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8월 29일 토요일 성 요한 세례자의 수난 기념일
말씀의 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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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바른말을 하기가 그리 쉽지 않습니다. 더욱이 권력을 쥐고 있는 사람에게 바른말을 하려면 때로 목숨까지도 각오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의 잘못에 대한 지적을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나탄 예언자가 잘못을 지적했을 때 그것을 인정한 다윗 임금의 태도는 놀랄 만합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잘못을 지적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어떤 마음을 갖습니까? 다른 사람의 잘못을 지적해 주는 일도, 또 자신의 잘못에 대한 지적을 받아들이는 일도 모두 어렵지만, 하느님께서 보시기에는 참으로 좋은 일일 것입니다.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립시다. ☆☆☆ ‘십자가의 길’ 기도는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재연하면서 바치는 기도입니다. “예수님께서 사형 선고 받으심을 묵상합시다.”라는 제1처부터 “예수님께서 무덤에 묻히심을 묵상합시다.”라는 제14처까지 모두가 우리의 가슴을 찡하게 만듭니다. 예수님께서는 사형 선고를 받으시고서도 아무 말씀이 없으십니다. 변명도 비난도 없이 그저 담담히 계십니다. 그분께서는 당신의 죽음을 세상의 모든 억울한 죽음과 함께하셨던 것입니다.
억울함을 당해 보지 않은 사람이 있겠습니까? 참을 수밖에 없는 억울함, 참지 않고서는 어찌할 방도가 없는 그러한 억울함을 당했을 때 무엇을 생각하였습니까? 복수였습니까? 용서였습니까? 아니면 망각이었습니까? 주님께서는 아무런 말씀도 하지 않으신 채 묵묵히 받아들이시며 당신의 길을 가셨습니다. 억울함도 자신의 몫으로 주어진 십자가라면 기꺼이 받아들여야 한다는 가르침입니다.
세례자 요한의 죽음도 억울한 죽음입니다. 그토록 의로웠던 분이 한 소녀의 춤 값으로 희생되셨다니 참으로 어이없는 죽음입니다. 그러나 그 역시 죽음을 기꺼이 받아들였습니다. 자신의 죽음을 이스라엘의 회개를 위한 희생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어떠한 억울함도 희생으로 받아들이며 승화시켜야 한다는 무언의 가르침입니다.
예레미야 예언자는 유다의 임금들과 대신들 앞에서 주님의 말씀을 전해야 했다. 그들과 맞서 싸워야 했던 것이다. 예언자는 위축되어 있지만 주님께서는 용기를 내라고 하신다. 아무도 당해 내지 못할 힘을 주시겠다고 하신다. 주님의 능력이 함께 있는 한, 그는 실패하지 않을 것이다(제1독서). 세례자 요한의 죽음은 예수님의 죽음을 미리 보여 준다. ‘헤로디아’는 의로운 사람을 죽게 했다. 백성의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죽게 한 것과 같은 행위다. 하지만 의인의 죽음은 속죄가 된다. 주님께서는 그를 위로하실 것이다(복음).
무엇이든지 들어 주마.”하고는 “네가 청하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주겠다.
내 왕국의 반이라도 주겠다.” 하고 맹세하였던 것이다
.(마르코 6,17~29)
The king said to the girl,
"Ask of me whatever you wish and I will grant it to you."
