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 처녀의 비유 (마태오 25,1-13)

2011. 8. 26. 오전 6:5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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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8 26일 연중 제21주간 금요일

 열 처녀의 비유

미련한 처녀들은 등잔은 가지고 있었으나 기름은 준비하지 않았다.

한편 슬기로운 처녀들은 등잔과 함께 기름도 그릇에 담아 가지고 있었다. 

(마태오 25,1-13)

 

말씀의 초대

하느님의 뜻에 맞는 생활은 거룩하게 사는 일이다. 그러려면 먼저 가정에서부터 경건하게 살도록 애써야 한다. 아내를 사랑과 존중으로 대하고, 믿음이 없는 사람처럼 처신해서는 안 된다. 그런 생활은 주님의 마음에 드는 삶이 아니다(제1독서). 지혜로운 처녀들은 기름을 넉넉히 준비했지만, 어리석은 처녀들은 기름이 부족했다. 준비하는 자세가 지혜로움과 어리석음을 판가름한 것이다. 종말도 마찬가지다. 늘 깨어 있는 삶이 구원으로 인도한다. 얼마만큼 준비하며 사는지 돌아봐야 한다(복음).

 

 

오늘의 묵상

 

예수님 시대의 유다인 남자는 반드시 혼인을 해야 했습니다. 아내를 갖지 않으면 하느님의 축복도 없다고 믿었습니다. 그런 남자는 많은 제약을 받았고, 마침내 공동체에서 소외당했습니다. 그만큼 혼인을 성스럽게 생각했습니다.
혼인은 반드시 랍비가 집전해야 인정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혼인식 전날부터 대부분의 예비 부부는 금식을 했습니다. 혼인을 경건하게 맞이하기 위해서였습니다. 하지만 결혼식은 주로 밤에 거행되었기에 신랑 신부에겐 여간 고역이 아니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결혼하지 않은 남자는 ‘떠꺼머리 총각’이라 해서 낮춰 불렀습니다. 혼인하지 않은 남녀는 머리를 땋아 늘어뜨리고 다녔는데, 그것을 ‘떠꺼머리’라 했던 겁니다. 사대부 집안에서는 혼인하지 않는 것을 수치로 여겼습니다. 그런 이유로, 죽은 처녀, 총각을 맺어 주는 영혼의 혼례식도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복음의 혼인식을 종말에 비유하십니다. ‘열 처녀’는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모든 사람입니다. 기름이 넉넉했던 처녀들은 혼인식에 들어갔지만, 기름이 부족했던 처녀들은 아쉽게 돌아서야 했습니다. 기름은 무엇을 의미하겠습니까? ‘기쁨’입니다. 기쁨으로 주님을 섬기는 ‘신앙생활’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희망을 만들어 내는 ‘삶의 기쁨’입니다.

 

☆☆☆

오늘 복음에서, 열 처녀가 신랑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에서는 결혼식을 신부 집에서 치렀습니다. 또한 낮에는 덥고 일을 해야 했기 때문에 저녁 무렵에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하루 일을 끝낸 사람들이 홀가분한 기분으로 모여 음식과 잡담을 나누며 신랑을 기다렸을 것입니다.
마침내 신랑이 온다는 소리에 처녀들은 신랑을 영접하려고 등을 들고 밖으로 나가려던 참이었습니다. 그런데 다섯 처녀들의 등불은 기름이 부족하여 점점 꺼져 갔습니다. 결국 그들은 탈락하고 기름이 충분한 처녀들만 신랑 옆에 설 수 있었습니다.
이 이야기의 핵심은 기름입니다. 슬기로운 처녀들은 만일을 대비해 기름을 넉넉하게 준비하였지만 게으른 처녀들은 그것을 소홀히 하였던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교훈은 단순합니다. 우리 역시 그렇게 준비하며 살고 있는지 돌아보라는 것입니다. 준비해야 할 기름이 무엇일까요? 그 기름은 삶의 기쁨입니다. 인생을 기쁘게 살 수 있는 능력입니다. 자녀들이 기쁘게 살기를 바라는 부모처럼 주님께서도 우리가 그러하기를 바라십니다.

