는 포르투갈과 갖고 있던 관계를 고려하여 그곳에서 선교하는 예수회 신부들을 철수시키고자 추기경을 파견합니다. 그러나 과라니 부족과 사제들은 이에 불응하며 이 마을을 노예 제도로 희생시키려는 포르투갈에 대응합니다. 결국 그곳 신부들은 원주민과 운명을 같이하며 포르투갈 군대와 맞서 싸우다 마침내 순교하게 됩니다. 영화 마지막에 나오는 이 아름다운 대사는 바로 그곳 신부들을 설득하려고 파견된 추기경이 교황에게 보내는 편지글 마지막 부분입니다. 결국 우리에게 종교와 사랑, 정의가 무엇인지를 물으며, 누가 진정으로 산 자이고, 진정으로 죽은 자인지를 대답하게 합니다.
우리가 자신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와 생명을 품고 살지 않으면, 살아 있어도 죽은 것입니다. 반대로 세상에서는 죽은 사람처럼 보여도 생명과 진리의 길을 걷고 있으면 살아 있는 것입니다. 교회의 한 지체로 살더라도 죽은 자로 살 수 있습니다. 지금 자신은 산 자입니까, 죽은 자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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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자주 들어 왔던 말씀입니다. 너무 당연해서 건성으로 넘기던 말씀입니다. 온 세상을 얻는다는 것이 나와는 무관하다고 생각했던 말씀입니다. 하지만 아닙니다.
목숨은 ‘목으로 쉬는 숨’입니다. 멈추면 죽습니다. 육체뿐 아니라 ‘영적 생명’도 끝납니다. 그러니 목숨에는 영적 생명도 들어 있습니다. 사람들은 사는 것에 ‘쫓기어’ 영혼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생각할 겨를이 없습니다. 그러기에, 현실적으로 성공을 거듭해도 ‘행복하다고’ 생각하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지라고 하십니다. 영적 생명을 위해서도 져야 한다고 하십니다. 십자가는 억울함입니다. 억울함이 강할수록 무거운 십자가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를 지려면, 먼저 자신을 치유해야 합니다. ‘용서하고’ 사랑해야 합니다. 일이 잘못되면 누구나 자신을 꾸짖고 자책합니다. 실수를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다른 이에게는 다정하고 그들의 잘못에는 너그러운 사람이 자신의 실수에는 마음을 바꾸려 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잘못입니다. 자신을 용서하지 않으면 남도 용서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라고 하셨습니다. 자신을 ‘버리는 것’이 주님의 뜻을 ‘먼저 생각하는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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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는 본래 사형 도구였습니다. 로마 제국은 식민지에서 반란이 일어나면 주동자들을 십자가형에 처했습니다. 고통은 길고 과정은 끔찍했기에 무척 위협적이었습니다. 반란자 대부분이 독립군이었기에 구경꾼도 많았습니다. 처형 장소도 따로 있었습니다. 사형이 확정되면 죄수들은 십자가를 짊어지고 그곳으로 가야 했습니다. 이스라엘 말로 ‘골골타’입니다. 번역하면 ‘해골 터’이지요(마르 15,22 참조).
신약 성경이 그리스 말로 기록되면서 ‘골골타’는 ‘골고타’로 번역됩니다. 소리 나는 대로 옮긴 것입니다. 라틴 말로는 ‘갈바리아’라고 합니다. 오늘날 이곳에는 커다란 성당이 세워져 있는데 프란치스코 수도회(작은 형제회)에서 관리하고 있습니다.
이렇듯 십자가는 혐오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러한 십자가가 희생과 봉사의 상징으로 바뀐 것은 예수님 때문입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는 오늘 복음 말씀 때문입니다.
누구에게나 자신의 십자가가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일는지요? 삶에 ‘아픔을 주는 고통’입니다. 자신의 성격일 수도 있고 직업일 수도 있습니다. 건강이나 가족 관계가 십자가일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모든 것을 인정하며 받아들이라고 하십니다. 그러니 십자가를 없애 달라고 기도해서는 안 됩니다. ‘십자가를 지고 갈 수 있는 힘’을 주십사고 기도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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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가에서는 생로병사 모두가 ‘고’(苦)라고 합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에는 고통이 많이 따릅니다. 크고 작음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사람은 누구나 저마다의 십자가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의 십자가보다 자신의 것이 더 크고 무겁게 여겨집니다. 남의 떡이 더 커 보이듯, 다른 사람의 십자가는 작고 가벼워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각자가 질 수 있는 크기의 십자가를 주신다고 합니다. 십자가의 고통은 인간을 벌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당신께서도 친히 십자가를 지셨듯이, 십자가로 부활의 영광을 보여 주셨듯이, 고통의 십자가는 인간에게 주어질 영광을 위한 신비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지고 기꺼이 주님을 따릅시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양승국신부-
<십자가가 다가올 때 마다>
젊은 시절, 오랜 날들 저를 괴롭히던 고질병이 하나 있었습니다. 병이 장기화되다보니 미칠 것 같았습니다. 당시 들었던 생각은 오직 한 가지 뿐, 무조건 빨리 이 병이 내 몸에서 사라져버렸으면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병 때문에 병원도 자주 다녀야 했고, 먹고 싶은 음식도 마음대로 먹지 못했습니다. 치료비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자주 자리를 비워야했기에 회사 정기인사 때 불이익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한 마디로 그 병은 내 삶을 망쳐놓은 ‘웬수’였습니다.
