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주22주간 금요일 (루가5,33-39)

2011. 9. 2. 오전 7:1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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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9월 2일 연중 제22주간 금요일

새 옷에서 조각을 찢어내어 헌 옷을 깁는 사람은 없다.

그렇게 하면 새 옷을 못 쓰게 만들 뿐만 아니라

새 옷 조각이 헌 옷에 어울리지도 않을 것이다.

(루가 5,33-39)

“No one tears a piece  from a new cloak to patch an old one.
Otherwise, he will tear the new
and the piece from it will not match the old cloak.

 

 말씀의 초대

그리스도께서는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모상이시며, 모든 피조물의 맏이가 되신다. 주님께서는 그분 안에 세상의 충만함을 심어 주셨고, 그분을 통하여 만물을 화해시키셨다. 바오로는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고 있다. 인류 역시 미구에는 그분의 인도를 받게 될 것이다(1독서). 예수님께서는 단식보다 단식의 정신을 강조하신다. 왜 단식하는지 돌아보라는 것이다. 그러기에 신랑이 있는 동안에는 단식할 수 없다고 하신다. 하느님을 떠난 단식은 신앙 행위가 될 수 없다는 가르침이다(복음).

 ☆☆☆

 

오늘의 묵상

 아무도 새 옷에서 조각을 찢어 내어 헌 옷에 대고 꿰매지 않는다.” 당연한 말씀입니다. 아무도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낡은 가르침으로 나를 판단하려 드는가?’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반문하신 것입니다. 요한의 제자들은 율법에 따라 단식하지만, 당신의 제자들은 새로운 가르침을 따른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요한의 제자가 아니라 예수님의 제자입니다. 단식만이 아니라 믿음의 모든 것에서 그분을 따라야 합니다. 그것이 새 부대에 새 포도주를 담는 행동입니다. 낡은 부대는 새 포도주의 가스를 견디지 못해 터져 버립니다. 삶이 바뀌지 않으면 말씀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가르침입니다. 주님의 말씀은 늘 새로운 포도주입니다. 언제까지 낡은 사람으로 남아 있으려는지요
?
예수님께서는 단식보다 단식의 동기를 중히 여기라고 하셨습니다. 단식은 절제를 위한 수단이지 목적이 아니라는말씀입니다. 어찌 단식뿐이겠습니까? 모든 것에서 원인을 알면 행동은 자유로워집니다. 그러므로 음식을 절제하면 어떤 것도 절제할 수 있습니다. 절제는 힘입니다. 자신을 붙잡아 주는 힘입니다. 과도한 분노에서, 탐욕에서, 이기심에서 우리를 돌아보게 하는 힘입니다. 단식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해야겠습니다.

 

 ☆☆☆ 

 

 

단식은 음식을 먹지 않는 일입니다. 옛사람들은 하늘의 기운을 얻고자 할 때 단식하였습니다. 먹고 싶은 욕망을 참을 때 하늘이 도와준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덕을 닦는 사람에게 단식은 필수적이었습니다.
유목민들에겐 단식하는 날이 많았습니다. 그들에게 단식은 강렬한 참회의 수단이었습니다. 부정을 씻고 하느님과 화해하는 방법으로 단식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민족 전체의 단식을 법으로 정해 지키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결정에 따라 의무적인 단식은 재의 수요일과 성금요일에만 합니다. 물론 개인적인 단식은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단식 자체보다 단식하는 동기를 더 중히 여기십니다. 단식은 수단이지 목적이 아니라는 가르침입니다. 먹는 자유를 절제함으로써 자신의 삶을 돌아보라는 말씀입니다.
어찌 단식뿐이겠습니까? 신앙생활의 모든 활동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을 섬기는 한 방법일 뿐 그 이상은 아닙니다. 활동 자체에 매달려 본질을 보지 못하는 어리석은 사람이 되지 않도록 노력합시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이별 연습>

 -양승국신부-

형제들과의 공동생활을 중시하는 수도자들이 일상적으로 직면하는 하나의 큰 화두이자, 고민거리이자 도전거리가 있습니다.

바로 동료 수도자들과의 관계입니다. 재미있는 사실 한 가지는 동료들과의 관계가 원활하고 부드러울 때 하느님과의 관계 역시 원활하고 부드럽습니다. 반대로 하느님과의 소통이 원활할 때 이웃들과의 관계 역시 원활합니다.

