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8월 17일 연중 제20주간 수요일
내 것을 내 마음대로 처리하는 것이 잘못이란 말이오?
내 후한 처사가 비위에 거슬린단 말이오?
(마태오 20,1-16)
Am I not free to do
as I wish with my own money?
Are you envious because I am generous?'

말씀의 초대
요탐은 아비멜렉이 임금이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사람들에게 우화적 표현으로 연설한다. 우화를 통해 요탐은 왕정 제도가 쓸데없음을 전하며 격렬하게 비판한 다음, 자기 형 아비멜렉을 피하여 브에르로 도망간다(제1독서). 하늘 나라는 부르심을 받은 시각이 아니라 부르심 그 자체에 의미가 있다. 이른 아침에 부르심을 받은 사람도, 오후 다섯 시에 부르심을 받은 사람도 다 똑같은 대우를 받는다. 주님께서는 어느 때이든 부르심에 응답하는 그 자체를 소중히 보신다(복음).
☆☆☆
오늘의 묵상
피정 강의에 초대받아 이해인 수녀님이 계시는 수도원에 머문 적이 있습니다. 이해인 수녀님은 누구나 한번쯤은 수녀님 글을 읽거나 들어 보았을 정도로 교회 안팎으로 잘 알려진 시인입니다. 그날은 수녀님이 경비실에서 안내를 보는 소임을 맡은 날이었습니다. 오전 내내 경비실을 지키며 몇 편의 시를 쓰셨다며 행복해하셨습니다.
우리는 수도자들도 그가 가진 유명세나 능력만큼 특별한 대접이나 대우를 받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수도원의 아름다움은 누구나 한 데나리온을 받는다는 데 있습니다. 교회를 위해서 한 일이 크든 작든, 수도 생활을 오래 했든 짧게 했든, 하는 일이 어렵든 쉽든, 똑같이 한 데나리온씩 받습니다. 이것이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아침부터 일한 사람에게나 저녁에 온 사람에게나 똑같이 한 데나리온을 지급하시는 ‘예수님의 셈법’입니다.
주님의 일을 하면서 남과 비교하고 불평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주님의 일은 남들보다 얼마나 더 열심히 했고 더 많은 성과를 냈느냐의 문제가 아니며, 오로지 주님과 맺은 관계 안에서 자신이 얼마나 최선을 다했느냐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눈에는 세상에 큰 업적을 남긴 것처럼 보일지라도 주님 앞에서는 가장 초라할 수 있고, 인간의 눈에는 가장 보잘 것없는 일을 한 것처럼 보일지라도 주님 앞에서는 어느 무엇보다도 큰일일 수 있습니다. 그러니 봉사하는 마음은 무엇보다도 한 데나리온에 감사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 이상으로 자신이 한 일에 가치를 부여하는 것은 주님의 일이 아니라 자신의 일을 한 것이 됩니다.
☆☆☆
임금이 궁중의 화가에게 물었습니다. “가장 그리기 어려운 것이 무엇이냐?” “개와 말입니다.” “그렇다면 가장 그리기 쉬운 것은 무엇이냐?” “귀신입니다.” 뜻밖의 대답에 이유를 묻자, 화가가 답했습니다. “개와 말은 사람들이 너무 잘 알기에 그리기가 어렵습니다. 하지만 귀신의 모습은 잘 모르기에 그리기가 쉽습니다.”
개와 말은 흔한 동물이라 볼 기회가 많습니다. 화가가 아무리 잘 그려도 비슷할 뿐입니다. 그러기에 사람들은 쉽게 시비를 겁니다. 하지만 귀신은 직접 볼 수 없기에 화가가 대충 그려도 사람들은 시비를 걸지 못합니다.
포도밭 일꾼들은 주인에게 불평합니다. “맨 나중에 온 저자들은 한 시간만 일했는데도, 뙤약볕 아래에서 온종일 고생한 우리와 똑같이 대우하시는군요.” 불평하는 사람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을 기준’으로 생각했습니다. ‘한 데나리온’을 약속한 주인을 기준으로 삼지 않았습니다.