☆☆☆

팔레스티나 혼인 잔치는 온 동네의 축제였습니다. 혼인 며칠 전부터 밤에 횃불을 밝히고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며 혼인을 축하했습니다. 그러다가 혼인날 신랑을 맞이하는 것으로 절정을 이룹니다. 신부 측 들러리를 서는 처녀들은 올리브기름에 적신 횃불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갑니다. 한 번 올리브에 기름을 적시면 횃불은 15분가량 불을 밝힌다고 합니다. 그래서 신랑이 올 때를 잘 맞추든가, 그러지 않으면 여유 있게 횃불을 밝힐 기름을 준비해야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시의 이런 혼인 풍속을 예로 드시면서, 신랑을 맞이하는 사람처럼 우리는 언제나 기름을 준비하고 깨어 있어야 한다고 가르치십니다.
신랑을 맞이하려고 밝히는 횃불은 ‘사랑의 불꽃’과 같습니다. 복음에서 비유로 말한 기름은 ‘영적 에너지’와 같습니다. 이 에너지로 어둠을 밝히는 사랑의 불꽃을 타오르게 합니다. 이 영적 에너지가 고갈되었을 때 우리의 사랑은 빛을 잃고 맙니다. 우리가 사랑의 빛을 잃으면 우리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됩니다. 그 어떤 지식도 능력도 믿음도 헛된 일일 뿐입니다(1코린 13,1-3 참조). 우리가 맞이해야 할 신랑이신 주님을 어둠 속에서 찾지 못하게 됩니다. 오로지 사랑으로 사랑이신 주님을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은 우리가 늘 영적으로 충만해 있어야 한다는 뜻을 전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랑이 필요한 곳에 언제라도 사랑의 불을 밝힐 수 있어야 합니다. 영적으로 준비된 사람이 바로 신랑이신 주님을 언제라도 맞이할 수 있는 ‘슬기로운 처녀’입니다

 

 

방심하는 그 날이 심판의 날 

 -반영억신부-

맥시칸의 결혼식과 인도 사람의 결혼식, 그리고 미국인들의 결혼식에 참석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서로 문화가 다르지만 복을 빌어주고 헤어지지 않기를 기원하며 자녀의 풍요를 누리기를 바라는 기원은 비슷하게 느껴졌습니다. 말은 잘 통하지 않지만 신랑신부를 끈으로 묶는 행위라든지 반지를 교환하고 부모가 자녀에게 쌀을 뿌리는 행위를 통해서 복을 기원하는 모습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계약의 선언 후 성모님께 꽃을 봉헌하는 모습을 통해 신앙인의 모습을 새롭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유다인의 결혼 풍습은 약혼을 먼저 합니다. 그리고 약혼으로 법적인 혼인이 성립되지만 약 1년간은 신부가 친정에 머물러 있고 부부관계를 맺지 않습니다. 그러다가 때가 되면 신랑이 친구들과 함께 신부 집으로 갑니다. 신부 집에서는 신부 친구들이 등불을 밝혀 들고 신랑을 마중합니다. 그리고 신랑 일행이 도착하면 함께 들어가 밤새도록 잔치를 벌입니다. 왠 등불이냐고요? 사막지역은 낮에는 너무 더우니까 밤을 이용하는 거죠. 그렇다면 오늘 비유에 등장하는 처녀들은 신부의 친구들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다섯은 기름을 충분히 준비하였고 다섯은 그러지 못하였습니다. 신랑이 일찍 왔으면 아무런 문제가 없었을 텐데 늦어져서 문제가 생겼습니다. 

사실 등잔에 기름이 없으면 있으나마나 입니다. 따라서 등잔불을 밝히려면 언제나 기름을 준비해야 합니다. 저는 하루일정을 마감하며 자동차의 주유상태를 확인합니다. 혹 급한 일이 있어도 일정거리를 갈 수 있도록 하기해서 입니다. 간혹 미처 확인을 하지 못하는 날이면 하필 그날에 일이 생기고 시간에 쫓기게 됩니다. 하루쯤이야! 하고 방심하는 그날이 심판의 날이 되고 맙니다. “그러니 깨어 있어라. 너희가 그 날과 그 시간을 모르기 때문이다.”(마태25,13)

