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20주간 토요일 성 베르나르도 학자 기념일 (마태23,1-12)

2011. 8. 20. 오전 6:13:12

글자
 
 

2011년 8월 20일 토요일 성 베르나르도 아빠스 학자 기념일

 

    너희는 스승 소리를 듣지 마라.

너희의 스승은 오직 한 분뿐이고

너희는 모두 형제들이다. 

(마태오 23,1-12)

 

 As for you, do not be called ‘Rabbi.'
You have but one teacher, and you are all brothers.

 

  

 베르나르도 성인은 프랑스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뒤 스물세 살에 성 스테파노 아빠스를 찾아가 수도회에 들어갔다. 성인은 유럽 곳곳을 다니면서 수많은 설교와 저술을 남겼으며, 해박한 지식과 뛰어난 믿음으로 존경받았다. 1153년 세상을 떠난 베르나르도 성인을 알렉산데르 3세 교황이 1174년에 시성하였고, 1830년에 비오 8세 교황은 성인을 ‘교회 학자’로 선포하였다.

룻이 엘리멜렉 가문의 보아즈를 만나 그의 아내가 되어 아들을 낳는다. 그의 아들 이름은 오벳인데, 다윗의 아버지인 이사이의 아버지다. 이스라엘 구원의 역사가 이방 여인 룻을 통하여 이어지고 있음을 보여 준다(제1독서). 예수님께서 군중과 제자들에게 바리사이와 율법 학자들의 행실을 본받지 말라고 말씀하신다. 예수님께서는 말이나 겉꾸밈으로 높은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섬기는 사람이 곧 높은 사람이라고 가르치신다(복음). 

 

어느 신문에서 대학생들에게 설문 조사를 하였습니다. 오늘날 가장 존경받지 못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물었습니다. 그 결과 가장 존경받지 못하는 제1순위는 ‘정치인’이었습니다. 한편 가장 존경하는 사람은 누구인지 물었더니, ‘환경 미화원’이라는 답이 가장 많았습니다. 젊은이들 마음속에 가장 힘없어 보이지만 묵묵히 세상을 위해 일하는 가난한 사람이 가장 존경스러워 보였던 것입니다.
오늘날 사회적 권위는 특정 계층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과거와 달리 어떤 인물이 사회적으로 권위를 인정받고 존경받게 되는 것은 그 사람의 신분이 아니라, 그 사람이 한 행위에 달려 있습니다. 아무리 높은 지위와 신분을 가졌어도 멸시받을 수 있으며, 아무리 약하고 힘없어 보이며 작은 일을 한다 해도 존경받으며 권위를 가질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옛날 이미 이런 문제를 지적하셨습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을 가리키시며 “그들이 하는 일이란 모두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삶에 알맹이는 없으며, 쭉정이 같은 겉치레에만 신경을 쓰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야말로 생색내기에만 열중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사람들 가운데에는 묵묵히 진실하게 살아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겉꾸밈으로 사람들의 시선을 끄는 데에만 관심을 두고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후자와 같은 사람들은 결국 ‘자기가 아닌 자기’가 주인이 되어 광대와 같은 삶을 살게 됩니다. 사람들은 결국 그를 광대로만 바라볼 뿐입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바라보는 시선과 수많은 사람이 나를 바라보는 시선은 결코 다르지 않습니다. 알고 보면 예수님께서 우리를 바라보시는 것처럼 주변 사람들도 진실한 내 삶을 보고 싶어 합니다.

☆☆☆

 

 성경을 보면,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은 가끔 예수님을 반대합니다. 그들의 심성이 악하거나 악의 세력과 연계되어 그런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들은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하여 앞장서서 노력하였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의 질책을 듣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들의 신앙이 위선과 형식에 젖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지닌 잘못은 말과 행동이 일치되지 않는 믿음, 하느님보다는 사람들에게 잘 보이려는 신앙, 공동체보다는 개인의 이익을 추구하려는 자세 등입니다. 그러니 계명을 잘 지키고 열심히 단식하고 아무리 애써 기도해도 참된 존경을 받지 못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섬기는 자세가 없으면 그렇게 된다고 오늘 복음에서 말씀하십니다. 그러기에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자기를 낮추는 자세는 마음먹는다고 저절로 갖추어지지 않습니다. 은총의 도움이 함께하여야 합니다. 섬기는 자세로 사는 사람에게는 그에 합당한 은총이 주어질 것입니다.

 

 

 

콩을 심으면 콩을 거두고

  -반영억라파엘신부-

어떤 사람이 ‘아마도 죽은 후에 신부님들은 입만 천당 가고, 수도자들은 귀만 가고, 일반 신자들은 발만 갈 것입니다’ 하고 우스갯소리를 하였습니다. 신분에 맞는 삶을 산다는 것이 그만큼 어렵다는 얘기로 받아들였습니다. 아는 것이 많거나 좋은 말을 많이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도 그 삶이 뒷받침 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아니 오히려 걸림돌이 되고 맙니다. 

