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22주일 (마태16,24-28)8월 28일 성 아우구스티노축일

2011. 8. 28. 오후 9:20:32

글자

 2011년 8월 28일 연중 제22주일

 성 아우구스티노 주교 학자 기념일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354년 북아프리카의 타가스테에서 모니카 성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젊은 시절엔 방탕한 생활을 일삼았고, 또 마니교에 빠져 있었다. 그러나 어머니 모니카의 기도로 회개하여, 당시 이탈리아 밀라노의 주교였던 암브로시오 성인을 만나 그 영향으로 입교하였다. 391년에 사제품을 받았고, 5년 뒤 주교가 되었다. 성인은 수많은 저술을 남겼으며, 이단으로부터 교회를 수호하는 데 일생을 바쳤다. 430년에 세상을 떠난 아우구스티노 주교는 중세 초기부터 ‘교회 학자’로 존경받고 있다.

예수께서는 베드로를 돌아다보시고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장애물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을 생각하는구나!”하고 꾸짖으셨다.

(마태오 16,21~27)

He turned and said to Peter,
"Get behind me, Satan! You are an obstacle to me.
You are thinking not as God does,
but as human beings do."

 

 

 

 

예레미야는 예언자의 아픔을 전하고 있다. 말씀을 전할 때마다 사람들이 비웃기 때문이다. ‘더 이상 그분의 이름으로 말하지 않으리라.’ 이렇게 다짐해도 주님의 말씀은 그를 떠나지 않는다(제1독서). 그리스도인은 언제나 새로운 삶을 살아야 한다. 자신의 몸을 주님 앞에 제물로 내놓을 수 있어야 한다. 그러니 현실에 동화되어서는 안 된다. 늘 주님의 뜻을 찾으며 살아야 한다(제2독서). 베드로 사도는 스승님의 수난과 죽음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렇게 허무하게 돌아가시면 안 된다고 말린다. 인간적 판단이다. 그러기에 예수님의 꾸중을 듣는다. 자신의 뜻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 십자가를 지는 것이다. 누구에게나 자기 몫의 십자가가 있다(복음).

 

 

 

 

 

