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8월31일 연중 제22주간 수요일
“나는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다른 고을에도 전해야 한다.
하느님께서는 이 일을 하도록 나를 보내셨다”
(루가 4,38-44)
I must proclaim the good news of the Kingdom of God,
because for this purpose I have been sent."

말씀의 초대
바오로와 티모테오는 콜로새 신자들에게 편지를 쓴다. 그들의 굳건한 믿음과 교우들 간의 친교를 칭찬하고 있다. 교우들은 하늘 나라에 대한 희망으로 현실의 어려움을 잘 극복하고 있었던 것이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시몬의 장모를 고쳐 주신다. 그러자 인근의 수많은 환자들이 그분께 몰려왔다. 가난 때문에 질병을 운명처럼 받아들이던 시절이었다. 주님께서는 그들 모두를 고쳐 주신다. 치유를 통해 하느님의 힘과 권능을 보여 주신 것이다. 행동으로 드러내신 하느님 나라의 선포였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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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찾아온 수많은 환자들을 낫게 하십니다. 정말로 예수님께서 병자들을 고쳐 주셨을까요? 그렇습니다. 모두 고쳐 주셨습니다. 당신께 그러한 능력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요즘도 교회에서 병이 나았다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습니다. 그들의 치유 기적을 여러 사람 앞에서 증언하기도 합니다.
그들의 말이 사실일까요? 진정으로 그들의 병이 나았을까요? 분명 병이 나았을 것입니다. 물론 거짓말하는 이도 있겠지만 신앙으로 병이 낫는 것은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입니다. 누구든 치유의 은혜를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등장하시는 예수님과 지금 우리가 성체를 통하여 만나는 예수님께서는 똑같은 분이십니다.
복음의 예수님께서 병을 낫게 하셨다면 성체의 예수님께서도 병을 낫게 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이천 년이 지났다고 해서 그분의 치유 능력이 사라진 것은 결코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능력을 보여 주시고자 아픈 사람을 낫게 하셨습니다.
의학적인 지식만을 앞세워 질병과 믿음은 무관한 것으로 여기는 사람이 적지 않습니다. 그러나 어떠한 질병도 주님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확신하는 신앙인이 되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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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의학 지식을 앞세워 질병과 믿음을 무관한 것으로 여깁니다. 대부분 그렇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닙니다. 어떤 질병도 주님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분께서 개입하시면 ‘못 고칠 병’은 없는 것이지요. 다만 그러한 청을 ‘감히’ 못 드리고 있을 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많은 병자들을 낫게 하셨습니다. 당신의 능력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성경에는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손을 얹으시어 그들을 고쳐 주셨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작심하시고 병자들을 대하신 것입니다. 이유는 ‘하느님의 나라’를 알리시려는 데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질병도 주님께는 ‘아무것도 아닌 것임’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이렇듯 성경의 치유는 ‘그분의 다스림’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그분의 ‘다스림’을 인정하면, 주님께서는 어떤 형태로든 개입하십니다. 그리하여 질병을 그분의 손길로 보게 합니다. 병을 통해 무엇을 말씀하시려는지 짐작하게 합니다. 병이 사람을 이기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병을 이기게’ 되는 것이지요.
병을 친구라 생각하면 인생의 또 ‘다른 불가사의’와 우정을 맺는 것이 됩니다. 그 우정을 주님께서 주관하신다고 여기면 마음은 달라집니다. 질병을 은총으로 받아들인 사람은 이미 ‘주님의 다스림’ 속으로 들어간 사람입니다.
