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복도 입지 않고 어떻게 여기 들어왔소?’
(마태오 22,1-14)
‘My friend, how is it
that you came in here
without a wedding garment?'
말씀의 초대
판관 입타는 창녀의 아들이었고 힘센 용사였다. 암몬 자손들과 싸움을 앞두고 주님께서 승리를 거두게 해 주시면 자신을 맞으러 나오는 첫 사람을 주님께 바치겠다고 약속한다. 그런데 오직 하나 밖에 없는 딸이 나온 것이다. 입타는 자신이 한 약속을 지키려고 그 딸을 희생시킨다. 사람을 신에게 희생 제물로 바치던 고대의 이러한 관습은 후대 예언자들의 비판을 받고 율법에서 금지된다(제1독서). 하늘 나라 잔치에는 누구나 초대받을 수 있지만 반드시 예복을 갖추어 입어야 한다. 예복은 하늘 나라의 잔치에 참여하는 내적 태도를 말한다. 의로움이나 겸손 또 선행으로 이해할 수 있다(복음).

오늘의 묵상
예수님 시대에 유다인들의 상류 사회에서는 잔치에 사람들을 초대할 때 두 번에 걸쳐 했다고 합니다. 첫 번째는 잔치 준비를 하면서 초대할 사람들에게 초청장을 보내고, 두 번째는 초대에 응한 사람들을 다시 초청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두 번째 초청을 받아 놓고 잔치에 참석하지 않는 경우는 큰 실례였다고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도 이런 이스라엘 풍속을 들어 하늘 나라 잔치를 비유로 말씀해 주십니다. 이 비유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임금은 하느님을, 그의 아들은 당신 자신을, 그리고 초대에 응하지 않는 사람들과 박해자들은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을 받아들이지 않고 배척한 유다인들을 가리킵니다. 결국 그들이 하늘 나라 잔치의 초대를 외면하거나 배척하여 하늘 나라는 오히려 모든 이의 차지가 되었다는 뜻을 전하고 있습니다.
이 비유는 당시 유다인들에게 배척받고 온 세상으로 그리스도교가 퍼져 가던 상황을 표현한 것이기도 하지만, 우리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교회로 초대를 받은 것은 우리가 어떤 특별한 존재이기에 부름 받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누구나 있는 그대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하늘 나라 잔치에 초대를 받은 사람은 그에 맞는 예복을 입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예복은 세례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입는 것을 말합니다(갈라 3,27). 그것은 세례의 외적 형식이 아니라 초대받은 이로서 지녀야 할 내적 믿음과 충실성을 말합니다. 우리가 하늘 나라에 초대를 받았지만 주님에 대한 믿음과 충실성을 잃으면 교회 안에 있지만 내적 삶은 세상 것에 꽁꽁 묶여 어둠 속에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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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자신의 앞날을 모릅니다. 알려고 애를 써도 알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미래를 알게 되면 삶의 의미는 반감되고 맙니다. 고통과 시련을 만나도 끝을 보기에 덤덤해집니다. 성공을 거두어도 결과를 알기에 싱겁습니다. 희망은 미래에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현실 안에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임금은 아들의 혼인 잔치에 사람들을 초대합니다. 그런데 초대받은 이들은 거부합니다. 뚜렷한 이유도 없습니다. 임금을 무시한 것으로밖에 해석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임금은 잔치를 계속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계획을 바꾸시는 분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찮은 이유로 거절해도 주님께서는 끊임없이 부르신다는 것이 오늘 복음에 나오는 비유의 핵심입니다.
유다인들은 예수님의 초대를 계속해서 거절하였습니다. 그러기에 하느님의 선택은 이제 이방인들에게 내려집니다. 오늘 복음의 비유는 그것을 알리는 예화라고 해석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어떻든 잔치는 기쁜 자리입니다. 혼인 잔치는 신랑 신부가 새로운 출발을 하는 자리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초대를 받은 우리 역시 ‘새 출발’을 시작해야 합니다. 그것이 잔치에 참석하는 이가 입어야 할 ‘예복’입니다. 현실의 삶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주님의 부르심에 대한 진정한 응답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늘 나라를 임금이 베푼 ‘혼인 잔치’에 비유하십니다. 그런 곳에는 아무나 갈 수 없습니다. 초대받은 자체만으로도 대단한 일입니다. 그런데 별 이유 없이 거부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사람을 보내 다시 오라고 했지만 역시 거절합니다. 심지어는 심부름꾼을 학대하고 죽이기까지 했습니다.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없는 일입니다. 임금의 호의를 그런 식으로 무시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모른 체했습니다. 따지고 보면 어리석은 일입니다. ‘임금은 군대를 보내 그들을 없애고 고을을 불살라’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모습은 오늘날에도 되풀이되고 있습니다.