오늘의 묵상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꾸짖으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수난에 인간적인 안타까움을 드러내던 베드로 사도가 혼이 나는 장면입니다. 아무리 그렇기로서니, 베드로가 몰랐기로서니 “사탄”이란 표현은 너무 심하신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도 듭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이 단호한 말씀 속에는 분명한 가르침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하시는 일을 인간적 감정으로 판단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한 치 앞을 내다보지 못하는 인간이면서 베드로는 간섭하였습니다. 인간적 애정으로 스승님의 앞날에 참견하였습니다. 동기는 순수했지만 베드로가 나설 일은 아니었던 것입니다.
세상은 갈수록 인간 중심으로 바뀌고 있습니다. 당연한 일입니다. 그렇지만 신앙의 중심은 인간이 아니라 하느님입니다. 사람이 하느님을 섬기는 것이지, 주님께서 사람을 섬기는 것은 아닙니다. 믿음을 인간 중심으로 생각하면 착각에 빠지기 쉽습니다. 신앙은 단지 재앙을 피하고 복을 얻는 수단이라는 착각입니다. 점치고 굿하는 기복 신앙과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는 어떤 믿음인지요? 주님께서 중심이 되는 믿음인지, 자기 자신이 중심이 되는 믿음인지 늘 돌아봐야 합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이 어머니 모니카와 대화를 합니다. 어머니 모니카가 말합니다. “현세의 것들은 모두 인간의 영혼에 맞지 않아. 그러기에 사람이 그런 것을 더 많이 추구하면 할수록 더욱더 비참해지고 곤궁해지게 마련이야.” 어머니의 이 말에 아우구스티노가 반박합니다. “무슨 말씀이세요? 만일 이 세상의 것들을 풍족히 소유한 데다 자기 욕심을 제어할 줄 알고 인생의 즐거움을 품위 있게 적당히 즐길 줄 안다면 행복하지 않을까요?” 모니카가 대답합니다. “아니, 아니야! 이 세상 것은 절대로 영혼을 행복하게 할 수가 없어!” 어머니의 이 말에 아우구스티노가 매우 기뻐하며 외칩니다. “얼마나 멋진 대답인가! 그렇다. 행복하고자 하는 사람은 누구나 사라져 버릴 것들을 초월해야 하며, 영원히 남을 것을, 설사 운명이 바뀌더라도 없어지지 않을 것을 추구해야 한다. 오직 하느님만이 그런 특질을 지니셨다. 따라서 오직 하느님 안에서만 행복을 찾을 수 있다!”(레몬 크리스티아니, 『아들아, 내 치마폭에는 눈물과 기도가 담겨 있다』)
어머니와 아들이 얼마나 아름다운 대화를 하고 있는지요? 우리도 아우구스티노 성인의 대답처럼, ‘적당히 절제할 줄 알고 품위 있게 즐기고 사는 것’이 행복이라고 생각하는데, 이것만으로는 우리 삶의 깊은 곳에 깃든 영혼까지 행복하게 만들지는 못한다는 것이지요. 영원한 것이 아니면 참된 행복과는 거리가 멀다고 말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당신 죽음을 예고하시자 베드로가 예수님을 꼭 붙들며 말리고 있습니다. 적당히 사람들에게 존경받으면서 이대로 살자는 것이지요. 그랬더니 예수님께서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하고 베드로를 모질게 나무라십니다. 베드로처럼 ‘적당한 것’, ‘좋은 게 좋은 것’에 머물고자 하는 생각들이 우리의 영적 성장에 걸림돌이 되지요. 영성 생활에서 정지된 상태란 없습니다. 성장하지 않으면 퇴보합니다. 우리의 성장을 가로막는 사탄이 오늘도 우리 안에서 ‘적당히 살라.’고 속삭입니다. 어떻게 대응하고 있습니까?

 

십자가를 사랑하십시오!

 -반영억 라파엘 신부-

찬미예수님, 사랑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변함이 없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사랑은 십자가를 통하여 확실히 드러났습니다. 우리를 위한 사랑때문에 오늘도 여전히 십자가에 매달려 계십니다.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고 십자고상을 끌어안으며 그분 사랑안에 머물러 있기를 희망합니다.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고 성당에서 살다시피한 신자가 있습니다. 그에게는 고통이 없을까요? 그에게도 시련과 고통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가 하느님의 뜻과 정의와 양심에 따라 열심히 살려고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시련을 겪을 수밖에 없는 것은 그의 잘못보다는 이 세상이 불완전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로 그것을 십자가라고 부릅니다. 십자가는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기 위해서 받는 고통, 인간의 도리를 다하기 위해서 받는 고통,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서, 더 많이 사랑하기 위해서 받는 고통을 말합니다.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어떠한 고통이나 결함이 없는 행복만이 있는 삶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고통 안에서 십자가에 버림받은 예수님을 찾아내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짊어지고 수난과 고통의 길을 묵묵히 걸어가신 예수님과 함께 걷는 것입니다. 온갖 조롱과 모욕을 감당하시고 세 번이나 무참히 넘어지셨던 그 십자가의 길을 내가 걷는 것입니다. 

