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8월 19일 연중 제20주간 금요일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님이신 너희 하느님을 사랑하여라.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여라.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다.
둘째도 이와 같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마태오 22,34-40)
"You shall love the Lord, your God,
with all your heart,
with all your soul,
and with all your mind.
This is the greatest and the first commandment.
The second is like it:
You shall love your neighbor as yourself.

말씀의 초대
룻은 ‘모압’ 여자로 이방인이었다. 하지만 이스라엘의 모범적인 여인으로 남아 있다. 시어머니 ‘나오미’를 극진히 섬겼기 때문이다. 나오미의 가족은 베들레헴 출신이다. 어느 해, 심한 가뭄이 들어 요압 지방에 살러 갔다가, 룻을 며느리로 맞이했다. 모든 것은 주님의 섭리였다(제1독서). 율법 교사는 예수님께 질문한다. 율법에서 가장 큰 계명이 무엇인지 물은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마음과 목숨과 정신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는 일’이라고 답하신다. 그리고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 두 번째 계명이라고 하신다(복음).
☆☆☆
오늘의 묵상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자신의 삶은 ‘미워하고 있다면’ 복음 정신이 아닙니다. 남에게는 봉사하면서 자신에게는 별다른 투자를 하지 않는다면 기쁨의 헌신이 될 수 없습니다. 먼저 자신의 삶에 애정을 가져야 합니다. 사랑받고 있음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래야 주어진 것에 감사할 수 있습니다. 진정한 사랑의 생활도 가능해집니다.
예수님 당시 유다교의 율법은 ‘613조항’이었습니다. 복음의 율법 교사는 그 중에서 어떤 것이 가장 큰 계명이냐고 물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음과 목숨과 정신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라고 답하십니다. 이른바 ‘사랑의 이중 계명’입니다.
바리사이들이 이러한 사실을 몰랐을 리 없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율법 조항에 묶여 전체를 보지 못했습니다. 단순했던 율법 정신을 복잡하게 만든 것이지요. 그러기에 예수님의 비판을 받았습니다. 사랑은 ‘베푸는 행위’입니다. 많이 받으면 많이 베풀 수 있습니다. 애정을 많이 받고 자란 아이들이 ‘어른이 되어서도’ 넉넉한 애정의 관계를 만들며 살아갑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을 자주 기억해야 합니다. 그분께서 도와주셨던 사건들입니다. 주님의 은혜를 잊지 않으면 ‘사람을 사랑하는 일’에 용기를 가질 수 있습니다. 사랑은 따뜻함입니다. 차가운 현실에서 훈훈함을 느끼게 하는 ‘힘’입니다. 사람을 사랑해야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 ‘하느님은 말씀’이라 했습니다. 그분의 음성은 마음으로만 들을 수 있습니다. 성경 말씀도 마음으로 새겨들으면 더욱 살아 있는 목소리로 바뀝니다. 물소리도 바람 소리도 어린이의 목소리도 마음으로 들으면 주님의 음성으로 들립니다. ☆☆☆ 영화감독 스티븐 스필버그는 영화 속에서 화석이 된 모기의 피에서 채취한 공룡의 유전자로 ‘쥬라기 공원’을 만들어 냈습니다. 사람들은 그의 놀라운 재치에 감탄합니다. 사실 하느님께서는 이 영화감독보다 훨씬 능력이 많으신 분이십니다. 오늘 성경 말씀이 전하듯이, 마른 뼈에 살을 붙여 다시 살리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한마디 말씀으로 빛과 세상을 창조하신 분이십니다. 그 창조주께서 가장 바라시는 것은 창조물과 당신의 사랑을 나누는 일입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다. 둘째도 이와 같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계명을 이렇게 단순화하셨습니다. 정성으로 주님을 섬기고 이웃을 섬기며 살라는 말씀이 아닐는지요.
