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의 주인이 언제 올지 모르니 깨어있어라.
만일 도둑이 밤 몇 시에 올는지 집주인이 알고 있다면
그는 깨어있으면서 도둑이 뚫고 들어오지 못하게 할 것이다.
(마태오 24,42~51)
"Stay awake!
For you do not know on which day your Lord will come.
Be sure of this: if the master of the house
had known the hour of night when the thief was coming,
he would have stayed awake

말씀의 초대
‘우리는 하느님의 인도로 여러분에게 갈 수 있었습니다.’ 바오로는 자신에게 일어났던 모든 일이 주님의 섭리라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자신들을 받아 준 테살로니카 교회에 감사한다. 그들의 신앙생활을 칭찬하며 더욱 굳건히 주님을 섬기라고 격려하고 있다(제1독서). 종말은 아무도 모른다. 그러니 늘 깨어 있어야 한다. 충직한 종은 주인이 언제 오든지 항상 준비되어 있다. 그런 종을 주인은 그냥 두지 않는다. 자신의 재산을 맡기고 신임한다. 주님의 재림을 준비하는 신앙인의 자세도 그래야 한다(복음).
☆☆☆
오늘의 묵상
충실한 종은 주인이 있든 없든, 주어진 일을 열심히 합니다. 주인의 일을 ‘자신의 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평생 남의 일만 한다고 생각하면 힘이 빠집니다. 남 좋은 일만 한다고 판단하기 쉽습니다. ‘나의 일’이라고 받아들여야 힘이 납니다. 일하는 즐거움이 생겨납니다.
하도 “오라고 하니까 간다.” 이렇게 말해서는 안 됩니다. “하도 ‘레지오 마리애’에 들라고 해서 들었습니다.” 이렇게 말해서도 안 됩니다. 하기 ‘싫은데’ 억지로 한다면 느낌이 올 리 없습니다. 마지못해 ‘들어 주는’ 강론은 언제라도 지겹습니다. 붙잡혀 ‘강제로 봤던’ 고해성사였기에 감동이 오지 않습니다.
“행복하여라, 주인이 돌아와서 볼 때에 그렇게 일하고 있는 종! 주인은 자기의 모든 재산을 그에게 맡길 것이다.” 주인의 재산은 하늘의 힘입니다. 삶을 풍요롭게 하는 ‘영적 에너지’입니다. 무엇이든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면 은총이 함께합니다. 축복을 받는 길은 의외로 가까운 데 있습니다.
피하고 멀리하는 것은 언제나 ‘차선’입니다. 가까이 가고 함께하는 것이 항상 ‘최선’입니다. ‘싫지만 해야 하는 일’은 누구에게나 있기 마련입니다. 그 일에 최선을 다하는 자세가 충실한 종의 모습입니다. 그런 사람은 결국 삶의 기쁨을 만납니다. 그에게 종말은 오히려 기다림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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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 말씀은 “충실한 종과 불충실한 종”의 비유입니다. 한 사람은 충실하였고 다른 이는 불충실하였습니다. 무엇이 두 사람을 갈랐습니까? 기다림의 자세였습니다. 평소와 똑같이 행동했던 사람이 칭찬받습니다. 어떤 상황에 있건 매 순간 최선을 다하라는 가르침입니다.
‘깨어 있는 삶’은 멀리 바라보며 준비만 하는 삶이 아닙니다. ‘지금 여기에서 잘 사는 것’을 말합니다. 있을 자리에 정확하게 있어야 합니다. 말이 아니라 행동이 필요한 곳에는 반드시 가야 합니다. 줄 것은 주고 내야 할 것은 미루지 않는 삶입니다. 충실한 종과 불충실한 종의 구분도 결코 한 번에 결정되지 않습니다. 매일 자신을 돌아보며 사는 이는 불충실한 종이 될 수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불충실한 종은 ‘주인이 늦어지는구나.’ 하고 생각하였기에 깨어 있지 못했습니다. 충실한 종은 주인에 대한 판단을 하지 않았습니다. 주님께서 어떤 모습으로 오시든 우리는 받아들여야 합니다. 축복에는 감사드리고, 시련에는 인내를 청해야 합니다. 결국은 그분께서 깨달음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한결같은 마음은 삶을 바꿉니다. 마음을 바꾸면 모든 것이 달라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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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실은 우리를 흔들리지 않는 자세로 살아가게 해 주는 미덕입니다. 사람들은 늘 성실한 사람들을 좋아합니다. 신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도 성실한 사람을 좋아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에게 보이지 않는 것도 보시는 분이십니다. 다른 사람의 시선이나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늘 성실한 사람들에게 하느님께서는 커다란 상급을 준비해 두십니다.
