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8월 11일 목요일 성녀 클라라 동정 기념일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잘못을 저지르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이면 되겠습니까?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여라.
(마태오 18,21―19,1)
"Lord, if my brother sins against me,
how often must I forgive him?
As many as seven times?"
Jesus answered,
"I say to you, not seven times
but seventy-seven times.
말씀의 초대
이스라엘 백성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고자 여호수아를 따라 요르단 강을 건너간다. 주님께서는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해 주신 것처럼 그의 후계자인 여호수아에게도 함께해 주시고 보호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신다. 이스라엘 백성은 갈대 바다를 건너는 것처럼 요르단 강을 건너간다. 새로운 시대가 그들에게 열리기 시작한다(제1독서). 남을 용서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내 삶에 베풀어 주신 헤아릴 수 없는 은혜를 깨달을 때 비로소 남을 용서할 수 있다. 평생을 갚아도 갚지 못할 만 탈렌트 빚진 사람의 심정으로 주님께 늘 감사하며 살아야 한다. 용서하지 못하는 것은 하느님의 사랑을 깨닫지 못하는 교만에서 비롯한다(복음).
☆☆☆
오늘의 묵상
창세기가 전하는 요셉의 긴 이야기는 한편의 드라마를 보는 듯합니다(창세 37,1-47.31). 야곱의 아들 요셉은 형제들에게 미움을 받아 그들 손에 죽을 뻔하다가 겨우 살아나 이집트로 팔려갔습니다. 그는 이집트에서마저 누명을 쓰고 억울한 옥살이를 하게 됩니다. 요셉은 그야말로 삶에서 가장 깊은 상처를 받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파라오의 꿈풀이를 해 주면서 당시 온 땅에 밀어 닥친 기근을 다스리는 이집트의 재상으로 곧바로 임명됩니다. 이때 자신을 죽이려다 이집트로 팔아넘긴 자기의 형제들이 식량을 구하러 이집트로 찾아옵니다. 다음은 자신의 깊은 상처와 기구한 운명에도 모든 것을 하느님의 뜻으로 받아들이는 요셉이 형들을 용서하는 장면으로, 이야기의 절정을 이루는 대목입니다.
“내가 형님들의 아우 요셉입니다. 형님들이 이집트로 팔아넘긴 그 아우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저를 이곳으로 팔아넘겼다고 해서 괴로워하지도, 자신에게 화를 내지도 마십시오. 우리 목숨을 살리시려고 하느님께서는 나를 여러분보다 앞서 보내신 것입니다. …… 그러니 나를 이곳으로 보낸 것은 여러분이 아니라 하느님이십니다”(창세 45,4-8).
상처는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받는 것이라고 합니다. 지금도 수많은 사람이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상처를 받고 용서를 하지 못한 채 지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용서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소개하는 책들도 수없이 나와 있으며, 자신의 건강한 삶을 위해서라도 용서를 해야 한다는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용서는 잘 되지 않습니다.
용서하는 데 필요한 두 가지 중요한 요소가 있습니다. 하나는 ‘세월이 약’이라는 말처럼 시간이 가야 합니다. 또 한 가지는 요셉처럼 자신이 감당해야 했던 기구한 운명을 하느님 안에서 해석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시간 속에서 내가 받은 상처를 치유해 주시고, 그것을 당신의 은총으로 바꾸어 놓으십니다. 또한 우리가 받은 상처를 통해서 주님께서 베풀어 주신 은총이 무엇인지를 해석해 내는 순간 요셉처럼 우리도 용서할 수 있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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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의 사랑은 완전하시며, 무조건적이십니다. 그런데도 마치 조건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바로 죄의 용서에 관한 부분일 것입니다.
“너희가 용서하지 않으면 하느님께서도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
저희 아버지는 중년의 나이에 동업자에게 사기를 당하시고 난 뒤 경제적으로
큰 어려움을 겪으셨습니다. 그동안 목재상을 경영하시면서 다른 사업체도
많이 가질 정도로 꽤나 성공하셨는데, 부도가 난 뒤 우리 가족이 살던 건물도
은행으로 넘어가고 셋방살이를 하실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재기를 하려고 무척이나 애쓰셨지만 워낙 자본이 없어서 헛고생만 하셨습니다.