기름을 채운다는 것은 준비한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새겨듣고 실천에 옮긴다는 말씀입니다. 기름을 준비하지 못하였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도 행하지 않은 사람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7,21)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늘나라의 천상잔치에 참여하기위해서는 늘 깨어 준비해야 합니다. 방심은 금물입니다. 그 날과 그 시간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혼인 풍습은 다르지만 그 안에 예식이 의미하는 알맹이가 있듯 하느님의 나라를 차지 하기위해서는 행동하는 믿음의 알맹이가 있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예기치 않은 시간에 갑자기 오시더라도 더 큰 기쁨으로 감당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할 일 없이 보낸 오늘 나의 하루가 어제 죽은 그 사람이 그렇게 살고 싶어 한 바로 그 내일이다.” 라는 말이 있습니다. 한 순간을 소홀히 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천국에 가면 놀랄 3가지가 있는데 1). 와야 될 사람이라고 생각한 사람이 오지 않은 것이고 2). 못 올 것 같다고 생각한 사람이 와 있는 것이며 3). 내가 거기 와 있다는 것입니다.

 

천국에 가면 남아있는 사람에게 미안한 것도 있는데 1). 이렇게 좋은 곳에 혼자 와 있어서 가족에게 미안하고, 2). 나를 떠나보내고 슬퍼하는 가족들에게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어서 미안하고 3). 내 힘으로 온 것이 아니라 주님의 보혈, 성인들의 통공과 가족, 이웃들의 희생과 기도로 온 것이기에 미안하답니다. 내 공로가 아니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사랑합니다.

 성령충만!

-전삼용신부-

 운전을 하신 분들은 가끔 기름이 떨어져 가는데 주유소를 찾을 수 없어 안타까운 경험을 한 경험이 있으실 것입니다.

제가 처음 차를 샀을 때, 서울에 급한 일이 있어 기름을 넣지 못하고 빨간 연료 등이 들어와 있는 상태로 한참을 다녔습니다. 일을 마치고 서울이니 주유소가 많을 것이라 생각하며 찾았지만 시내에선 좀처럼 찾기 어려웠고 더군다나 차가 많이 막혀서 움직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멈추어 있을 때는 아예 시동을 꺼 놓고 있었습니다. 차가 길 한가운데 멈추어 서서 발생하는 문제도 작지 않지만 기름이 다 떨어져버리면 차의 엔진에도 문제가 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가슴 조렸던 생각이 납니다. 다행히 가까운 곳을 찾아 기름을 가득 채우니 마음이 다 든든하였습니다. 가끔은 주유소에 갈 시간도 부족할 때가 있으니 항상 차의 기름을 충분히 넣어두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항상 주유램프가 들어오기 전에 기름을 채워 넣는 버릇이 생겼습니다.

유학 나와 로마에서 피렌체까지 차로 주행을 해야 할 일이 있었습니다. 돌아올 때 연료를 확인해보니 거의 가득이었습니다. 저는 이정도면 로마까지 충분히 갈 수 있다고 생각을 하고 함께 간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며 고속도로를 달렸습니다. 신학적인 이야기를 시간가는 줄 모르고 주고받다가 무심코 연료게이지를 보았는데 빨간 불이 들어와 있고 연료는 거의 바닥인 것이었습니다.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왜냐하면 얼마 전에 주유소를 지나쳤고 또 남은 주유소도 그 연료로는 도달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차를 길가에 세우고 전화로 도움을 청했습니다. 레커차가 오더니 기름 조금 넣어주고 우리나라 돈으로 30만 원가량을 받아갔습니다. 그리고 깨달았습니다.

“아~ 이게 미련한 처녀들이 졸다가 기름이 부족해 끝까지 못가는 경우구나!”