하느님께서도 성실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깨어 있으십시오
-반영억 라파엘 신부-
늘 준비하고 산다는 것은 지혜로운 삶입니다. 그리고 준비할 수 있다는 것은 깨어있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깨어 있지 않으면 준비할 수 없습니다.
저는 미리 미리 준비하지 못하고 사는 편입니다. 그래서 무엇을 하고 나서는 ‘미리 준비했더라면 좋았을 텐데’ 하고 후회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특히 강의를 부탁 받을 때 여유 있게 준비하지 못하고 날짜가 임박해서 안절부절못합니다. 그러고는 다음부터는 잘해야지 다짐합니다. 그러나 막상 그 결심을 실천에 옮기지 못하고 또 후회합니다.
운동선수에게 있어서 시합이 이루어지는 날은 희망의 날이고 영광의 날입니다. 노력한 모든 것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는 기회이기 때문입니다. 정성과 땀이 함께 했으면 등수에 구애 받을 이유가 없습니다. 설사 실패를 한다 하더라도 그 실패는 다시 일어설 수 있는 발판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깨어있는 사람에게는 실패는 늦추어진 성공이요, 최선을 다한 것이 보상입니다. 그러나 준비 없이 경기에 임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에게는 두려움의 날이 될 것입니다. 그에게 있어서는 패배는 패배일 뿐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하늘을 향한 인생여정의 길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의 종말이 언제 오든 준비하고 있으면 구원의 날을 맞이하게 됩니다. 반드시 올 그날을 지금 준비하면 그날이 언제 오든 두려워할 것이 없습니다. 사실 인생여정의 모두가 구원의 날입니다. 예상하지 못한 날, 짐작하지 못한 시간에 주님께서 심판자로 오신다 해도 깨어 준비한 사람에게는 구원의 영광을 기뻐하게 됩니다. 그러나 깨어있지 못한 사람은 자기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그야말로 심판대에 서게 되고 후회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는 후회해도 이미 늦게 됩니다. 그러므로 기회가 주어진 지금 깨어 준비하고 있어야겠습니다.
순간순간 주어지는 선택의 기회에 옳고 바른 것을, 주님께서 기뻐하시고 마음에 들어 하시는 것을, 그리고 구원을 이루는 선택을 함으로써 후회를 반복하는 일이 없기를 희망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깨어 있으십시오.”(마태24,42) “여러분은 모두 빛의 자녀이며 낮의 자녀입니다. 우리는 밤이나 어둠에 속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다른 사람들처럼 잠들지 말고, 맑은 정신으로 깨어있도록 합시다.”(1테살5,5-6) “정신을 차리고 깨어 있도록 하십시오. 여러분의 적대자 악마가 으르렁거리는 사자처럼 누구를 삼킬까 하고 찾아 돌아다닙니다. 여러분은 믿음을 굳건히 하여 악마에게 대항하십시오.”(1베드5,8)
서울 무상급식 주민투표가 투표율 25.7%로 마감되었습니다. 33.3%에 미달되어 개표조차 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잘사는 사람’과 ‘서민’의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다름을 확인했고 불필요한 사회적 갈등과 분열을 낳았습니다. 경제적 손실도 많아 혈세 182억 원의 선거비용이 들었고, 앞으로도 서울시장 보궐 선거를 치르기 위해서는 300억 원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시장에 출마하려는 사람들의 이해관계가 얽히게 되고 또다시 선거를 하면서 많은 소모적 갈등을 초래할 것이 뻔합니다. 이 손실과 앙금의 해결은 누가 감당해야 합니까? 정신을 바짝 차리고 깨어있지 않으면 이런 전철을 반복할 것입니다. “깨어 있으십시오. 믿음 안에 굳게 서 있으십시오.”(1코린6,13) 사랑합니다.
