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8월 22일 월요일 동정 마리아 모후 기념일
1954년 비오 12세 교황은 ‘여왕이신 동정 성 마리아’ 축일을 제정하고 해마다 5월 31일에 지내도록 하였다. 이후 로마 전례력 개정에 따라, 마리아를 천상 영광에 연결시키고자 ’성모 승천 대축일’ 다음 팔일째 되는 날인 8월 22일로 옮겼으며, 축일 이름도 복되신 ‘동정 마리아 모후 기념일’로 바꾸었다. 이날 교회는 복되신 동정 마리아께서 우리를 위한 구원의 도구가 되시고, 하늘에 오르시어 그리스도와 함께 영원히 다스리시는 우리의 모후가 되셨음을 기념한다.
어리석고 눈먼 자들아! 무엇이 더 중요하냐?
금이냐, 아니면 금을 거룩하게 하는 성전이냐?
(마태오 23,17)
Blind fools, which is greater, the gold,
or the temple that made the gold sacred?
[말씀 초대]
바오로 사도는 테살로니카 교회에 믿음이 빛을 내는 것을 보고 감사드린다. 바오로 사도는 우상을 버리고 하느님께 돌아서서, 주님의 부활을 믿으며 영광 속에 재림하실 주님을 기다리는 데 게으르지 말라고 당부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 바리사이와 율법 학자들을 꾸짖으시며 그들의 삶이 불행한 이유를 말씀하신다. 그것은 위선과 탐욕과 형식에 매여 사람들을 옭아매는 그들의 삶의 태도 때문이다(복음).
[말씀 묵상]
“새싹이 때 아닌 서리에 상하게 되면 피어나지 못하듯, 인간에게 사랑이라는 따스한 격려가 없다면 이 차가운 세상에서 제대로 피어나지 못하고 가려진 그대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 존 포웰의 『왜 사랑하기를 두려워하는가?』에서 인용한 글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바리사이와 율법 학자들을 꾸짖으시는 것은 그들의 찬 서리 같은 삶의 태도 때문입니다. 인정과 사랑이 피어나야 할 세상에 종교인이라는 사람들이 종교의 이름으로 오히려 차갑고 경직된 세상을 만들어 가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없는 사람은 두렵고 외롭습니다. 존 포웰이 지적하는 것처럼 사랑이 없는 사람에게 하느님의 영상은 신에 대한 경외심만을 강요하는, 두렵고 무서운 우상이 됩니다. 바리사이와 율법 학자들은 자신들이 가진 두려운 하느님의 영상을 종교적 규범을 만들고 지키는 것으로 이겨 내려 했습니다. 사람들에게 지키기 어려운 숱한 법을 만들어 강요하면서(마태 23,4 참조), 그들은 내적으로는 두려움을 극복하고 외적으로는 명예와 권력을 유지했습니다.
바리사이와 율법 학자들의 불행은 거짓 권위와 위선으로 사람들 위에 군림하며 자신들이 누구인지도 모르는 데 있습니다. 종교를 통하여 위선자가 되고 허망한 권력을 일삼으니 불행한 것입니다. 우리 신앙인은 그런 불행한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예물이 중요한가, 예물을 거룩하게 하는 제단이 중요한가?’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은 예물이 더 중요하다고 말한다. 그들은 제단을 두고 한 맹세보다 예물을 두고 한 맹세를 먼저 지키라고 한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그들의 위선을 강하게 꾸짖으신다
새벽을 열며
어제 저녁미사 때였습니다. 주일 저녁미사는 청년들 미사로써 청년 밴드 팀이 반주하면서 신나는 음악과 함께 미사를 진행합니다. 그런데 저는 미사의 어느 한 순간이 되면, 긴장을 멈출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부분에서 벌써 한 달째 틀리고 있거든요. 이 부분은 바로 ‘신앙의 신비여’입니다. 저는 맞게 한다고 하는데, 미사가 끝나고 나서는 반주자가 항상 말합니다.
“신부님, 오늘도 틀리셨어요.”
이러한 말을 듣다보니, 이제는 자신이 없습니다. 그리고 왜 틀리는가를 고민하지 않을 수가 없었지요. 하긴 ‘신앙의 신비여’ 버전이 너무나 많습니다. 어린이미사, 중고등부미사, 성인미사, 국악미사, 그리고 청년미사까지... ‘신앙의 신비여’의 음이 다르다보니 이렇게 틀리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한 달째 틀릴 수가 있을까요?