한 형제가 열심히 기도생활에 전념하기는 하는데, 기도가 끝난 후 현실로 돌아와서 그 결과가 좋지 않다면, 예를 들어 사사건건 형제들과 충돌한다거나 수시로 마찰을 빚는다면, 그 형제의 기도생활은 진지한 반성이 필요하다는 표시입니다.

오늘날 잘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아무리 재산이 많다하더라도 이웃들과의 관계가 완전히단절되어, 마치 무인도처럼 고립되어 산다면, 그래서 철저하게 혼자라면, 그게 잘 사는 것일까요?

진정으로 잘 산다는 것은 이웃들과의 관계를 잘 맺는다는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적극적이고 창조적인 이웃들과의 관계, 활발한 상호소통을 바탕으로 한 풍요로운 만남, 그것이 잘 살고 있다는 한 표시가 아닐까요?

여기, 이웃들과의 바람직한 인간관계를 형성하기 위해서, ‘참 나’와 ‘참 너’가 만나기 위한 소통을 잘하기 위한 비결 한 가지가 있습니다. 그 비결은 오늘 복음에서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매일 만나는 이웃들, 우리가 매일 신앙하는 하느님과 매일 아침 새롭게 만나는 것입니다. 그들을 새 옷, 새 포도주로 바라보며 관계 안에서 늘 새로움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지금 내 앞에 있는 어제 나와 제대로 한번 충돌한 그 형제, 내 영혼에 심각한 상처를 입힌 그 형제가 아니라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으로 간밤에 새롭게 태어난 새 인간으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길고도 고된 하루 일과에 시달려온 그, 관계 안에서 상처입고 방황하던 그, 이제 하루 일과를 마감하고 침실로 향하는 그의 뒷모습과 매일 밤마다 작별 인사를 나누는 것입니다.

오늘 인간관계 안에서 서로 간에 주고받았던 깊은 상흔과 그로 인한 괴로움, 내면의 아픔과 분열과도 하나하나 작별을 고하는 것입니다.

지금 내 앞에 있는 이 형제는 오늘이 지나면 이제 다시는 못 볼 형제로 바라는 것입니다.

잘 산다는 것은 매일 떠남을 전제로 합니다. 진정으로 살기 위해는 매일의 이별 연습이 필요합니다. 어제의 그를 떠나보내는 연습, 어제의 나와 작별하는 연습...

 

새 술은 새 부대에

  -반영억라파엘신부-

어느 날 옷장 깊숙이에서 포도주를 한 병 찾아냈습니다. 제법 오래된 것이라서 맛이 좋겠다고 기대하며 한잔 가득히 부었습니다. 입에 대는 순간 곧 인상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보관을 잘못한 탓인지 맛이 변했습니다. 오래된 것이 다 좋은 것은 분명 아니었습니다.

묵은 포도주를 마셔 본 사람은 묵은 것이 더 좋다 하면서 새것을 마시려 하지 않는다.(루가5,39) 했는데 제가 술 맛을 모르나 봅니다. 

묵은 것에 맛들인 사람은 새것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새것을 거부합니다. 새것이 얼마든지 더 좋을 수도 있는 데 그것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율법학자들이나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종교생활의 쇄신은 부정한 것에 대한 단호한 기피와 단식과 기도 등에서 이루어진다고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옛 규정들은 오히려 새로운 규정으로 지켜져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새로운 것을 담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와는 다르게 근본적인 것을 강조하셨습니다. 쇄신되어야 할 것은 인간의 내적 태도이지 단지 외적인 형식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단식을 하던, 기도를 하던 그것을 왜 해야 하는가의 의미를 찾고 알맹이에 충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등잔을 위해 불이 있지 않고 불을 위하여 등잔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는 변해야 할 것이 있고, 변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근본은 지키고 거기에 접근하는 방법은 변할 수 있고 변해야 하지만 참된 회개, 내적인 마음의 변화를 이룬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오래된 것일수록 애착이 가게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 애착을 버리라고 하십니다.

묵은 포도주가 귀한 것은 거기에 걸 맞는 맛을 보존했을 때에만 그렇습니다. 그리고 옛 것을 고집하는 한 새것은 결코 맛보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합니다. 자기 것으로 가득 차 있으면 주님께서 들어설 자리가 없습니다. 옛 가르침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되지만 주님께서 새 가르침을 주셨으면 그 가르침을 기쁘게 받아들이고 옛 것의 부족함을 채워가야 합니다. 주인이 바뀌었는데 자꾸 옛 주인 얘기만 하고 있으면 참된 성장은 없습니다. 주님의 새 다스림을 받아들여 새로운 마음으로 나날이 새로워지고 법의 형식보다도 내용을 지킴으로써 주님을 만나시길 바랍니다. 사랑합니다.