병에서 빨리 헤어나려면 몇 가지 요소가 충족되어야 합니다. 좋은 의사의 정확한 진단과 처방, 효능 좋은 약과 적절한 치료방법, 그리고 환자 본인의 긍정적인 마음과 치유를 위한 적극적인 의지가 한데 아우러져 치유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병에 대한 적개심과 분노가 마음에 가득하니, 아무리 병원을 다니고, 약을 복용한다한들 치유가 제대로 이루어졌겠습니까?
병이 장기화되면서 이러다 죽겠구나, 싶었는데, 우연히 한 깨달음이 제게 다가왔습니다.
‘병고를 친구처럼’
이 병 역시 여기저기 떠돌다 내 육신에 둥지를 튼 가엾은 친구로 생각했습니다. 이 병은 내 몸을 더 소중히 여기고, 평소에 좀 더 신경 써서 가꾸라는 친구의 충고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이 병도 내 몸의 일부이니 예민한 친구처럼 조심스럽게 대하고, 잘 다스려보자고 마음을 바꿔먹었습니다. 함께 살아가자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신기한 일이 생겼습니다. 그렇게 마음을 바꿔먹는 순간부터 몸과 마음이 편해지고, 약도 잘 들고, 신속하게 병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우리네 인생, 어찌 보면 숱한 십자가들의 연속입니다. 한번 다가온 십자가는 찰거머리처럼 우리 몸에 딱 달라붙어 여간해서 떨어지지 않습니다. 희한하게도 도망가려고 발버둥 치면 칠수록 십자가의 무게는 더 무겁게 느껴집니다.
십자가의 무게가 유난히 무겁게 느껴질 때 마다 반드시 기억하십시오. 어떤 마음으로 십자가를 지냐에 따라 십자가가 은총이 될 수 있는가 하면 정반대로 우리를 죽음으로 몰고 가는 원인이 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기꺼이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예수님은 당연히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예수님은 당당하게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예수님은 기쁘게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 결과 영광스런 승리를 맛보셨습니다.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절절한 사랑과 희생을 한번 체험한 사람에게 있어 십자가는 더 이상 십자가가 아니라 예쁘고 화사한 포장지에 싸여진 선물입니다. 영적으로 충만한 삶을 살고 있는 사람에게 있어 십자가는 더 이상 십자가가 아니라 하느님 사랑의 표시입니다

하느님의 것
-최영균 신부-
자신을 버린다는 것은 자신을 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에 대하여 더 이상
집착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투자는
무엇일까요? 매일의 삶에서 순간 순간 우리는 우리 자신을 어떠한
형태로든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직면한 문제들과 삶의 결정 등을
통해서 특정한 인격체로서 구성해나가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무엇인가 얻기 위해서 노력합니다. 하지만 어떤 순간에 인생의 가장 중요한
것을 잃었구나 하고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물질적인 것은 우리가 영원한
진리를 얻는 데 도움이 못 됩니다. 우리의 깨어진 마음을 물질로는 고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우리에게 묻습니다. 생명을 무엇과 바꾸겠는가?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은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선물입니다. 우리 삶을
비롯하여 모든 것은 하느님의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께 금전적인 것만
봉헌할 뿐 우리 자신을 드리지는 않고 있습니다. 입으로는 그분을 찬양하지만
마음을 드리지는 않습니다. 진정한 주님의 제자는 하느님과 함께하는 영원한
즐거움과 행복을 얻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꿀 줄 알아야 합니다.
오늘 하루 여러분이 만들어가는 사건 하나하나를
하느님과의 관계 속에서 꾸며보십시오.
- 이동훈 신부-
돈과 건강은 어느새 우리 시대의 우상이 되어버렸다. 도덕적 가치는 고리타분하고 쓸데없는 것이 되었다. 그래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만 많이 벌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아졌다. 돈의 우상에 눈이 멀어 국가를 이끌어 갈 통치자나 정치인을 뽑는 데도 도덕적 가치는 이미 고려대상에서 제외되었다.