떠날 때를 알아야 한다
-반영억라파엘신부-
“사랑을 받게 되면 버림받을 때를 생각하고 편안하게 있을 때는 위태로움을 생각하라.”(명심보감)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는 항상 자기의 때를 알고 준비하면서 살아야겠습니다. 살아가면서 연연해하면 결국은 버림을 받게 됩니다. 버림 받기 전에 떠나면 그를 기리고 아쉬움도 남는 법인데 그 때를 못 맞춰서 결국 명예도 잃고 추하게 됩니다. 아쉬움이 남을 때 그 때야말로 떠나야 될 때임을 잊지 맙시다. 칭찬을 받을 때, 그 때가 떠나야 될 때입니다. 칭찬은 좋은 것이기도 하지만 독이 되기 쉽습니다. 영국 속담에는 “바보를 칭찬해 보라. 그러면 훌륭하게 쓸 수 있다”는 말이 있다고 합니다. 칭찬 받은 사람은 하나같이 바보처럼 행동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나자 자기들을 떠나지 말아 달라고 붙들었습니다.”(루가4,42). 치유와 말씀에 사로잡혀 예수님과 오래도록 머물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아쉬움을 남긴 채 떠나십니다.
“나는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다른 고을에도 전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도록 파견된 것이다.”(루가4,33)하시며 현실에 안주하지 않으시고 아버지 하느님의 뜻을 찾으십니다. “성인은 언제나 깨어 있어서, 하늘이 명하는 바를 알고 그것을 따르는 사람이다”(이현주) 주님께서는 언제나 아버지의 뜻 안에 계셨습니다. 한적한 곳을 찾고, 이른 아침 고요한 곳을 찾아 기도한 덕분입니다.
‘네가 아니면 안 된다’고 할 때, ‘네가 꼭 필요하다고 할 때’ 주님이 무엇을 바라시는지를 헤아려야 합니다. 그 얘기가 진심으로 하는 얘기인지, 아니면 듣기 좋으라고 하는 소리인지를 잘 파악해야 합니다.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알고 있는 사람은 그가 떠난 자리가 빛나고 아름답습니다. 어디에든 연연해하지 말고 단순하게 훌훌 털어버릴 수 있는 지혜를 주시길 기도합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세상을 즐기고 싶은 유혹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요한 세례자를 기억해 봅니다. 그는 인기가 참으로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제자들도 많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말합니다. ‘나는 작아 져야 하고 그분은 점점 커지셔야한다.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드릴 자격도 없다.’요한은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고 있었습니다. 분수를 알고 뒤에 오실 분을 위해 자리를 뜨게 됩니다. 바로 우리가 드러내야 할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말재주로 전해지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통해서 증거 됩니다. 그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삶의 모범과 표양을 통해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찬양하게 해야 하겠습니다. 사랑합니다. 많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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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하고 감사하기
- 최성기 신부-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서간들을 보면, 편지를 시작하면서 기억하고
감사한다는 이야기로 시작하곤 합니다. 오늘 독서에도 “여러분을 위하여
기도할 때면 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느님께 감사를
드립니다”(콜로 1,3)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기억하고 기도하는 일, 우리에게
주어진 은혜가 얼마나 크고 복된지를 마음으로 느끼고, 나와 함께 삶을
섞어가며 하느님 나라를 향해 걸어가는 형제 자매들을 기억하는 일, 그리고
이런 여정에 하느님께서 함께하고 계심을 감사하고 찬양하는 일이
신앙 공동체가 걸어갈 길이자 하느님과 일치를 추구하는 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도 홀로 한적한 곳으로 가셨습니다. 결코 할 일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시몬의 장모를 고치는 일부터 시작해서 수없이 밀려드는
사람들을 모두 맞아들여야 했습니다. 아픔과 고통으로 삶의 희망을 잃은
이들에게 희망을 불어넣는 일은 단순히 기적을 행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한
일입니다. 기적을 베푸는 이의 삶이 감사에 찰 때, 하느님과의 일치를
체험할 때 비로소 살아 있는 희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외딴곳에서 머무신 시간은 예수님이 걸으셨던 삶에 대한 기억과
감사를 되살리는 시간, 참된 희망의 힘이 되살아나는 시간, 하느님과
하나임을 확인하는 시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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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위해서입니다
- 김석인 신부-
오늘 복음에서 들려주는 예수님의 행적은 특별한 상황에서 전개되는 것이 아니라 일상 안에서 이루어지는 일임을 알 수 있다. 내가 어릴적에 하루를 마무리를 할 때쯤이면 동네 비석거리에 사람들이 모여들면서 이런저런 소식을 전하고, 길흉사가 있을 때면 모두들 그리로 모여들어 이야기꽃을 피우던 동네 어른들의 모습이 떠오른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집에서 열병을 앓는 장모를 고쳐주셨으니 아픔을 안고 있는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예수님께 모여들었을 것이다. 이렇게 병든 사람들을 고쳐주는 예수님을 보고 아무도 그가 떠나가는 것을 원치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아침 일찍 외딴곳으로 가서 아버지와 친교를 이루신다. 예수님의 모든 능력이 아버지한테서 나오고 또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것만을 항상 하셨으니 아버지와 함께하는 이 시간이 참으로 중요했을 것이다. 이 시간에 와서 그 동네에 머물러 달라고 부탁하는 사람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사명에 대해서 분명하게 말씀하신다. 하늘나라의 기쁜 소식을 다른 고을에도 전해야 하며, 그 일을 위해서 오셨다고 말이다.