예수님께서는 내로라하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삶이 표양이 되지 못하고 있음을 아셨기에 군중과 제자들에게 “그러니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따라 하지 마라.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마태23,3).하고 말씀 하셨습니다. 

사실, “예수님께 다가가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오히려 장애가 될 때가 많습니다. 스스로 실천하지 않으면서 복음을 전한다고 하기 때문입니다.”(마더 데레사) 들은 것과 말한 것, 행하는 것 사이에는 일치를 이루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율법을 듣는 이가 하느님 앞에서 의로운 이가 아니라, 율법을 실천하는 이라야 의롭게 될 것”(로마2,13)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실행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말씀을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야고1,22).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기 좋아하는 자들처럼 눈가림으로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하느님의 뜻을 진심으로 실행하십시오.”(에페6,6). 콩을 심으면 콩을 거두고 오이를 심으면 오이를 거두는 것은 자연의 이치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생각과 말과 행동이 어디에 있느냐에 따라 거두는 것도 달라지게 마련입니다. 바리사이파 사람들, 율법학자들이 꾸중을 듣는 것은 그들의 지향과 행동이 주님의 마음과 일치하지 못한 까닭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삶으로 말해야 하고 우리의 삶을 통해 주님이 말씀하시도록 나를 도구로 내놓아야 하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갈라2,20) 라고 하셨습니다. 

길다란 예복을 걸치고 인사받기를 좋아하고 높은 자리를 찾으며 스승이라는 소리를 듣기를 원하고 속으로는 온갖 잡생각에 사로잡혀 있으면서도 겉으로는 거룩한 척하는 사람은 어느 시대나 있어왔고 지금도 있습니다. 그게 바로 저입니다. 섬기는 사람이 되고(마태23,11), 자기를 낮추는 사람(마태23,12)이 되어야 한다고 강론을 하면서도 정작 대접 받는 것에 익숙해져 있으니 큰일입니다.

“백성이 떼지어 모여들듯 너에게 와서, 나의 백성으로 네 앞에 앉아 너의 말을 듣는다. 그러나 그 말을 실천하지는 않는다. 그들의 입에는 열정이 차서 그럴듯하게 행동하지만, 그들의 마음은 제 이익만 좇아간다.”(에제33,31). 그러나 분명한 것은 주님께서 오시면 “그분께서 어둠 속에 숨겨진 것을 밝히시고 마음 속 생각을 드러내실 것입니다. 그때에 저마다 하느님께 칭찬을 받을 것입니다.”(1고린4,5). 콩을 심으면 콩을 거둘 것이요, 오이를 심으면 오이를 거둘 것입니다. 무엇을 심던지 정성껏 심어야 하겠습니다. 실행이 해답입니다. 무엇을 하던지 사랑으로 실천하십시오. 사랑합니다.

 

 

   그대로 전할 수만 있다면     

-임문철 신부-


 주교님을 뵈러 온 의대 교수들을 제 차로 모시고 간 적이 있습니다.
그들은 동료 의사의 건강을 염려하면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이렇게 결론을 맺었습니다. ‘의사들이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따라 하지 마라.’
이제는 으레 그런 것이려니 하고 많이 둔해지기도 하고 또 체념해버린
문제이지만, 제가 사제로서 가르치는 바와 실제 삶의 괴리는 사제생활의
가장 큰 십자가로 다가왔습니다. 한번은 제의를 입고 미사를 드리는 제 모습이
너무 위선적이어서, 차라리 지금 이대로 제단에서 내려가야 옳은 일이 아닐까
한 적도 있을 정도였습니다. “자기가 설교하는 대로 살지 못하는 것은 비극이다. 그러나 자기가 사는 대로만 설교한다면 그것은 더 큰 비극이다”라는 우습지도
않은 유머를 떠올리며 위안을 삼아보지만, 여전히 그 십자가는 무겁기만 합니다. 자녀들도 부모들이 말하는 대로 크지 않고, 보는 대로 큰다고 하지요.
우리 신자들이 제 행동을 보고 예수님의 제자로 양성된다고 생각하면
허투루 살아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그대로
전할 수 있는 그런 사제가 되고 싶습니다.