어렵고 힘든 일이 있을 때 “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나이까?”하시던 예수님을 기억하십시오. “이 잔을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듯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아버지, 제 영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하시며 하느님의 뜻을 따른 예수님을 기억하며 우리의 고통도 하느님의 뜻과 일치시켜야 합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 그분의 계획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는 모든 것이 함께 작용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로마8,29)을 알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결국 자기 자신을 죽인다는 말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자기의 견해, 주장, 생각, 바람들을 접고 주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따르는 것입니다. 많은 경우 내 생각이나 바람에 하느님의 말씀을 꿰어 맞추고 합리화 시키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 나를 죽인다는 것은 그분에게 나를 맞춘다는 의미입니다. ‘내가 바라는 하느님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나’가 되는 것입니다. 자신을 알고, 자신에 대하여 더 이상 집착하지 않고 더 큰 것을 위해 보다 작은 것을 포기하는 행위입니다.“주님, 제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사도22,10) 묻고 ‘당신이 저에게 바라시는 일이 무엇인지 알려 주십시오. 저는 저의 뜻을 버리고 당신의 뜻에 저를 맞추겠습니다.’하는 행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주장이 커가는 세상입니다. 가정에서도 공동체 안에서도 사회 안에서도 그렇습니다. 자기 목소리가 커지고 그것을 관철하려 하니까 불협화음이 납니다. 성당 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소위 기도를 많이 하는 사람, 봉사를 많이 한다고 하는 사람도 서로 일치를 이루는 것이 어렵습니다. 하느님 뜻 안에 있다고 하면서도 활동만 있고 사랑이 없습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자신을 희생하며 사랑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묵묵히 걸어가는 사람이 많지 않음에 안타까워합니다. 

세월이 갈수록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자기 자신의 이익을 끊어버리겠다는 단호한 의지와 결심이 더욱 요구됩니다. 하느님의 뜻이라면 그 어떤 것도 받아들여야 합니다. 비록 인간적인 시련과 고통, 고달픔을 감당해야 할지라도 말입니다. 그리하면 하느님께서는 부활이라는 참 생명을 주십니다. 그리고 그 생명을 얻으면 모든 것을 얻은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다 나름대로의 십자가가 있습니다. 어떤 이는 건강, 자녀, 배우자, 친구, 술, 도박이 십자가입니다. 성직자, 수도자가 걸림돌이 될 때도 있습니다. 저도 있고 여러분도 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 행복해 보이는 사람도 그 속을 보면 다 십자가를 안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참고 순종하며 그 십자가를 기꺼이 짊어지면 마지막에는 그 십자가가 우리를 져줄 것입니다. 십자가를 사랑하면 십자가는 우리를 사랑할 것이며, 천상 하느님께로 우리를 이끌어 줄 것입니다. 나의 십자가, 걸림돌이 나를 겸손하게 만들고 기도하게 만들며 침묵하고 희생할 수 있는 기회로 다가 옵니다. 더 많이 사랑할 수 있는 은총의기회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주시는 십자가를 피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두꺼비와 뱀은 앙숙이랍니다. 그래서 둘은 만나기만 하면 독을 뿜어 낸답니다. 그런데 두꺼비가 새끼를 배면 일부러 뱀을 찾아가서 약을 올립니다. 그러면 뱀이 화가 나서 두꺼비를 통째로 삼켜 버립니다. 그러면 두꺼비는 뱀 속에 들어가서 독을 뿜어내고 마침내 뱀의 뱃속에서 숨이 막혀 죽고, 뱀은 두꺼비의 독 때문에 죽게 됩니다. 그런데 긴 시간이 지나고 나면 두꺼비와 뱀이 썩은 시체 안에서 살아나는 새 생명이 있는데 그것이 두꺼비 새끼들이랍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큰 의미를 던져 줍니다. 두꺼비는 자기 종족을 보존하기 위해서 자기 자신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자기를 죽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죽는 것이 아니라 사는 것입니다. 뱀의 입 속으로 뛰어 들어가 자기는 죽는 것인데 거기에서 새 생명이 살아납니다. 

겉으로는 뱀이 이겼지만 속으로는 두꺼비가 이겼습니다. 십자가를 짊어지는 삶이 그렇습니다. 겉으로는 고달프지만 속으로는 주님을 차지하는 기쁨이 있는 것입니다. 천상을 차지하는 복이 거기 있습니다. 영원한 생명의 나라입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썩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아있고 썩으면 많은 열매를 맺게 됩니다.’ 우리가 새 생명에 이르는 길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자신이 죽어야 되는 것입니다. 내 뜻, 내 생각을 접고 주님의 뜻, 주님이 기뻐하시는 것을 선택해야 합니다. ‘누구에게 상처를 받았다고 말하지 않고 그가 나를 희생의 제물로 바쳐준다.’ 고 받아들이면 복됩니다.