죄의 용서는 히브리 말로 빚의 탕감과 같은 말이라고 합니다.
이스라엘은 죄를 하느님께 빚진 것으로, 갚아야 할 것으로 생각한 것입니다.
그때 아버지가 그 큰 빚을 갚을 수 있도록 누군가가 도움을 주셨다면
아버지의 기쁨이 어떠했을까 생각해봅니다. 또 우리 식구들의 기쁨은
어떠했을까 생각해봅니다. 그 고마운 분을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라도 하려 들지 않았을까요?
가슴이 답답해서
-반영억신부-
우리가 만나는 모든 사람들이 서로에게 부담을 주지 않기를 희망합니다. 서로 상대가 없으면 안 되는 것처럼 붙어 다니다가도 어느 날 아침 등을 지기도 합니다. 꼭 큰 일이 있어서가 아니라 아주 사소한 일로도 마음이 멀어집니다. 선한마음과 좋은 관계를 항구하게 지키는 것이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 등을 지는 것은 마음 안에 화를 심는 것입니다. 그리고 선을 두고도 행하지 않는 것은 스스로를 해치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 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마태18,23) 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한없이 기꺼이 용서하라는 말씀입니다. 누구의 잘못을 따질 것이 아닙니다. 그저 용서해야 합니다. 용서는 선행이 아니라 마땅히 해야 할 일입니다. 내가 살아오면서 알게 모르게 저지른 잘못과 용서 받은 것을 생각하면 남을 용서 못할 것도 없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살아가면서 열심히 노력할 것이지만 실수와 잘못의 허물이 없을 만큼 완벽할 수도 없습니다. 나는 용서 받고 살아온 죄인이고, 용서받아야 할 아야 할 죄인입니다. 그러니 내가 용서 받기 위해서라도 용서해야 합니다.
일반적으로 개와 고양이사이는 적대관계입니다. 그것은 개와 고양이의 행동양식이 정 반대이기 때문입니다. 개는 기분이 좋으면 꼬리를 치켜세우고 흔들어 댑니다. 배를 드러내고 누워 귀염을 떱니다. 그리고 무섭거나 경계할 때는 꼬리를 내리고 으르렁거립니다. 그런데 고양이는 반대로 기분이 좋으면 꼬리를 내립니다. 그리고 무서우면 꼬리를 세웁니다. 배를 드러내고 누우면 싸우겠다는 강한 의지의 표시입니다.
개와 고양이의 감정표현이 서로 다르니 개가 좋다고 꼬리를 흔들고 다가가면 고양이는 싸우겠다는 표현으로 입력이 되고, 고양이가 좋다고 꼬리를 내리고 다가가면 개는 사우겠다는 신호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둘 사이가 앙숙이 되고 만 것은 서로의 의사표시가 다른데서 기인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사람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의 입장과 주장이 상대에게는 전혀 다른 의견으로 비춰질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본마음과는 달리 미운감정과 분노, 적개심을 키워갈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상황에서든 상대방의 입장에서 헤아려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면 상대방이 이해가 되고 감정을 넘어서 용서할 수 있는 마음이 회복되기도 합니다.