실연한 까투리가 있었습니다. 까투리는 솔밭에 누워 며칠을 앓습니다. 어느 날 목을 축이려 냇가로 내려갑니다. 거기서 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무심코 바라봅니다. 퀭한 눈과 부석부석한 자신의 얼굴을 봅니다. 까투리는 놀라 외치지요. “이게 뭐야? 이 꼴이 내 모습이란 말인가? 남은 탓하면서도 내가 나한테 저지른 잘못은 모르고 있다니.” 까투리는 소리를 지르며 하늘로 날아갑니다. 정채봉의 우화집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자신의 삶은 미워하고 있다면 복음 정신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에게는 봉사하면서 자신에게는 아무런 투자도 하지 않고 있다면 기쁜 헌신이 될 수 없습니다. 먼저 자신의 삶에 애정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야 주어진 모든 것에 감사할 수 있습니다. 진정한 사랑의 생활이 가능해집니다.
그리고 모든 창조물이 서로 사랑하는 일입니다. 사실 사랑은 생명이 태어나는 곳입니다. 그리고 모든 생명이 도달해야 할 목표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랑 안에서, 특히 하느님의 영원한 사랑 안에서 죽음은 파멸되고 생명이 되살아납니다.
주님을 사랑합니다
-반영억라파엘신부-
하느님은 사랑 자체이시고(1요한4,16) 우리가 깨끗하지 못해도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하느님은 사랑 자체이시기에 사랑하실 수 밖에 없으십니다. 따라서 “선한 사람에게나 악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햇빛을 주시고 옳은 사람에게나 옳지 못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려주십니다”(마태5,45).
하느님의 사랑에는 한계가 없고 그 깊이 또한 헤아릴 길이 없습니다. 그래서 십자가의 성 요한은 “하느님께 대해 어떤 특별한 것을 알려 하거나 느끼고 싶어 하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가득찬 마음을 지닌 채 주님을 향하는 것으로 만족하시오! 사랑에 불타는 영혼은 조금도 피로하지 않고 또 남을 피로하게 만들지도 않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사막의 은수자 까롤로 까레또도 “이해하려 들지 마시오, 결코 성공하지 못할 것입니다. 알려들지 마십시오. 결코 알지 못할 것입니다. 다만 사랑하기를 힘쓰십시오. 사랑 안에서, 사랑 안에서만 버림받은 예수님과 이 세상에서 버림받은 모든 사람들에게 다가갈 수 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계명은 사랑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을 사랑한다면 그 사랑이 구체적인 이웃 사랑으로 드러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자기의 형제를 미워하는 사람은 거짓말쟁이입니다. 눈에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가 어떻게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의 형제도 사랑해야 한다는 이 계명을 우리는 그리스도에게서 받았습니다.”(1요한4,20-21).
사랑은 모든 것의 근본이고 우리가 행하는 모든 일에 가치를 부여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을 회피하지 마십시오. 사랑은 가까이 다가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랑을 산다는 것은 아무런 내색도 없이 어떤 요구도 없이 그저 베푼다는 의미입니다.”(리지외의 성녀 데레사)“사랑은 이유를 묻지 않으며 이익을 따지지 않습니다. 사랑이란 존재에 있습니다. 존재하기 때문에 사랑하고 사랑하기 때문에 존재합니다.”(성 베르나르도) 그러므로 “사랑하십시오, 그리고 당신이 원하는 바를 하십시오.”(성 아우구스띠노) 사랑합니다. 사랑합니다. 당신을 사랑합니다. 주님을 사랑합니다.
하느님 사랑
- 한은주-
“예수님이 사마리아 여인에게 하신 말씀은 거짓말이에요. 그분이 얼마나 좋으신지 맛보면 맛볼수록 더 목이 마르거든요.” 올해 은경축을 맞으신 본당 신부님께서 이 말씀을 하실 때는, 어린아이처럼 천진하면서도 막 연애를 시작한 청년마냥 들뜬 표정이기도 했다. “아, 나는 언제 저와 같은 고백을 할 수 있으려나.” 마냥 부러웠다. 예수님은 ‘하느님 사랑’이 모든 것에 앞선 첫째 계명이라고 하셨다. 하지만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가? 어떻게 해야 신부님의 저 달디단 고백이 내 입에서도 터져나올 수 있을까? 너무 어려웠다.