그러므로 기회가 되면, 아니 주어지면 기꺼이 “십자가를 지십시오! 그러면 마지막 날에 그 십자가가 나를 져줄 것입니다. “사람의 아들이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천사들과 함께 올 터인데 그때에 각자에게 그 행실대로 갚을 것입니다.”(마태16,27) 따라서 “ 십자가를 사랑하십시오! 내가 십자가를 사랑하면 십자가도 나를 사랑할 것이며, 천상의 하느님께로 나를 이끌어 줄 것입니다.”(성녀 빌리아르) “십자가는 하느님이 당신의 사랑스런 자녀들에게 주시는 선물입니다. 십자가는 하늘로 올라가는 사다리이며, 천당의 문을 여는 열쇠이기도 합니다.”(성 요한비안네) 

집회서를 보면 하느님께서 인간을 만드셨을 때 인간은 자유 의지를 갖도록 하셨습니다. 그리고 자유의지의 사용이 축복과 저주, 생명과 죽음을 갈라 놓습니다. “그분께서는 인간을 제 의지의 손에 내맡기셨다. 네가 원하기만 하면 계명을 지킬 수 있으니 충실하게 사는 것은 네 뜻에 달려 있다. 그분께서 네 앞에 물과 불을 놓으셨으니 손을 뻗어 원하는 대로 선택하여라. 사람 앞에는 생명과 죽음이 있으니 어느 것에나 바라는 대로 받으리라.”(집회15,14-17)라고 말합니다. 천상을 바라면 그에 맞는 선택을 해야 합니다.

오늘 자리가 많이 비었는데 어디를 가셨을까요? 금초를 하러 가신 분이 많으시리라 봅니다. 조상을 위하는 풍습은 좋습니다. 그러나 금초를 하는 것 보다도 먼저 세상을 떠난 이들을 위해서 미사 안에서 기도해 드린다면 그것이 훨씬 중요합니다. 

루가복음9장61-62를 보면 한 사람이 “주님, 저는 주님을 따르겠습니다. 그러나 먼저 가족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게 허락해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습니다. 이때 예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 보는 자는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주님께로 가는 길은 자신을 죽이는 길입니다. 세상일에 미련을 버리는 일입니다. 힘들고 고통스러울 때, 결단을 내리기 어려울 때 우리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부활하신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십자가를 통한 사랑의 승리입니다. 나를 죽이고 포기하는 일이 곧 부활의 영광을 차지하는 길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십자가는 우리 눈과 가슴에만 있을 뿐 아니라 내 안에서 생생하게 생활하고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만일 생활 안에서 십자가에 못 박힌 자가 된다면 주님께서는 분명히 우리를 부활시켜 주실 것입니다.” 아무쪼록 ‘십자가에 못 박혀 달리신 예수님께서 살아있는 교과서’,‘ 삶의 지침서’가 되기를 희망합니다. 언제라도 십자가를 쳐다보며 가야할 길을 발견하고 가야할 길에 용기를 얻기를 기도합니다. 십자가는 우리를 위한 사랑의 표징입니다. 그 사랑에 응답하기 위해 나도 십자가를 집니다. 주님께서 약속한 영광의 미래가 있기에 그 십자가는 가볍습니다. 사랑합니다. 사랑합니다. 