후회와 미련
-박대남 신부-
‘후회.’ 자신의 일을 제때에, 제대로 하지 못한 이들이 느끼는 허탈하고 아쉬운
마음입니다. 오늘 예수님의 말씀, “깨어 있어라”는 곧 후회하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우리들이 하느님을 믿는 참된 삶을 살면서 동시에 준비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가장 좋은 것, 가장 최고의 것을 보여주시며,
다시 말해 하느님의 구원과 사랑을 보여주시며 이것을 선택하여 후회하지
말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 모든 신앙인들은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삶이 어떤 것인지, 그리고 그 하느님의 사랑을 느끼고 체험하며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사람으로
살아가면서 가끔 인간적인 후회와 미련을 가질 때가 있습니다. ‘왜 하느님께선
내게만….’ ‘괜히 신앙을 가졌어’라는 의문을 던지고 괴로워할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깨어 있음의 시작일 것입니다. 자신의 좋지 않는 마음을
적어도 하느님께 돌리고 있으니 말입니다. 이런 마음을 간직하며 살아가는
충실한 종은 분명 그분의 친구가 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을 탓하고 또 하느님께
자신의 원망을 보내는 것이 좋지 않은 줄 압니다. 물론 이런 것보다 감사와
찬미를 드리는 것이 사람이 해야 할 일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불평과 불만도 사랑하시는 분이십니다. 혼자서만 후회하지 말라고, 그분 사랑과
구원을 놓친 채 그냥 후회만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깨어 있으라 하십니다.

나의 마지막 날을 생각하며

졸음이 밀려올 때
-김광태 신부-
졸면 죽는다.’ 군대의 초소마다 쉽게 발견할 수 있는 이 문구는 우리의 신앙 안에서도 똑같습니다. 늘 깨어 있어야 합니다. 그렇긴 한데, 한편으로 늘 깨어 있기란 또 얼마나 어렵습니까? 설문 결과에 따르면 열심히 활동하는 구역장 반장들 중에서도 냉담하고 싶은 충동을 느낀 사람들의 비율이 상당했습니다.
실제로 주변에서도 이제 좀 쉬고 싶다는 신자들의 불평을 흔히 듣습니다.
이해할 만합니다. 누가 알아주지도 않는데다가 주변의 협조도 없는 가운데 너무 오랫동안 어떤 직책을 수행하다 보면 지치게 되는 것입니다. 운전하다 졸음이 쏟아지면 아무리 노력해도 정신을 가다듬기 쉽지 않습니다. 그럴 땐 휴게소에 차를 대고 잠깐 눈을 붙이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신앙생활 하다가 힘들고 지칠 때 역시 ‘십자가를 져야 구원 받는다’는 당위성만 강조해가지고는 그 상태로부터 벗어날 수 없습니다. 쉬어야 합니다. 단 그냥 쉬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힘을 회복하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특히 하느님의 사랑을 깊이 체험할 수 있어야 합니다. 높은 산으로 올라가 얼굴이 변하신 예수님을 만난 제자들처럼 일상의 삶에서 훌쩍 떠나 하느님의 기운이 머무시는 장소를 찾아가 봅시다.
하느님의 사랑을 진하게 체험하고 나면 더 이상 인내력으로 버티지 않아도 됩니다.

돌보는 이의 행복
-김보경 수녀-
13년 전 큰 어려움에 봉착하여 집에 가서 잠시 몸을 맡길 양으로 가족을 생각하는데, 제일 먼저 언니의 얼굴이 떠올라 깜짝 놀랐다. 평소 어머니께서 나를 두고 ‘딸 셋 중에서 제일 예뻐하는 딸을 하느님께서 데려가셨다’고 말씀하셨고, 나 역시 어머니의 희로애락에 나의 희로애락을 동일시하였기에 당연히 어머니가 떠오를 줄 알았기 때문이다.