 

 

 

 죽은 강의

-한명수 시인(대구가톨릭대학교 인성교양부)-


 20대 후반 무렵부터 나는 초청 강의나 강연에 나가기 시작했다. 그동안 수많은 강의를 해왔지만 잊혀지지 않는 강의가 하나 있다. 그것은 박수를 여러 번 받고 훌륭한 강의였다는 칭찬을 들었기 때문만이 아니다. 이유는 다른 데 있다.
신임 교리교사들을 대상으로 세 시간 동안 ‘교리교사론’에 대해 이론이 아닌 실천을 중심으로 강의를 했다. 휴식 시간마다 후배 교사들은 나에게 와서 좋은 강의에 감사하다는 인사를 했고, 여러 가지 칭찬과 함께 다음 기회에 또 강의를 듣고 싶다는 말을 남기곤 했다. 마침내 강의가 끝나고 큰 박수를 받으면서 강의실을 빠져 나왔다. 큰 박수가 주는 뿌듯함은 잠시, 계단을 내려오는 동안 나는 몹시 괴로웠다. 평소 내가 실천하지 못한 일을 남에게 실천하라고 말해서는 안 되며 말을 했으면 반드시 실천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해 온 터라, 그날 강의에서 나는 행하지도 못하면서 그들에게는 ‘해야 한다’고 강조한 이율배반적인 나의 언행 때문이었다. 그 일이 있은 후 한동안 강의 요청을 거절하였다. 말만 하고 실행하지 않는, 실행하지 않은 일을 마치 실행한 것처럼 말하는 강의는 아무리 크고 오랜 박수를 받아도 무의미한 것이 아니겠는가?
그 후 나는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강의를 하려고 무진 노력을 해왔고, 지금도 그렇게 하고 있다. 강의는 곧 그 강사의 인간 됨됨이기 때문에 말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는 강의는 죽은 강의라고 생각한다.

 


 

 

 태양초 고춧가루

-양승국신부-


요즘 저희는 빨간 고추 수확에 여념이 없습니다. 처음에는 흐뭇한 마음으로 기쁜 얼굴로 녀석들을 땄었는데, 요즘은 돌아서면 빨갛게 익어대는 녀석들 때문에 정말 괴롭습니다.


고추만 따왔다고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신속히 건조시키기 위해 일일이 가위로 반을 자릅니다. 햇살이 좋을 때를 골라 마당에 ‘쫙’ 깝니다. 비라도 오면 즉시 걷어야지요. 오랜 손길과 정성 끝에 잘 건조된 녀석들만 골라 방앗간으로 들고 갑니다. 드디어 태양초 고춧가루가 탄생되는 것입니다.


넓은 수도원 마당은 요즘 수도 없이 널어놓은 새빨간 고추들로 인해 벌써 가을의 정취가 완연합니다.


참으로 기특한 고추농사입니다. 올봄 저희가 밭에 심은 것은 분명 여리고 가냘픈 고추 모종이었는데, 어느새 키가 허리까지 올라왔습니다. 셀 수도 없이 많은 탐스런 결실이 계속됩니다.


반대로 토마토를 잔뜩 심은 하우스는 신경을 별로 쓰지 못한 관계로 건질 것이 거의 없습니다. 근처 다른 토마토 하우스에서는 매일 수많은 출하가 이루어지고, 지나가는 사람들이 직접 사가기도 하는 등 분주한데, 저희는 완전 반대입니다. 잎은 무성합니다. 키도 얼마나 큰지 모릅니다. 그러나 열매의 질이 형편없습니다. 다른 집과 게임이 안 됩니다. 완전 꽝입니다. 조금도 기대할 것이 없습니다.


이유가 무엇인가 생각해봤습니다. 여력이 없었던 관계로 순따주기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솎아주지도 못했습니다. 불필요한 잎과 가지만 무성하다보니 영양분이 그리로 다 쏠렸습니다. 열매는 미성숙 단계에서 성장이 멈췄습니다. 크기도 작고, 볼품도 없는 토마토이기에 출하는 꿈도 꿀 수 없습니다. 그저 오며 가며 심심풀이 삼아 먹을 수밖에 없습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우리가 가장 경계해야 할 모습은 정체된 신앙생활, 고착화된 신앙생활, 앞뒤가 꽉 막힌 신앙생활, 유아기적 상태에서, 초보단계에서 성장이 멈춰버린 신앙생활, 그로 인해 성장이나 결실이 전혀 없는 신앙생활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으로부터 강한 질타를 받고 있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신앙생활이 그랬습니다. 그들은 외적인 것에 지나치게 연연한 나머지 정신을 잃어버렸습니다. 영성을 상실했습니다. 신앙의 본질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들은 사실 당대 중요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당시 유대 사회 안에서 차지하던 역할은 중차대했습니다. 종교법과 의식에 관한한 독자적인 판결을 내렸습니다. 형사소송 때 재판관으로 참여하기도 했습니다. 민사소송 때는 다른 재판관들과 함께 판결을 내리거나 단독재판관이 되기도 했습니다. 그들은 동족들의 운명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권한의 소유자들이었습니다.