많은 이들이 신앙에 불림을 받았지만 충실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믿음의 길이 ‘하늘 나라의 초대’인 줄 모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임금이 베푸는 잔치’라고 하셨습니다. 잔치는 기쁨입니다. 신랑 신부가 새 출발하는 즐거운 자리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을 ‘다시 시작하는 것’이 임금의 초대에 응하는 것이 됩니다. 인생을 ‘새롭게 출발하는 것’이 혼인식에 참석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런 ‘삶’이 잔치에 참석하는 이가 입어야 할 ‘예복’이었습니다. 모르기에 대충 살아갑니다. 현실의 삶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부르심에 대한 진정한 응답입니다.
핑계 댈 것을 핑계 대야지
-반영억신부-
성모승천대축일에 청주교구 운동동성당 봉헌식이 있었습니다. 대축일에 봉헌식을 하니 바쁜 날이었습니다. 그렇지만 많은 신부님과 신자들이 함께 감사미사를 봉헌하였습니다. 더욱이 신자가 아닌 지역대표들도 참석을 하여 축하를 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자리를 함께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유가 있었겠지만 고생한 신자들과 동료신부를 위로해 주는 자리였는데 안타까웠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사람들이 잔칫집에 초대를 받았는데 이런 저런 핑계를 대고 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 잔칫집에 초대 받은 사람들은 초대한 분으로부터 오래도록 은혜를 입은 사람들입니다. 그렇지만 그 은혜보다도 자기 잇속을 차리느라고 어떤 사람은 밭으로 가고 어떤 사람은 장사하러 갔습니다. 그들은 당장 내가 먹고 사는 것을 중요하게 여겼고 내가 아니어도 축하객이 많으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날의 잔치는 매우 성대하였고 귀한 선물도 마련되었습니다. 그러니 처음부터 초대 받은 사람은 핑계 아닌 핑계를 댐으로써 선물을 받을 기회를 놓치고 전혀 생각하지 않은 사람들이 선물을 차지 하였습니다.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귀한 선물은 영원한 생명,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초대 받은 사람은 많았지만 정작 선택된 사람은 적었고, 이 모습은 오늘도 여전히 유효합니다. 제가 이번 대축일을 맞이하여 ‘손 십자가’를 선물로 드렸는데 못 받은 분들이 계십니다. 평상시 미사참례를 잘 하시다가 모처럼 빠졌는데 하필이면 이 날 선물을 주었으니 얼마나 안타까운 일이겠습니까? 그런데 어떤 이들은 순례지를 찾아 기도하러 왔다가 생각지 않은 선물을 받으셨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합니다. “그러니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기 때문이다.”(마태24,44) “너희는 조심하고 깨어 지켜라.”(마르13,32)
하느님께서 허락하시는 구원의 문은 언제나 열려 있지만 결코 아무나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깨어 응답하는 사람만이 들어갑니다. 묵시록 3장20절에는 “보라, 내가 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목소리를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의 집에 들어가 그와 함께 먹고 그 사람도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 하고 말씀하십니다. 문 두드리는 소리를 듣고 문을 열어드리는 역할은 나의 몫입니다. 깨어 있지 않으면 문 두드리는 소리를 들을 수 없고 응답을 한다는 것은 그만한 준비가 동반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잔칫집에 가려면 그에 걸맞는 예복을 입어야 하듯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그만한 삶이 뒤따르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위로는 하느님 사랑이요, 옆으로는 이웃사랑입니다. 매일 십자성호를 그으면서 하느님 사랑의 구체적인 표현인 이웃사랑에 마음을 열어야 하겠습니다.
“배부르면 산해진미가 귀찮고 배고프면 보리죽이 꿀맛이다.”라는 옛말이 있습니다. 헛배가 부르면 정말 먹어야 할 것을 먹지 못하게 됩니다. 따라서 헛배가 불러 꼭 챙겨야 할 것에 관심을 갖지 못하는 것은 불행한 일입니다. 일상 안에서도 미사참례, 피정이나 세미나, 교육, 봉사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집니다. 그러나 기꺼이 응하는 사람만이 보람과 기쁨을 간직하게 됩니다. 설사 꼭 가겠다고 생각하다가도 하필이면 다른 일이 생겨 일정을 놓치기도 합니다. 똑같이 주어진 일이지만 은총의 기회로 삼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사실 부르심을 받은 이들은 많지만 선택된 이들은 적다.”(마태22,14) 영적인 풍요로움을 주는 일에 핑계대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사랑합니다.
< cafe.daum.net/rara63 신을 벗어라>
하느님의 초대
-임문철 신부-
성령기도회나 ME 강의를 나가다 보면, 가끔 사람들이 예상만큼 모이지 않아
준비한 사람들이 당황해하는 모습을 보기도 합니다. 어떤 날은 거절해야 할
만큼 많은 이들이 오기도 하고, 어떤 날은 그나마 오기로 약속한 이들마저
펑크를 내 이렇게 작은 수로 모임을 진행해야 되나 말아야 되나 고민을 합니다.
