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8월 14일 연중 제20주일
"여인아, 참으로 네 믿음이 장하다!
네 소원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마태오 15, 21-28)
"O woman, great is your faith!
Let it be done for you as you wish."
말씀의 초대
이사야 예언자는 백성에게 하느님 말씀을 전한다. 주님께서는 구원이 가까이 왔으니 공정을 지키고 정의를 실천하라고 말씀하신다. 특히 이방인들도 하느님께 돌아와 그분을 섬기고 안식일을 지키게 되리라고 선언하신다(제1독서). 바오로 사도는 이스라엘 백성이 복음을 거절하자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게 되었음을 선언하면서 이방인들도 하느님의 자비를 얻어 누리게 되었음을 강조한다(제2독서). 이방인인 가나안 여자가 주님에 대한 굳건한 믿음을 보여 준다. 주님의 구원이 가까이 왔고, 그분의 정의가 곧 드러나리라는 이사야 예언자의 말씀대로 가나안 여자는 주님에 대한 믿음을 고백하여 주님의 자비를 입게 된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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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배우자를 대신해서 죽을 수는 없어도 자식을 대신해서는 죽을 수 있다는 말이 있듯이, 부모에게 자식은 자신의 생명과 같은 존재입니다. 우리나라 대표적인 지성인 가운데 한 사람으로 일컬어지는 이어령 박사가 신앙을 받아들인 데에는 딸과 손자의 고통이 있었다고 하지요. 딸이 그의 아들 때문에 마음의 고통을 겪다가 그 딸마저 실명 위기에 놓이게 됩니다. 그동안 종교는 문화의 일부라고 주장하며 자신의 신념을 내세우던 현대의 지성이, 딸의 고통을 보고 딸을 위해 종교를 받아들인 것입니다. 이것을 두고 어느 언론에서는 이성에서 영성으로 넘어간 사건이라고 했지요.
이 세상에 고통이 없다면, 하느님을 믿는 사람이 있을까요? 놀랍게도 깊은 신앙을 가진 사람들 가운데는 인간의 힘으로 어쩔 수 없는 고통과 한계를 경험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알량한 지식과 가진 것으로 “하느님이 어디 있느냐?” 하고 교만하며 살지만, 인간의 한계 앞에서 결국 신앙만이 위대한 힘을 발휘하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자기 딸을 살려 달라고 절박하게 애원하는 여인을 통해 예수님께서는 믿음이 무엇인지를 알려 주십니다. 믿는다는 것은 주님께 온전히 항복한 상태를 말합니다. 자기가 아는 모든 것이 주님 앞에서는 매우 하찮다고 여기며, 주님 식탁의 빵 부스러기라도 감사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일 때 우리의 이성은 비로소 영성으로 바뀝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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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평소와는 다른 모습을 보여 주십니다. 당신께 다가오는 가난한 처지의 여성들, 병자들, 고통 받는 사람들을 한 번도 외면하지 않으시는데, 오늘따라 당신께 애원하는 한 여인에게 냉정한 모습을 보이십니다. 그것도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방인들을 무시할 때 했던 ‘강아지’라는 말도 서슴없이 하시면서 말입니다.