이번에는 제대로 하느님을 붙들자. 마음속에서 그분을 알고 싶은 욕구가 커졌다. 주변의 어른들께 조언을 청하고 영성 서적들을 읽었다. 평일미사에 참여하기 시작했고 규칙적으로 아침저녁 기도 시간을 가졌다. 처음에는 무척 힘이 들었다. 나름 바쁘다는 핑계거리가 있었으니까. 그러던 것이 하나둘 내 삶에 작은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웃음이 거의 메말랐던 내 입가에 웃음이 떠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신부님이 또 날 부추기셨다. 성경의 첫 장부터 마지막 장까지 관통하는 주제는 “하느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에 대한 사랑 이야기입니다. 다른 건 다 몰라도 그것만 알아들으시면 돼요. 우리는 자꾸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는 유혹에 빠지지만 그냥 누리세요, 즐기세요.” 하느님이 나를 사랑하신다? 흔한 말씀이었다. 당신 아들은 날 위해 목숨까지 바치시지 않았는가. 그런데 그 사랑을 머리로는 알겠는데 어떻게 느낄 수 있을까?
이 세상에서 ‘사랑’에 관한한 어머니들은 단연 전문가 아닐까. 나는 어머니께 그 사랑에 대해 여쭈었다. “하느님을 알게 해주신 것, 믿게 해주신 것 그게 다 날 사랑하셔서가 아니야? 하느님이 창조하신 모든 만물을 소중히 여기는 것이 하느님 사랑하는 방법이겠지. 자연이나 사람이나 모두를.” 그 대답이 얼마나 즉각적으로 나오는지 나는 놀랐다. 엄마는 몸과 마음으로 사랑을 느끼고 사랑을 하고 계셨다. 그 사랑은 잦은 웃음과 낮은 성가의 읊조림과 너그러움으로 품어져 나온다. 사랑을 받아본 사람이 사랑할 줄 안다는 진리가 여기에 있구나.
나는 요즘 걸어서 평일미사에 간다. 처음에는 운동 겸 시작한 길이었는데 요즘은 그 길을 사랑하게 되었다. 왕복 한 시간 남짓의 논두렁 길. 어느덧 나는 예수님과의 데이트 시간을 더할 나위 없이 즐기게 된 것이다. 하늘과 들꽃과 풀벌레, 그리고 쑥쑥 커가는 벼들과 소나무 숲. 모든 게 우리 둘의 만남을 위해 완벽하다. 볼수록 더 보고 싶은 당신, 고맙습니다. 요즘은 그저 그분 생각하면 웃음이 나오고 기쁘다.

사랑
- 박대남 신부-
‘사랑.’ 가장 쉬울 것 같은 하느님의 명령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사랑의
가장 큰 원칙은 ‘보이는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은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밖에 없고,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보이는 사람을 사랑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랑의 가장 큰 원칙을 보여주시는 예수님의
이 원칙은 머리로 이해되고, 머리로 받아들여지는 쉬운 원칙처럼 보입니다.
이 원칙을 온몸으로, 그것도 십자가로 보여주신 예수님. 우리가 이 원칙을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은 과연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십자가의 예수님 말씀을
실현해내는 것입니다. 곧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면서 보여주셨던
아버지 하느님께 대한 순명과 사랑, 그리고 우리를 대신해서 지셨던 십자가의
인간사랑, 이 두 가지를 몸소 보여주신 그분의 사랑을 우리 삶 안에서
실현해내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에게 달려 있습니다. 과연 하느님을
사랑하십니까? 하느님을 사랑한다면 지금 나는 마음속에 누군가를
미워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한다면 오늘도 누군가의 말에
특히 소외되고 아픈 이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것입니다. 그렇게 이웃을
사랑한다면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은 하느님께 찬미 드리는 일이 될 것입니다.