그럴 때 봉사자들은 “맛있는 음식을 잔뜩 준비해놓고 기다리는데 아무도 오지
않을 때처럼 황당하고 허망하다”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부인이 된장찌개를 끓여놓고 남편을 기다리다 늦기만 하여도 화가 날 터인데,
임금의 아들 혼인 잔치에 초대받은 이들이 하찮은 일상사를 돌보느라 오지 않고, 초대장을 들고 온 종들을 때리고 죽이니 이런 모독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니
임금이 진노하실 수밖에 없겠지요. 영원한 생명, 영원한 행복이라면서도
하느님에게 거저 얻는 구원이기에 우리가 너무 값싸게 여기는 것은 아닌지요.
하느님이 하도 마음 좋은 분이시라 너무 업신여기는 것은 아닌지요.
억지를 부릴 줄 모르시는 우리 주님, 우리에게 허락하신 자유를 끝까지
존중하시며 우리 스스로 마음을 열기를 기다리시는 우리 주님,
상처받을 줄 뻔히 아시면서도 또 기회를 주시는 우리 주님은 찬미 받으소서.
보이지 않지만 여전히 보는 그 사람이 믿음의 사람입니다.
찢어지고 버려진 예복
-한명수 시인-
태중교우인 나는 생활 속에서 ‘하느님 나라의 의’를 구하기 위해 교회의 가르침대로 봉사하며 사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알고 자랐다. 하지만 세상은 그렇지가 않았다. 세상 사람들은 자기에게 실질적인 이득이 없으면 움직이려 하지 않았고, 그들과 함께 지내는 나 또한 조금씩 그런 물에 젖어들었다.
청소년기를 막 벗어날 무렵 나는 학교 공부뿐 아니라 본당과 교구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기쁜 마음으로 봉사했다. 어느 날 본당 선배가 “미카엘은 참 부지런하구나. 그렇게 많은 일을 해내는 것을 보니 사회에 나가면 돈 많이 벌겠는데!” 하는 게 아닌가. 그때는 그런가 보다 하고 별 생각 없이 지내면서, 교회 일을 참으로 열심히 했다. 그런데 요즈음 그 선배의 말이 가끔씩 떠오른다. ‘돈’이 나의 가치를 좌우하는 것은 아닌지, ‘하느님 나라의 의’를 구하기보다 ‘개인의 의’를 먼저 찾는 것은 아닌지, 어떤 일이 주어지면 기쁜 마음으로 다가가기보다는 나에게 구체적으로 어떤 이득이 생기는지를 먼저 계산하는 것은 아닌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하여 합당한 예복을 준비해야 하는데 오히려 입고 있는 예복조차도 하나씩 벗으며 살아가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마지막 날, 아무 열매도 맺지 못한 채 어둠 속으로 버려지는 것은 아닐까? 찢어지고 버려진 예복을 다시 깁고 다림질해야겠다.
외국의 한 성모 마리아 발현 성지를
-임영숙 -
국제 세미나에 참석했던 길에 관광명소가 된 외국의 한 성모 마리아 발현 성지를 찾게 됐습니다. 워낙 유명한 곳인지라 신자·비신자가 함께 동행한 길이었는데 일행 중 한 분이 우스갯소리로 말했습니다. “한국에서도 성모 마리아 유치 운동을 펼쳐야겠네.” 모두 유쾌하게 웃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다음 말은 조금 듣기 거북했습니다. 얼마 전 바티칸을 방문했을 때 그곳에서 세례를 받기로 했는데 약속한 날에 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귀국 후 그분을 잘 아는 작가 최인호 선생을 만나서 그분도 세례를 받을 마음이 있는 듯하다면서 그 이야기를 했더니 “그분이 하느님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그분을 선택하는 것이지요”라고 했습니다. 주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사람의 의지나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주님의 은총과 축복으로만 가능한 것이라는 말이겠지요.
그분은 분명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뽑히지는 못했습니다.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많지만 뽑히는 사람은 적다”는 오늘 복음은 세례를 받은 신자라 할지라도 항상 자신을 되돌아보는 거울로 삼아야 할 말씀이 아닐까 싶습니다. 하느님의 부르심은 한 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계속되는 것이니까요.
“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 지금 말씀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하신 성모 마리아. 예수님의 “나를 따르라”는 말씀에 즉각 일어나 그분을 따라 나선 제자들처럼 부르심에 적극 응답하는 자세를 가져야겠지요. 그러나 임금의 혼인잔치에 초대받은 사람들이 대수롭지 않게 여겨 밭으로 가고, 장사하러 가고, 그를 부르러 온 임금의 종을 붙잡아 때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했듯이 오늘 우리가 쫓는 명예나 돈, 안락함을 버리고 주님의 부르심에 따르기가 사실 쉽지 않습니다. 부르심에 응답한다는 것은 자신을 버리고 주님 뜻에 따르는 것이니까요.