며칠 동안 내면작업을 하고 나의 무의식을 알게 되었다. 나보다 2년 8개월 위인 언니는 아홉 살 때부터 어머니 대신 집안일을 도맡았다. 어머니께서 우리에게 아침을 먹이고 일을 나가시면 씻기고 옷 입히고 점심 저녁을 해먹이고 집안을 치우고 심지어 목욕탕에 데려가 때를 밀어준 이도 언니였다. 언니가 야간 고교를 가자 저녁밥 짓는 일이 내 몫이 되면서 언니가 어린 나이에도 그렇게 살뜰히 씻기고 먹이며 돌보아 준 일을 까맣게 잊어버린 것이다. 어머니는 양식과 교육비를 대었지만 나를 돌본 이는 언니였기에 마음 편히 쉬며 몸을 맡기고 싶을 때 언니가 떠올랐던 것이다.
언니는 뇌종양 수술을 받고 후유증으로 몇 달 고생하다가 며칠 전부터 제천에 있는 용하다는 의사에게 치료를 받고 있다. 그런데 내가 전에 발이 아팠다는 것을 기억하고 제천에 데려가 진료받게 하고 싶다고 시간을 낼 수 있느냐고 전화를 한 것이다. 이미 중년이 된 동생을 여전히 대가도 바라지 않고 돌보려 하는 언니에게 마음속 깊이 감사의 정을 느꼈다. “주님, 당신께서 식솔을 맡기시고 제때에 양식을 내주게 하였던 종이 그렇게 하였을 때에 축복하였듯이, 당신께서 맡기신 두 동생을 한번도 불평하지 않고 성심껏 충실하게 돌본 언니에게 ‘행복하여라, 그렇게 일하고 있는 종’이라 칭찬하여 주시고 축복하여 주소서.”
누군가가 참으로 어려워서 몸을 의탁하고 싶을 때 절로 마음에 떠오르는 사람이 된 이여! 행복하여라. ●
“깨어 있어라.”
-양승국신부-
<은총의 순간이 다가오면>
어느덧 여름의 끝자락에 와있습니다. 무더운 여름 보내시느라 고생들이 많으셨습니다. 저희는 청소년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간 바닷가 캠프장에 와서 그들이 사용했던 담요를 빨고 있습니다. 물기를 뺀 담요들은 대 강당 양철 지붕위에 널어 말립니다.
휴식시간 동안 높다란 지붕 꼭대기에 홀로 앉아있었는데, 그 기분이 이만저만 좋은 것이 아닙니다. 마치도 산 정상에 올라온 것 같습니다. 세상이 다 제 발아래입니다. 멀리 점점이 떠있는 고깃배들 하며, 무인도들이 그림처럼 제 아래로 펼쳐져 있었습니다.
아무리 그럴싸해도 지붕 위에서는 긴장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여기서 졸다가는 바로 응급실로 직행입니다. 오늘 예수님 권고 말씀대로 ‘깨어있어야’ 합니다.
형제들과 단체로 움직일 기회가 많기에 저희는 주로 승합차를 이용합니다. 운전석 옆에 앉은 형제들이 가끔씩 꼬박꼬박 졸기 시작하면, 운전하는 저까지 졸음이 오기 때문에 저희끼리 농담 삼아 몇 가지 ‘선탑자 수칙’을 만들었습니다.
1. 선탑자는 만일의 돌발 사태에 신속히 대처하기 위해 늘 깨어 있는다.
2. 선탑자는 언제나 전방을 예의주시한다.
3. 선탑자는 운전자가 졸고 있는지 여부를 주기적으로 확인한다.
4. 선탑자는 운전자가 늘 깨어있게 도와주기 위해서 최신 버전 농담을 3개 이상 준비한다.
깨어있다는 것, 생각할수록 좋은 것입니다. 운전할 때 선탑자가 정신없이 졸고 있다면 정말 운전할 맛 안 납니다.
강사로 초빙되어 갔는데, 앞에 앉아있는 사람들이 침을 흘려가면서까지 졸고 있다면 그것처럼 맥 빠지는 일은 다시 또 없을 것입니다.
가끔씩 그런 사람 있는데, 단 둘이 마주한 술자리에서 한 사람은 신나게 이런 저런 세상 살아가는 펼쳐놓고 있는데, 바로 앞에 앉은 사람이 술을 못 이겨 잠을 잡니다. 참으로 재미있는 모습입니다. 제가 많이 그랬습니다. 지금 생각하니 그분들께 정말 죄송하고 부끄럽습니다.