이런 그들이 신앙의 본질이나 고유한 정신, 영성을 잃어버렸으니, 그들을 믿고 따르며 의지하던 백성들의 고초가 얼마나 컸겠습니까?


세월이 흐른다고, 세례 받은 연한이 길어진다고 그에 비례해서 신앙이 성장하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신앙의 성장을 위해서는 반드시 그에 따른 대가가 필요합니다. 쇄신을 위한 가지치기입니다. 솎아주기입니다. 철저한 자기 성찰 작업입니다. 부단한 자기 쇄신 작업입니다.


영국의 정신과 의사 헨리 모슬리는 인간이 흘리는 눈물에 대해 이렇게 정의했습니다.


“하느님이 인간에게 선물한 치유의 물.”


인간은 슬픔과 서러움으로 인해 눈물 흘립니다. 때로 견딜 수 없는 통증으로 인해 눈물을 흘립니다. 때로 힘겨웠던 지난 세월 앞에 눈물 흘립니다. 그 숱한 죄와 배신에도 불구하고 다시금 새 삶을 허락하신 하느님 은혜가 너무나 감사해서 눈물 흘립니다. 때로 너무 행복해서 눈물 흘리기도 합니다.


그런데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아마도 눈물에 인색한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눈물 흘리는 것은 약한 자들이나 하는 짓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자신의 내면 안에서 일어나는 은밀한 감정들도 애써 억눌렀을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하느님을 향한 신앙도 점점 메말라갔을 것입니다. 마침내 눈물샘이 말라버린 사람들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늘 사람들을 가르치려고만 했습니다. 이웃들의 결함에만 몰두했습니다. 그러다보니 자신의 내면세계를 들여다볼 시간이 없었습니다. 하느님께 투자할 시간도 사라져버렸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우리 신앙생활에 대한 지속적인 점검입니다. 총체적인 평가입니다. 세밀한 자기진단입니다.


이런 노력이 계속되지 않을 때, 우리 역시 자신도 모르게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걷던 길로 들어가 있을 것입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참 신랄하게 묘사

-임영숙(서울대교구 한남동 성당)-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참 신랄하게 묘사돼 있습니다. 그 우스꽝스럽고 경멸스러운 모습을 떠올리며 비웃음을 짓다가 가슴이 서늘해집니다. 그 모습이 바로 나 자신의 모습일 수도 있다는 자각에서입니다. 체면을 중시하는 우리 사회에서는 몰라도 아는 척, 없어도 있는 척하는 것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자신의 참모습은 숨기고 가면을 쓰고 사는 것이지요.
직장을 그만두고 가장 막막했던 것은 내가 참으로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모른다는 것이었습니다. 막연히 지금까지 살아온 것과는 다른 새로운 삶을 살고 싶다고만 생각했지 구체적으로 뭘 하고 싶은지 떠오르는 게 없었습니다. 비슷한 시기에 그만둔 친지들은 사진을 배운다, 첼로를 배운다, 책을 쓴다며 금방 새로운 일을 시작했지만 저는 성서 못자리 강의에 수강신청을 하고 결석하지 않기를 목표로 세운 것 이외는 할 일이 없었습니다. 춤을 배우고 싶다는 생각은 했지만 실천하지는 못했습니다.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내 삶이 너무 오랫동안 ‘남에게 보이기 위한 위선적인 삶’이었기 때문에 내가 정말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상태에 이른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춤을 추지 못하는 것도 같은 이유입니다. 춤추는 내 모습을 남들이 어떻게 생각할까 두려워서 춤을 못 추는 것입니다. 춤을 출 수 있게 되면 남의 시선을 지나치게 의식하는 내 소심함이 사라질까 해서 배우고 싶다고 생각했지만 아직까지 실천을 못하고 있습니다.

복음 묵상을 글로 쓴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벌거벗은 채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장 쓰기 어려운 글인 듯싶습니다. 오랫동안 글을 써왔다지만 그것은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쓴 글이었습니다. 가면 뒤에 숨은 채 누구나 할 수 있는 말, 하기 쉬운 말을 그럴듯하게 엮어 내놓은 것이지요. 그러면서도 마치 대단한 일이라도 하는 듯이 ‘글쓰기는 피를 말리는 일’이라는 둥 엄살을 늘어놓기도 했습니다.

지난 열흘 동안의 매일성서묵상을 하면서 제딴은 진솔한 글을 쓰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 잘 보이고 싶어서, 독자들에게 감동을 주고 싶어서 부지불식간에 가면을 썼을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듭니다. 가면을 쓴다는 것은 그토록 익숙한 습관이니까요. 주님,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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