주님, 제 삶 안에서 당신의 뜻이 무엇인지 항상 헤아리면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저를 이끌어 주옵소서. *

† 예복을 준비하라.
-박상대 신부-
예수께서는 요르단강을 따라 여러 마을들을 거쳐 예리고(요르단강 서쪽 10Km, 예루살렘 북동쪽 36Km)를 지나 예루살렘으로 들어오셨다. 성대한 예루살렘 입성식도 있었다.(마태 21,1-11) 이제 예수님의 활동무대는 이스라엘의 도성 예루살렘이다. 환전상들과 장사꾼들로 오염된 성전까지도 정화하셨다. 예수님의 대담 상대자는 막연한 군중으로부터 이스라엘 백성의 지도자들인 원로들과 대사제들로 바뀌었다.
예복을 준비하라.
오늘 복음은 예수께서 바로 이들에게 들려준 ‘혼인잔치의 비유’이다. 마태오복음에 의하면 나귀를 타고 군중의 환호를 받으며 성대한 행렬을 통하여 예루살렘에 입성하신(21,1-11) 예수께서는 예루살렘 성전을 정화하신 일(21,12-16) 때문에 이미 백성의 지도자들과 한바탕 대립을 벌였다(21,23-27).
이어서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두 개의 비유를 들려주신다. ‘두 아들의 비유’(21,28-32)와 ‘포도원 소작인의 비유’(21,33-43)가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는 숨을 돌릴 틈도 없이 곧바로 ‘혼인잔치의 비유’가 잇따른다. 이 비유가 오늘의 복음이다. 이 시점에서 잠시 숨을 돌리고 정리를 해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마태오복음 20장부터 22장까지에서 모두 네 개의 비유를 대면한다. 그것은 예수께서 예루살렘 상경 중에 제자들을 상대로 말씀하셨던 ① 포도원 일꾼의 비유(20,1-16), 예루살렘에 와서 백성의 원로들과 대사제들에게 들려주신 ② 두 아들의 비유(21,28-32), ③ 포도원 소작인의 비유(21,33-43), 그리고 ④ 혼인잔치의 비유(22,1-14)이다. 네 개의 비유는 모두 하늘나라에 관한 은유법이다.
예복을 준비하라.예복을 준비하라.그런데 비유내용의 강도에 주의해야 한다. 포도원 일꾼의 비유에서는 하느님 나라에 구약의 백성과 신약의 백성 모두가 초대되어 똑같은 차원의 후한 대접을 받지만, 포도원 소작인의 비유와 오늘 혼인잔치의 비유에서는 구약의 백성들이 대접을 받기는커녕 이미 차지한 특권마저 빼앗기고 추방당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물론 그 잘못과 책임은 백성의 지도자들 측에 있다. 오늘 복음이 들려주는 혼인잔치의 비유에서는 구약의 백성들이 맞이하게 될 종말의 심판이 한층 고조되고 있다. 이는 다른 복음서에 비해 마태오가 특별히 강조하는 부분이다.
오늘 복음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 부분은 임금이 자기 아들의 혼인을 위해 베푼 잔치에 초대받은 사람들이 제각기 변명과 이유를 둘러대고는 오기를 거부하자, 임금이 종들을 보내어 아무나 불러들여 잔칫집을 가득 채운다.(1-10절) 이 대목을 거듭 읽어보면 이스라엘의 역사와 딱 맞아떨어짐을 알 수 있다. 하느님께서 구약시대에는 예언자들, 신약시대에는 사도들을 통하여 당신의 구원계획을 알렸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그들을 배척했고 때로는 죽였다.
예복을 준비하라.예복을 준비하라. 이에 대한 하느님의 정의는 실제로 기원후 70년 로마군인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살육하고 성전을 불태우는 사건으로 드러났다. 그들이 구원받을 자격을 스스로 상실한 셈이다. 이렇게 이스라엘의 역사는 비극으로 끝나지만 하느님께서는 새로운 역사의 문을 여시는 것이다. 임금의 종들이 거리로 나가 아무나 잔치에 초대한다는 것은 유다인이나 이방인이나 선인이나 악인이나 할 것 없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하느님 나라의 초대를 받았음을 의미한다.
둘째 부분은 임금이 손님으로 가득 찬 잔칫집을 돌아보다가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을 집어내어 추방하는 장면이다.(11-14절) 이렇듯 길바닥에서 아무렇게나 초대해온 사람들로부터 ‘예복’을 운운하는 임금의 처사는 좀 심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비유의 사실적 표현에서 눈을 떼어 비유의 우의적 표현으로 시선을 옮겨야 한다.