깨어있다는 것은 늘 준비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깨어있다는 것은 늘 예의바르다는 것입니다. 깨어있다는 것은 경건하다는 것, 단정하다는 것, 성실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남들이 세상모르게 다 잠들어있는 꼭두새벽에 일어나 하늘을 올려다보신 적이 있습니까? 홀로 깨어있는 체험을 해보는 것, 정말 좋은 일입니다. 더욱 금상첨화인 것은 홀로 깨어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냥 홀로가 아니라 하느님 안에 홀로입니다. 그분과 나 둘이 함께 있는 것입니다.
돌아보니 정말 많은 은총의 날들이 흘렀습니다. 정녕 감사해야겠습니다. 언제일지 모르겠지만, 또 다시 자비의 세월이 흐르던 어느 날 주님께서 우리에게 다가오실 것입니다. 그리고 손을 내미실 것입니다. 그리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자, 이제 그만 일어나야겠구나. 때가 되었구나. 나랑 같이 길을 떠날 순간이다.”
언제일지 모르겠지만 그런 순간이 올 때 지체 없이, 기다렸다는 듯이 일어설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영원을 내다보는 사람
-이기양 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늘 깨어 준비하고 있으라는 가르침을 주십니다.
㰡’그러니 깨어 있어라. 너희의 주인이 어느 날에 올지 너희가 모르기 때문이다. 이것을 명심하여라. 도둑이 밤 몇 시에 올지 집주인이 알면, 깨어 있으면서 도둑이 자기 집을 뚫고 들어오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기 때문이다.㰡“(마태24,42-44)
준비가 없는 삶은 재난을 초래한다는 것을 경고하시지요. 하느님께서 언제 어디에서 어떻게 부르시더라도 충실한 종의 모습으로 따를 수 있도록 준비를 하고 있으라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늘 깨어 준비하는 모습이란 어떤 것을 말하는 것일까요?
이탈리아 예수회 알로이시오 성인이 신학교를 다니던 때에 있었던 일입니다. 하루는 교장신부님이 운동장에서 놀고 있는 어린 신학생들을 불러 세우고 물었습니다.
㰡’5분 후에 이 세상에 종말이 찾아온다면 무엇을 하겠느냐?㰡“
한 학생이 대답했습니다.
㰡’성당에 가서 기도를 하며 종말을 준비하겠습니다.㰡“
또 다른 학생은 이렇게 답했습니다.
㰡’저는 집에 가서 부모님과 함께 종말을 준비했으면 좋겠습니다.㰡“
그때 알로이시오 성인은 이렇게 답했다고 합니다.
㰡’지금 그대로 운동장에서 놀겠습니다.㰡“
그렇습니다. 준비한다는 것은 어느 날 갑자기 수선을 떨며 허둥대는 것이 아니지요. 평소와 다름없이 성실하고 묵묵하게 최선을 다하여 하루 하루를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지나온 과거를 후회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서 살고 또 허황된 미래를 꿈꾸지 않으며 현재를 충실하게 사는 것, 이것이 준비하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물론 여기에서 성실하게 최선을 다한다는 것은 하느님의 뜻에 맞게 사는 삶을 말하지요. 준비하고 깨어 있으라는 오늘 예수님의 말씀은 매 순간 종말을 맞듯이 순간 순간을 성실하게 살아가라는 말씀입니다. 사실 우리에게 있어서 매 순간은 종말이지요. 그 순간은 다시는 돌아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준비된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을 충실한 종과 불충한 종을 예로 들어 설명하시지요. 여기에서 충실한 종은 주인이 맡긴 일에 최선을 다하여 자기 책임을 다하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주인으로부터 인정을 받을 뿐만 아니라 더 큰 상급을 받게 되지요.
반면에 불충한 종은 속으로 주인이 더디 오려니 생각하고 다른 종들을 때리며 술친구들과 함께 먹고 마시기만 하다가 생각지도 않은 날, 짐작도 못한 시간에 돌아온 주인에게 발각이 되어 위선자들이 벌받는 곳으로 쫓겨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충실한 종과 불충한 종의 대조적인 두 모습을 제시하시면서 늘 깨어 준비하는 성실한 삶을 살아갈 것을 우리에게 가르치시지요.
