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8월 10일 수요일 성 라우렌시오 부제 순교자 축일
라우렌시오 부제는 로마 교회의 일곱 부제 가운데 한 분으로, 스페인에서 태어났다. 그는 로마 황제 발레리아누스의 박해 때에 동료들과 함께 순교하였다. 잡히기 전에 라우렌시오 부제는 교회의 보물과 소유물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의 행동에 분개한 박해자들은 온갖 고문을 가한 뒤, 석쇠 위에 눕히고 구워 죽였다. 훗날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그를 기념하는 성당을 세웠고, 이후 라우렌시오 성인에 대한 공경은 널리 퍼져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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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잘 들어두어라.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아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요한 12,24-26)
"Amen, amen, I say to you,
unless a grain of wheat falls to the ground and dies,
it remains just a grain of wheat;
but if it dies, it produces much fruit.

말씀의 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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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우리의 나날은 죽음과 부활의 반복입니다. 이기적인 자아가 죽고 새로운 자아로 탄생하며 변화합니다. 살아 있는 우리는 앞을 향해 나아갑니다. 생명을 이어 가는 것이 삶이니까요.”
발렌타인 L. 수자 신부가 쓴 『온유한 사랑으로』에서 인용한 글입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건강하게 성장해 간다는 것은, 자신의 이기적인 자아가 죽고 새롭게 태어나는 ‘죽음과 부활’이 삶 속에서 반복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우리 몸을 구성하고 있는 세포가 끊임없이 생성되고 소멸됨으로써 우리가 건강한 생명을 유지하는 것과 같습니다. 만일 세포가 죽지 않고 생성만 된다면 사람은 죽고 말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는 ‘암세포’라고 부릅니다. 마찬가지로 자신을 비우고 포기하는 죽음의 삶을 살지 않으면 우리 마음은 암 덩어리 같은 마음이 되어 영적으로는 숨을 쉴 수 없게 됩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어야 새 생명이 돋아날 수 있습니다. 우리 자신의 이기적인 자아가 죽어야 평화와 기쁨이 찾아옵니다. 신앙생활은 수련입니다. 날마다 우리 자신이 죽고 새롭게 태어나는 연습을 하는 것입니다. 내가 죽지 않으면 새로운 나는 탄생할 수 없습니다. 오늘의 ‘묵은 나’가 죽을 때 내일의 ‘새로운 나’를 선물로 받습니다. 나날은 같은 날의 연속이지만 이런 삶을 살면 하루가 늘 새날처럼 경이롭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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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목숨을 간직할 것이다.”
라우렌시오 성인은 참으로 주님 말씀에 충실하게 살았습니다. 자기 목숨을 불 속에 던지면서 오로지 주님을 향한 충실성 하나로 순교하신 분입니다. 교회 안의 재산은 언젠가는 없어져 버릴 물질적인 것입니다. 라우렌시오 성인은 어려운 상황에서도 그것을 가난한 이들을 구제하는 생명의 양식으로 삼았습니다.
현재 한국 천주교회도 수많은 순교자들을 모시고 살아갑니다. 그분들이 흘리신 피로 한국 교회는 더욱 풍요로워졌습니다. 물질이 모든 것을 압도하고 있는 듯한 오늘날, 우리는 앞서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기꺼이 주님을 따라 나선 순교자들의 고귀한 순교 정신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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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부자가 천금을 걸고 ‘천리마’를 구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3년이 지나도 구할 수가 없었습니다. 엉터리 말은 많았지만 진짜는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나이 든 집사가 자신이 구하겠다며 집을 나섰습니다. 그러더니 거금 500냥을 주고 죽은 말의 뼈를 사 왔습니다.
화가 난 부자가 이유를 묻자, 이렇게 답했습니다. “주인님께서 죽은 천리마를 오백 냥이나 주고 사셨다는 ‘소문’이 나 보십시오. 죽은 말에도 500냥이나 주는데, 살아 있는 말이라면 훨씬 더 많은 돈을 주리라고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이제 천리마를 숨겨 놨던 사람들이 줄을 설 것입니다.”
주지 않으면 받을 수 없습니다. 베풀지 않으면 돌아올 것이 없습니다. 남을 위해 희생하지 않는데, 어찌 남이 나를 위해 희생해 주기를 바랄 수 있을는지요? 한두 번의 희생은 받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입니다. 뿌리지 않으면 ‘어느 누구도’ 거둘 수 없습니다.