내면의 아름다움과 강건함보다는 외적 아름다움과 육체적 건강을 위해 물불 가리지 않는 사람도 많아졌다. 심지어 각 종교에서 발행되는 언론이나 잡지 광고도 건강에 관한 것이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으니 건강이 우상임에 틀림없다.
돈과 건강이 과연 우리를 행복하게 해주고 있는가? 우상은 그야말로 허상일 뿐이지 않는가? 우리나라는 과거보다 몇 배의 경제적 부를 쌓았고, 평균 수명도 늘어났다. 그렇다면 우리나라 사람들은 과거의 조상들보다 과연 몇 배 행복하게 살고 있는가?
가난했던 과거엔 6,?7명의 자녀를 낳아도 다 키울 수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교육비 때문에 1명의 자녀도 버거워한다. 과연 경제적으로 성장했다고 말할 수 있는가? 과거엔 평균 수명이 짧아도 가족과 오순도순 이야기하고 함께 지내는 시간도, 혼자만의 시간도 많았다. 그러나 현대를 사는 우리는 많은 일로 인해 가족과 대화할 시간, 자신을 돌아볼 시간을 늘 미루고만 살아가는데, 조금 더 늘어난 수명은 무슨 의미가 있는가?
우상을 위해 우리는 소중한 것들을 잃어버렸다. 이웃에 대한 관심, 가난하고 어려운 이들에 대한 배려, 심미적 감각을 일깨워 주는 아름다운 자연에 대한 사랑을 헌신짝처럼 내버렸다. 나와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이나 자연은 서로 분리된 존재가 아니다. 나무가 내뿜는 숨을 인간이 들이쉬고 있으며, 인간이 내뿜는 숨으로 나무들이 살아간다. 인간은 모든 창조물과 하느님과 연결되어 있다. 그러기에 우리의 행복은 나와 연결된 창조물과 하느님께 관심을 가질 때 참다운 생명으로 살아갈 수 있다. 어찌 돈과 건강을 챙겨 혼자만 잘살려고 하는가? 그것이 가능하기나 한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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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를 사랑하십시오!
-반영억신부-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고 성당에서 살다시피한 신자가 있습니다. 그에게는 고통이 없을까요? 그에게도 시련과 고통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가 하느님의 뜻과 정의와 양심에 따라 열심히 살려고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시련을 겪을 수밖에 없는 것은 그의 잘못보다는 이 세상이 불완전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로 그것을 십자가라고 부릅니다. 십자가는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기 위해서 받는 고통, 인간의 도리를 다하기 위해서 받는 고통,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서, 더 많이 사랑하기 위해서 받는 고통을 말합니다.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어떠한 고통이나 결함이 없는 행복만이 있는 삶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고통 안에서 버림받은 예수님을 찾아내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짊어지고 수난과 고통의 길을 묵묵히 걸어가신 예수님과 함께 걷는 것입니다. 온갖 조롱과 모욕을 감당하시고 세 번이나 무참히 넘어지셨던 그 십자가의 길을 내가 걷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결국 자기 자신을 죽인다는 말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자기의 견해, 주장, 생각, 바람들을 접고 주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따르는 것입니다. 많은 경우 내 생각이나 바람에 하느님의 말씀을 꿰어 맞추고 합리화 시키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진다는 것, 나를 죽인다는 것은 그분에게 나를 맞춘다는 의미입니다. 자신을 알고 자신에 대하여 더 이상 집착하지 않고 더 큰 것을 위해 보다 작은 것을 포기하는 행위입니다. 요한 비안네 성인은 “십자가는 하느님이 당신의 사랑스런 자녀들에게 주시는 선물입니다. 십자가는 하늘로 올라가는 사다리이며, 천당의 문을 여는 열쇠이기도 합니다.” 하고 말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주장이 커가는 세상입니다. 따라서 자기 자신의 이익을 끊어버리겠다는 단호한 의지와 결심이 더욱 요구됩니다. 하느님의 뜻이라면 그 어떤 것도 받아들여야 합니다. 비록 인간적인 시련과 고통, 고달픔을 감당해야 할지라도 말입니다. 그러면 하느님께서는 부활이라는 참 생명을 주십니다. 그리고 그 생명을 얻으면 모든 것을 얻은 것입니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 하느님의 사랑인 십자가의 의미를 깨닫기 위해 ‘지상의 행복을 추구하지도 않고 자신만의 생각에 고집을 부리지도 않으며 자신의 공로를 내세우지도 않고 자기 자신을 드러내지도 않는다.’ 고 했습니다. 그는 이미 오래 전 세상을 떠났지만 그의 삶은 여전히 우리의 모범으로 기억되고 주님을 향한 그의 사랑은 앞으로도 기억될 것입니다. 그가 행한 대로 믿는 이들의 가슴에 살아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도 “십자가를 지십시오! 그러면 마지막 날에 그 십자가가 나를 져줄 것입니다. “사람의 아들이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천사들과 함께 올 터인데 그때에 각자에게 그 행실대로 갚을 것입니다.”(마태16,27) “ 십자가를 사랑하십시오! 내가 십자가를 사랑하면 십자가도 나를 사랑할 것이며, 천상의 하느님께로 나를 이끌어 줄 것입니다.”(성녀 빌리아르)
사랑합니다.