또한 우리가 오늘 복음에서 잊지 말고 짚고 가야할 중요한 부분이 있습니다. 충실한 종과 불충한 종의 비유에서 보듯이 모든 재산의 권리는 주인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마치 자기의 것인 양 으스대며 다른 종들을 때리고 술친구들과 함께 먹고 마시며 방탕한 생활을 한 불충한 종은 결국 주인에 의해 벌받는 곳으로 보내지고 거기에서 가슴을 치며 통곡하였지만 때는 이미 늦고 말았습니다. 참으로 어리석은 모습이지요. 우리가 이 세상에서 누리고 있는 모든 것은 나의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나에게 맡겨주신 것입니다. 이것은 천주교 신자나 불교 신자나 할 것 없이 인간이면 누구에게나 해당되는 진리입니다. 그래서 불가(佛家)에는 㰡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㰡‘라는 말로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인생을 표현하기도 하지요.
우리는 하느님께서 맡겨주신 것을 관리하는 관리인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주인이신 하느님께서 나에게 위탁한 것을 이 세상에 살아 있는 동안 관리하는 것뿐이지요. 그리고는 다시 주인에게 돌아가서 성실한 관리인으로 인정을 받는 것이 우리 삶의 본분입니다. 하느님을 모르는 사람들은 갖추고 누리는 모든 것을 내 것인 양 여기며 살아갑니다. 뿐만 아니라 어떤 때는 내 것으로 착각하는 그 도를 넘어서 재물을 마치 주인처럼 섬기며 살아가기도 하지요. 우리는 이것을 우상숭배라고 부릅니다. 이는 신자나 비신자나 별 차이가 없는 것 같습니다. 하느님이 모든 것의 주인이시며, 우리의 인생이 빈손으로 왔다 빈손으로 가는 것임을 안다면 그렇게 살지는 않을 것입니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생각지도 못한 때, 짐작도 못한 시간에 다가옵니다. 우리는 죽음을 만날 때마다 빈손으로 태어나서 빈손으로 죽는 우리의 삶이 재산 관리인에 지나지 않다는 것을 거듭 확인하게 되지요. 주인에게 최선을 다하고 자신의 본분에 충실한 관리인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주인이 맡긴 재산이 자기 것인 양 흥청망청 살거나 또는 필요 이상으로 집착을 한다면 그것은 성실한 종의 모습이 아닙니다. 그런 사람을 두고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지요.
㰡’만일 그가 못된 종이어서 마음속으로 㰡주인이 늦어지는구나.㰡‘ 하고 생각하며, 동료들을 때리기 시작하고 또 술꾼들과 어울려 먹고 마시면, 예상하지 못한 날, 짐작하지 못한 시간에 그 종의 주인이 와서, 그를 처단하여 위선자들과 같은 운명을 겪게 할 것이다. 거기에서 그는 울며 이를 갈 것이다.㰡“(마태24,48-51)
우리는 언제든지 주인이 부르면 달려갈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 부르심에는 순서가 없지요. 아직 젊다거나 할 일이 많다는 이유로 자신에게는 해당이 안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잘못된 판단입니다. 주인이 부르면 언제든지 응답할 수 있도록 성실하게 하루 하루를 준비해야 하겠습니다. 이런 글이 있지요.
㰡’할 일 없이 보낸 오늘 나의 하루가 어제 죽은 그 사람이 그렇게 살고 싶어한 바로 그 내일이다.㰡“
매일 매일을 성실하게 사는 것이 성실한 종의 모습이며, 깨어 준비하라는 오늘 복음 말씀의 실천임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주님과의 관계
-이수철신부-
주님과의 관계의 깊이는 어느 정도인지요?
관계 속에서 살고 있는 우리들입니다.
관계를 떠나선 살 수 없는 우리들입니다.
관계가 잘 될 때는 자유로움을 느끼지만
관계가 잘 안될 때는 답답함을 느낍니다.
“주님은 우리의 하느님이시니 어서와 조배드리세.”
늘 하는 평범한 독서기도 시 초대송 후렴이지만,
주님이신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가 전제되어 있습니다.
사람 간의 보이는 수평적 관계만 있고,
하느님과의 보이지 않는 수직적 관계가 빈약하다면
그 내적 삶은 얼마나 천박(淺薄)하겠는지요.