자기를 기준으로 보면 많은 것이 못마땅합니다. 그러기에 자신을 ‘객관화하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자신을 주관화하면, 언제나 ‘나만 고생하고’ ‘나만 억울한 것’ 같습니다. 살면서 너무 따지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보다 ‘우리의 삶’을 더 잘 알고 계십니다.
☆☆☆
라일락 꽃 속에 파묻힌 꿀벌은 정신이 없었습니다. 이윽고 원을 그리며 날다가 꿀벌은 혼자 중얼거렸습니다. “역시 꽃 중의 꽃은 라일락이야. 가슴이 떨리도록 향기롭단 말이야.” 이 말을 듣고 있던 나비가 말했습니다.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저 장미꽃을 두고 그런 말을 하다니! 그리고 저 들국화는 어떻고. 꿀벌아, 너는 정말 무얼 몰라도 너무 모르는구나.”
“아니야. 라일락이 최고란 말이야.” 꿀벌은 결코 지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도대체 라일락이 무어 그리 대단하다고 그러는 거야. 차라리 채송화가 더 낫겠다.” 나비의 이 말에 꿀벌은 속이 상해 입을 다물었습니다. 기고만장해진 나비가 꿀벌을 재촉하였습니다. “왜 아무 말도 못하니?”
“그렇게 어처구니없는 말을 하는데 무슨 말을 더 하겠니?” 꿀벌이 말을 이었습니다. “나비야, 꽃은 겉모양만 보고 판단해서는 안 돼. 라일락은 그윽한 향기를 만들어 내지만 잎을 씹어 보면 얼마나 쓴지 몰라. 쓴맛은 자신에게 남기고 향기는 남에게 주는 아름다운 꽃이 라일락이야.”
이 라일락의 우화는 우리 신앙인의 자세를 되새기게 합니다. 거름을 잘 준 화초가 꽃도 건강하고 열매도 많이 맺는 법입니다. 신앙생활의 거름은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끊임없는 기도와 선행입니다. 이는 또한 얼마나 많이 했는지가 아니라, 정성과 열정을 얼마나 기울였는지가 더 중요합니다.

법대로 할까요?
-윤원진 신부-
예비신자 교리를 하다보면 입교식을 마치고도 한참 후에 교리반에 들어오려는
이들이 있습니다. 우리 성당은 1년 동안 교리를 하는데, 세례식을 2-3개월
앞두고 교리를 배우겠다고 찾아오면 어떻게 결정할지 참으로 혼란스럽기만
합니다. 법대로 따져서 안 된다고 거절할까, 내년에도 기회가 있을 것이니
기다렸다가 신청하라고 할까, 일찍 교리를 배우기 시작한 다른 예비신자와의
형평성을 따져서 당신들에게만 혜택을 줄 수 없다고 말해줄까 …. 그러나
복음에 따르면 예수님은 그러한 사람들도 받아들여 주셨습니다. 그분의 ‘불쌍히
여기는 정신’은 어떠한 법보다도 앞선 모양입니다. 형평성과 공정함 앞에서
복음은 모호한 기준을 제시합니다. 이럴 때에 법과 복음은 서로 다른 듯이
보입니다. 다만 한 가지 알 수 있는 것은 그분이 ‘모든 사람을 한 가지
기준으로만 판단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배려함’, 곧 ‘모든 사람은 저마다
다르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은 저마다 각기 다른 대우를 받아야 한다’는 원칙이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사랑이 아닐까 하고 잠시 생각해봅니다. 그리고
그분께서도 나에게 ‘법대로’ 하시면, 과연 살아남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몹시 두려워집니다. 다만 나에게도 “한 데나리온”이 주어지기를
기도할 뿐입니다.