사람을 사랑한다면 하느님께서도 사랑하는 그 사람을 사랑하실 것입니다.

하느님 사랑 먼저
-전삼용신부-
아일랜드에서 영어를 배우고 있을 때, 수업시간에 자신을 행복하게 하는 조건들을 중요한 순으로 쓰라고 했습니다. 저와 같은 그룹 학생들은 언제나 그렇듯이 사랑, 가족, 건강, 직업 등을 나열했습니다.
저는 첫 번째로 중요한 것이 ‘믿음’이라고 썼습니다. 그랬더니 한 폴란드 여자가 자신은 그것에 동의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 학생은 “행복은 사랑이라고 생각을 하는데 신을 믿는 것과 사랑은 서로 관계가 없다.”고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제가 신을 믿으라고 강요한 것도 아니었는데 왜 그렇게 흥분하나 모르겠지만 그래도 ‘믿음이 없는 사랑은 있을 수 없다.’고 설명해 주려 노력하였습니다. 그래도 팔짱을 굳게 끼고 자신은 결코 믿음이 행복의 조건임에 동의할 수 없다고 했고, 한 프랑스 여학생도 자신도 신을 안 믿는다고 거들었습니다. 반 아이들 중 행복의 조건으로 믿음이나 종교를 쓴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청년들이 신앙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은 알았지만 반의 모든 학생이 종교에 대해 그렇게 반감을 가지고 있는 것을 보고 조금은 놀랐습니다.
그들은 종교가 삶을 억압하여 사랑을 가로막고 행복을 가로막는 세상에서 빨리 없어져야 하는 것으로 여기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깨닫지 못하는 것이 이것입니다.
즉, 하느님을 먼저 사랑하지 않으면 사람을 사랑하는 것도 불가능해진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믿고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여러분을 사랑한다고 하면 믿지 마십시오. 아니면 그 사람에게 먼저 하느님을 향한 사랑이 무엇인지 가르치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그가 말하는 사랑이라고 하는 것이 곧 사랑이 아니었음이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얼마 전 한 자매가 저에게 생명의 은인이라고 하면서 감사의 말을 전했습니다.
그 자매는 2년 동안 남편이 외도하는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그 사실을 알고는 그 충격으로 암까지 걸려 고생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너무 힘들어서 자신의 딸과 함께 아파트에서 뛰어내리려고도 생각했습니다.
그 때 저에게 전화가 왔었는데 저는 이야기를 들어주고 하느님께 의탁하라고 밖에는 해 줄 말이 없었습니다. 남편의 외도로 아내가 암이 걸려 세상을 먼저 뜨는 경우도 종종 보았기 때문에 걱정이 되었고 기도를 해 주었습니다.
그 자매는 정말 신앙의 힘으로 그 때를 잘 극복했습니다. 지금은 몸도 거의 정상으로 돌아왔고 딸과 함께 나름대로 즐겁게 살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하느님께 대한 사랑을 첫 번째로, 두 번째로는 이웃에 대한 사랑을 말씀하십니다.
자살은 하느님께서 주신 생명을 스스로 버리는 것이니 자신도, 하느님도 사랑하지 않는 것이고, 만약 딸과 함께 죽었다면 자신의 목숨뿐만 아니라 이웃의 생명까지 끊는 것이므로 두 번 살인을 하게 될 뻔 했던 것입니다.
만약 위의 자매가 하느님께 대한 믿음이 없었다면 이를 극복하는 것이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좀 비약해서 말한다면, 딸은 엄마의 믿음으로 산 것입니다. 엄마의 믿음이 딸까지 살렸으니 하느님께 대한 사랑이 이웃사랑으로 실천 된 것입니다. 따라서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서라도 먼저 하느님께 대한 사랑이 있어야하는 것입니다.