복잡하고 바쁜 세상을 사는 우리에게 이 복음은 과연 무엇을 전하려 하는 것일까? 난 예수님이 아니기에 그러한 기적을 행할 수는 없을 것이다. 혹시라도 그런 일이 생긴다면 그것은 분명 성령의 역사일 것이다. 그렇지만 내 곁을 지나치는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관심을 가질 수 있고, 그의 얘기를 귀담아들어 줄 수 있다. 아니면 말없이 그와 함께 있어 줄 수 있다. 이것을 내 일상 안에서 시도해 볼 수 있다. 함께 사는 가족에게, 직장 동료에게, 학교의 모든 동료에게, 길을 가다가 만나는 사람들에게 웃음을 던지는 등 하루에도 수없이 많은 순간이 있을 수 있다. 이러한 순간마다 “예수님, 당신을 위해서입니다!”라고 하면서 항상, 즉시, 기쁘게, 그렇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내가 할 수 있는 복음 선포이며 하늘나라를 전하는 것이다. 그분께서 내 안에 계시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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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쁘게 헤어질 수 있어야 합니다
-상지종신부-
기쁘게 헤어질 수 있어야 합니다.
가지 마세요... 매달리는 사랑하는 이들에게 환한 웃음 지어주며 고마웠습니다...
당신의 사랑 잊지 않을께요... 다른 이들에게도 주님 사랑 나누어야지요...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 기쁘게 내딛을 수 있어야 합니다.
자꾸 자꾸 뒤를 돌아보는 떠나는 이에게 당신 발걸음마다 주님 축복 가득하시기를...
지치고 외로울 때 나와 함께 했던 시간 기억하시면서 힘을 내세요...
힘과 용기를 주며 떠나보낼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이들의 마음 속 따뜻한 자리 언제나 그 안에 머물고픈 마음 간절하지만 주님께서 머무셔야 할 자리 주님께 내어드리고 주님 손길 필요한 누군가 마음의 자리를 찾아 떠날 수 있어야 합니다.
언제까지나 함께 있고픈 마음 간절하지만 부르심 받아 떠나는 길에 행여 마음 무거울까
안녕히 가시라고 웃음 머금은 인사 나누며 떠나 보낼 수 있어야 합니다.
떠나는 이 보내는 이 서로를 애뜻한 마음으로 바라보는 아름다움이 주님을 향한 서로의 눈빛안에 언제나 가득할 것이기에 기쁘게 헤어질 수 있어야 합니다.
떠나는 이 보내는 이
서로에게 주어질 새로운 사랑의 만남을 축하하며 환한 낯으로 서로의 뒷모습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작은 헤어짐은 또 다른 작은 만남으로 이어지고 헤어짐과 만남이 모이고 모여
떠나는 이... 보내는 이... 서로를 이어주며 모두가 우리가 될 때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은 울려퍼질테니까요.
"세상을 이기는 승리의 길은 곧 우리의 믿음입니다."(1요한 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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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승국신부-
오늘은 제가 무척 존경하는 선배 신부님, 보다 더 가난한 아이들을 위해 한국에서의 안정된 기반, 소중한 인연들을 뒤로하고 훌훌 몽골로 떠나신 선교사 신부님으로부터 메일이 도착했습니다.