하느님의 선하심
- 안소근 수녀 -
“꼴찌가 첫째 되고 첫째가 꼴찌 된다.”는 말씀을 자신에게 적용시킬 때는 감사한 마음으로 기쁘게 듣습니다. 그러나 꼴찌라고 생각했던 다른 사람이 첫째가 될 때는 어떻겠습니까? 오늘 복음의 하느님 모습은 인간적인 논리를 넘어섭니다. 어떤 사람이 하느님의 뜻에 따라 올바로 살지 않을 때, 우리는 흔히 그가 언젠가는 그 갚음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느님께서 모든 사람의 구원을 바라신다는 것, 그에게도 한 데나리온을, 곧 구원을 주고자 하신다는 것은 쉽게 잊고 맙니다. “내가 후하다고 해서 시기하는 것이오?”라는 구절을, 200주년 성경에서는 “내가 선하다고 해서 당신의 눈길이 사나워집니까?”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선하시기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고자 하시는데, 선하지 못한 우리가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에 눈길이 악해진다는 것입니다. 복음 곳곳에서 예수님은, 다른 사람을 판단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다른 사람의 부족함을 받아주고 인내하는 것만이 아니라 하느님의 선하심과 너그러우심을 받아들이라는 의미입니다.
꼴찌였던 사람에게 선하신 하느님께서 구원을 베푸시면, 그는 첫째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첫째였던 사람이 이런 하느님의 선하심을 받아들이지 못하여 그의 눈길이 악해진다면, 그는 꼴찌가 될 것입니다. 우리 자신이,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따랐던 세리와 창녀들을 무시했던 바리사이들과 똑같아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성실하게 살아가고자 노력하는 사람에게 이것은 예리한 칼과 같은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설명할 수는 있지만 실제 삶을 돌아보면 부끄러울 뿐입니다. 그러나 복음을 우리의 삶과 타협시키고 예수님의 말씀을 바꾸어 놓을 수는 없습니다. 바뀌어야 하는 것은 우리의 삶입니다

하느님의 자비는
-임문철 신부-
예전에 ‘부끄러운 구원’이라는 말이 있었습니다. 세상에 사는 동안 이런 저런
죄를 짓고 죽기 전에 세례를 받아 구원받은 이들을 일컫는 말입니다.
요즘은 이런 표현을 찾아보기 힘듭니다. 그러나 여전히 구원에도 등급이 있어서 순교자들처럼 영광스런 구원이 있고, 간신히 구원받는 사람들은 당연히
부끄러운 줄 알아야 한다는 경향이 남아 있는 것 같습니다.
몇 년 전에 가족 중에 망인 혼자만 세례를 못 받고 죽었는데, 그 유족들이
성당묘지에 묻기를 원할 때 허락해도 되는가 하는 문제가 사제회의에서 논의된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묘지이기에 교회에 속하지 않은 비신자는
교회묘지에 묻힐 수 없다는 결론이 나왔습니다. ‘익명의 그리스도인’은
구원의 가능성에 관한 신학적 이론일뿐 정작 현실에서는 적용되지 않는 것
같아서 참 안타까웠습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비상세례(대세)도 허락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까지 나왔습니다. 믿음도 없이 교회묘지에 묻히려고 비상세례를
받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설령 그것이 부끄러운 구원일 수 있다
하더라도, 세상을 떠난 이나 그를 사랑하는 이들에게는 하느님 자비의 승리요
영광스런 구원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투덜대는 마음이었는데
-한명수 시인-
일을 하다 보면 서로가 마음 상하는 일이 생기곤 한다. 더군다나 구성원 개개인의 능력 차에서 오는 소외감은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회의를 하면서 제안하는 여러 일 중에는 구성원들이 해결할 수 없는 일들도 많다. 하지만 제안자는 쉽게 자기 뜻을 굽히지 않는다. 할 수 없는 일을 자꾸만 요구하니 난감할 수밖에 없다.