밀알이 싹을 틔우려면 썩어야 합니다. 썩지 않으려 발버둥 치면 그대로 남습니다. 썩어 거름이 ‘되어야’ 새싹이 돋아납니다. 모든 동물의 어미는 새끼를 위해 희생합니다. 자연의 미물도 ‘모성애’가 있기에 생존이 가능한 것이지요. 본능에 따른 행동이라고 하지만 숙연한 모습입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스승님의 말씀입니다. 참고, 나누면서, 아무런 계산도 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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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알은 땅에 떨어져 썩어야 싹을 틔웁니다. 어디 밀알뿐이겠습니까? 모든 씨앗이 그렇습니다. 약육강식의 동물의 세계에서도 새끼를 위한 어미의 희생은 참으로 대단합니다. 본능에 따른 행동이라고는 하지만 감동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 인간 사회는 어떻습니까? 동식물보다 못한 사람이 많은 게 사실입니다. 희생하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자신을 낮추는 사람을 오히려 어리석게 여깁니다.
희생하지 않으면 밀알이 썩는 이치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썩지 않으면 하늘의 생명력을 얻을 수 없습니다. 삶의 무미건조함이 팽배한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밀알이 썩지 않는데 어찌 싹이 돋을 수 있겠습니까? 희생하지 않는데 어찌 기쁨이 주어지겠습니까? 그러니 희생하는 행동을 구체적으로 실천해야 합니다. 이것이 사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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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당신차례야
-반영억신부-
하나의 밀알을 심는 것은 열매를 기대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풍성한 열매를 맺기 원하면 그만한 정성과 사랑으로 씨앗을 심어야 합니다. 그리고 밀알이 땅속에 묻히면 죽어서 싹을 틔우게 됩니다. 만약에 씨앗이 땅속에 묻히길 거절한다면 아마도 새한테 먹히거나 짐승한테 밟혀 으깨어지고 말 것입니다. 그러므로 묻혀야 합니다. 밀알이 땅속에서 사라지는 것은 없어짐을 뜻하지 않고 생명을 낳기 위하여 뿌리를 내림을 뜻합니다. 사실 죽는다는 것은 곧 새롭게 사는 것입니다. 따라서 얻기를 원하는 만큼 심어야 합니다. 얻기를 원하는 만큼 죽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생명을 위한 죽음이었습니다. 진정한 생명을 위하여 감당한 죽음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따르는 사람들은 영원한 생명을 위하여 그리고 더 높은 가치 때문에 지상의 생명을 거부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주님과 그분의 나라 때문에 지상의 매력에 집착된 욕심을 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일상의 삶 안에서 이웃을 위하여 나 자신을 포기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새 생명의 기쁨이 더해집니다.
주님께서는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야 한다. 내가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사람도 함께 있을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면 아버지께서 그를 존중해 주실 것이다.”(요한12,26)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는 예수님의 모범을 따라야 하고 결국 그리하면 아버지 하느님께서 영광의 자리에 함께해 주시고 또 영광스럽게 해 주신다는 약속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감당하고 있는 모든 일상의 삶을 기왕이면 밀알의 삶이 되도록 해야겠습니다.
우리가 상대를 위한 배려를 하다가 그만 지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젠 당신도 바뀔 때가 되었지 않느냐! 이제는 철이 들 때가 되었지 않느냐! 왜 나만 양보해야 하느냐! 이제는 당신차례야!” 하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한 알의 밀알이 된다는 것은 남에게 미뤄야 할 것이 아닙니다. 내가 묻혀 썩어야지 남이 대신 해 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습니다.”(요한12,24) 그렇다면 열매를 맺고 안 맺고는 나의 죽음에 달려 있습니다.
각자 삶의 자리에서 한 알의 밀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할 만큼 했다고 생색을 내지 말고 끝까지 항구하시기 바랍니다. 아버지 하느님께서 영광스럽게 해 주시는 그날까지 결코 좌절하거나 실망하지 말고 최선에 최선을 다하는 기쁨을 차지해야겠습니다. 사랑합니다.