심신은 비록 고달프지만 가장 도움이 필요한 아이들을 위해 손수 집도 지으시고, 가끔씩 아이들을 위해 팝콘도 튀기시는 신부님, 이 세상 어딜 가도 마땅히 머리 눕힐 곳조차 없어 맨홀 안에서 생활하는 아이들을 찾아다니시는 신부님의 행복해하는 모습이 편지를 통해서 손에 잡힐 듯 했습니다.
"나는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다른 고을에도 전해야 한다. 하느님께서는 이 일을 하도록 나를 보내셨다"고 선포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가장 구체적으로 실천하고 계시는 선배님의 삶이 오늘 따라 더욱 부럽습니다.
"양신부님, 오는 10월 6일 대림동 수도원에서 있을 축제-바자회를 저희 몽골을 돕기 위해 개최한다니 감사하고 감사한 일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래저래 저를 움직이시고 작용하시는 듯 싶습니다.
제가 이곳 길거리 아이들을 위해 몽골에 도착한지 어언 1년, 이제야 하느님께서 저를 이곳에 보내신 뜻을 깨달아 갑니다.
짙은 어둠과 습기로 가득 찬 지하에서도 이곳 몽골 아이들은 천진난만한 얼굴로 촛불을 밝힙니다.
저는 지금 당장 맨홀에 사는 아이들을 위한 게르(몽골집)를 뜯어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야 할 판입니다. 내년 4월까지만 기다려 달라고 했는데 상황이 여의치 않은가 봅니다.
밤잠도 못 이루고 고민하고 있는 중이었는데, 좋은 소식을 보내주시니 정말 감사드립니다. 이래저래 하느님께서는 몽골의 아이들을 돌보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이 아이들과 매일 묵주기도를 바치고 있습니다.
몽골의 아이들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마치 제 어린 시절 친구들의 얼굴을 보는 듯 합니다. 어찌 그리도 꼭 60년대 우리들 모습과 비슷한지 모릅니다.
열악한 조건 속에서도 때묻지 않고 살아가는 이곳 몽골의 <맨홀 속 아이들>을 지상으로 끌어 올려 주고 싶습니다. 맨홀에서 건져낸 아이들과 함께 매일 묵주기도를 바치고 있습니다."
호기심으로 눈동자가 반짝거리는 몽골 아이들에 둘러싸여 진지한 모습으로 설탕을 녹여 소다를 살짝 쳐 젓는 모습, 조심스레 철판 위에 붇고 별 모양의 틀을 찍는 선배 신부님의 모습이 얼마나 기뻐 보이던지...
진정한 복음은 우리 마음속에 고이 간직된 복음, 우리끼리만 열심히 읽고 공부하는 복음, 우리 민족만의 복음이 결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진정한 복음은 점점 보다 큰 동심원을 그리며 세상 방방곡곡으로 퍼져나가는 복음이라고 확신합니다.
오늘도 지구 반대편, 세상 끝 오지에서 비록 당장 눈앞에 나타나는 결과가 뚜렷하지 않지만 꾸준히 복음선포에 매진하는 모든 선교사들의 건강과 행복을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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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환대하셨다.
-이기양 신부-
오늘 독서와 복음은 모두 선교에 관한 내용입니다. 일년 동안 예비신자 한 명씩은 다 봉헌하도록 하자고 전에 제안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랬더니 어떤 분들이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아유, 작년에 괜히 다 해버렸네. 좀 남겨둘 것을…”
부담이 있지요. 많은 신자분들이 선교에 대해서 부담을 갖고 있습니다. ‘내 신앙도 형편없는데 이 상태에서 어떻게 선교를 할 수 있을까?’ 걱정하며 ‘더군다나 교리 지식도 짧고 모르는 것 투성이인데 괜히 이야기했다가 거절당하면 어떻게 하나‘하고 망설입니다. 그리고 나서는 이렇게 엉뚱한 결론을 내립니다.