예복을 준비하라.예복을 준비하라. 여기서 예복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것은 외적 치장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에 합당한 내적 자질을 말한다. 이는 곧 예수께서 내리신 산상설교의 가르침으로 무장된 정신이다. 이 정신은 단순히 ‘굳게 마음먹음’이 아니라 ‘실제로 행함’이요, ‘덕행의 열매’를 말한다. 교회는 거룩하나 그 안은 별의별 사람들로 가득 차 있다. 이는 종말에 이르기까지 그럴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종말이 오기 전에 ‘예복’을 잘 갖추어 입어야 한다는 것이다.......◆

-양승국신부-
언젠가 수 백 명이나 되는 교구, 수도회 신부님들과 함께 하나의 중대한 지향을 두고 공동으로 미사를 집전한 적이 있었습니다. 미리 도착한 공문에 분명히 "영대 색깔은 백색"이라고 적혀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깜박깜박 잘하는 저였기에 나중에 보따리를 펼쳐보니 녹색이었습니다.
이를 어쩌나 하다가 "나말고도 나 같은 사람 분명히 몇 사람 있을거야?"하고 입장을 했는데, 왠걸 그날 따라 다 하얀 색깔인데 저 혼자만 녹색이었습니다. 어릴 때부터 남보다 튀는 걸 죽어도 싫어했던 저였기에 "나만 혼자 녹색"이라는 것 때문에 미사시간 내내 안절부절하며 보냈습니다. 녹색 영대로 인해 제가 받았던 스트레스는 참으로 큰 것이었습니다. 모든 사람들 시선이 저한테 쏠리는 것만 같았습니다.
그 때 일을 떠올리며 장소에 맞는 옷을 적절하게 입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특히 장례식이나 결혼식과도 같은 중대사에 참석할 때 장소에 어울리는 복장을 갖추려는 노력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아주 중요한 예절입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반바지에 멜빵에 티셔츠를 입고 장례식에 참석한다면 분명히 "상식 없는" 사람으로 손가락질 받을 것입니다. 결혼식 하객으로 참석한 사람이 동네 공원 산책 나온 사람처럼 추리닝 차림으로 왔다면 분명 예의가 아닐 것입니다.
이런 논리는 하느님 나라에서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하느님 나라의 잔치에 참석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잔치에 어울리는 예복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그 잔치를 위한 예복은 결혼식이나 장례식에 필요한 품위 있는 고급 정장이 절대 아닙니다.
하느님 나라 잔치에 가장 어울리는 예복은 바로 "이웃사랑의 실천"이란 예복입니다. "희생"이란 예복입니다. "겸손", "자선", "기도"란 예복입니다. "고통의 적극적인 수용", "십자가를 기꺼이 짐"이란 예복입니다.
그 모든 예복 중에서도 가장 값진 예복, 예복 중에 예복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란 예복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잔치에 참여하기 위해서 우리는 무엇보다도 먼저 세상이란 낡은 옷을 벗고 예수 그리스도란 새로운 예복으로 갈아입어야 합니다.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예복, 가장 값진 예복을 입은 사람이 바로 성모님이셨습니다. 그분은 온 몸을 온통 오직 예수 그리스도란 예복으로 치장한 분이었습니다. 예복 중에 가장 빛나는 예복, 구원의 빛나는 겉옷인 예수 그리스도만으로 단장한 왕후가 바로 성모님이셨습니다.
<잊지 못할 녹색 영대>
사랑합니다.
"하늘나라는 자기 아들의 혼인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에게 비길 수 있다."
예수님께서는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에게 혼인잔치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초대받은 이들로서 응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이 말씀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반응을 보이지 않았고 마침내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혀 죽였습니다.
혼인잔치는 벌어졌는데 누구의 혼인잔치인지에 대해서 명확히 제시되고 있지는 않습니다. 신랑은 확실합니다. 임금의 아들입니다. 신부는 소개되고 있지 않습니다. 이 복음말씀을 끝까지 읽는다면 신부가 바로 초대받은 이들이면서 동시에 예복을 갖춘자들, 곧 신부임을 알 수 있습니다.
초대받은 이들의 반응은 제 각각입니다. 어떤 이들은 밭에 나갔고 어떤 이들은 장사하러 갔습니다. 이는 자신의 일이 하느님의 일보다 우선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우리도 너무 바삐 살다보니 이들 부류에 끼여 있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어떤 이들은 혼인잔치에 초대하러 다니는 종들을 때리거나 죽이기까지 합니다. 혼인잔치에 들어가고 싶지 않다는 강한 반발심을 볼 수 있습니다. 이들은 세상의 이익을 쫓는 부류에 해당됩니다.