어제 저녁미사 후, 시원한 맥주 한 잔 마시기 위해 사제관에 모였습니다. 이런저런 이야기가 나오다가 ‘신앙의 신비여’에 대한 말이 나왔지요. 저는 바로 그 자리에서 제가 기억하고 있는 음을 노래 불렀습니다. 아니랍니다. 저는 이 음이 맞다고 계속해서 우겼지요. 그리고 이 ‘신앙의 신비여’가 나오는 음반을 틀어보았습니다.
결과는 저의 잘못이었습니다. 제가 음을 잘못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스스로 음을 제대로 알고 있다고 생각했었고, 단지 긴장을 해서 음이 계속 틀리는 것이라고 착각한 것이지요. 그러다보니 한 달 동안 틀렸음에도 불구하고 한 번도 음반을 틀어 보면서 연습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쓸데없는 고집이며, 어리석은 저의 모습인 것이지요. 결국은 신자들에게 놀림감만 될 뿐인데, 뭐가 잘났다고 그렇게 고집을 부렸는지……. 이 모습이 바로 오늘 복음에 예수님께서 꾸짖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모습이 아닐까요?
율법의 핵심인 ‘사랑’을 실천하는데 최선을 다하는 것이 아니라, 율법의 세부조항에만 목숨 걸고서 지키려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모습. 이런 모습을 예수님은 도저히 지켜볼 수가 없었지요.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복음의 말씀처럼 따끔한 충고를 하십니다. 그러나 이들이 이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일까요? 자기들이 예수님보다 더 윗자리에 있다는 착각에, 자신들의 말은 항상 옳다고 생각하는 어리석음에, 그래서 자신의 말과 행동을 절대로 굽히지 않는 고집을 버리지 않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하느님의 아드님을 배척할 수밖에 없었지요.
우리 역시 이런 모습을 취할 때가 많습니다. 바로 주님께서 가장 강조하신 ‘사랑’을 잊고, 나 중심으로만 모든 것을 맞추려고 할 때 또 한 명의 바리사이와 율법학자가 되는 것입니다.
앞서 쓸데없는 고집을 부려서 결국 한달 동안 성가를 틀리는 어리석은 모습을 보였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이처럼 고집 부려서 좋을 것 하나 없습니다. 고집 부리지 말고 주님의 사랑을 지금 당장 실천하십시오.
빠다킹신부

진정한 따름이란
-임문철 신부-
한라산과 해안 사이에 펼쳐진 들판은 참으로 평화롭습니다. 그 한 곳에
이시돌 목장이 있고, 거기에는 삼뫼소라는 아름다운 성지가 있습니다.
그곳에서는 첫 토요일마다 성모신심 미사가 있는데, 미사 후에는 호숫가를
함께 돌면서 묵주기도를 바칩니다. 묵주기도를 바칠 때면 매 단의 현의를
노래하면서 “아베, 아베” 하는 후렴부분은 양 팔을 쳐듭니다.
저희 본당에서도 성모의 밤 때, 묵주기도를 하면서 후렴 부분은 양팔을 들고서
기도를 합니다. 그런데 웬일인지 복사 아이들이 모두 한 팔만 들고 노래를 합니다. 왜 그런가 하고 보았더니 제가 앞에서 주송을 하느라 한 손에 마이크를 들고
있어서 나머지 한 손만 들었더니 아이들이 다 저를 따라한 것이었습니다.
주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고장난 녹음기나 앵무새처럼 그분의 가르침을
되뇌는 것이 아닙니다. 기계적으로 또는 외워서 전하는 그분의 가르침이
얼마나 힘이 있겠습니까? 그분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우선 그분과 함께 지내면서
그분을 잘 알게 되고, 더욱 친밀한 사이가 되어 그분의 가르침이 아니라
그분 자신을 전하는 것입니다. 말이 아니라 삶으로 보여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교육자의 탈을 쓴 위선자
-한명수 시인-
◆‘진리의 길’을 가르치는 것은 참된 지식과 순수한 지혜의 열쇠를 주는 것과 같다. 길을 모르는 이들은 길을 아는 이들로부터 그 길을 묻고 배워야 하고, 길을 아는 이들은 모르는 이들에게 그 길을 제대로 알려주어야 하지만, 가르치는 내게 참된 지식도 없고 순수한 지혜도 없다면 나한테 배우는 이들은 진리의 길을 걸을 수가 없을 것이다. 그들뿐만 아니라 나조차도 진리의 길을 걸을 수 없기에 나는 ‘눈먼 인도자’(마태 23,16)에 지나지 않는다.