신비 신학자 십자가의 요한 성인은 이렇게 말하였지요. “우리가 자기 자신과 처절한 싸움을 하여 ‘완전한 무’(無)에 이를 수 있을 때 우리의 영혼은 ‘완전한 전부’(全部)이신 하느님과 일치할 수 있다.” 우리가 간절히 바라는 것을 얻으려면 스스로 완전히 부서지고 버려져서 온전히 ‘무’(無)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냉정한 모습을 보이신 이유는 가나안 여인을 무시해서도, 그에게 관심이 없어서도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나안 여인의 믿음을 드러내 보여서 제자들과 사람들에게 믿음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믿음은 살아 있는 고백입니다. 정지된 ‘고정 관념’이나 ‘신념’ 같은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힘, 알량한 지식, 자존심 등 자신을 드러내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온전히 ‘무’(無)가 되어 주님께 의탁하는 것입니다. 주인의 상에서 떨어진 빵 부스러기처럼 “주님, 저는 당신 앞에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고 스스로 부서지고 없어질 때, 우리는 비로소 ‘전부’를 얻을 수 있습니다. 믿는다는 것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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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에서 가나안 여인은 예수님께 마귀를 물리쳐 주시기를 청합니다. 딸을 괴롭히고 있는 마귀입니다. 이전의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청을 거절하지 않으셨습니다. 사탄 때문에 고생하는 이에게는 언제나 다정한 분이셨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말씀이 없으십니다. 묵묵부답하신 채 걷기만 하십니다. 보다 못해 제자들이 말씀드립니다. ‘여인이 저렇게 애원하고 있는데 어떻게 하실 겁니까?’ 예수님의 답변은 엉뚱합니다. ‘자녀들의 빵을 강아지들에게 주는 것은 좋지 않다.’ 강아지는 이방인입니다. 그들에게 기적을 베풀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 당시 어법이라고는 하지만, 생각하면 모욕적인 말씀입니다. 그럼에도 여인은 조금도 개의치 않습니다. 오히려 재치 있는 답변으로 예수님의 거절을 뒤집습니다. 여인의 무엇이 예수님의 마음을 움직이고 기적을 불러왔겠습니까? 오늘 복음의 교훈은 이 점을 묵상하는 데 있습니다.
겸손한 믿음입니다. ‘무슨 말씀을 하시더라도 예수님께서는 기적을 베푸실 것이다. 나는 그것을 굳게 믿는다.’ 여인의 이 확신을 예수님께서 읽으셨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권능을 드러내셨습니다. 거절당할 때 여인인들 왜 마음이 아프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나 여인은 극복하였습니다. 서운한 감정을 믿음으로 뛰어넘었기에 기적을 만날 수 있었던

거절을 통한 가르침
-박용식 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이해할 수 없을 만큼 쌀쌀맞습니다. 딸의 병을 고쳐달라고 애원하는 어미에게 개망신을 줍니다. 동냥은 못 줄망정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좋지 않다"(마태 15,26)고 말씀하시면서 그 여인을 개(犬) 취급합니다.
여인이 욕심을 부린 것도, 과분한 부귀영화를 달라고 한 것도 아닙니다. 사랑하는 딸의 병을 고쳐달라고 지극히 인간적인 간청을 했을 뿐입니다. 어머니라면 당연히 원하는 지극히 소박한 청입니다. 그런데 그런 청을 들어주기는커녕 개망신을 주시니 도무지 자비로운 예수님답지 않습니다.
인도의 현자 라마나 마하리쉬에게 "예수님은 어떤 분입니까?"하고 묻자 "모든 사람을 각자 수준에 맞게 가르치는 분이다"하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오늘 예수님이 그 여인의 청을 거절하면서 개망신을 준 것은 그 여인 수준에 맞게 가르치고자 '거절'이란 방법을 쓴 것 같습니다. 절박한 간청을 거절당한 그 여인은 기분 나쁘고 자존심이 상해서 욕이라도 한 바가지 퍼붓고 그 자리를 떠나버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여인은 밑바닥까지 떨어져 상처 입은 자존심을 억누르면서도 자식의 병을 고쳐야겠다는 일념과 '이분이 아니면 해결할 수 없다'는 굳은 믿음으로 다시 한 번 무릎을 꿇고 겸손하게 애걸합니다.
"주님, 개 취급을 해도 좋으니까 제 자식 병만 고쳐주십시오."
드디어 '거절'이라는 예수님의 교육 방법이 성공해 열매를 맺습니다.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네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마태 15,28).
그리하여 그 여인은 더 굳은 믿음을 갖게 됐고, 딸의 병은 말끔히 나았습니다. 예수님은 병든 딸을 치유해줄 뿐 아니라 그 여인의 믿음까지 굳게 해주려고 모질게도 '거절'이란 방법을 사용하신 것입니다. 거절을 통해서 그 여인에게 '강한 믿음'을 심어주셨습니다.