결국 초대받은 이들(유다인들)은 그 초대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거나 무관심함을 보였습니다. 하는 수 없이 하느님께서는 고을 어귀로 가서 선인이든 악인이든 모두 불러오라고 명을 내립니다. 여기에 우리들이 해당됩니다. 하지만 혼인잔치에 초대받은 모든 이들이 예복을 갖추어 입은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예복을 갖추어 입지 않은 이들은 바깥 어두운 곳으로 내던져 집니다. 예복은 복음을 통한 회개와 변화된 삶을 의미합니다. 이로써 하느님 나라의 혼인잔치의 뜻이 명확해졌습니다. 그 잔치는 모든 이들에게 열려져 있지만 선한 일을 한 이들만(예복을 갖추어 입은 이들)이 들어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복음을 통해 얼마나 변화된 삶을 살고 있습니까? 성사와 기도생활을 너무 형식적으로 하는 것은 아닙니까? 진정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변화되고자 하는 마음이 우리에게 있는지 반성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매일의 혼인잔치인 미사에 열심히 참례하면서 후일에 있을 단 한번의 혼인잔치를 준비해야 하겠습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주교회의판 매일미사책의 오늘의말씀 제1독서 판관기 11장29-39절이 선정된 것에 유감스럽게 생각됨..
간략내용...판관 입타에게 주님의 영이 내려 암몬족을 치러 간다...그리고 전투에 앞서 주님께 서원하기를 암몬족을 제 손에 넘겨주시면, 개선하여 입타가 자기집에 들어갈때 제일 먼저 자기를 맞으러 나오는 사람을 주님 제단에서 불에 태워 번제물로 바치겠다고 한다...(제 집에 가면 가장 먼저 반가워 뛰쳐나오는 사람은 당연히 가족일 진대... 애초에 가족을 번제물로???) 주님께서는 암몬족들을 그의 손에 넘겨주어 성읍 스무개를 쳐부수는 대승을 거둔다...(그의 서원이 그렇게 마음에 드셨나?) 승리후 제 집으로 들어서니, 무남독녀 외동딸이 아버지를 반겨 제일 먼저 나온다........그래서 결국 입타는 서원대로 주님께 외동딸을 불태워 번제물로 바친다. 그리고 입타는 그 이후에도 판관노릇을 하며 잘 먹고 잘 산다....
이게 뭐임? 성경? 주님의 뜻?아니지요! 이건 예수님이 반대하고, 예수님의 말씀이 거슬려서 못박아버린 유대교인들의 신관일 뿐 이지요.특히나 구약성경은 결국 그리스도교 경전 이전에 유대교 경전이고, 선민사상에 입각한 유대민족종교의 신관을 기록한 책입니다.
물론 예수님도 구약성경의 근본정신을 부정한것은 아니었지만, 그 안에는 예수님께 단죄받은 수많은 쓰레기도 하느님의 보화와 함께 섞여 있다고 개인적으로 생각합니다.(구약성경안에는 이런 쇼킹한 쓰레기들이 눈에 띄지요..) 그러기에 근세이전 가톨릭에서 평신도에게 성경을 쉽게 허락하지 않은 것이 아닐까요?(종이도 귀했겠지만..)즉 선별해서 잘 읽어야 하고 설명이 필요하다는 뜻이 아닐까요?
그런데 주교회의에서 다른 보화같은 말씀을 제쳐두고, 하필 이 쓰레기같은 구절을 오늘의 말씀으로 선정하여 모든 가톨릭신자들에게 읽게 하고 "주님의 말씀입니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라고 응답하게 하신 이유가 궁금합니다. 즉, "하느님께 서원한 것은 그게 무엇이든 하늘이 두쪽이 나도 지켜야 한다." 라는 점을 강조한것 외에 다른 뜻이 있나요? 이 대목이 그렇게 중요한 성경구절인지 저는 도저히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오늘 미사는 참여할 수가 없네요....쓰레기구절을 듣고, "주님의 말씀입니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라고 응답할 자신이 없습니다.가득한 분심속에 성체를 영할 수는 없기에...알려주십시요. 이 성경구절이 선정된 이유와 해석을....(성경 묻고 답하기 5481남응진(njsa)
하늘나라 잔치의 삶
- 2011. 8.18 연중 제20주간 목요일 -
(판관11,29-39ㄱ 마태22,1-14)
‘하늘나라는 자기 아들의 혼인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에게 비길 수 있다.’
지금 여기서 하늘나라 잔치에 초대 받아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입니다.
바로 매일 미사잔치가 삶은 하늘나라 잔치임을 상징합니다.
하늘나라 미사잔치에 참석한 여러분은 과연 혼인잔치와도 같은 하늘나라의 잔치예복을 입고 있는지요.
누구에게나 열린 하느님의 초대요 은총입니다. 그러나 초대 받았다고, 은총 받았다고 구원이 아니라
초대에 자발적으로 기쁘게 응답했을 때, 또 초대에 응답하여 치열한 삶으로 그리스도의 옷을 입었을 때
구원입니다. 세례 받았다 하여, 수도생활에 불림 받았다 하여 저절로 구원이 아닙니다.
값싼 은총이 아닙니다. 간절하고 절실히 하느님을 찾으며 노력할 때 삶은 은총임을, 감사임을 깨닫습니다.