He even swore many things to her,
"I will grant you whatever you ask of me,
even to half of my kingd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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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에게 충고를 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더구나 그 대상이 상관이거나 손윗사람일 때 더욱 그렇습니다. 특히 우리 사회는 수평적 관계보다 수직적 위계를 가지고 있어서 올바른 토론 문화가 이루어지지 않는 때가 많습니다. 이런 상하 관계의 분위기에서는 중요한 사안들이 일방적으로 결정되기 쉽습니다. 그래서 책임자 주변에는 충언을 해 줄 사람이 드물고 결정권자의 입맛에 맞장구나 치는 간사한 무리들이 자리를 잡기 쉽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의인 요한이 희생된 모습을 보면 책임자와 그 주변 사람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 줍니다. 복음에 등장하는 인물을 보면 헤로데 임금과 그의 생일잔치에 초대된 고관들과 무관들, 갈릴래아의 유지들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리고 요한을 희생시키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하는 간악한 헤로디아와 그녀의 딸이 있습니다. 그런데 헤로디아의 잘못된 요청에 대하여 그 누구도 거부를 하거나 임금에게 올바르게 말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고관과 무관, 갈릴래아의 유지들이 어떻게 그 기득권을 유지할 수 있었는지를 침묵하고 있는 그들의 태도에서 짐작할 수 있습니다. 자신만 피해 받지 않으면 아무리 의인의 죽음이라도 대수롭지 않습니다.
이런 일은 상하 관계가 존재하는 사회에서, 무릇 교회 안에서조차 일어날 수 있습니다. 결정권자가 사회적으로 영향력이 큰 사람일수록 그 주변의 인물도 중요합니다. 이런 사람들이 끊임없이 바르게 식별하고, 용기 있게 진실을 말하고, 자신 또한 바르게 서 있지 않으면 이 땅의 정신세계를 더욱 황폐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악은 늘 누군가를 희생시키고 어둠의 세력을 넓혀 나갑니다. 사회적으로 책임이 큰 사람과 그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저버린 양심만큼 사회는 병들어 갑니다. 그 사람들이 져야 할 죄 또한 그만큼 크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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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이라는 이름은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은혜로우심을 보여 주신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이 이름의 의미를 새겨들어야 합니다. 사실 요한을 통하여 하느님의 은혜로움이 세상에 드러났습니다. 요한은 메시아의 길을 준비하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는 자기의 세례는 회개를 위한 것이지만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분이 곧 오신다고 말했으며, 수많은 사람들이 회개의 세례에로 인도되었고 그의 능력을 보고 어떤 사람들은 그가 혹 메시아기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계속해서 사람들을 예수님께로 관심을 돌리게 하였고 심지어는 자신은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드릴 만한 자격조차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몇몇 추종자들을 예수님의 첫 제자가 되도록 보내기까지 하였습니다. 메시아 예수님께 대한 그의 태도는 “그분은 더욱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요한3,30)는 것이었습니다. 그가 한 모든 일은 다만 그저 해야 할 일을 했을 따름입니다. 그는 겸손의 사람입니다.
요즘세상은 줄서기를 잘해야 하고 자기에게 줄을 세우려 합니다. 그러나 세례자 요한은 자기의 인기가 오르면 오를수록 그 초점을 예수님께로 향하였습니다. 주님은 바로 오늘도 요한과 같은 사람을 통하여 하느님의 은혜로움이 세상에 전해지기를 바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보다 앞서 온 모든 사람 중에서 가장 위대한 인물로 요한을 지적하시면서 “여자의 몸에서 태어난 사람 중에 세례자 요한보다 더 위대한 인물은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그 말씀다음에 덧붙인 “그러나 하늘나라에서는 가장 미소한 자라도 그 사람보다 더 위대하다.”는 말씀을 기억합니다.
세례자 요한은 자기의 정체성을 확실히 안 사람입니다. 그야말로 분수를 알고 주제파악을 확실히 하여 자기가 있어야 할 자리를 알고 있었습니다. 우리도 각자 자기의 위치를 알고 거기에 알맞은 삶을 살아야하겠습니다. 그리하면 하느님의 나라에서 위대한 사람으로 인정을 받게 될 것입니다.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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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의 헤로데는 예수님 당시 이스라엘 북쪽을 다스리던 ‘헤로데 안티파스’입니다. 그의 아버지는 저 유명한 ‘헤로데 대왕’입니다. 예수님의 탄생을 메시아의 출현으로 여겨 죽이려 했던 사람입니다. 자신의 왕권을 위협한다고 생각했던 것이지요. 결국 그는 예루살렘에 살던 두 살 이하의 남자 아이들을 모두 살해합니다. 헤로데 임금의 잔인한 성격으로 보아 능히 그랬을 것입니다.