우리 믿음을 키워주실 때도 예수님은 거절의 방법을 쓰실 수 있습니다. 우리 각자 수준에 맞게, 우리 각자 신앙심이나 상황에 맞게 우리를 가르치십니다. 예수님께서 '거절'이란 방법을 쓰실 때 우리는 오늘 복음의 여인처럼 한 번 거절당했다고 포기하지 말고 주님께 매달려야 할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거절당하거나 반대에 부딪힐 때 기분이 나쁩니다. 마음이 상하고 자존심에도 상처를 입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거절당하고 반대 받을 때 상처 입은 마음을 단련함으로써 고귀한 인격으로 성장합니다. 거절당할 때 교만을 부수고 겸손을 배웁니다. 반대 받을 때 먼저 자신의 행동을 반성하고 더 나은 길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어린이를 교육할 때도 옳지 않은 일은 반대하고 거절해야 합니다. 아이가 예쁘다고 해서 달라는 대로 다 주고, 아이 행동을 무조건 찬성한다면 그 아이는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배울 수 없으며 올바른 인격체로 성장할 수 없습니다.
사제인 저도 거절당하고 반대 받는 일이 있습니다. 물론 그때마다 인간적으로 기분이 상합니다. 그런데 만일 내가 한 번도 반대를 받거나 거절당하지 않았다면 아마도 무척 교만해졌을 것입니다. 마치 하느님이라도 된 듯 내가 하는 일은 모두 옳은 것으로 착각해 본당 사목을 그르칠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나의 일이 때로는 거절당하고 반대 받기에 내 생각과 계획을 다시 한 번 더 검토해보고, 필요하면 수정하고 보완해서 더 좋은 사목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또 삶에서 수많은 거절과 반대를 받는 중에 내게 허락되는 것이 있을 때, 그 허락된 것을 고마워하고 소중하게 여깁니다. 만일 거절당하고 반대 받는 것 없이 모든 것을 다 이루게 된다면 이뤄진 것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이나 행복을 느끼지도 못할 것입니다.
절박한 상황에서 간절한 청을 거절당한 여인이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믿음을 갖고 주님께 나아감으로써 큰 결실을 얻은 것처럼, 우리도 거절당하고 반대 받을 때 포기하지 않고 겸손하게 주님 뜻을 실천해 간다면 더 큰 은총을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네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
-최인각신부-
어머니의 크신 사랑과 믿음
요즘 “신부님, 기도해 주세요”라는 부탁을 많이 받습니다. 대부분 가족들을 위한 것들입니다. 어제는 부탁받은 기도들을 생각하며 정성껏 미사를 드렸습니다. 그러던 중에 이러한 모든 것을 아시는 주님께서 흐뭇하게 웃고 계신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이교도 지방에 갔을 때, 어떤 가나안 부인이 예수님께 다가와 “다윗의 자손이신 예수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제 딸이 호되게 마귀가 들렸습니다”라고 외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런 불쌍한 여인에게 “나는 오직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파견되었을 뿐이다”라고 냉정하게 대하십니다. 그뿐만 아니라,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좋지 않다”라고 덧붙이십니다. 정말 가혹할 정도로 느껴집니다. 아마 보통 사람이었다면, 예수님께 화를 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 여인은 “주님, 그렇습니다. 그러나 강아지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라고 말하며, 자신의 자존심을 완전히 내려놓습니다. 이러한 여인의 모습을 본 예수님은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네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라고 감동에 찬 말씀을 하시며, 그 여인의 딸을 고쳐주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저의 가슴을 사로잡은 몇 가지가 있었습니다. 먼저, 어머니들의 마음입니다. 자신의 처지보다는 고통 받는 자녀를 위해서 그 무엇이라도 하는 어머니들의 마음[母性愛]. 더욱이 이미 세상을 떠나신 어머니가 하늘나라에서 정성을 다해 자녀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모습을 생각하니, 정말 가슴 뭉클한 사랑이 느껴집니다. 이러한 어머니의 사랑을 받고 자랐기에 지금의 내가 있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모든 어머니께 진정으로 감사드리며 큰절 올립니다.