또 죽음 있어 삶이 은총의 선물임을 깨닫습니다.
하여 사막교부들은 날마다 죽음을 눈앞에 환히 두고 살라하셨습니다.
매일 마지막처럼 하루의 선물에 감사하여 은총의 삶을 살라는 말씀입니다. 삶은 은총이며 과제입니다.
삶이 은총임을 깨달아 알수록 감사와 찬미로 현재의 과제에 투신하게 되며 현재의 과제에 투신할수록
삶이 은총임을 깨닫게 됩니다. 주님 주신 현재의 과제에 충실하여 믿음의 옷, 사랑의 옷, 희망의 옷,
그리스도의 옷을 입고 살 때 지금 여기가 은총 가득한 하늘나라의 삶입니다.
“사실 부르심을 받은 이들은 많지만 선택된 이들은 적다.”
우리 삶을 되돌아보게 하는 주님의 경종의 말씀입니다.
아무리 열심히 살아도 하느님과 무관하게 잔치예복을 입지 않고 살면 선택되지 못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혼인잔치 옷을 입지 않아 잔치에서 추방된 자와 판관기의 판관 입타가 흡사합니다.
주님의 영이 내려 판관이 된 입타는 열정은 많았지만 하느님의 옷을 입지는 않았습니다.
맹목적이고 어리석은 믿음에 눈이 없었습니다. 뭔가 하느님의 뜻을 찾는 치열한 삶이 결여되어있음을 봅니다. 그가 하느님의 뜻을 찾음으로 은총에 맞갖은 지혜의 눈을 지녔더라면 자기 딸을 서원 제물로 바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사람을 신에게 희생 제물로 바치는 관습은 예언자들도 비판했고 율법에서도 금한 일이었습니다.
‘두 달 뒤에 딸이 아버지께 돌아오자, 아버지는 주님께 서원한 대로 딸을 바쳤다.’
입타의 어리석음으로 자초한 비극적인 결말이 마음이 긴 여운으로 남습니다.
삶은 은총이자 과제입니다.
은총만으로 구원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주신 평생과제에 항구할 때, 하느님의 은총에 우리의 노력이 하나 될 때 구원입니다.
하느님께서 각자에게 주신 평생과제에 충실할 때 선사되는 지혜와 겸손, 믿음과 희망 사랑이요
주님 친히 입혀주시는 하늘나라 잔치 예복입니다.
주님은 당신의 초대에 그리스도의 예복을 입고
미사잔치에 참석한 우리들에게 풍성한 은총을 내려주시어
오늘도 주어진 과제에 충실할 수 있게 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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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시고 참고가 되셨으면 감사하겠습니다.그러니 예수님께서도 너희는 아에 맹세하지 마라. 그저 예할것은 예하고 아니오할것은 아니오라고만 하라고 하셨습니다.성경에는 이 보다 더한 내용도 나오는데 일일이 내 잣대로 선을 긋기 보다는지금 나에게 무엇을 말씀하시고자 하는가를 한번 묵상해 보심은 어떨까요.??좋은 삶을 허락하신 주님께 언제 어디서나 감사하며 살 수 있음 참 좋겠습니다.감사합니다.~~작으마한 참조라도.....
아버지 입타의 승리를 기뻐하며 반기는 딸(1859-61)
길앗 사람 입타는 창녀의 아들이었다. 그는 힘센 용사였지만 창녀의 아들이기 때문에
상속권이 없었다. 그래서 집안에서 쫓겨나 건달들과 어울려 지냈다. 그런데 암몬의 자손들이
이스라엘을 침략하여 곤경에 빠지자 입타의 힘이 필요하여 도움을 청하였다.
그러자 입타는 주님께서 암몬을 자기에게 넘겨주면 우두머리가 되는 조건으로 승낙하였다.
입타는 사절을 통해 암몬 자손들의 임금에게 이스라엘을 치는 이유를 물었다.
암몬의 임금은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올라올 때 요르단까지 그들의 땅을
점령하였기 때문이니 그 땅을 돌려달라고 하였다. 입타는 목적지 까지 가는 과정에서
에돔땅을 거쳐 지나가려고 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아 에돔땅과 모압땅을 돌아 아모리족에
이르렀으나 시혼임금이 지나는 것을 허락하지 않고 공격하니 부득이하게 그들과 싸워
그 영역을 차지하게 되었다고 하였다.
그리고 그렇게 삼백 년 동안 살아온 땅을 되찾겠다고 공격하니
주님이 판결을 내려줄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암몬자손들이 임금은
그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러지 그에게 주님의 영이 내려 길앗과 므나쎄를
가로질러 암몬의 자손들이 있는 곳으로 갔다. 그곳에서 입타는 주님께 서원을 하였다.