 오늘 복음은 종말에 관한 것입니다. 종말에 등잔 기름을 충분히 준비해 주었던 처녀들은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그렇지 못하고 기름이 없는 처녀들은 그 곳에 들어가지 못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신랑은 언제 올지 모릅니다. 그래서 언제 오더라도 반가이 맞이할 수 있도록 불 켜진 등잔을 들고 있어야합니다. 마찬가지로 세상 것들에 정신이 팔려 있다가 신랑이 오는 때에 보니 자신의 등잔이 꺼져가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마지막에 구원되기 위해 가장 절대적으로 중요한 것이 ‘항상 기름을 충분히 지니고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비유 말씀에서 가장 핵심적인 것은 ‘기름이 무엇이냐를 아는 것’입니다. 그래야 우리가 기름을 지니고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신랑과 신부가 혼인하기 위해서 사제가 필요합니다. 사제를 통하여 하느님께 혼인서약을 하는 것입니다. 성부와 성자께서도 한 몸이 되시기 위해 성령님이 필요하신 것처럼 모든 하나 되는 것은 하느님 ‘삼위일체’의 모델을 따릅니다. 하찮은 꽃들도 서로 수정이 되기 위해서는 꽃가루를 날라주는 벌이나 바람이 필요하듯이 둘만의 힘으로 하나가 되는 경우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영원하고 유일한 신랑이십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어린 양으로서 천상예루살렘, 즉 교회와 혼인을 하시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신랑은 준비되었지만 신부 측에서 준비되지 않은 것이 있었습니다. 바로 ‘기름’이신 성령님입니다. 인간의 기름통이 원죄와 본죄로 깨어져 기름을 주어봐야 소용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수난과 죽음으로 피를 흘려 인간의 깨어진 상처를 치유해 주셨습니다. 그리고는 성령을 부어주셨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옆구리에서 나온 피와 물의 의미이고 그 피와 물로서 아담의 옆구리에서 하와가 나왔듯이 그리스도의 옆구리에서 그 분과 한 몸이 될 교회가 탄생하게 된 것입니다.

세례 때 먼저 물로 씻고 다음에 크리스마 성유를 바르는 것은, 항상 씻는 것이 먼저고 그래야 성령님이 오신다는 것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도 물에 들어갔다 나온 다음에 성령님께서 비둘기 모양으로 내려오셨습니다.

 문제는 그리스도의 피로 인간의 깨어진 곳이 정화되고 치료되어 기름이 새지 않는다고 하여도 기름을 꾸준히 채워 넣지 않으면 언젠가는 다 소진되어 버린다는 것입니다. 자동차가 한 번 기름을 넣는다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차가 움직이는 동안은 끊임없이 주유소로 가야하는 것처럼, 세례를 받은 우리들도 기도를 멈추지 않아야 오늘의 미련한 처녀와 같은 처지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아침, 저녁 기도나 삼종기도와 같이 시간을 정해놓고 하는 기도들을 권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기름이 다 떨어져가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바로 성령님의 9가지 열매로 알 수 있습니다. ‘사랑’이 줄어들고 사람이 미워지려 한다면, ‘기쁨’이 줄어들고 우울해 지려 한다면, ‘평화’가 깨어지고 초조해지거나 걱정 불안 두려움이 커진다면, ‘절제’가 안 된다면, ‘화’를 참지 못하게 된다면 등으로 자신의 기름 정도를 체크 해 볼 수 있습니다. 성령님이 모든 에너지를 주시는 분이기에 에너지가 떨어진다고 느끼면 기도해야 하는 때인 것입니다.

아무리 기도를 많이 해도 성령님의 열매가 맺어지지 않는 사람은 먼저 그릇의 깨어진 곳이 없는지 살펴야합니다. 적어도 대죄가 없는 은총지위에 있어야 기름이 새어나가지 않습니다. 그리고는 ‘성령 충만’으로 살아가야합니다. 성령님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오시기 때문에 ‘말씀과 성체’를 가까이 하면 됩니다.

오늘 축일을 맞는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랑하십시오, 즉 먼저 성령으로 충만하십시오. 그리고 하고 싶은 대로 하십시오.”

 

 

 



<열 처녀의 비유>

 

마태오복음의 '열 처녀의 비유'(마태 25,1-13)에서 '신랑'은 재림하실 예수님을 뜻하고, '열 처녀'는 그리스도인들을 뜻합니다.

열 처녀가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것은 신앙생활을 뜻합니다.
그런데 '어리석은 처녀들은 등은 가지고 있었지만 기름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라는 3절은 좀 더 내용을 분명히 해둘 필요가 있습니다.

그들이 등만 준비하고 기름을 준비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미리 준비한 기름이 떨어질 때를 대비하지 않았습니다.
뒤의 8절에 '우리 등이 꺼져 가니' 라고 되어 있는 것이 그것을 나타냅니다.

그래서 그들은 어느 정도 등을 켤 수 있는 기름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들의 생각과는 달리 신랑이 너무 늦게 왔기 때문에 기름이 모자라게 됩니다.
'그들의 생각과는 달리 신랑이 너무 늦게 왔다.' 라는 점이 중요합니다.