아주 오래전, 여름성경학교를 준비하며 회의를 할 때였다. 그때 주위 사람들은 내가 아이디어가 많고 주일학교 경험도 있으니 일을 잘할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었다. 그런 기대감에 부응이라도 하려는 듯이 매번 회의 때마다 기발한 제안을 하곤 했는데, 그때마다 “그 일은 한명수 선생님이 하시면 딱 제격인데요.”라고 했다. 제안만 하면 좋은 생각이라고 하면서도 아무도 맡지 않으려고 해 역정을 내기도 했다. 그렇게 며칠이 흐른 뒤 다시 모였다. 며칠 전과 비슷한 상황에서 교사 회장이 “앞으로 무슨 일을 결정할 때 약한 자의 편에서 생각하고 결정을 하면 어떻겠습니까?”라는 제안을 하였다. 순간 나는 형언할 수 없는 부끄러움을 느꼈다. 나는 그들에게 언제나 어려움을 안겨주었고, 새벽부터 일을 하고도 한 데나리온밖에 받지 못했다며 투덜대는 사람과 같은 마음이었던 것이다.
소외된 사람들에 대한 하느님의 따뜻한 배려를 제안했던 그 교사 회장은 주위의 기대감을 살 만큼의 아이디어는 없었지만, 그 모든 것을 포용하는 하느님의 마음을 지녔던 것이다. 지금도 그의 낮은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내 후한 처사가 비위에 거슬린단 말이오?
-강영구신부-
‘사촌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웃과 형제들이 잘 되는 꼴을 보아주지 못하는 심술을 한 마디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사촌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픈 사람은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에도 배가 아픕니다.
공평과 정의의 잣대를 고집하는 사람은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마저 불평하게 됩니다.
아침 일찍 포도원에 나와서 일한 사람은 해거름에 나와서 일한 동료가 주인으로부터 자기와 같은 대우를 받는 것을 기뻐하고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늘나라는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감사하며 함께 누리는 것입니다.
혼자서 많이 차지하고 누리는 곳에는 하늘나라가 없습니다.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루가 16,19-31)를 잘 아시지요.
부자가 한 방울의 물이 아쉬운 지옥(地獄)에 떨어진 것은 남의 것을 훔치거나 빼앗거나 사람을 죽이거나 악한 일을 해서가 아닙니다.
그는 비단으로 몸을 감싸고 호의호식하며 자기 삶을 즐길 줄만 알았지,
대문간에 누워있는 거지 라자로의 불행과 고통을 철저히 외면했습니다.
거기에 지옥(地獄)이 있었고 지옥을 살았던 부자는 지옥으로 떨어졌습니다.
하늘나라(天國)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은 분명합니다.
하늘나라는 대자대비(大慈大悲)하신 하느님께서 당신의 주권(主權)을 행사하시어 모든 사람들에게 당신의 자비를 베푸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대자비(大慈悲)를 기뻐하고 감사하는 사람이 하늘나라를 누릴 수 있습니다.
하늘나라는 정의가 꽃피는 나라가 아니라,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가 꽃피는 나라입니다.(一明)
정진
-전삼용신부-
어제 청년들을 만났는데 한 자매가 “저는 사람들을 죽이고 평생 못된 짓만 하다가 죽기 전에 회개해서 구원받는 것을 이해할 수 없어요. 생각으로는 이해 가지만 정말 내 가족에게 그런 짓을 한 사람이라면 용서할 수 없을 것 같아요.”라고 말했습니다.
저도 한 사형수를 기억합니다. 제 대자 중 한 명의 형님이었는데 청부 살인을 하고 사형을 당하였습니다. 물론 사형 선고를 받고 하느님을 알게 되어 믿는 마음으로 누구보다도 영웅적으로 죽음을 맞이하였습니다.