“당신께서 암몬의 자손들을 제 손에 넘겨만 주신다면, 제가 암몬의 자손들을 이기고
돌아갈 때 저를 맞으러 제 집 문을 처음 나오는 사람은 주님의 것이 될 것입니다.
그 사람을 제가 번제물로 바치겠습니다.”
그리고 나서 입타는 암몬의 자손들에게 건너가서 크게 싸워 이겼다.
그들은 이스라엘의 자손들 앞에서 굴복하였다.
입타가 미츠바에 있는 자기 집으로 돌아는데 그의 외동딸이 손북을 들고 춤을 추며
그를 맞이하였다. 그 딸을 보는 순간 입타는 비탄에 빠져 옷을 찢으며 말하였다.
“아, 내 딸아! 네가 나를 짓눌러 버리는구나. 바로 네가 나를 비탄에 빠뜨리다니!
내가 주님께 약속했는데 그것을 돌이킬 수 없단다.”
그러자 딸이 말하기를,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주님께 직접 약속하였습니다.
주님께서 아버지의 원수인 암몬자손들에게 복수해주셨으니,
이미 말씀하신대로 저에게 해주십시오.” 그리고 두달의 말미를 달라고 하였다.
그 딸은 동무들과 산에 가서 처녀로 죽는 자신을 두고 두달 동안 곡을 하였다.
그리고 딸이 돌아오자 서원한 대로 딸을 바쳤다. 그때부터 이스라엘에 딸들이 집을 떠나
나흘 동안 곡을 하는 관습이 생겨났다.
입타는 여섯 해 동안 판관으로 일하고 죽었다.(판관 11, 1-12, 7)
입타는 이스라엘로부터 소외당한 서자였다.
그러나 그의 용기가 대단함이 이미 이스라엘에 알려져 있었다.
이스라엘이 그를 필요로 하였을 때 그는 교만하지 않았다.
그는 이민족들에게 그들의 불가피한 여정을 잘 설명했고,
이스라엘이 침략에 대응해서 싸웠을 뿐이라고 설득하였다.
그러나 암몬의 자손들은 이스라엘의 여정을 허락하지 않았고
이미 빼앗은 땅을 자신들에게 되돌려 주기를 원하였다.
입타는 이러한 요구가 부당하고 큰 전쟁이 임박하였음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진정한 판관이신 주님께 이 전쟁에서 이길 수 있도록 청하며
사람의 번제물을 서약하였다. 그는 암몬의 자손들을 크게 무찔러 이겼다.
그러나 그의 승리를 반기며 나온 사람은 그의 유일한 사랑하는 딸이었다.
이러한 일이 일어나리라고는 예상치 못하였으므로 그는 깊은 비탄에 빠져 괴로워하였다.
그러나 입타의 딸은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렸다. 그
리고 기꺼이 자신이 번제물이 되겠다고 위로하였다.
그녀는 두달 동안 산에 가서 곡을 하며 스스로 이스라엘을 위하여
번제물이 될 것을 준비하였다.
순결한 입타의 딸이 기꺼이 희생제물이 되는 성경에 나타나는 비극 가운데 하나이다.
하느님은 이사악의 경우를 보더라도 사람을 희생으로 바치기를 원치 않으신다.
그런데 어찌하여 입타는 그런 서약을 하였는가?
이 이야기는 아브라함이 이사악을 희생제물로 바친 이야기와는 대조적이다.
이사악은 자신이 희생제물이 되는 것을 알지 못하고 있었다.
희생제는 아브라함의 믿음으로부터 시작되고 야훼이르에로 완결된다.
그러나 입타의 딸의 희생제는 딸이 기꺼이 희생제물이 되어 아버지의 서약을 완성시킨다.
딸은 아버지의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고 있었다.
서약을 지키는 것은 이스라엘민족을 살리고 아버지를 복권시키는 일이었다.
딸은 아버지가 깊이 고려하지 못한 서약을 완성시킨다.
어린 딸의 용기와 결단은 아버지에게는 비탄이지만 민족을 위하여 피할 수없는 서약이었다.
입타는 아무런 조건없이 주님께 서약을 하였다.
사람을 번제물로 바칠 것을 서약할 정도로 민족의 위기는 급박하였다.
이제 그는 맏배와 다름없는 사랑하는 딸을 바쳐야한다.
이스라엘 민족이 자신의 딸과 같이 소중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서
입타는 진정한 판관이 된다.
이 성경구절을 읽으면 심청전이 떠오른다.
심청은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하기 위하여 스스로 뱃사공에게 팔려가 제물이 된다.
그러나 지극한 효성으로 심청은 죽지 않는다. 여기서도 입타의 딸은 죽지 않는다.
우리 눈에 죽을 뿐이다. 순결한 사람만이 희생의 제물이 될 수 있다.
완전한 사람이 희생의 제물이 되는 것을 장차 예수님에게 보게 될 것이다.
그리고 입타의 딸은 처녀의 몸으로 수많은 신앙의 자녀들을 낳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