주일학교 교사로서, 가톨릭 학교 교사로서, 교사들을 가르치는 교사로서 나는 분명 ‘가르치는 사람’이다. 내가 교회로부터 그리고 대학과 대학원에서 공통적으로 배운 것은 가르치는 자의 공적인 일은 진리의 길을 가르치는 데 있다는 것이다. 만약 내가 진리의 길을 가르치지 않는다면 그것은 교사의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않는다는 것과 같다. 나는 학생들을 열심히 가르친다고 하지만, 그 열심이 삶의 진리를 향한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을 살아가는 잘못된 요령만을 가르치는 것이 될까 봐 두렵다. 내가 그들 앞에서 하늘나라의 문을 잠가버리는 역할을 하는 것은 아닌지`….
먹고사는 일에 눈이 멀어 학생들이 인격체로 보이지 않고, 그저 나에게 돈을 가져다주는 ‘것’으로만 보인다면 나는 교육자의 탈을 쓴 위선자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 나는 예수님한테 꾸지람을 듣는 율법학자요 바리사이며, 비록 하늘나라의 열쇠를 지니고 있다고 할지라도 곧 그것을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

불행선언
- 최경용 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위선자들인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에게 불행을 선언하십니다. 그들의 임무는 유다 율법과 조상들의 전승을 지키고 보존하고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느님의 뜻에 따라 사는 바른 삶을 보여 주지 않고 오히려 백성에게 무거운 율법의 짐만 지워 주었습니다. 그들은 악인이면서 의도적으로 성인군자 행세를 하였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일곱 가지 위선에 대한 불행을 선언합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그 중에 세 가지 위선을 들추어 말씀하십니다. 첫 번째 불행 선언은 이러합니다.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사람들 앞에서 하늘나라의 문을 잠가 버리기 때문이다. 그러고는 자기들도 들어가지 않을 뿐만 아니라, 들어가려는 이들마저 들어가게 놓아두지 않는다.”
율법학자들은 민족을 하느님께로 인도하는 교도권을 한 손에 쥐고 사람들을 가르칠 권한을 행사하였습니다. 그런데 하늘나라에 들어가려면 먼저 가르치는 사람들부터 언행이 일치해야 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회개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겸손하지도, 회개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은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열쇠를 쥐고 있으면서도 문을 닫아놓고 자기도 안 들어가고 남도 못 들어가게 하였습니다. 사실 그들은 예수님이 죄인들의 집에 들어가는 것도 반대하였고 죄인들이 예수님께로 오는 것도 반대하였습니다. 이렇게 그들은 하늘나라에 접근하는 것을 가로막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하게 가로막는 그들은 참으로 불행합니다.
두 번째 불행 선언은 이러합니다.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개종자 한 사람을 얻으려고 바다와 뭍을 돌아다니다가 한 사람이 생기면, 너희보다 갑절이나 못된 지옥의 자식으로 만들어 버리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해외 이산 유다교인들을 겨냥한 말씀입니다. 조국을 떠난 유다인들은 이교도들을 유다교로 개종시키는 선교활동에 몰두함으로써 자기들이 유다교에 충실함을 드러내었습니다. 그들은 유다교에 입교한 이방인들에게 할례를 주고 유다교 공동체에 받아들여 예식에 참여할 권리를 주었습니다. 그들은 유다교에 입교한 이방인들을 개종자라고 불렀습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개종한 이방인들을 유다인처럼 만들고 다른 사람들을 미워하도록 하였습니다. 특히 유다교에서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사람들을 배반자로 몰아세웠습니다. 예컨대, 개종하여 사도가 된 바오로를 가장 많이 박해한 사람들이 바로 유다교에 입교한 개종자들이었습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의 말씀처럼 유다교에 입교한 개종자들을 “갑절이나 못된 지옥의 자식으로” 만들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 나라의 성장을 가로막고 박해하는 사람들은 참으로 불행하다고 선언하십니다.