이도 이해가 가는 것이 평생 그리스도의 규범 안에서 착하게만 살다가 힘겹게 구원을 받는가하면 어떤 사람들은 마지막 순간에 회개하여 극적인 구원을 받습니다. 구원을 받는다는 것에 있어서는 오래 된 신자건 얼마 안 된 신자건 같은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이 질문을 한 자매는 그러나 현재 냉담중입니다. 제가 있을 때는 주일학교 교감까지 하면서 매일 성당에서 살다시피 한 사람이었습니다. 어느 새 냉담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구원은 과거에 무엇을 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지금 현재 나의 모습이 구원받을 상태에 있는가가 더 중요하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산부인과 의사를 하시며 평생 낙태와 성감별 등을 하시며 살아오신 70이 훨씬 넘어 회개하신 한 할머니의 이야기를 해 주었습니다. 그 할머니는 생이 얼마 남지 않은 인생의 황혼에 세례를 받았지만 세례 받은 지 1년 반 만에 신구약 필사를 하였고 매일 기도로 회개의 삶을 살고 계십니다. 비록 질문을 했던 그 자매가 성당에서 봉사도 훨씬 많이 하였지만 지금 당장의 모습으로는 구원받기에 더 합당한 사람은 그 할머니나 제가 알던 사형수인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선 예수님께서 이렇게 벌어질 상황에 대해 미리 아시고 비유를 통해서 먼저 하느님을 알게 된 이들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첫째가 꼴찌가 될 수 있고 꼴찌가 첫째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하루 종일 일한 사람은 포도원 주인에게 오히려 꾸지람까지 듣고 한 시간 일한 사람은 제일 먼저 합당한 임금을 받습니다. 그렇다면 즐길 것 다 즐기다가 늦게 세례를 받고 마지막에 불타는 마음으로 잠깐 살다가 죽는 것이 더 좋은 일일까요?
하루 종일 뙤약볕에서 일한 사람들은 한 시간 일한 사람들을 질투합니다. 왜냐하면 자신들은 너무나 고생하였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정말 하느님을 따르는 것이 고생일까요? 세상눈으론 그렇게 보일 수도 있습니다. 매일 미사하고 기도하고 쉽게 넘겨버릴 잘못도 양심상 하지 못하고 살아야 하는 것이 힘들어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정작 더 힘든 사람들은 하느님을 모르고 죄를 지으면서 사는 사람들입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행복하라고 불러주셨습니다. 만약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 행복이었다면 오히려 늦게 하느님을 알게 된 이들을 안타까운 눈으로 쳐다보아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느님을 모르고 온갖 고생을 하다가 늦게나마 참 행복을 알게 된 이들이기 때문입니다.
과연 남들은 일하고 있는데 일을 시켜주는 사람이 없어서 포도원 밖에서 하루 종일 빈둥대는 것이 쉬운 일일까요? 이들은 일용직이고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오늘 돈을 벌어오지 않으면 내일 아이들이 굶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 걱정 속에서 일을 못하고 포도원 밖에서 안절부절 못하며 하루를 보내는 것이 더 쉬울까요, 아니면 포도원 안에서 비록 고생은 하지만 내일에 대한 걱정 없이 일하는 것이 더 행복할까요? 그러나 오늘 포도원에서 일하던 사람들은 마음이 악하여 행복으로 불러주셨음에도 그 행복을 느끼지 못하고 고생이라고 생각하며 살았던 사람들이었던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불러주셨더라도 그분의 참 뜻을 깨닫고 주님 안에서 자신의 행복과 감사를 늘려가지 않는다면 언젠가는 우리도 이런 똑같은 사람들이 될 수도 있습니다.
제가 아일랜드에서 영어 학원을 다닐 때 제가 있던 반에서 그래도 제가 다른 한국 사람들보다 영어를 잘 하는 편이었습니다. 특별히 외국 말을 오래 한 저로서는 다른 한국 사람들보다는 영어단어도 더 많이 알고 말도 더 잘 만들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뻐기고 있을 때 한 한국 자매가 들어왔습니다. 영어를 완벽하게 하였습니다. 알고 보니 한국에서 영어 교사를 하는데 잠깐 발음을 배우러 온 것이었습니다.
우리를 먼저 불러주신 것은 우리가 완벽해서가 아닙니다. 먼저 불러주었으니 빨리 정진하라는 뜻입니다. 늦게 불러주신 사람들은 그들이 덜 완전해서가 아닙니다. 하느님은 하느님 나름대로 그들을 훈련시키고 계셨던 것입니다.