둘째, 창피함을 잃어버린 어머니의 모습입니다. 마귀 들린 딸을 고쳐 달라고 소리 지르며 청합니다. 어떤 가정은 자기 집에 마귀 들렸거나 성하지 않은 가족이 있으면, 창피해서 이것을 감추고 쉬쉬하는 경우도 있는데, 복음에 나온 어머니는 그렇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의 여인은 창피나 자존심을 다 내려놓고, 딸의 고통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여 외칩니다. 이 순간, 저를 위해 기도해 주셨던 부모님, 나의 고통과 좌절을 나보다 더 크게 느끼시고 함께해 주셨던 부모님, 학창시절 나의 자취방과 잠자리를 위해 친척들에게 아쉬운 부탁을 하셨던 부모님, 나의 학자금과 용돈을 마련하시기 위해 여기저기 꾸러 다니셨던 부모님이 오늘 특히 기억납니다.
셋째, 포기하지 않는 어머니의 장한 믿음입니다. 딸을 고쳐달라고 큰 소리로 한 번만 외친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고쳐주실 것이라는 믿음을 갖고 지속적으로 청합니다. 모욕적으로 거절당함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과 제자들이 귀찮을 정도로 청합니다. 그녀의 인내는 승리를 얻었습니다. 며칠 전 어떤 어머니에게 연락을 받았습니다. 자신의 딸에게 손끝의 살점이 떨어지고 지문이 없어지는 병이 있었는데, 무던히 믿고 기도했더니, 어느새 손가락에 새살이 돋고, 지문이 생기기 시작했으며, 이번 주부터는 약을 먹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어머니와 딸은 주님께만 희망과 믿음을 두며 기쁘게 살았음을 저는 압니다. 제가 볼 때도 그들의 믿음은 참으로 컸습니다. 그래서 저는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라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넷째, 가나안 여인의 겸손한 마음입니다. 이 여인은 예수님께 겸손한 믿음으로 기도하였습니다. 도와 달라는 소원을 거절당할 때도, 모욕적으로 개 취급당할 때에도, 이 여인은 그저 ‘자비를 베푸소서’라고 겸손히 외칩니다. 이 여인의 겸손이 예수님을 감동시킵니다. 겸손은 하느님을 감동시킨다는 말을 자주 듣습니다.
마지막으로 가나안 여인의 예지입니다. 이 여인은 딸을 구해주고 인생을 바꿔줄 분을 정확히 알았던 것입니다. 이 여인이 칭찬받을 만한 믿음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을 주님으로 알아보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예지의 힘으로 이 여인은 ‘믿음의 시험’에 아주 우수한 성적을 거두며, 아니 예수님을 감동시키며, 예수님으로부터 승리의 월계관을 받습니다. 그 상급으로 “네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라는 예수님의 응답을 듣습니다. 이보다 더 큰 상급이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에게도 참으로 많은 시련과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믿음을 시험하는 주님의 방법론임이 틀림없습니다. 그 믿음의 시험에 어렵사리 합격할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감동시키며 “네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라는 응답을 얻을 수 있는 신앙생활을 하시길 기도합니다.


적어도 삼 세 번
-김현준 신부-
1. 가나안 여인과 예수님과의 대화
여 인 :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제 딸이 마귀가 들려 몹시 시달리고 있습니다.
예수님 : (묵묵부답 후) 나는 길 잃은 양과 같은 이스라엘 백성을 찾아보라고 해서 왔다.
여 인 : (예수께 다가와 꿇어 엎드려) 주님, 저를 도와주십시오.
예수님 : 자녀들이 먹을 빵을 강아지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
여 인 : 주님, 그렇긴 합니다만 강아지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주워 먹지 않습니까?
예수님 : 여인아, 참으로 네 믿음이 장하다. 네 뜻대로 이루어 질 것이다.