세 번째 불행 선언은 ‘맹세’에 관하여 잘못 가르치고 있는 “눈먼 인도자들”인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에게 내려집니다. 그들은 자기네를 백성의 인도자로 여기지만 예수님이 보시기에는 ‘눈먼 이로서 남을 인도하는 사람들’입니다. 마태복음 15장 14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전통에 사로잡혀 형식적인 종교생활로 인도하는 이들을 가리켜 “눈먼 이들의 눈먼 인도자다. 눈먼 이가 눈먼 이를 인도하면 둘 다 구덩이에 빠질 것이다.”(마태 15,14)라고 하셨습니다. 그들 자신조차 길을 잃고 헤매면서 백성을 잘못된 길로 인도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회생활에는 자신이 한 말에 진실과 책임이 따라야 합니다. 특히 분쟁이 있는 곳에서는 말의 진실성을 보장해주는 담보가 필요합니다. 고대사회에서는 그 보증과 담보로서 맹세를 하게 되었고 그 맹세가 신빙성이 있다는 표로서 하느님의 이름을 걸었습니다. 모세는 백성에게 맹세의 신성성을 지키는 규정을 정해주었습니다. 그러나 후기의 율법학자들은 이 규정을 구분하여 어떤 경우에는 지켜야 하고 어떤 경우에는 지키지 않아도 된다는 세부규정을 가르쳤습니다. 그 예가 오늘 세 번째 불행 선언에 나옵니다. 성전과 제단을 두고 한 맹세는 지키지 않아도 되지만 성전의 금과 제단 위에 놓인 예물을 두고 한 맹세는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결국 어디에 걸고 맹세를 했건 간에 중요한 것은 하느님 앞에 맹세한 것을 충실히 지키는 성실성입니다. 일단 맹세를 했으면 지켜야 합니다. 어느 것은 형식에 맞는 맹세이니 지켜야 하고 어느 것은 형식을 밟을 수 없는 맹세이니 지킬 의무가 없다고 말 할 수 없는 것이다. 맹세는 양심적인 진실성이 중요합니다. 한 번 맹세했으면 그것은 양심을 걸고 하는 것이기 때문에 하느님의 이름으로 하는 맹세나 마찬가지입니다. 맹세는 실천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그래서 마태복음에서 예수님은 “아예 맹세하지 마라.”(마태 5,34)고 하셨습니다.
신앙생활은 하느님을 섬기고 사랑하고 믿는다는 표현입니다. 신앙생활에 가식과 위선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가식 없는 우리의 신앙생활이 기도와 봉사활동을 통해 다른 이들에게 도움이 되면 좋겠습니다.

하느님의 인도자인 저의 눈은 어떤가
-유재훈 신부-
한 본당에서 토종닭을 기르던 일이 생각납니다. 봄이 되면 어미닭은 자신이 품을 수 있을 만큼의 알을 낳습니다. 이후 어미닭은 알을 부화시키기 위해 오랫동안 둥지에 웅크리고 앉아 있습니다. 모이를 먹을 때만 빼고는 항상 알을 품고 있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알은 부화됩니다. 알에서 나온 병아리들은 어미닭을 졸졸 따라다니며 어미닭이 하는 대로 합니다. 어미닭이 부리로 풀을 쪼면 병아리들도 그렇게 하고, 어미닭이 발로 흙을 헤집으면 병아리들도 그렇게 합니다. 물 한 모금 먹고 하늘을 쳐다보는 것도 어미를 그대로 따라 합니다. 병아리들은 어미닭이 먹는 것을 먹고, 행동을 따라 하는 것이 가장 안전하다는 것을 본능으로 압니다. 어미닭은 병아리에게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을 가르치는 인도자이자 보호자입니다.