말년의 그는 아무도 믿지 못합니다. 그리하여 아내와 장남까지 처형하는 광기를 드러내다가 죽습니다. 그의 유언에 따라 이스라엘은 삼등분되었고, 그의 아들들이 다스렸습니다. 북쪽의 갈릴래아 지방을 맡았던 아들이 ‘헤로데 안티파스’입니다.
안티파스는 로마에서 공부할 때 이복동생의 아내였던 ‘헤로디아’와 가까워졌습니다. 왕이 되자, 그는 아내를 버리고 헤로디아와 재혼합니다. 그녀는 ‘마카베오 가문’의 공주였던 ‘미리암’의 딸로, 정통 유다인이었습니다. 하지만 헤로데 가문은 이방인 출신입니다. 안티파스는 헤로디아와의 혼인으로 신분 상승을 원했던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기에 요한의 죽음을 원하는 아내의 청을 거절하지 못합니다. 의로운 사람인 줄 알면서도 묵인합니다. 세례자 요한은 두 사람의 공모로 살해된 셈입니다. 하지만 요한은 죽음을 기꺼이 받아들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떻게 돌아가실지를 자신의 죽음으로 증명했던 것입니다. 그의 일생은 철저하게 구세주의 앞날을 준비하는 삶이었습니다.
하느님을 선택하는 바보
-반영억라파엘신부-
똑똑하고 잘난 사람이 많으면 힘들어 집니다. 왜냐하면 자기 잘난 맛에 살기 때문입니다. 주장을 굽힐 줄 모르고 계산을 잘합니다. 그래서 자기를 우선적으로 챙깁니다. 그리고 상대를 의식하다가 얼굴이 굳어집니다. 그러나 바보와 함께하면 살기가 수월합니다. 그들은 계산을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기를 챙길 줄도 모르고 웃으며 살아갑니다. 어쩌면 그들이 진짜 똑똑한 사람입니다.
오늘 기억하는 성 요한 세례자는 바보였습니다. 인간적인 계산을 하였더라면 헤로데 왕에게 잘 보여 자기의 권세를 누릴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계산을 하지 못하고 바른 말을 했습니다. 요한은 헤로데 임금이 임금으로서 해서는 안 될 부정한 결혼을 하였다는 잘못을 지적한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목이 베어져 죽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볼 때는 정말 바보였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목숨보다도 하느님의 뜻 안에 머물러있는 것이 행복이었습니다. 결국 요한은 빛이 되었습니다. 그는 인간의 눈에 바보가 될지언정 하느님을 놓치지 않길 희망했습니다.
헤로데 왕은 똑똑하고 잘 난 것 같았지만 하느님 앞에서는 그야말로 진짜 바보였습니다. 모든 권력을 가지고 무엇이든 마음대로 할 수 있으리라 여겼지만 경솔한 말 한마디 때문에, 그리고 헛된 맹세와 체면 때문에 요한의 목을 베도록 명령하였습니다. 몹시 괴로웠지만 결국은 하느님의 뜻을 거역하고 위신과 체면을 선택하는 계산을 하고 말았습니다. 해서는 안 될 일을 하고 말았습니다. 함부로 맹세를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눈에 보이는 성공을 기대하지 말고 어떤 처지에서든지 하느님을 선택하는 바보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창세기26장에 보면 우물을 파는 이사악의 얘기가 나옵니다. 중동지방에서 우물은 한 부족의 운명이 달린 것이기에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우물을 판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물길을 잡는 것도 그렇고 또 모래땅에서 우물을 파기란 어려움 그 자체입니다. 그런데 이사악은 일곱 개나 팠습니다. 열심히 파 놓으면 주위 사람들이 시비를 걸었습니다. 그러면 조용히 자리를 옮겨 또 파고 그러다 보니 일곱 개나 파게 되었습니다.