2. 믿음과 겸손, 그리고 항구심
우리는 삼 세번을 선호한다. 가위바위보도 삼 세번, 배구나 족구 경기도 삼 세번(3판2승), 자리나 음식을 권할 때도 세 번 정도는 한다. 오늘 가나안 여인의 대화(기도)에서도 삼 세번의 간청을 본다. ① 큰 소리로“주님,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② 꿇어 엎드려“주님, 저를 도와주십시오”, ③“주님, 그렇긴 합니다만 강아지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주워 먹지 않습니까?”여인의 이 삼 세번 자세 안에서 주님의 뜻에 맡기면서도 주님께 더 다가가기 위해 ①
생각을 열어 나가는 믿음, ② 거듭 반복하는 항구심, ③ 간청의 겸손을 발견할 수 있다. 우리도 예수님과 기도(대화)한다.“많이 기도 했다. 기도할 만큼 했다. 밤새도록(죽도록) 기도했다”고 말하곤 한다. 그러나 이 말 속에 과연 가나안 여인의 기도에서 볼 수 있는 믿음과 겸손, 그리고 항구심(적어도 삼 세번)이 담겨 있었는지 생각해 볼 일이다.
3. 생각을 열어 나가는 믿음
“교회는 새로운 방법으로 인류에게 다가가야 해. 진실은 변하지 않아도 진실을 소통하는 방법은 새롭게 고칠 수 있는 것이야”라고 말씀하신 교황 요한 2 3세는, 교회의‘벽’을‘문’으로 바꾸는 일대 혁명을 몰고 올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여신 분이다. 제2차 공의회가 열린 기간을 두고, 어떤 분은‘모든 사람의 의견이 다 소중했고 믿음은 같았지만, 생각이 달랐던 사람, 그리고 모든 종교 간의 대화가 가능했던 기적의 날들이었다’고 회상했다. 가나안 여인의 모습을 보면서 교회의 벽을 문으로 바꾼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생각이 나는 것은 왜일까? 교황 요한 23세, 그분 안에서 생각을 열어 나가는 믿음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여인아, 참으로 네 믿음이 장하다!”
-의정부교구 주보-
오늘 우리는 복음 말씀으로 가나안 여인이 예수님께 찾아와 자기 딸을 고쳐달라고 청하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예수님 주변에는 항상 병자들과 마귀 들린 사람들이 찾아와 자신들을 도와달라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때마다 예수님은 측은한 마음이 들어 그들을 모두 고쳐주었다고 했는데, 오늘은 분위기가 사뭇 다릅니다.
여인이 다가와도 아무런 대답도 없으시지 않나, 제자들이 재촉하니 “나는 길 잃은 양과 같은 이스라엘 백성만을 찾아 돌보라고 해서 왔다.”고 말씀하시지 않나, 심지어 그 이방인 여인을 강아지에 비유하시면서 까지 거절의 말씀을 하십니다.
예수님 하면 항상 인자하시고 사랑이 넘치신 분이라고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데, 오늘 이 모습은 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게다가 그리스도교의 보편적 사랑이라는 가치를 두고 볼 때, 이방인이라고 왜 이런 박대를 받아야 되는 것일까요? 여인의 입장에서 생각해본다면 예수님이 너무 치사하고 야박하기만 합니다. 계속해서 예수님께 간청하다가 강아지 이야기를 할 때 분명 자신을 두고 하는 말씀인 줄 알았을 것입니다. 모욕도 이런 모욕이 어디 있습니까? 저 같으면 그 순간에 박차고 일어나서 화를 내면서 다른 데를 알아보겠다고 일어났을 것입니다. 그런데 과연 알아볼 다른 데가 있을까요? 어디로 가서 이런 하소연을 할 수 있을까요?