주님 안에서의 새로운 길-최영균 신부-
우리가 예수님께서 제공하시는 새로운 생명을 얻고 싶다면, 세속에 물든
나 자신을 씻어버리고 싶다면, 낡은 자신에서 새로운 세상으로
나가고 싶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것은 신앙인으로 살면서
우리가 늘 갖는 질문일 것입니다. 예수님은 씨앗의 비유를 통해서
우리가 찾고자 하는 답을 주시고 있습니다.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듯이
자연의 법칙 안에서 씨앗은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씨앗은 자라고,
열매를 맺기 전에 반드시 대지에 자신을 묻어야 합니다.
이것이 죽음입니다. 우리는 세례 성사를 통해서 죄로 인한 낡은 것으로부터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고, 그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창조물이 되었습니다.
바로 여기에 위대한 십자가의 신비, 십자가의 역설이 드러납니다.
죽음은 새로운 삶을 인도합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에 대해서 죽을 때,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 생명으로 부활하게 됩니다.
여기서 말하는 죽음은 하느님 뜻을 거스르게 하는 것,
십자가를 거부하는 것에 대한 죽음입니다.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요한 12,24-26)
-유광수 신부-
제가 이 복음 묵상을 쓰고 있는 곳은 여주군 강촌면 도전리라는 깊은 산골 마을이다. 밭에 심어 놓은 고추, 콩 등도 씩씩하게 잘 자라고 있고 논에 심어놓은 벼들도 원기 왕성하게 자라고 있다. 이변이 없는 한 아마도 올해는 대풍년이 될 것 같다.
자연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준다. 자연만큼 하느님의 섭리에 잘 순응하는 것도 없다.
비가 오면 비를 맞고 따가운 햇빛이 내려 쬐면 햇빛을 고스란히 받아들인다. 바람이 불면 바람이 부는 대로 춤을 추고, 더우면 더운 대로 땀을 흘려가며 받아들이고, 추우면 추운 대로 옴추르며 그대로 견뎌낸다. 한번도 저항하거나 거부하지 않는다.그래서 모든 것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부드럽고 아름답게 가꾸어져 나간다.
봄에 푸른 옷을 입히면 푸른 옷을 입고, 가을에 단풍 옷을 입히면 단풍 옷으로 갈아입고, 겨울에 옷을 벗기면 앙상한 살 몸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며 하느님을 찬미한다. 어떤 처지에서든지 항상 하느님의 섭리에 온전히 순응하는 것, 그것이 자연이다.
모든 자연은 이토록 하느님께 순응하건만 유독 인간만이 하느님의 섭리에 적응하지 못하고 반기를 든다. 추우면 춥다고 불평하고 더우면 덥다고 짜증을 부린다. 하느님의 섭리에 반항하는 것, 그것이 인간이다. 그래서 병들고 나약해지고 추하게 변해간다. 인간이 하느님께 순응하면서 나이를 먹는다면 가장 아름다운 모습 즉 하느님을 닮은 거룩한 모습으로 변해 갈 텐데....
그러나 인간은 그 진리를 모른다. 자연이 아는 진리를 만물의 영장인 인간만이 모르고 있다. 아니 모른다고 하기보다는 그 진리대로 살지 않는다. 자연은 진리대로 살고 인간은 그 진리를 알면서도 그 진리대로 살지 않는 것이 자연과 인간과의 차이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오늘도 인간들이 알아듣고 진리대로 살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가 다 아는 자연을 비유로 말씀하신다.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고.
봄에 뿌린 벼 씨가 땅에 떨어져 죽었기 때문에 벼가 나서 무럭 무럭 자라고 있듯이 인간도 자라야 한다. 나이를 먹으면 먹은만큼 자라야 한다. 인간이 자란다는 것은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는 것처럼 하느님께 대한 반항이 죽어야 하고, 하느님께 대한 불평이 죽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자연이 하느님께 절대적인 순명을 하는 것처럼 하느님의 섭리에 순순히 순응하는 모습으로 길들여지는 것을 말한다.
우리가 죽지 않기 때문에 툭하면 하느님께 또 이웃에게 악을 쓰고 대들고 이를 갈며 투덜대는 것이다. 벼들이 익으면 고개를 숙이듯이 인간도 나이를 먹으면 고개를 빳빳하게 세우지 말고 다소곤히 머리를 숙여야 한다. 그것이 인간의 아름다움이며 나이 먹음의 무게이다.