똑똑하고 잘 난 사람은 우물을 파지 않고 파 놓은 우물을 차지하려 머리를 썼습니다. 그러나 이사악은 그런 풍조에 물들지 않고 바보가 되어 우물파기에 열중했습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내가 너와 함께 있으니 두려워하지 마라”(창세26,24) 하시며 이사악과 함께 하셨습니다. 결국은 바보 이사악이 승리하였습니다. 우물을 빼앗았던 사람들은 똑똑한 것 같았지만 불행하게 살았습니다. 바보처럼 우물을 빼앗기고 또 빼앗겼던 이사악은 마침내 주 하느님을 차지했습니다.
복음에 보면 죽은 이는 요한 세례자이고 살아있는 자는 헤로데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정말로 죽은 자는 헤로데요, 살아있는 이는 요한 세례자입니다. 성 요한 세례자나 이사악이 바보처럼 보였지만 진짜 똑똑이입니다. 그러나 똑똑하다고 했던 사람들은 헛 똑똑이였습니다. 오늘 하루만이라도 하느님을 선택하는 바보가 되길 기도합니다. 사랑합니다.
<예언자>
복음서에는 세례자 요한이 헤로데의 결혼 문제를 비판하다가 죽음을 당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 일에 대해서 세례자 요한이 너무 오지랖이 넓은 것 아니냐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예레미야 예언자가 이런 고백을 한 적이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이 저에게 날마다 치욕과 비웃음거리만 되었습니다.‘그분을 기억하지 않고 더 이상 그분의 이름으로 말하지 않으리라.’ 작정하여도 뼛속에 가두어 둔 주님 말씀이 심장 속에서 불처럼 타오르니 제가 그것을 간직하기에 지쳐 더 이상 견뎌내지 못하겠습니다(예레 20,8-9).
예언자로서 하느님의 말씀을 세상에 전하는 것은 자기가 하고 싶어서 하는 일이기도 하고, 해야 하니까 하는 일이기도 하고, 할 수밖에 없도록 ‘말씀’이 자기 안에서 불처럼 타오르기 때문에 하게 됩니다.
세례자 요한이 오지랖이 넓어서 헤로데의 사생활을 비판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을 헤로데에게 전한 것입니다. 헤로데가 그 말씀을 듣고 회개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헤로데는 회개 대신에 예언자의 입을 막아버리는 쪽을 선택했습니다.
자기 임무를 수행하다가 죽음을 당한 예언자는 순교자가 되는 것이고, 예언자를 죽인 살인자는 하느님의 말씀을 거역했으니 기다리는 것은 멸망뿐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항상 뭔가를 비판하고 꾸짖기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잘하고 있는 사람을 격려하고, 위로하고, 칭찬하는 말씀일 때도 있습니다.
요한 묵시록 2장과 3장을 보면 일곱 교회에 전하는 말씀이 나오는데, 그 말씀들 중에는 칭찬도 있고, 격려도 있고, 꾸중도 있습니다. 어떻든 헤로데와 헤로디아는 하느님에게 혼날 짓을 한 것이 사실입니다. 혼날 짓을 했으니 혼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때 다윗은 즉시 고백합니다. “내가 주님께 죄를 지었소(2사무 12,13).”
사실 다윗의 죄나 헤로데의 죄는 거의 같습니다. 하느님께서 예언자를 시켜서 꾸짖으신 것도 같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회개를 했고, 헤로데는 예언자를 죽였습니다. (그 후에 헤로데 왕실은 몰락하고 멸망했습니다. 다윗은 혹독한 보속을 해야만 했지만 어떻든 용서를 받았습니다.)
지금도 하느님의 말씀은 여러 가지 방식으로 계속 세상에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 말씀을 새겨듣고 실천하면 살겠지만, 듣기 싫다고 자기의 귀를 막고 예언자의 입을 막아버리면 헤로데가 간 몰락과 멸망의 길을 따르게 될 것입니다.