함께 사는 세상
넋두리
-홍성남 신부-
자기가 겪고 있는 삶의 어려움을 토로하는 것을 하소연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상대방의 하소연을 듣다 보면 짜증이 날 때가 종종 있습니다.
들으면서 상대방이 얼마나 힘들까 하고 공감하기보다 반대로 왜 이렇게
살아가나 하고 짜증이 나곤 하지요. 이처럼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연민의 정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불편한 감정, 짜증나는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듣는 사람의 자세에 문제가 있는 게 아니라 말하는 사람에게
문제가 있어서입니다. 즉 스스로 변화할 생각은 하지 않고 그저 넋두리만
늘어 놓기 때문에 상대방에게 피곤한 느낌을 주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대개가 응석받이였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저 징징거리기만
해도 부모가 다 알아서 해주었기 때문에 성장해서도 자기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려고 하지 않고 다른 사람들에게 넋두리함으로써 해결하려고 합니다.
이런 이들에겐 주위의 불행하고 힘들게 사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둘러보라고
마음 아픈 이야기도 필요하다면 해야 합니다. 그렇게 말해야 하는 것이
십자가가 될지라도 오늘 주님이 자신을 버리고 십자가를 지고서
당신 뒤를 따르라 하신 것처럼 이런 문제를 극복할 수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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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 때문에
- 이정석 신부-
얼마 전 포콜라레 모임에서 개최하는 ‘하루 마리아 뽈리’에서 한 어린이가 수줍은 목소리로 이렇게 증언했습니다. “저는 제 동생을 업고 가다가 무서운 개를 만났습니다. 무서운 개에게 물릴까 봐 무거운 제 동생을 버리고 달아나고 싶었지만 동생 안에 계시는 예수님을 사랑하기 위해서 동생을 업은 채 도망쳤습니다.”
오늘 복음은 제자들의 길에 대한 예수님의 설명입니다. 제자의 복음적 정의는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제자들은 “나를 따르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분을 ‘따라나선’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입시를 위해 독서실이나 도서관에서 ‘열공’하는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걷던 팔레스티나의 척박한 땅과 소박한 밥상머리, 폭풍우 치는 갈릴래아 호수와 벌판이 그들의 학원이었습니다. 입시가 목적이 아니라 그분과 함께라면 ‘참된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란 믿음을 가지고 가족과 소유를 버린 사람들이었습니다. 나자렛 사람 예수, 그분이 제자들이 선택한 새로운 삶의 이유였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그들의 새로운 삶에 어떤 전망을 제시한 것일까요? 예수님이 삶의 이유인 사람들 앞에 놓인 미래의 청사진은 무엇일까요?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는 삶에 대해 무엇이라고 가르치셨기에 제자들이 그분께 모든 것을 걸었을까요? 그 대답을 복음서 안에서 찾아보니 ‘박해와 죽음’ 곧 십자가의 길입니다(마태 5,11; 10,18.39; 16,25).
예수님을 따라나선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마지막 여정은 그 말씀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이었는지를 두 눈으로 보게 합니다. 예수님의 길은 골고타의 십자가에서 끝났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뵌 제자들은 그분의 길이 무엇이었는지 그제야 깨닫게 됩니다. 이제 선생님이 가신 그 길을 제자들이 걷게 됩니다.
“우리는 온갖 환난을 겪어도 억눌리지 않고, 난관에 부딪혀도 절망하지 않으며, 박해를 받아도 버림받지 않고, 맞아 쓰러져도 멸망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예수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지고 다닙니다. 우리 몸에서 예수님의 생명도 드러나게 하려는 것입니다. 우리는 살아 있으면서도 늘 예수님 때문에 죽음에 넘겨집니다. 우리의 죽을 육신에서 예수님의 생명도 드러나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에게서는 죽음이 약동하고 여러분에게서는 생명이 약동합니다.”(2코린 4,8-12)
예수님 때문에 차마 동생을 버리지 못하고 허둥지둥 달아났던 그 어린이는 그렇게 예수님의 길을 달려가고 있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우리는 오늘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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