"선교는 나 같이 주일 미사만 겨우 나오는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니라 총회장님이나 총구역장, 꾸리아 단장 같은 사람들이 하는 것이야."
한편 선교를 하자고 하면 선전문을 들거나 요란하게 띠를 두르고 거리에 나가는 것으로 생각하고 큰 거부감을 나타내고 힘겨워 하기가 쉽지요. 그렇다면 선교는 신앙심이 깊고 교리 지식이 풍부한 사람들만 할 수 있는 일일까요? 아닙니다. 그렇지 않지요.
전에도 한 번 말씀드렸지만 저는 어느 성당에서 8개월 정도의 기간을 갖고 선교 운동을 한 적이 있습니다. 초등부와 중등부, 어른들 모두가 참여한 행사로 학생들은 각 학년별로, 또 어른들은 각 구역별로 나름대로 목표량을 정해주고 함께 할 것을 제안하였지요. 초등부도 유치부부터 6학년까지 실적표를 다 그려 붙여서 어느 학년이 잘 하는지 한 눈에 알아보기 쉽게 만들어 놓았습니다. 잘 하는 어린이한테는 상을 주고, 또 잘하는 학년에는 특별히 칭찬을 해 주며 6개월이 지나갔습니다.
어떤 결과가 나왔을까요? 똑똑하고 많이 아는 6학년 학생들이 제일 잘했을 것 같지요? 그런데 결과는 정반대였습니다. 놀랍게도 유치부 꼬마 어린이들의 결과가 제일 좋았습니다. 처음에 유치부 어린이들은 한 열 명 정도 되었는데 6개월이 지나서 확인해 보니 세배로 늘어 있었습니다. 삼십 명도 넘는 어린이들이 성당 마당에서 신나게 노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었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선교를 잘했을까요? 유치부 어린 꼬마들의 신앙이 뛰어났겠습니까? 아니면 교리 지식이 풍부했을까요? 아닙니다. 답은 유치부 어린이들의 단순함에 있었습니다. 선교는 용기입니다. 선교는 용기를 내는 것부터 시작되지요. 유치부 어린이들은 성당에 안 다니는 자기 친구를 만나면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신부님이 다음 번 성당에 올 때 친구 한 명씩 데리고 오라고 했는데 너 나랑 같이 우리 성당에 가자."
그러면 그 말을 들은 친구는 "그래." 그리고는 따라나섭니다. 그래서 같이 오면 간식도 주고 또 선생님이 잘 왔다고 칭찬도 해주고 하니까 다음에 또 오고 싶어집니다. 이렇게 시작이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선교는 용기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어린이처럼 아주 단순하게 시작해야 하는데 그렇지가 않습니다. 어른들은 생각이 복잡합니다. 6학년만 되도 뭔가 복잡해집니다. 그래서 제일 못하는 학년이 6학년입니다. 자기 생각이 많아지고 이것저것 따지고 재는 것이 많아지지요.
"내가 저 친구에게 말을 했을 때 저 친구가 어떻게 나올까?"
어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사람에게 어떻게 세상과 신앙을 조목조목 이야기해서 완전히 항복시켜 성당으로 끌고 나올까?"
이렇게 생각하면 시작도 못하고 주저앉게 됩니다. 이야기 꺼냈던 사람이 주저앉고 말지요. 처음 시작이 틀렸습니다. 신앙이 어떻고 성사가 어떻고 이 세상이 어떻고 이렇게 시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선교는 아주 사소한 인간적인 동기에서 시작하면 되는 것이지요. 친한 친구가 성당에 다니니까 한번 가서 보고 싶어진다거나, 나무를 좋아하는 이웃이 있으면 어느 날 “나무를 참 좋아하시네요. 우리 성당에 참 멋진 소나무가 있는데 한번 구경 가실래요?” 그리고 그냥 가볍게 한번 와서 보는 겁니다. 오면 나무만 보고 갑니까? 성모님도 보게 되고 성당 건물도 보고 해서 눈에 익숙해지는 것이지요. 또 어떤 경우에 이웃과 나란히 성당 앞을 지나 가다가 “우리 차 한 잔 하고 갈까요?”하고 들어오는 겁니다. 차는 찻집에만 있습니까? 성당에 와서 차 한 잔씩 뽑아들고 편안히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 나누어 보기도 하는 것이지요.