외형적으로 보면 예수님께서 참으로 야박하게 이 여인을 대한 것 같지만, 사실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간절한 믿음을 보여주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하느님의 구원계획은 약소한 민족 이스라엘 백성을 통해 이루기로 계획되었고, 그래서 예수님은 먼저 이스라엘 백성을 찾아가셨습니다. 그들에게 하느님의 말씀을 전해주셨고, 병자들과 마귀 들린 사람들을 고쳐주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간절한 믿음을 갖지 못했습니다. 당연히 자신들이 받아야 될 것이라 생각했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 사람들과 섞여 살고 있으면서도 한 번도 제대로 된 사람으로 인정받지 못했던 이 여인의 장한 믿음을 하느님을 소유(?)하고 있다고 자부하는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과 우리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일찍 세례를 받았다고, 신자이기 때문에 믿음이 저절로 자라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구하라, 찾아라, 문을 두드려라(마태 7,7)”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적극적으로 주님을 찾아나서는 사람에게 신앙이 싹트는 것이고 구원이 보장되는 것입니다. 믿음은 보편적인 것입니다. 이방인이 되었건 병자가 되었건 가진 사람 없는 사람, 잘난 사람 못난 사람 구별이 없습니다. 믿음이 보편적이기 때문에 구원도 보편적인 것이어야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 말은 누구나 주님께 대한 믿음만 있다면 구원받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내가 비록 내세울 것이 없어도, 많이 부족하고 나약하다고 하더라도 결국 주님은 내 편이 되어주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니 우리도 오늘 만난 가나안 여인처럼 주님을 끝까지 따라가야 할 것입니다. 구하고 찾고 문을 두드리다가 답이 없다고 이내 포기하고 다른 곳을 찾아갈 곳이 어디 있겠습니까?
연중 20주일(마태15,21-28) 첫영성체
당신의 모습을 감추셨을 지라도
-반영억신부-cafe.daum.net/rara63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에 대한 주님의 사랑은 언제나 변함이 없으십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사랑을 효과적으로 느낄 수 있도록 성체성사를 설정하셨습니다. 하늘로부터 내려온 살아있는 생명의 빵으로 우리를 풍요롭게 하십니다. 오늘 첫 영성체를 하는 어린이들이 주님의 사랑을 체험하고 주님의 사랑 안에 항구하게 머물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아울러 ‘첫 영성체 할 때 청하는 기도는 하느님께서 기쁘게 받아주신다.’했으니 어린이들이 믿음으로 주님의 마음에 드는 희망을 새롭게 하기를 바랍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한 가나안 여인이 예수님께 와 엎드려 “다윗의 자손이신 주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간청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주는 것은 좋지 않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이방인 여인을 무시한 것이 아니라 은총은 준비된 사람에게 우선적으로 주어지게 되어있다는 말씀입니다. 다시 말하면 구원의 혜택이 이방인에 앞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인의 반응이 놀랍습니다. “주님, 그렇습니다. 그러나 강아지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하고 말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여인의 큰 믿음을 보시고 “네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확고하게 믿으면 그만큼 하느님의 능력을 보게 되고 은총의 혜택을 입게 됩니다. 하느님의 은총과 더불어 인간의 협력이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구원은 유다인이나 이방인이라는 외적인 관계보다 철저한 믿음의 사람으로 있느냐가 관건입니다. 이방인 여인은 주님께 대한 믿음과 자식을 위한 한 없는 사랑, 그리고 끈기 있는 간청으로 이루고자 하는 소망을 결국 이루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를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1). 하느님께서는 지금으로부터 4천여 전에 수많은 민족 가운데 이스라엘 민족을 당신의 백성으로 선택하였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느님께서 뽑아 주셨다는 것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하였습니다. 선민의식이 뿌리 깊게 박혔습니다. 그들은 선택받지 못한 백성들을 구원받을 수 없는 이방인이라고 부르고, 심지어 ‘강아지’라고 까지 부르면서 교만함이 가득 차 있었습니다. 특별히 선택되었다면 그에 걸 맞는 믿음의 삶, 사랑의 삶을 살아야 하는데 그렇지를 못했습니다. 사실 이스라엘 백성이 선택되었다고 다른 모든 민족들이 배척된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마음과 표현으로 여인에게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에게 파견 되었을 뿐이다.’말씀하시고, ‘자녀들의 빵을 강아지에게 던져주는 것은 옳지 않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여인은 ‘강아지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하며 간절한 믿음을 표현하였습니다. 바로 이스라엘 백성이 이러한 믿음의 소유자가 되어야 하는데 그렇지를 못하니 ‘정신 차려라!’는 꾸중의 말씀으로 들을 수 있습니다. 너희가 이방인이요, 강아지라고 무시하던 사람이 더 큰 믿음을 가지고 있으니 어찌된 일이냐? 배부르고 등 따뜻하면 하느님이 다 무슨 필요가 있느냐? 내칠 위험이 큽니다.