 

그래도 계속 가라

-양승국신부-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죠셉 M 마샬이란 특별한 작가가 있습니다. 그는 인디언 보호구역에서 태어났는데, 현재 교사이자 역사가, 민속학자이자 인디언 전통 공예품 장인으로 활동하고 있지만, 많은 이들 삶의 스승으로도 유명합니다.  그는 간간이 인디언의 전통적인 삶과 철학에서 길어 올린 지혜와 통찰력을 바탕으로 난해한 인생의 문제들에 대해 깊이 있는 해석을 내어놓는데, 이번에 나온 책이 ‘그래도 계속 가라’(Keep Going)입니다.  

저자는 강조합니다.  “인생에 있어 기쁨의 순간은 찰나입니다. 때로 기쁨이 오랜 장마 간간이 먹구름 사이를 뚫고 잠깐 내비치는 햇살처럼 미약하기만 하고 대부분 슬픔과 고통의 연속인 것처럼 보이는 우리네 인생이지만, ‘그래도 계속 가라’고 말입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베드로 사도는 ‘그래도 계속 가라’를 충실히 실천한 분이 틀림없습니다.

베드로 사도가 보여준 모습, 예수님 보시기에 참으로 실망스러운 모습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토록 오랜 시간, 귀에 못이 박히게 강조해왔지만, 오늘 보시다시피 베드로 사도는 전혀 말귀를 알아듣지 못하고 엉뚱한 말을 해대고 있습니다. “맙소사, 주님! 그런 일은 주님께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당신은 힘과 권력을 바탕으로 살상과 정복을 일삼는 세상의 왕이 아니라 비폭력의 하느님, 고통의 메시아, 산 제물로 바쳐질 어린 양임을 그토록 강조해왔건만, 베드로 사도는 아직도 납득하지 못하고 허황된 꿈속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베드로 사도를 향한 예수님의 질책을 매섭기만 합니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아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베드로의 위신이 공개적으로 완전히 찌그러지는 순간입니다. 속까지 환히 들여다보시며 정곡을 찌르는 예수님이 오늘따라 엄청 밉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참혹할 정도로 부끄럽습니다. 

자존심이 구겨진 베드로 사도의 머릿속은 ‘이런 말까지 들어가며 계속 가야 하나?’하는 의구심으로 가득 찼겠습니다. 그러나 베드로 사도의 태도를 보십시오.  그래도 계속 갑니다.  여기에 베드로 사도의 위대함이 있습니다.

삶이 우리를 위해 준비한 것은 행복과 기쁨만이 아닙니다. 때로 온 우주가 우리에게 호의적인 것 같은 때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풀잎 끝에 잠시 맺혀있는 아침이슬과도 같습니다. 눈 깜박할 사이에 우리들의 시야에서 사라집니다.

하느님의 뜻과 사람의 일 "
-
이기양신부-

'냉탕과 온탕을 넘나든다'는 말이 있는데 오늘 베드로 사도의 하루가 그에 해당되는 것 같습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마태 16,15)는 예수님의 질문에 베드로는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마태 16,16)라고 답합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극찬을 받고 천국의 열쇠를 받았지만 바로 이어서 미래에 있을 스승의 수난에 반대하고 나서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마태 16,23)고 호된 야단을 맞습니다
.
 베드로가 '천국의 열쇠' 주인이 되는 영광과 졸지에 '사탄'이라는 극단적인 말을 듣고 얼어붙어 있을 때 예수님의 가르침이 흘러나옵니다
.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마태
16,23)
 베드로뿐만 아니라 세상을 사는 우리에게도 하느님의 뜻과 사람의 일은 끝없는 갈등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하느님의 일을 생각한다는 것, 또 사람의 일만을 생각한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요
?
 