선교는 이렇게 인간적이고 작은 것에서 출발을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출발을 해서 서서히 하느님을 알아 가는 것이지요.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렇다고 이런 인간적인 용기만 있으면 되는 것은 또 아닙니다. 더불어 필요한 것이 있지요.
두 번째로 꼭 필요한 것이 기도입니다. 기도로 준비하지 않으면 선교를 시작했다가 상처를 받기가 쉽습니다. 자존심을 상하고 오히려 내가 흔들릴 수가 있지요. 친구한테 성당에 한 번 가보자고 제안했다가 무안만 받고 친구 관계가 끊어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또 성당에 가자고 하면 얘기 한 즉시 싸구려 장사꾼 취급을 하며 너무 쉽게 반응을 해 버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래서 선교하려고 시도했다가 상처를 받고는 다음에는 말도 못 꺼내고 어색해지고 맙니다.
그러면 선교할 때 오는 그런 부담감을 어떻게 소화하면 좋겠습니까? 방법은 있습니다. 기도하면 됩니다. 기도로 준비하면 충분히 소화해 낼 수 있게 됩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어떤 반응에도 인내할 수 있습니다. 상대방이 거절하면 오히려 당연하게 생각합니다. 여러분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누가 여러분에게 절에 나가자거나 교회에 가자고 하면 “그래, 당장 갑시다.” 이렇게 이야기하시겠습니까?
그럴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리고 성당에 나온다는 것이 얼마나 겁나는 것인지 모릅니다. 우리는 익숙해져 있기 때문에 아무렇지도 않지만 처음에 오는 사람은 “내가 죄가 많은데 성당 갔다가 혹시…” 이렇게 생각하는 것부터 시작해서 낯설고 모르는 것 투성이어서 어쩔 줄 몰라 하지요. 그러므로 성당에 나오는 것을 힘들어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그 사람을 내 입장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 사람의 입장으로 가야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전도하러 오셨다고 하시며 다음 동네에도 이 일을 하러 가야 한다고 거듭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님도 먼동이 트기 전에 일어나 외딴 곳에서 제자들이 찾을 때까지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도 일을 하기 전에 기도하셨는데 하물며 우리야 어떻겠습니까? 피곤하고 지칠 때는 기도를 통해 하느님의 은총을 재충전하고 다시 시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선교하기가 어렵습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선교에서 오는 많은 스트레스를 고스란히 상처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습니다.
복음 선포는 특별한 누구만의 임무가 아니라 모든 신자들이 반드시 해야 할 사명 중의 하나입니다. 그런 면에 있어서 우리 신자들이 일년에 한 명 하느님께 예비신자를 봉헌하는 것이 결코 무리한 일이 아닙니다. 마음 먹고 노력하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지요..
어떤 사람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신부님, 복음 선포는 해서 뭐합니까? 신자들이 많아져봐야 내 신앙에 도움이 되는 것도 아니고.” 아닙니다. 잘못 생각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선교가 교회의 생명이라고 우리 교회에서 이렇게 강조하고 있는 것은 바로 복음 선포가 개인의 신심을 성화 시키는데 첫 번째 큰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을 만나고 싶으면 복음 선포를 하십시오. 여러분의 공동체가 또 가정이 하느님의 성령 안에서 풍성하게 살고 싶으면 복음을 전하십시오. 복음을 전하는 바로 그곳에 주님이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사람의 언행에 주님께서 함께 하십니다. 이것을 저는 사목 경험을 통해 확신하고 있습니다. 신심도 약하고 교리 지식도 짧은데 어떻게 선교를 할 수 있을까 걱정하는 분들이 있다면 걱정말고 복음을 전하십시오. 복음을 전하면 신심이 탄탄해집니다.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면 교리 지식이 나도 모르게 풍부해지지요.