만일에 그들이 예상했던 시각에 신랑이 왔더라면 기름이 모자라지 않았을 것이고, 기름을 사러 갈 일도 없었을 것이고, 혼인 잔치에 참석하지 못하게 되는 일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면 예정 시각보다 늦게 온 신랑이 잘못한 것인가?
이것은 실제 상황이 아니라 비유 말씀이기 때문에, 이야기 속의 상황이 나타내는 뜻을 잘 생각해야 합니다.

신랑이 언제 올지 아무도 모릅니다.
예상했던 것보다 일찍 올 수도 있고, 아주 늦게 올 수도 있습니다.

종말과 재림은 인간의 생각보다 훨씬 더 빨리 이루어질 수도 있고, 훨씬 더 늦게 이루어질 수도 있습니다.

(8월 30일의 복음 말씀에 나오는 '못된 종'은 그가 예상했던 시간보다 주인이 너무 일찍 왔기 때문에 미처 대비하지 못하고 벌을 받았습니다.

8월 31일의 복음 말씀에 나오는 '어리석은 처녀들'은 자기들이 예상했던 시간보다 신랑이 너무 늦게 왔기 때문에 대비를 못하고 말았습니다.)

신랑의 도착 시간을 마음대로 예상했던 '어리석은 처녀들'의 모습에서 종말이 곧 온다면서 세상을 시끄럽게 만드는 종말론자들의 모습이 연상됩니다.

휴거파 같은 종말론자들은 이상한 근거를 바탕으로 종말의 시간을 계산하고,
그 종말을 대비한다면서 소동을 피우다가, 아무런 일도 안 일어나고 지나가면 계산을 잘못했다고 하면서 다시 계산하거나, 아니면 아예 믿음을 잃어버리거나 합니다.

그들이 곧 닥치게 될 종말을 준비한다면서 하는 행동을 보면, 직업도 버리고 학업도 포기하고 가정도 버리고 한 자리에 모여서 단식기도를 하고 극기고행을 하고 ... 호들갑을 떱니다.

그래서 가족과 이웃에게 상처를 주고, 가정이 파탄 나고, 사회를 혼란스럽게 만들고... 사랑을 거스르는 행동을 하게 됩니다.

예수님을 기다린다면서도 예수님께서 그렇게 강조하셨던 사랑과 선행 실천은 하지 않고 자기 개인의 구원만 바라는 이기적인 모습을 보입니다.

그런데 사실 사도들도 처음에는 주님의 재림이 이렇게까지 늦어질 것이라는 생각을 못하고 자기들이 살아 있는 동안 주님께서 재림하실 것이라고 기대하다가(1테살 4,15), 나중에 그 생각을 바꾸었습니다.

그리고 교회 초기부터 종말론자들은 늘 있었고, 곧 종말이 닥친다고 자기들 마음대로 예상하고 생업을 포기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테살로니카 2서 3장 11절에 언급된 '무질서하게 살아가면서 일은 하지 않고 남의 일에 참견만 하는 자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인데, 곧 종말이 온다는 이유로 일은 하지 않고 남에게 폐만 끼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20세기 말에 그랬던 것처럼 옛날에도 한 세기가 끝나고 다음 세기로 넘어갈 때마다 종말론자들이 많이 나타났습니다.

또 큰 규모로 전염병이 퍼지거나 큰 전쟁이 벌어지거나 대규모 자연재해를 겪게 되면 종말의 재앙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지난 이천 년 동안 계속되었던 어리석은 모습들입니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열 처녀의 비유'를 읽어보면,
신랑이 오기 전까지는 슬기로운 처녀들과 어리석은 처녀들 사이에 차이점이 별로 없습니다.

열 처녀 모두 똑같이 등을 준비했고, 그 등을 켰습니다.
등을 켜고 신랑을 기다리다가 졸게 되고 잠이 든 것도 똑같습니다.
준비한 기름의 양 외에는 차이점도 없고 구별도 되지 않습니다.

어쩌면 재림이 있기 전까지는 누가 구원을 받고 누가 구원을 못 받게 되는지를 구별하고 판단하는 일이 어려울지도 모릅니다.
아마도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쉽게 판단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 자기가 가지고 있는 기름이(신앙생활이) 충분한 것인지,
아니면 모자란 것인지를 잘 살펴야 합니다.
자기 마음대로 '이만하면 충분하다.' 라고 하는 것은 위험한 일입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일상에 대한 진지한 접근>

-양승국신부-

 

언젠가 인천교구 김병상 신부님께서 "기쁨과 사목"이란 소식지에 기고하셨던 글을 읽고 크게 뉘우친 적이 있었습니다. 