용서라는 얘기가 나오면 가슴이 답답해지는 사람도 있습니다. 마음에 응어리 진 것이 많은 탓입니다. 억울한 것도 많고 되갚아 주고 싶은 것도 많은데 ‘사랑하라’, ‘용서하라’고 하니 정말 가슴이 터질 것 같습니다. 왜 나만 당하고 살아야 하느냐고 항변할 수밖에 없는 이 처지가 싫습니다. 그러나 원수든 친구든 하느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우리의 이웃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므로 “악에 굴복당하지 말고 선으로 악을 굴복시키십시오.”(로마12,21) 원수 짓는 것은 마음 안에 불행을 쌓는 것이나 마찬가지 입니다. 그러니 해질 때 까지 성난 채로 있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용서한다고 마음먹었다가도 그 때의 상황이 떠오르면서 다시 되살아나는 것이 미움의 감정이고, 상처 준 사람이 있다면 외면하고 보복하고 싶은 것이 인간의 나약한 모습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의지적인 노력도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이들을 용서하시고, 아버지 하느님께 기도까지 하셨습니다.“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루카23,34) 그 기도를 우리가 할 때입니다. 사랑합니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 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양승국신부- <작은 것이 아름답습니다> 교회 안의 큰 경사이자 대축제인 성모승천대축일을 하루 앞둔 오늘 우리는 성모님에 대한 열렬한 신심의 소유자였던 폴란드 출신의 콘벤투알 성 프란치스코회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 사제의 축일을 지냅니다, 각별한 성모신심을 지녔었던 콜베 사제는 성모님께 자신의 전 존재를 봉헌했으며, 성모님을 세상만방에 널리 알리기 위해 ‘성모의 기사’란 잡지를 창간했습니다. 콜베 사제가 우리에게 모범으로 남겨둔 이웃사랑의 실천은 참으로 특별한 것이었습니다. 제대로 담근 시원한 동동주가 목으로 술술 넘어가듯 만사가 술술 잘 풀리는 가운데 이웃사랑을 실천하기란 사실 ‘누워서 떡먹기’입니다. 좋은 분위기 속에서, 평화로운 가운데, 넉넉한 자금과 수많은 협력자들이 확보된 가운데 이웃사랑을 실천하기란 ‘식은 죽 먹기’입니다.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나도 죽을 지경인 상황 속에서, 옆을 돌아볼 여유가 없는 괴로운 상황 속에서는 제대로 된 이웃사랑을 실천하기가 얼마나 힘든지 모릅니다. 그렇지만 ‘내 코가 석자’인 상황 속에서도 이웃을 돌아볼 줄 아는 그 사람이야말로 참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이라고 확신합니다. 콜베 신부님께서 그랬습니다. 그분의 사랑은 우리의 사랑보다 ‘살짝’ 한 걸음 더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우리보다 한 2% 더 사랑이 추가되었던 것입니다. 그분도 난 데 없이 죽음의 수용소로 끌려와서 강제노역에 시달리느라 하루하루가 죽을 지경이었을 것입니다. 하루에도 몇 명씩 동료 수감자들이 주검이 되어 실려 나가는 것을 보며 그분도 죽음의 공포를 느끼셨을 것입니다. 머리털 나고 처음 맞이해보는 극단적이고 처절한 상황 앞에서 ‘하느님, 도대체 이게 뭡니까?’ 하는 하소연이 저절로 튀어나왔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목자로서 콜베 신부님은 너무나 당당하고 의연하셨습니다. 죽음의 수용소 안에서도 그의 자세는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았습니다.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힘겨운 강제노역에 시달리면서도 힘겨워하는 동료들을 위로하고, 격려하고, 쥐꼬리만한 빵 조각을 젊은 재소자들에게 나눠주고, 눈을 부릅뜨고 죽어버린 형제의 눈을 감겨주고, 임종을 지켜주고... 이것이 바로 참 목자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 사제의 마지막 모습이었습니다. 그분은 단 한명의 동료 재소자를 대신해서 죽음의 아사 감방으로 내려가셨지만, 사실 인류 전체를 대신해서 지하로 내려가신 예수님을 꼭 빼닮았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분의 생애는 작은 것이 아름답다는 역설의 진리를 온 몸으로 말해주고 있습니다. 지금 내 눈 앞에서 죽어가고 있는 단 한 사람을 소중히 여기고 최선을 다하는 것, 지금 내 곁에서 고통 받고 있는 단 한 생명을 소홀히 하지 않은 것... 그것이 사실 가장 중요한 일이라는 것을 온 몸으로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