나 개인에게 오신 주님을 이제는 이웃에 전함으로써 더 풍요로운 열매를 맺도록 하는 것은 우리의 의무입니다. 내 신앙을 이제는 개인에서 이웃에게로 넓혀가야 합니다. 그래서 복음선포는 이웃 사랑입니다. 내가 누구를 사랑한다면, 부모를 사랑하고, 자녀를 사랑하고 또 다른 누구를 정말 사랑한다면 복음을 전하게 됩니다. 성서에서 만난 주님, 나의 삶을 정화시켜 주시는 주님을 어떻게 전해주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당연히 전하게 되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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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생활 초기 예수님은 인기가 좋습니다.
초창기에는 예수님도 Populism을 잘 활용하셨던 것일까요?
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을 모두 고쳐주시고 사람들에게서 악령들을 몰아내주시니 인기가 높을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요즘도 치유 은사와 구마의 은사를 받은 사람 주변에 사람이 얼마나 많이 몰립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요즘의 은사 받은 사람들과 다른 점이 있습니다.
대부분의 보통 사람들은 설교나 강의를 잘 하여 인기를 끌면 그 인기를 누리고 유지하기 위해 애를 씁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끊임없이 떠나십니다.
이것은 박수칠 때 떠난다는 그런 뜻도 아니고 떠나면 사람들이 더 열렬하고 극성스럽게 따르게 된다는 그런 전술적인 이유도 아닙니다.
한 마디로 인기 관리 차원에서 떠나시는 것이 아닙니다.
저도 과거의 인연이나 사랑에 머물지 않으려는 사람입니다.
옛날에는 지금보다 훨씬 추상과 같이 떠났습니다.
예를 들어 짧은 본당 사목이었지만 떠난 다음에는 다시 찾아가지 않고 연락이 오기 전에는 제가 아무 연락을 취하지 않는 그런 식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쉬운 것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사람이나 좋은 추억을 버리고 떠나는 것도 쉽지 않지만 그분들의 호의와 사랑을 매정히 끊는 것도 죄송하고 어떤 때는 마음 아프기까지 합니다.
그래도 저의 경우에는 그 사랑에 안주할까봐 그래서 순례자와 나그네의 삶을 살지 못할까봐 떠났습니다.
예수님은 왜 떠나셨을까요?
많은 병자들을 고쳐주시고 악령을 쫓아내신 다음 날 외딴 곳으로 가시자 사람들은 그곳까지 찾아 와 자기들을 떠나지 말아달라고 붙잡을 때 예수님도 뿌리치기 힘드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떠나십니다.
간다는 것은,
-김찬선신부-
그러시면서 앞으로 당신의 삶이 어떤 삶일지 천명하십니다.오늘도 내일도 파견되어 가는 삶임을 천명하십니다.
그런데 간다는 것은 굳이 표현하지 않아도 떠나가는 것입니다.
떠나지 않고는 갈 수가 없으니 말입니다.
그리고 떠나는 것은 또 어떤 식으로든 버리는 것을 뜻합니다.
인기와 인정에 머물지 않을 뿐 아니라 더 적극적으로는 인간의 사랑을 포기하고 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간다는 것은 떠나가는 것 뿐 아니라 그 자체로 향해 감, 즉 목적을 내포하는 것입니다.
목적지가 없다면 방황이겠지요. 방황이 아닌 이상 목적지는 반드시 있는데 예수님의 목적지는 궁극적으로는 아버지가 계신 하느님 나라요,
우선은 옆 고을입니다. 더 많은 사람에게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것, 이것이 당신의 소명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주님처럼 하느님 사랑과 더 많은 사랑을 위해 떠나는 삶이길 기도합니다.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신부
오늘은 ‘사명’에 대한 묵상을 나눕니다. 예수님은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이 그의 사명이었고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 역시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 선포가 우리의 사명입니다.
정주의 삶을 우리 분도회 수도승들의 사명은 밖에 나가서가 아닌 수도원을 방문한 이들에게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선포합니다. 말로서가 아닌 복음적 삶 자체로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선포합니다.