이사야서에 이런 경고가 있습니다. “비와 눈은 하늘에서 내려와 그리로 돌아가지 않고 오히려 땅을 적시어 기름지게 하고 싹이 돋아나게 하여 씨뿌리는 사람에게 씨앗을 주고 먹는 이에게 양식을 준다.
이처럼 내 입에서 나가는 나의 말도 나에게 헛되이 돌아오지 않고 반드시 내가 뜻하는 바를 이루며 내가 내린 사명을 완수하고야 만다(이사 55,10-11).”
- 송영진 모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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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장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 저에게 주시기를 바랍니다.”
<소멸의 가치>
이 한 세상 살아가다보면 참으로 이해 안가는 일들이 많습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 아닐까요? 아직 갈 길이 구만리 같은 한 청춘이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나는 일, 법 없이도 살 착한 사람들이 겪는 끔찍한 고통...
때로 세상은 너무나 불공평합니다. 이 세상에서 불필요한 것들만 소멸했으면 좋으련만 현실은 그렇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오늘 우리가 기억하는 세례자 요한이 그랬습니다. 그는 당대 모든 사람들로부터 기대와 존경을 한 몸에 받던 대예언자였습니다. 단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하느님의 뜻을 성취해나가던 참 신앙인이었습니다.
그런 세례자 요한이었는데, 참으로 안타깝고 어이없는 죽음을 당하게 됩니다. 너무나 기가 차서 말이 안 나오는 황당한 죽음을 급작스럽게 맞이합니다.
이 세상에서 불필요한 것들, 무가치한 것들만 소멸했으면 좋으련만 그렇지 못한 것이 자연의 이치요 우리네 인생인가 봅니다.
그래서 우리가 지금 바라보고 있는 모든 것들이 더욱 특별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매일 습관처럼 만나는 인연들이 더욱 소중합니다.
마치 파리 목숨처럼 순식간에 사라져버린 세례자 요한의 짧았던 생애 앞에 아쉬움과 안타까움이 크겠지만, 그의 죽음에서 반드시 우리는 하나의 의미를 찾아내야만 합니다.
우리네 인생은, 우리네 운명이란 것은 사람의 힘으로 좌지우지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우리에게 매일 다가오는 모든 삶의 국면들을 있는 그대로 수용할 줄 아는 모습입니다.
오늘 우리가 이렇게 건강하게 살아가고, 이렇게 자신감 지니고 살아가지만 내일 우리의 운명이 어떻게 될지 단 한 치 앞도 모르는 것이 사실입니다. 우리의 모든 것은 하느님 그분의 손길에 달려있습니다.
강물이 위쪽에서 아래쪽으로 유유히 흘러가듯, 중력이 위에서 밑으로 작용하듯, 우리네 삶도 물 흐르듯이 흘러가게 놔둘 일입니다.
떨어질 순간이 오면 떨어지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럽고 당연합니다. 밑으로 내려갈 순간이 오면 너무나도 당연히 내려오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렇게 살아가던 어느 날 하느님께서 부르시면 아쉽지만 모든 것 내려놓게 그분께로 나아가는 것은 자연의 이치입니다.
아직 우리가 이 땅위에 두발을 딛고 서있다는 것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아직 뭔가를 기대하고 있다는 것, 그래서 최선을 다해서 하느님의 뜻을 찾고 그분이 원하시는 일을 하는 것, 기꺼이 최선을 다해 삶을 살아내는 것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과제가 아닐까요?
고통의 순간이 다가오면 있는 그대로 견뎌내고, 주어지는 모든 것에 만족하며, 작은 인연조차 소중히 여기며, 절박한 순간조차 유머감각을 잃지 말며, 최악의 순간에도 최선을 다하시는 하느님을 생각하는...
†살레시오회 수도원 수련원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