가끔, 마치 친구 같은 장성한 딸과 팔짱을 끼고
도란도란 이야기하며 걷는 모녀들을 보면
그 친밀한 관계의 모습이 참 아름답고 흐뭇하게 느껴집니다.
한 집에 살아도 다 그런 관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한 집에 살아도 고립 단절되면 남남일 수 있듯이,
한 수도원이나 수녀원에 살아도
하느님과 무관하게 남남으로 살 수 있습니다.
남남으로 살다 이혼하는 부부이듯이,
주님과도 남남으로 살다가 수도원을 떠날 수 있습니다.
새삼 관계의 중요성에 주목하게 됩니다.
우리가 매일 평생 끊임없이 드리는 미사와 기도,
하느님과의 관계를 깊이하기 위함입니다.
그냥 타성적으로 바치는 전례기도가 아니라
하느님 사랑의 표현인 전례요,
이 전례를 통해 하느님과의 사랑의 관계도 깊어집니다.
이래서 깨어 의식적으로 미사와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하느님과의 깊어지는 관계는 저절로 온유와 겸손의 열매로 들어납니다.
오늘 복음과 독서도 이런 관계의 관점에서 보면 그 의미가 명료히 드러납니다.
“깨어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기 때문이다.”
“어떻게 하는 종이 충실하고 슬기로운 종이겠느냐?
행복하여라! 주인이 돌아와서 볼 때에 그렇게 일하고 있는 종!”
늘 깨어 준비하며 주님을 기다리는 성실한 삶의 자세,
바로 주님과의 살아있는 관계의 표현입니다.
이런 이들의 눈빛은 초롱초롱 기대의 기쁨으로 빛날 것입니다.
하느님은 성실하신 분이십니다.
그분께서 당신의 아드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친교를 맺도록
우리를 불러 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님과의 깊은 친교와 더불어
하느님과의 관계도 깊어지는 우리들입니다.
그분께서는 우리를 끝까지 굳세게 하시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흠 잡을 데가 없게 해 주실 것입니다.
이 거룩한 성체성사를 통해
하느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과 평화가
여러분에게 내리기를 빕니다.
아멘.

깨어있는 사람과 잠 자는 사람
-강영구신부-
+너희의 주인이 언제 올지 모르니 깨어있어라. 만일 도둑이 밤 몇 시에 올는지 집주인이 알고 있다면 그는 깨어있으면서 도둑이 뚫고 들어오지 못하게 할 것이다.
그대에게
예수께서는 깨어있는 삶을 살 것을 당부합니다.
깨어있다는 것이 무엇일까요? 잠을 자지 않는 것이 깨어있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깨어있기 위해서는 잠을 잘 자야 합니다.
우리는 인생의 삼분의 일을 침대에 누워 잠으로서 보냅니다.
80년을 산다고 가정하면 적어도 25년은 침대 위에서 잠을 자게 됩니다.
잠으로 보내는 25년이 깨어있는 55년을 좌우하게 됩니다.
우리는 하루 24시간 중에 적어도 7시간은 잠을 자게 됩니다.
7시간 동안 깊이 그리고 평화롭게 잠을 자는 사람은 깨어있는 17시간을 알차게 보내게 됩니다. 이런 사람이 깨어있는 사람이 됩니다.
반대로 잠자는 시간이 아깝다고 밤을 새워 일을 하거나
온갖 근심 걱정거리와 갖가지 망상으로 뒤척거리면서 뜬 눈으로 밤을 새우면
깨어있는 시간을 졸음으로 망쳐버리게 됩니다.
이런 사람은 깨어있기는 하지만 잠자는 사람이 됩니다.
깨어있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잠을 잘 잘 수 있어야 합니다.
엄마 품에 안긴 아기가 평화롭게 잠을 잘 수 있는 것처럼
하느님 품에 귀의(歸依)하여 그분께 모든 것을 맡겨드리고 하늘의 뜻(天命)을 따라 사는 사람이 깨어있는 사람이 됩니다.
깨어있기 위해서 하느님 품안에서 잘 자는 사람이 되십시오.(一明
-상지종신부-
오늘 밤 성당 마당에서
내일 장례미사 때 사용할 운구용 수레를 보았습니다.