첫째가 꼴찌가 되는 일이 없도록 믿고 구원받는 것에 만족하지 말고 완전해 질 수 있도록 오늘을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정진’합시다.
사랑을 담아서 하라
-반영억라파엘신부-
하느님께서 주신 본디부터 가지고 있는 애정이나 남을 동정하는 마음을 인정이라고 합니다. 사람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기대고 또한 나누며 살아갑니다. 그 안에서 어떤 사람은 따뜻한 마음을 지녀서 인정미 넘치는 사람으로 부르고 어떤 사람은 야박하여 인정머리가 없다는 소리를 듣게 됩니다. 자기도 모르게 세상을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이 바로 몰인정한 사람입니다. 몰인정한 사람은 세상에는 좋은 것이 많은데 좋지 않은 것을 더 많이 얘기하고 그것으로 마음에 화를 담기도 합니다. 물론 더 좋은 것을 만들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자꾸만 부정적으로 생각하여 봐야 될 것을 올바로 보지 못하게 됩니다. 자기는 잘하고 있다고 확신을 하고 있는데 남들이 보면 전혀 아닌 경우가 있습니다. 또한 잘한다고 하는 것이 자기모순에 빠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매사를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인정 있는 사람이 되어야하겠습니다.
오늘 복음은 포도원 일꾼과 품삯에 대한 비유입니다. 9시, 그리고 12시와 오후 3시, 그리고 오후 5시쯤에 일꾼을 자기 포도밭으로 보냈습니다. 그런데 그 일꾼들의 품삯을 한 데나리온으로 하였습니다. 주인이 품삯을 계산하는데 5시에 온 사람을 먼저 해 주었습니다. 그랬더니 일찍 와서 일하던 사람들은 약속과 다른 기대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기대가 무너지자 실망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불평을 늘어놓았습니다. “맨 나중에 온 저자들은 한 시간만 일했는데도, 뙤약볕 아래에서 온 종일 고생한 우리와 똑같이 대우하시는군요.”
주인이 약속을 어긴 것도 아닌데 상대적인 박탈감으로 힘들어 하는 모습입니다. 그는 정의를 강조하는 모습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생각을 바꿔보면 어떨까요? 어렵고 힘든 사람이 그 시간에 일해서 당당하게 그 만큼을 벌었다고 한다면 그는 남에게 손을 벌려 동정을 받지 않았기에 자존심을 지킬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절박함에 처한 사람이 그런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면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이겠습니까? 정의보다는 사랑이 먼저 입니다. 사랑은 정의를 포용하지만 정의는 결코 사랑을 포용할 수 없습니다. 사실 불평불만도 습관이 됩니다. 그러니 자기에게 주어진 것에서 만족하고 더 나은 내일을 위해서 노력할 것이지 이런저런 이유를 들어 불평을 할 것이 아닙니다. 주인이 후하다고 해서 시기할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비에 감사하고 나도 크게 베풀 줄 아는 인정을 지녀야 하는 것입니다.
일을 많이 하고 적게 한 것이 문제가 아니라 어떤 마음으로 어떤 정성을 쏟았느냐가 중요합니다. ‘얼마나’가 아니라 ‘어떻게’가 먼저 입니다. 그러므로 매사를 긍정으로 생각하고 정성을 쏟았으면 좋겠습니다. 하늘나라의 관점은 정말, 일의 성과가 아니라 그 사람의 마음을 봅니다. 그러므로 마음을 잘 가꾸어야겠습니다. 아무리 많은 일을 하였어도 사랑이 담기지 않으면 적게 일한 것이고, 적게 일한 것처럼 보여도 사랑이 담기면 많은 일을 한 것입니다. 그러니 무슨 일을 하던지 사랑을 담아서 하기 바랍니다. “네 눈이 성하지 못하면 온몸도 어두울 것이다. 그러니 네 안에 있는 빛이 어둠이면 그 어둠이 얼마나 짙겠느냐?”(마태6,23)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