성모님은 예수님과 마찬가지로 요즘 젊은 사람들이 추구하는 행복의 조건들은 하나도 지니고 있지 못했습니다. 가난했고 과부였고 외아들마저 죄인으로 굴욕의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성모님을 세상에 살았던 이들 중 가장 행복한 분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그분도 모든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행복을 추구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다만 하느님을 믿고 사랑하기로 하셨고 그 믿음 때문에 당신의 아들을 못 박는 이들도 용서하고 사랑하셨습니다. 사람을 먼저 사랑하셔서 용서하실 수 있었던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사랑하기에, 당신 아들도 용서하셨기에 당신도 용서하신 것입니다.
남편을, 혹은 아내를, 가족을, 이웃을 더 사랑하기 위해서 먼저 하느님을 더 사랑하도록 노력합시다. 신앙이 없이는 내 자신도, 이웃도 사랑하는 것이 불가능하고 그래서 행복해지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힘겨운 날>
-양승국신부-
오늘 오후 한 아이를 "큰집"에서 데려오는 차안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오랜만에 쐬는 바깥공기에 기분이 좋아진 아이는 "마치도 길고도 깜깜한 터널을 막 빠져 나온 느낌이다"고 말했습니다. 그간 아이의 고생이 손에 잡힐 듯 했습니다.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홀로 이곳 저곳을 전전해서 그런지 아이는 자기표현이 뚜렷했습니다. 제가 "적군"이 아님을 확인한 아이는 자신의 지난 스토리를 스스럼없이 아주 소상하게 들려주었는데...참으로 눈물 없이 들을 수 없는 이야기였습니다.
그 아이의 기막힌 사연을 들으면서 진흙탕에 빠진 사람에게는 그를 건져줄 다른 사람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 세상은 아이 홀로 헤쳐나가기 어려운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혼자 발버둥쳐도 진흙탕에 빠진 사람은 더 깊은 늪으로 빠져들기 마련입니다.
세상을 살다 보면 혼자서 할 수 있는 일과 그렇지 못한 일이 있더라구요. 알아서 뭍으로 올라오겠지 생각하고 방치해두면, 더 깊은 늪 속으로 빠져들어 결국은 헤어날 수 없게 된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한 하루였습니다.
힘겨운 날 어깨를 기댈 수 있는 그 누군가가 이 세상에 단 한사람도 없다는 것처럼 슬픈 일은 다시 또 없습니다. 그런데 때로 이 세상 어딜 가도 의지가지 하나 없이 홀로 비틀비틀 걸어가는 아이들을 만납니다. 너무도 가엾어서 할 말을 잃고 맙니다.
결코 길지 않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우리는 서로에게 이런 고백을 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이렇게 힘겨운 날, 이 세상에 그나마 당신이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요? 계셔줘서 정말 고맙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사랑에 대해서 말씀하시는데, 사랑은 그리 거창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힘겨운 순간 함께 같이 길을 동행해주는 일, 깊은 좌절로 인해 일어설 힘조차 없을 때 다가와 손을 내밀어 주는 일, 그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고통이 눈물 되어 흘러내릴 때 조용히 어깨를 감싸 안아주고 눈물을 닦아주는 일, 그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돈보스코 성인의 교육학 안에 참으로 중요하며 효과적인 도구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친절한 사랑입니다. 돈보스코 성인에게 있어서 친절한 사랑이란 아이들의 영혼을 구하는데 있어서 가장 큰 전략적인 가치를 지닙니다. 친절한 사랑은 살레시오 정신 안에서 가장 특징적인 요소입니다.
친절한 사랑이란 잘 대해준다든지 공감해준다든지 상냥하게 대하는 그 이상의 태도입니다. 친절한 사랑이란 상대방의 무례함이나 부족함을 끊임없이 인내하는 덕 중의 덕입니다. 친절한 사랑은 상대방의 성장을 위해 기꺼이 한 알 썩는 밀알이 되고자 하는 바램의 외적 표현입니다. 친절한 사랑은 인격 전체의 투신을 요구하는 영웅적인 행위입니다. 친절한 사랑은 이웃에게 자기 자신을 전적으로 개방하고 이웃을 진정한 형제로 받아들이는 복음적 삶의 방식입니다.