이 말씀은 특별히 우리 감곡매괴성모순례지 성당의 신자들에게 하시는 말씀이라고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올해 본당설정 115주년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청주교구의 어머니성당으로써 많은 은총과 축복으로 살아왔습니다. 성소의 못자리요, 많은 성직자 수도자를 배출하였습니다.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곧 나의 믿음은 아닙니다. 그에 못지않은 믿음과 사랑을 간직하고 사느냐? 자문할 필요가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우리 성당을 찾아오십니다. 시간과 경제적 부담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십니다. 우리는 엎어지면 코 닿을 곳에 있으면서도 은총의 땅을 소홀히 합니다. 늘 풍요로움 속에 있으니까 고마움을 모릅니다. 따라서 더 큰 믿음과 사랑에 소홀함이 없어야 하겠습니다. 겸손으로 거듭나야 합니다.
2). “여자는 약해도 어머니는 강하다.”는 말이 있습니다. 딸을 위해 어떤 어려움도 감당하는 어머니를 봐야 합니다. 강아지 취급받는 구박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끝까지 믿음으로 매달립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끈질기고 집요하게 청하는 사람을 물리치지 않으십니다. 마침내 어머니의 믿음으로 딸이 치유되었습니다. 야고보 사도는 말합니다. “사실 우리는 끝까지 견디어 낸 이들을 행복하다고 합니다.”(야고5,11)
우리는 어떤 바람이 있을 때 반드시 얻게 되리라는 것을 믿고 기도하고, 믿고 기다려야 합니다.“기도는 지속성이 있어야 합니다. 비록 죄를 짓고 잘못에 떨어졌다 해도 기도하기를 그쳐서는 안 됩니다. 그 잘못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힘은 꾸준히 계속되는 기도를 통해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선한 지향으로 인내하면서 청하는 것은 하느님께서 반드시 이루어 주십니다. 기도는 하늘의 열쇠며, 세상의 기둥입니다. 지혜의 저장소며 영혼의 힘이고 낙심의 치료제입니다. 슬픈자들의 위안이며 의로운자들의 승리고 하늘의 삶을 미리 맛보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받으려 하는 것보다 천배 만 배 더 베푸실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시련과 고통 중에 믿음으로 간절히 기도하십시오.
그리고 은혜를 베풀어 주실 때 믿음의 자세가 필요한데 백인대장의 처신을 볼 수 있습니다. “주님, 저는 주님을 제 지붕 아래로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 그러면 제 종이 나을 것입니다.”(마태8,8) 이 믿음의 고백은 오늘 우리의 미사 안에서 영성체 전에 고백하고 있습니다. “주님, 제 안에 주님을 모시기에 합당치 않사오나 한 말씀만 하소서. 제가 곧 나으리이다.”무엇을 주시든지 주님께서 주시는 것이라면 고마운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하겠습니다.
성경을 보면 열두 해 동안이나 하혈병을 앓던 여자도 믿음으로 병이 나았고(마태9,20-22), 주님은 “너희가 믿는 대로 되어라”(마태9,29)하시며 눈 먼 사람을 고쳐 주셨습니다. 또한 믿음을 보시고 “얘야, 너는 죄를 용서 받았다”(마르2,5)하시며 중풍병자를 고치셨습니다. 더군다나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다”(요한14,12) 하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이는 우리를 도구삼아 일하신다는 말씀으로도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바람이 큰 만큼 큰 믿음을 지켜야 합니다. 믿음은 ‘설령 하느님께서 당신의 모습을 감추셨을 지라도 결코 흔들림이 없는 것’입니다. 이방인 여인이 마치 예수님께서 외면하는 듯 여겼을지라도 한 치의 흔들림 없이 확고부동한 믿음을 지켰듯이 우리도 어두운 밤이 올수록 더 큰 신뢰를 가지고 믿음을 증거 하시기 바랍니다. 오늘은 기대하는 바와 간절한 소망이 하느님 안에서 완성되기를 기도합니다.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