 지금도 미국의 매사추세추주 플리머스항에는 102명의 청교도들이 타고 왔던 메이플라워호가 전시돼 있습니다. 1620년 그들이 지어놓은 우람한 교회도 보존돼 있지요. 그들은 하느님 한 분만을 찾아서 그곳에 와 땀과 눈물로 교회부터 지었습니다. 믿음의 형제들이 하나, 둘 죽어감에도 기어코 교회를 완공했으며 일 년 동안 농사를 짓고 그 추수를 하느님께 드리면서 최초의 추수 감사주일을 지켰습니다. 그들이 지켰던 믿음과 감사와 희생의 씨로 말미암아 그들의 후손은 오늘의 최대 강국인 미국을 이루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똑같은 유럽인들 가운데 황금을 찾아 남미로 간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노다지를 찾았고 황금 덩어리를 캐냈습니다. 그들은 당시 북미로 갔던 청교도인들보다 훨씬 부자가 됐지요. 하지만 그 후손은 지금 가난하게 살고 있습니다
.
 두 예에서 보듯이 하느님의 뜻을 먼저 생각하는 사람과 인간의 일을 먼저 생각하는 사람의 결과는 너무나도 다릅니다. 하느님을 믿고 하느님의 말씀대로 산다는 것, 이것이 바로 신자가 된다는 의미입니다. 똑같은 세상을 살아도 하느님의 뜻을 먼저 실천하는 사람이 신자인 것입니다
.
 사람들은 인생에서 자녀 교육과 재물, 건강 등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여기서 신자와 비신자의 차이는 무엇을 우선에 두는 가에 달려 있습니다. 모두가 자녀들 성공을 위해 헌신한다고 해도 신자들은 세상 사람들과는 달리 자녀들이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도록 교육시켜야 합니다. 그 자녀는 세상에서 성공할 뿐만 아니라 부모의 노후에 큰 보람이 될 것입니다.
 또 세상 사람들이 이웃의 아픔을 외면하고 내 돈 내 마음 대로 쓰는데 무슨 상관이냐며 자신의 안일에만 급급할 때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40)는 주님의 말씀을 가슴에 새기고 나눔의 삶을 실천해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이 신자들입니다
.
 건강에 있어서도 세상 사람들은 온갖 정성을 기울이고 최상의 관리를 하며 살지만 신자들은 영원한 세상을 지향하고 믿기에 죽음에 있어서도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하느님을 알기에 자유로운 자의 노력은 집착과는 거리가 있습니다
.
 오늘 베드로 사도는 잠시였지만 하느님의 일보다 사람의 일을 먼저 생각했다가 예수님께 호된 꾸지람을 들었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기보다는 세상을 따르는 것이 이득이 될 것 같아도 하느님의 길을 걸어가십시오. 그때가 바로 하느님의 은총을 확신할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입니다. 같은 세상을 살고 같은 직장에 다니고 같은 가정생활을 해도 그 안에서 하느님의 뜻을 찾는 것, 바로 그것이 우리 신자들입니다.

 

 

어떤 고난과 역경도 그 속에서 내딛는 미약한 한 걸음보다 강할 수 없습니다.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라
-배광하신부-
착각>
19세기를 지나며 과학자들은 빛의 정체에 대해 새로운 사실을 발견합니다. 빛은 다양한 길이의 파장을 가지고 있는데, 파장이 짧을수록 온도는 더 뜨겁다는 것입니다. 결국 파장이 긴 빨간색보다 파장이 짧은 파란색이 더 뜨겁다는 것입니다. 파란색은 언제나 차가운 색깔로 인식되어 왔었는데, 파란색이 뜨거운 색이었던 것입니다.

나아가 우리의 몸을 이루는 가장 작은 물질이자 시작인 원자 역시 파란색이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것 말고도 인간의 과학이 발전하게 되면서 그동안 우리가 가지고 있던 생각들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 속속들이 밝혀지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늘 크고 작은 착각과 판단, 편견 속에 살고 있습니다. 신앙에서도 이 같은 착각과 편견은 계속되어 왔었습니다.