얼마나 많은 이들이 하느님의 집 수도원에서 위로와 평화를 얻고 가는지요. 저는 이런 삶 자체로의 복음 선포를 존재론적 복음 선포라 합니다.
어느 분은 두 성공 요건으로 사명(mission)과 열정(passion)을 말했고 저 역시 공감했습니다. 사명감이 뚜렷해질수록 열정도 샘솟지만 사명감이 약화되면 열정도 저절로 식습니다.
1.사명감이 좋아야 역동적 삶입니다.사명감이 좋을 때 샘솟는 열정의 역동적 삶입니다. 복음의 예수님과 독서의 사도 바오로가 그 좋은 모범입니다. 복음의 예수님의 활약상을 보십시오.
무척 분주해 보이지만 하느님 나라를 향해 잘 질서 잡힌 모습입니다. 이분들의 지칠 줄 모르는 열정은 바로 사명감에서 기인함을 깨닫습니다. 콜로새 교회 신자들 역시 사랑과 믿음과 희망이 어우러진 역동적 열정의 삶임을 봅니다.
“우리는 여러분을 위하여 기도할 때면 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느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리스도 예수님에 대한 여러분의 믿음과 모든 성도를 향한 여러분의 사랑을 우리가 전해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 믿음과 사랑은 여러분을 위하여 하늘에 마련되어 있는 것에 대한 희망에 근거합니다.”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 자체가 우리의 희망이요 이 희망에서 샘솟는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과 형제들에 대한 사랑입니다. 이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에 대한 희망을, 사명감을 잃으면 믿음과 사랑도 점차 시들어 가기 마련입니다.
2.사명감이 좋아야 숲과 나무, 부분과 전체를 보는 시야를 지닙니다.예수님의 시야가 참 광활합니다만 부분을 놓치지 않습니다. 지금 여기 만나는 이들 하나하나에게 최선을 다합니다. 숲만 보는 게 아니라 동시에 나무 하나하나마다 보면서 정성을 다하는 모습입니다.
시몬의 장모가 심한 열병에 시달리자 그를 고쳐주시고 온갖 질병을 앓는 이들을 있는 대로 데려오자 예수님께서는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손을 얹어 그들을 고쳐주셨다.’합니다. 이 대목이 참 인상적입니다. 군중의 숲만 보는 게 아니라 한 사람 한 사람의 개인을 소중하게 대하시며 정성을 다해 이들을 고쳐주시는 진정성 가득 담긴 모습이 감동적입니다. 사제의 강복도 이랬으면 좋겠습니다.
3.사명감이 좋아야 집착이 없습니다. 공성이불거, 공을 이뤘을 때 지체 없이 떠나야 아름답습니다. 예수님은 추호도 집착이 없었던 ‘무욕의 사람’이셨습니다. 성령 따라, 하느님의 뜻에 따라 바람처럼, 물처럼, 구름처럼 끊임없이 흘렀던 정처 없는 분이셨습니다. 예수님의 정주처는 보이는 세상의 장소가 아닌 보이지 않은 하느님이셨습니다.
날이 새자 예수님께서는 밖으로 나가시어 외딴곳으로 가셨다 하는데 잠시 정주처인 하느님 안에서 휴식을 취한 듯합니다. 바로 여기 까지 와서 자기들을 떠나지 말라고 집착하는 군중에게 자신의 선교 사명을 말씀하신 후 홀연히 떠나시는 주님이십니다.
“나는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다른 고을에도 전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도록 파견된 것이다.”말씀 하신 후 주님은 유다의 여러 회당에서 복음을 선포하십니다. 예수님뿐 아니라 제자들은 물론 우리 모두의 사명이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의 선포입니다. 이 사명감에 투철할 때 역동적 신망애의 삶이요, 지금 여기의 구체적 현장에 충실한 삶이요, 집착 없는 자유인의 삶입니다.
똑같은 주님께서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우리에게 전하시고 우리 역시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하라고 세상에 파견하십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