왜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어야 많은 열매를 맺는가?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는다."는 것은 "겸손해진다."는 것이다. 겸손을 라틴어로 "humilta"라고 하는데 이 단어는 땅을 의미하기도 한다. 땅은 가장 낮은 곳이며 누구나 밟고 다닌다. 높은 사람 낮은 사람, 어린이 어른, 미운 사람 고운 사람, 서양사람 동양 사람 흑인, 죄인이거나 의인이거나, 살인자이거나 강도이거나 할 것 없이 누구나 밟고 다녀도 불평이나 거부 한번 하지 않는다.
그뿐이랴 땅은 모든 것을 받아들인다. 비를 받아들이고 햇빛을 받아들인다. 쓰레기를 받아들이고 침을 뱉으면 침을 받아들인다. 추위를 받아들이고 더위를 받아들인다. 대소변을 받아들인다. 땅은 거부하는 법이 없다. 불평하는 법이 없다. 모든 것에 모든 것이 되어준다. 그것이 땅의 겸손함이다. 그것이 땅의 봉사요 섬김이다. 인간에 대한 봉사요 섬김, 자연에 대한 봉사와 섬김, 하느님께 대한 봉사와 섬김이다. 그래서 땅이라는 humilta라는 단어는 겸손이라는 뜻으로 사용하는 것이다.
오늘 복음에서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야 한다."라고 말씀하시고 이어서 "내가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이도 함께 있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한 알의 밀알은 예수그리스도를 말하며 "땅에 떨어져 죽는다."는 것은 당신의 죽음을 말한다. 예수님은 우리 인간을 섬기기 위해 가장 낮은 곳인 땅에 떨어져 고개를 떨구셨다. 그분이 바로 우리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우리가 믿고 따르는 분이시다. 그런데 과연 "내가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이도 함께 있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그분이 있는 곳에 우리도 함께 있는가? 얼마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봉사를 거부하고 겸손의 미덕을 멀리하고 있는가? 하나도 죽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더 팔팔하고 뻣뻣하다. 모두 다 자기가 잘났고 왕이기 때문에 하느님도 이웃도 모두 다 떠받들어야 할 사람들이다.
자기 분수(꼬라지)를 모르는 무지의 소치이다. 내가 믿는 분이 어떤 분인지, 내가 있어야 할 위치가 어디인지, 내가 해야할 일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무지의 결과이다.
"너 자신을 알라!"는 소크라테스의 말은 참으로 명언임을 오늘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된다.
유태인 신학자 마르틴 부버가 들려주는 이야기이다.감옥의 간수장이가 랍비에게 물었다.
"모든 것을 알고 계시는 하느님이 아담에게 '너 어디 있느냐?'고 물으셨는데, 이를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그러자 랍비가 "당신은 성서 말씀이 영원하며, 모든 세대, 모든 사람에게 해당한다는 것을 믿습니까?"하고 되물었다. "그렇습니다."하고 간수장이 대답하였다. 그러자 랍비가 대답하였다. "그렇다면 하느님은 시대마다 각 사람을 부르십니다. '너는 네 세상에서 어디쯤 도달했느냐? 너에게 주어진 햇수와 날수가 그렇게 많이 지났는데, 너는 네 세상의 어디에 있느냐?' 그러니까 하느님은 '너는 마흔여섯 해 동안 살아왔다. 그런데 너는 지금 어디까지 와 있느냐?'하고 물으시는 거지요." 자기 나이를 언급하자 간수장은 흠칫 놀라 정신을 차렸다.그리고 랍비의 어깨에 손을 턱 얹으며 말했다. "좋은 말씀이오!" 그렇지만 속 마음은 떨렸다.
하느님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같은 질문을 통하여 자신의 삶을 검토하고 그 삶의 방식에 대하여 책임지게 하신다. 부버에 따르면 이 결정적인 마음 살핌은 인간에게 있어 영적인 길의 시작이다. 그 작고 조용한 목소리,'너 어디 있느냐?'고 하는 목소리에 직면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영원히 길을 잃은 채 헤메이게 될 것이다.
아담은 그 목소리에 직면했고, 자기의 곤경으로부터 빠져 나갈 길을 발견하였다.
'너 어디에 있느냐?' 하는 질문은 우리 삶의 지도에서 '현 위치'와 같다. 지하철 역 안내판의 '현 위치'에는 우리가 지금 서 있는 위치가 정확히 표시되어 있다. 그 지점을 확인하고 나면 목적지를 향해 나아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