옆에 있던 청년 벗들에게 한 마디 건넸습니다.
"이 것 보면 뭐 생각나는 거 없니?"
"장례 미사 때 관을 실어나르는 거 잖아요."
"나도 언젠가는 여기에 눕겠지."
다른 친구들은 어떤 느낌을 가졌는지 모르겠지만,
오늘 따라 왠지 이 수레를 보면서 내가 누워있는 것이 떠올려집니다.
언제일지는 모르겠지만, 언젠가는 여기에 눕겠지요.
함께 했던 사람들의 눈물의 전송을 받으면서 홀로 외롭게 떠나겠지요.
아직은 그렇게 실감나지 않습니다.
내가 수레 위에 차가운 시신이 되어 누어 있는다는 것이.
나에게 주어질 가장 확실한 현실이지만
그러나 아직까지는 너무나도 멀리 있기 때문입니다.
그 날이 언제일지는 모르겠지만 그 날 행복하고 싶습니다.
아무리 열심히 살아도 주님 앞에 부족할 뿐이겠지만,
그 날 나의 지난한 삶의 몸짓이
주님께는 아름답게 받아들여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다해도 다할 수 없는 것이 벗들에 대한 사랑이지만,
그래도 그 날 나의 마지막을 지켜보는 이들에게
따뜻한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습니다.
내일 한 형제를 주님께 떠나보내면서,
오늘 내가 떠나 갈 그 날을 생각합니다.
"세상을 이기는 승리의 길은 곧 우리의 믿음입니다."(1요한 5,4
공동체 안에서 깨어 있기
- 한은주-
영국 여행 중에 다벨(‘형제단’이란 의미의 ‘부르더호프’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현재는 지역 공동체명을 쓴다) 공동체에 열흘간 머문 적이 있다. 재침례교도인 그들은 복음에 얼마나 충실한지 유아세례도 인정하지 않고 성인이 되어 신앙의 결단을 위한 수련을 받은 후에 세례를 받는다. 이후 온 가족이 공동체에 헌신하며 살아간다. 오전에는 공동체 내에 있는 농장·목제 완구 공장·세탁실·주방·학교 등에서 일하고, 아이들도 공동체 학교에서 공부한다. 오후 늦게 각자의 가정에 모여 찬양하는 시간을 갖고 저녁 식사는 모든 공동체원 300여 명이 함께한다. 이때는 공동 게임을 즐기는 등 소통의 시간이다.
그들은 이렇게 ‘그들만의 세상’을 꾸려가며 살고 있지만 세상에 대한 관심도 끊어버리지 않았다. 기아에 허덕이는 수많은 이들을 위해 자발적으로 점심을 굶고 있었고, 전문가나 사회운동가들을 초청해 사회문제를 함께 고민하기도 했다. 그들은 사회부적응자나 실패자들이 아니었다.
내가 묵었던 집의 옆집에 사는 헬렌만 하더라도 아빠는 언어학 박사, 엄마는 의사로 독일인들이었다. 그들은 대안적 삶을 찾아 이곳에 들어왔고, 아빠는 이곳 공동체 고등학교에서 교육을 하고 있고 엄마는 공동체의 아픈 이를 돌본다. 전세계 각지에서 복음적 삶을 찾아 이곳에 온 그들은 그야말로 공동체를 위해 자신의 재능을 내놓고 평등하게 나누면서 살아간다. 내가 그곳에 머무는 동안 그들은 내게 한번도 개종을 강요하지 않았다.
다만 하느님을 찬양하고 자연에 순응하며 공동체가 기쁘게 사는 모습을 자연스럽게 보여줄 뿐이었다. 나는 그들과 있는 동안 초대교회 신자들의 기쁨이 이런 것이었겠거니 조심스레 짐작할 수 있었다.
복음 말씀을 글자 그대로 해석해 살아가는 그들처럼 살 수는 없다. 그럼 우리는 어떻게 예수님을 잘 기다릴 수 있을까? 지금 내가 있는 자리에서 노동과 찬양, 감사로 채워지는 삶을 살고, 공동체에게 서로를 기꺼이 내주는 삶을 살 때 가능할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함께 마음과 비전을 나눌 공동체를 찾아보는 것은 정말 시급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