이를테면, 인간에게 닥치는 모든 고통을 하느님의 탓으로 돌리는 일, 부활만을 꿈꾸며 십자가는 멀리하는 안일한 신앙, 예수님의 자비와 용서와 사랑을 강조하며 심판과 정의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그릇됨, 또는 그 반대의 신앙으로 심판과 징벌만을 강조하는 믿음, 기복적인 신앙만을 추구하며 교회는 복을 주어야 한다고 떼를 쓰는 신앙, 이 모든 그릇된 신앙 뒤에 반드시 존재하는 오류는, 자기 희생의 십자가는 싫고 축복의 부활, 영광, 행복만을 추구하는 믿음입니다.

예수님 십자가의 고난을 반대했던 오늘 복음의 베드로 사도는 그 좋은 예입니다. 그 같은 그릇된 믿음을 추구할 때, 우리 또한 예수님의 심한 꾸중을 듣게 될 것입니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마태 16, 23)

우리의 믿음은 종종 하느님의 뜻이 아닌 자기의 생각, 편견, 착각, 교만함 속에 있어 왔습니다. 그리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는 신앙이 아닌 무엇인가 계속 움켜쥐는 신앙을 추구해 왔습니다. 그러니 자유롭지 못하고 신앙의 참된 기쁨을 만끽하지 못하였습니다.

자유와 기쁨을 살지 못하였기에 십자가는 늘 짐이었고, 신앙의 걸림돌이었습니다. 그 결과는 짜증과 미움과 절망적인 삶으로 나타났습니다. 십자가는 피하면 피할수록 지겨움을 만들고, 불평불만을 하면 할수록 더 큰 짐으로 다가오게 됩니다. 그러나 기쁨으로 받아들일 때는 그 모든 무게가 사라지고 인내가 생겨 힘 있게 안고 갈 수 있게 됩니다.


산 제물>
예레미야 예언자는 주님께서 주신 사명이 너무 벅차 하소연 합니다. 사람들의 놀림감이 되고, 조롱과 치욕이 그를 괴롭힙니다.

우리 또한 참된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같은 아픔을 겪게 됩니다. 직장 동료들이나 가족, 친지들에게 ‘미쳤다’는 소리를 들어야 하고 바보란 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사도 성 바오로의 신학을 한마디로 말하라면 ‘십자가’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만을 바라보고 십자가를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바보로 사는 것, 손해보며 사는 것, 계산적이지 않고 세속적인 이윤의 잣대로 살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기가 너무 힘겨워 울부짖던 예레미야 예언자는 그래도 끝내 하느님 사랑을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분을 기억하지 않고, 더 이상 그분의 이름으로 말하지 않으리라’ 작정하여도, 뼛속에 가두어 둔 주님 말씀이 심장 속에서 불처럼 타오르니, 제가 그것을 간직하기에 지쳐 더 이상 견뎌내지 못하겠습니다.”(예레 20, 9)

우리가 세상에서 십자가를 살기에 너무도 힘겨워 할 때, 주님의 말씀을 의지하며 위로와 용기를 가지면, 말씀 안에서 인간의 힘으로는 감히 형언할 수 없는 주님의 놀라운 권능의 힘을 체험하게 됩니다. 때문에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말씀을 믿는 정도가 아니라, 그 말씀이 우리들 심장 속에서 불처럼 타오르게 만드는 일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오늘 바오로 사도의 말씀처럼 우리 자신을 하느님 마음에 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때에는 세상의 십자가가 결코 고통의 무게로 다가오지 않게 됩니다. 부활은 분명 십자가의 죽음 뒤에 오는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1975년부터 이슬람 국가인 방글라데시에서 가장 가난한 이들과 함께 살고 있는 미국인 ‘봅 멕카일’ 신부는 그곳 방글라데시의 무슬림들이 그리스도교로 개종하면 무얼 주겠냐는 질문에, “당신이 그리스도교를 믿으면 내가 줄 수 있는 것은 고통뿐입니다”라고 대답한다고 하였습니다.
이 짧은 대답에 그리스도교의 신앙과 십자가의 역설적인 신비가 다 담겨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오늘 우리에게 분명히 가르치십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태 16, 24)

 

 

 

댓글 0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

매일말씀묵상

목록 전체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