사람, 사랑, 삶
-상지종신부-
어딘지 모르게 어감이 비슷하게 다가옵니다. 사람, 사랑, 삶이 같은 어원에서 나온 단어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사실 이 세 가지가 서로 떨어질 수 없습니다.
사람은 사랑함으로써 참된 삶을 살게 됩니다. 사랑이 없는 삶은 사람의 삶이 아니요, 사랑을 하지 못하는 사람은 참된 사람이 아닙니다.
이 당연한 진리를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알고 있는 것만큼 실천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사랑'이라는 말이 너무나도 흔해서 그런지는 모르지만 이제는 '사랑'이라는 말을 들어도 그저 그런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교회에 나오면 의례 듣게 되는 말이 '사랑하라'는 것 정도로 넘어가기도 합니다.
어떻게 하면 첫사랑의 순간처럼 '사랑'이라는 말을 들을 때에 가슴이 뜨거워질 수 있을까요? '사랑해' 라는 말이 그저 의례적인 인사 치례가 아니라, 진정으로 차가운 마음을 녹이고, 딱딱해진 가슴을 부드럽게 하는 감미로운 음성으로 전해질 수 있을까요?
사랑은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직접 몸과 마음으로 사랑함으로써 가능합니다. 참된 사랑은 입으로 전해지는 것이 아니라 온 몸과 마음으로 누군가에게 다가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참된 사랑에는 자신의 모든 것을 담아내기 마련입니다. 마음과 의지, 생명까지도 사랑하는 이에게 온전히 내어놓게 마련입니다.
이러한 사랑을 하기 위해서는 사랑을 전하려는 '나'와 내가 사랑을 전해주고자 원하는 '너'를 온전히 하나로 받아들이는 것, '너'를 또 하나의 '나'로 생각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사랑을 하기 위해서는 참된 일치와 화해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 사회는 우리가 하나되는 데에 너무나도 커다란 장벽을 수없이 쌓아놓고 있습니다. 돈, 지위, 권력, 지식 등, 여러가지 잣대로 사람을 갈라놓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장벽을 허물고 모든 이들과 어울리셨습니다. 그러기에 당시에 잘난 사람들, 사두가이파 사람들이나 바리사이파 사람들 그리고 율법학자들로부터 끊임없는 시기와 질투, 모함을 받으셨고 마침내 십자가를 지게 되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율법학자는 예수님께 시비를 걸고자 가장 큰 계명을 물어온 것입니다. 율법에 능통한 율법학자가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계명을 모를 리 만무합니다. 이들은 사랑이라는 계명을 알고 있되, 결코 사랑을 할 수 없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가난하고 무식한 형제 자매들을 자신의 이웃으로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 주위에도 많은 율법학자들이 있습니다. 또한 우리가 율법학자가 될 수도 있습니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사랑을 방해하는 온갖 유혹들이 있습니다. 그러기에 바로 지금이 예수님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일 때입니다. 바로 지금이 하느님과 이웃 사랑을 위하여 십자가 위해서 생명을 내어놓으신 예수님의 뒤를 따르고자 결단을 내려야 할 때입니다.
사랑은 보이지 않는 발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작은 사랑을 실천하면, 그 사랑은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이웃에게 전파되어 서로 서로에게 사랑 넘치는 세상을 만들 수 있을 것입니다. 2000년 전 예수님의 사랑이 지금 우리가 어울려 있는 교회라는 사랑의 공동체를 일구어낸 것처럼 말입니다. 이제 우리가 사랑을 지피는 작은 불씨가 되어 세상 속으로 나아가야 하겠습니다.