신부님께서 사제로 서품되신 직후 한 원로 신부님을 찾아가셨답니다. 인사를 올린 후 "새 사제로서 어떻게 살면 좋겠습니까?"하고 조언을 부탁드렸습니다.  

한참 묵묵히 생각이 잠겨 계시던 신부님은 이런 조언을 해주셨답니다. "자네가 가장 가까이 접하게 될 사람들로부터 신뢰와 존경을 받도록 노력하게나. 언제나 자네 주변에서 가장 수고가 많은 식복사 자매님, 수녀님, 사무실 직원, 사목위원들을 먼저 챙기고 그들에게 정직한 모습, 성실한 사제의 삶을 보이도록 노력하게." 

평범하고 소박한 한 마디 말씀이지만 생각을 거듭할수록 인생의 진리가 담겨있는 소중한 말씀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사실 우리가 가끔씩 만나는 사람들에게 좋은 사람으로 평가받는 일은 아주 쉬운 일입니다. 또한 먼발치에서 바라다보는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기란 쉬운 일입니다. 또 그들에게 "사랑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라고 말하기는 너무도 간단한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와 가장 가까이 살아가는 사람들, 배우자, 부모, 자녀, 직장동료, 친구, 이웃들을 지속적으로 사랑하고 그들로부터 인정을 받기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잘 실감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그 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 그러니 항상 깨어 있어라"고 하시며 마지막 날을 잘 준비하라고 당부하십니다. 

"어떤 모습의 삶이 <마지막 날>을 가장 잘 준비하는 삶이겠는가?" 생각해 봅니다. 제 개인적으로는 무엇보다도 단순하고 소박한 삶, 늘 정리된 삶이 아니겠는가 하고 생각합니다. 기존에 우리가 지니고 있던 소유지향적인 삶, "이것만은 절대로 놓지 않겠다"는 식의 고착된 삶의 양식으로부터 이탈된 삶, 그런 삶이 준비된 삶이 아닐까요? 

예수님의 삶 역시 극도로 단순하고 소박한 삶이었습니다. 매일 다가오는 수많은 문제들과 한계들을 매일 아버지께 맡기고 밤이면 모든 걱정 툭툭 털어 버리고 기쁜 마음으로 잠자리에 들던 삶이 예수님의 삶이었습니다. 당신에게 다가오는 그 누구도 물리치지 않으시고 그들에게 위로와 기쁨을 선사하셨습니다. 특히 가장 가까이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돈보스코 성인의 영성 그 핵심에 "일상의 영성"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일상의 영성은 평신도들의 영성가운데 가장 중요한 부분이기도 하지요.  

일상의 영성은 다름 아닌 매일의 삶에 충실하려는 영성입니다. 무엇보다도 일상의 영성은 매일 만나는 이웃들, 가장 가까이 몸 붙여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충실하려는 영성입니다. 또한 매일 주어지는 작기에 하찮아 보이는 일상의 업무들에 충실한 영성입니다. 아울러 매일 와 닿는 예기치 않았던 고통스런 상황들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영성입니다. 

회개란 거창한 그 무엇이 아니라 일상 안에서 우선 작고 하찮아 보이는 것들을 개선시켜나가는 노력입니다. 이런 일상에 대한 진지함이나 충실함이야말로 주님의 날을 준비하는 가장 중요한 노력일 것입니다. 

누군가의 고백처럼 "일상에 대한 진지한 접근, 인생의 진리는 바로 거기에 있었습니다."

♡ 긴장을 풀고 쉬십시오 ♡

가끔 긴장을 풀고 쉬어야 합니다.
특히 가족들과 함께 즐기십시오.
그러나 느긋이 자신을 가지고 쉬십시오.
당신에게는 하느님이 주신 힘이 있습니다.

당신은 걸을 수 있고, 읽을 수 있고, 글을 쓸 수 있습니다.
당신은 자전거를 타고, 수영을 하고, 생각하고, 뛰고
벌과 꽃에 대해 연구하고, 기도하고, 꽃밭을 가꾸고
아니면 그냥 하루 종일 쉴 수도 있습니다.

어째서 재미없는 판에 박힌 듯한 생활을 합니까?

  -「그대가 성장하는 길(개정판)」 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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