복음에 “너희 같은 눈먼 인도자들은 화를 입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인도자는 목표를 향해 가는 길에 어떤 장애물과 위험이 있는지 정확히 볼 줄 아는 눈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께서는 인도자들이 눈이 멀었기 때문에 화를 입을 것이라고 경고합니다. 인도자가 눈이 멀었다면 그뒤를 따라오는 사람은 모두 불행한 일입니다. 눈을 크게 뜨고 걸어가도 제대로 갈 수 있을지 걱정스러운데 인도자가 눈이 멀었으니 그와 그를 따르는 이들의 앞날은 뻔합니다.
오늘 복음을 묵상하며 하느님의 인도자인 저의 눈은 어떤가 생각해 봅니다. 혹시 스스로 시력이 좋다고 착각하고 있는 눈뜬 장님이 아닌지 반성해 봅니다.
하늘의 그물은 빠져 나갈 수 없다
-반영억라파엘신부-
거리를 떠돌다 숨지는 노숙인들이 해마다 300명 이상에 이르더니 최근에는
하루에 한 명꼴이랍니다. 통계청 사망자료 분석에 의하면 2005년에 300명, 2006년 325명, 2008년에 319명, 2009년에 357명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강원카지노 주변에서 5년간 25명이 자살하였고 올해만 벌서 5명이 자살을 하였다고 합니다. 우리나라의 “삶의 질”지표가 경제협력개발기구와 주요20개국이 포함된 39개국 가운데 27위로 하위권으로 나타났습니다. 더더욱 산업구조와 복지, 안전등은 아주 미흡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런데도 정부는 가난하고 고통을 받는 이들을 비롯한 국민의 삶의 질 향상을 위한 노력은 외면한 채 4대강 사업에 막대한 예산을 퍼부으면서 자만에 빠져있고 정치권은 무상급식이라는 이슈로 많은 시간과 헛돈을 쓰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게 제 충심’이라며 눈물을 흘리며 무릎을 꿇고 큰 절을 하였습니다. 주님께서 이들의 속을 보시고 뭐라 하실까?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들아! 불행하여라, 너희 눈먼 인도자들아!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 는 옛 말이 있습니다. 원인이 있으면 반드시 결과가 있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진실이든 그렇지 않든 결과를 낳게 되고 그 결과는 하늘 앞에 그냥 넘어갈 수 없는 법입니다. 제아무리 명석한 두뇌를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결코 하늘의 그물은 빠져 나갈 수 없습니다. 지금 잔머리를 굴려도 결국은 진실은 드러나게 되어있습니다. 그 피해가 후손에게 넘겨질까 두려울 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위선자’라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그들의 겉과 속이 달랐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겉은 화려하고 속은 거짓으로 가득 찼습니다. 자기들은 지키지 않으면서도 남에게는 많은 짐을 지어 놓았습니다. 그러면서 스승이요, 지도자로 행세하였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그렇게 대우한 것 까지는 좋은데 본인들이 그렇게 자처했습니다. 그것이 문제입니다. 오늘날 한국 정치현실을 보면 그와 다르지 않습니다. 저 자신도 그렇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준수하라고 강조했지만 그 속에서 자기 자신을 제외시켜놓고 있었습니다. 오히려 지키는 가, 아닌가를 감시하는 자리에 자기만은 우뚝 서 있는 것으로 착각하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하느님 앞에서는 그것으로 인정받지 못합니다. 오히려 ‘위선자’, ‘눈 먼 인도자’ 라는 소리를 듣게 되었습니다. 율법준수를 말하고 영혼을 구하려고 찾아 나서는 바리사이들의 열성은 중요하지만 행실이 없는 외침은 공허할 뿐입니다. 그리고 그만큼 불행합니다. 덜 중요한 것을 더 중요한 것보다 더 중시하는 오류 속에 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열심에 앞서 껍데기와 알맹이를 구별할 줄 아는 지혜를 지니고 살아야겠습니다.
지나친 열심이나 헛된 열성은 오히려 진실을 외면하고 거짓에 가깝습니다. 참으로 중요한 것들이 무엇인지 알고 그에 소홀함이 없기를 바랍니다. 즈카르야 예언자는 말합니다. “만군의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내가 부를 때에 그들이 듣지 않은 것처럼, 그들이 부를 때에 나도 듣지 않겠다.”(즈카7,13) 주님의 목소리를 거부하는 사람은 아예 주님의 축복을 받을 생각을 말아야 합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실천하는 가운데 행복하시길 기도합니다.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