"세상을 이기는 승리의 길은 곧 우리의 믿음입니다."(1요한 5,4)

첫째가는 계명
-김광태 신부-
유다인들이 십계명을 근간으로 6백여 가지가 넘도록 율법 조항들을 세분화시킨 일을 너무 가볍게 비판해서는 안 됩니다. 삶의 모든 차원에서 극도의 경건함을 실현하려는 그들만큼 신앙의 열정을 지닌 민족도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들을 비판하신 까닭은 너무도 철저하게 율법을 준수하고 있지만, 그런 일들이 그 율법의 근본 바탕을 이루는 하느님과 인간을 사랑하는 일 안에서 균형 감각을 상실하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1945년 4월 9일, 개신교 신학자 본 회퍼는 히틀러 암살계획에 가담했다는 죄로 사형에 처해졌습니다. 목사요 신학자가 어떻게 십계명의 제5계명인 사람을 죽이는 일을 시도할 수 있을까요?
본 회퍼는 감옥에서 동료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만일 어떤 미친 운전사가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인도 위로 차를 몰아 질주한다면 목사인 내 임무는 희생자들의 장례나 치러주고 가족들을 위로하는 일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나는 그 자동차에 올라타서 그 미친 운전사로부터 핸들을 빼앗아야 할 것입니다.”
본 회퍼의 이런 행동을 ‘폭력이냐 비폭력이냐’ 하는 잣대로 재서는 안 됩니다. 그에 앞서 도대체 십계명과 모든 율법 조문의 근본 정신이 무엇인가를 먼저 파악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그 많은 율법 조문 중 첫째 가는 계명과 둘째 가는 계명만 언급하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둘째도 이와 같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온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 이 두 계명에 달려 있다.”
-김보경 수녀-
◆예수님 당시 유다교 계명은 613개였는데 예수님은 그 계명을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하라’는 사랑의 이중계명으로 요약하셨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고,“사랑은 사랑으로만 갚을 수 있다”(예수의 성녀 데레사)는 말씀이다.
며칠 전 40대 초반의 요한(가명)이 간경화로 선종했다. 부인과 두 아들이 있었지만 매일 병원에 와서 돌보는 이는 말끔한 얼굴과 훤칠한 몸에 양복차림의 건강한 팔순의 멋쟁이 노신사였다. 32년 전 부인과 사별하고 다섯 자녀를 홀로 키웠고 성당에서 봉사를 많이 하신다. 요한에 관해 말하실 땐 늘 눈시울이 붉어지고 기도해 달라며 90도 절을 하신다. 내가 요한을 처음 만났을 때는 지쳐 보였으나 말도 하고 함께 기도도 했다. 얼굴은 황록색이고 눈자위는 샛노랬으나 사랑을 많이 받고 자랐음을 알 수 있었다. 부인이 보기에 그는 ‘철없고 세상 물정 모르는 사람’이었으나 내게는 노인이 보는 것처럼 사랑스럽고 착한 소년으로 보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요한은 신앙생활에 태만했다. 두세 달에 걸쳐 입퇴원을 거듭하던 그날도 요한은 힘없이 병상에 걸터앉아 있었다. 노인은 “얘가 누우려 하지 않고 자꾸 무엇이 보이고 들린다며 무서워해요”라며 보조침상에 앉아 요한의 무릎을 힘껏 감싸안으며 “눈을 떠봐, 수녀님이 오셨어. 내 몸 전부를 주어서라도(이식) 얘를 살리고 싶습니다” 하며 눈물을 글썽였다. 요한의 피부는 이미 검푸렀고 임종이 가까웠음을 알 수 있었으나 차마 노인에게 말할 수 없었다. 순간 요한에 대한 나의 사랑은 ‘요한이 임종의 두려움에서 벗어나 평화로이 하느님께 가게 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눈물을 글썽이며 노인에게 ‘임종경’을 바칠 것을 권했다. 마침내 요한은 아버지와 형들과 가족에 둘러싸여 임종기도를 받으며 참으로 평화로이 하늘나라로 향했고 노인은 기뻐했다. 다윗 왕이 자식을 잃고서 힘을 되찾은 것처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