 

 

 

새 술은 새 부대에

  

저는 가난하게 사시는 한 신부님을 압니다.

그 신부님이 아시는 다른 신부님을 만나려 함께 간 적이 있었습니다.

미사를 함께 드렸는데 성작과 성합이 매우 아름답고 값어치 있게 보였습니다.

저와 함께 간 그 신부님은 미사 도중에도 그 아름다운 성작의 문양을 손으로

만져보는 등 그 화려함에 경탄하는 모습이었습니다.

 

함께 차를 타고 돌아오는 도중 그 신부님은 저에게 “오늘 좋았지?

근데 내가 오늘 그 신부에게 사는 게 너무 사치스러운 것이 아니냐고

충고를 해 주었어.”하는 것입니다.


저는 가난하게 사시는 그 신부님을 존경하면서도 이렇게 말씀드렸습니다.

“신부님, 각자 삶의 방식이 있으니 당신이 가난하게 사신다고 남에게 뭐라고

하시면 안 돼요. 성인들이 다 가난했던 것은 아니잖아요.”

그랬더니 그 신부님이 “그럼 부자가 성인이 되나?”라고 되묻기에

저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교황님들을 생각해 보세요. 많은 성인 교황님들이 계십니다.

그 분들은 가난하게 살려고 해도 그럴 수 없는 분들이었잖아요.”

그 신부님은 더 이상 저에게 말을 하실 수 없었습니다.


가난한 것은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가난하다고 다 성인이 되는 것이 아니고

부자라고 다 죄인인 것도 아닙니다. 속으로는 행려자가 더 부자일수 있고

재벌이 더 가난할 수 있습니다.

 

“가난한 것을 자랑하는 사람은 부자이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전 어떤 신학생으로부터 이 말을 듣고 충격에 가까운 느낌을 받았습니다.

너무 우리의 심리를 잘 표현한 말이기 때문입니다.


이 말에 따르면, 위의 제가 아는 신부님은 겉으로는 가난하게 살지만

사실은 부자이기를 원하기 때문에 부자로 사는 동료 사제에 대해 화가

났던 것입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자신도 그렇게 살고 싶은 마음이 있는데

억지로 짓누르고 있는 자신에게 화가 난 것입니다. 결국 우리가

다른 이들에 대해 비판하고 있는 것들이 나의 모습을 비판하고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사이들이 예수님께 와서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사이의 제자들은 단식하는데, 선생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라고 묻습니다.


단식은 참 좋은 것입니다. 육체의 욕망을 제어함으로써 영적인 능력을

극대화하게 만듭니다. 성경에 보더라도 ‘단식과 기도’를 자주 함께

사용함으로써 단식이 기도와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모든 상황에 강요되어져서는 안 됩니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단식할 수야 없지 않으냐?

신랑이 함께 있는 동안에는 단식할 수 없다.”


혼인잔치에서 단식하는 일은 오히려 잔치에 초대한 사람에 대한 예의가 아닙니다.

초대받았을 땐 왕창 먹어줘야 합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신랑이고 당신과 함께 있는

동안에는 단식할 필요가 없음을 일깨워주십니다.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모든 상황에 적용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산의 정상에 오르기 위해서는 많은 길들이 있듯이 누구나 다 각자의 길로

정상에 오를 수 있습니다. 완덕으로 향하는데 한 길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좋은 것이라도 적재적소에 올바르게 적용되어야 함을 말씀하시기 위해

이런 비유를 들어주십니다.

“아무도 새 천 조각을 헌 옷에 대고 깁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헌 옷에 기워

댄 새 헝겊에 그 옷이 땅겨 더 심하게 찢어진다. 또한 아무도 새 포도주를

헌 가죽 부대에 담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도

부대도 버리게 된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내가 따르고 있는 것들이 항상 상대방에게도 적용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헌옷은 헌옷 조각으로 새 옷은 새 옷 조각으로

기워야 옷이 상하지 않습니다. 술도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지

그렇지 않으면 발효하여 터지고 맙니다.

 

내가 하는 것들을 남들에게 강요하지 않도록 합시다.

하느님은 그들을 다른 방법으로 부르고 계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ㅡ 전삼용 (요셉) 신부ㅡ

 

속빈 강정

-전삼용신부-

 

한 신부님이 자신의 신학교 시절을 이야기하면서 이런 이야기를 해 주었습니다.

자신과 같은 반에 ‘상투스’가 있었답니다. ‘상투스’는 거룩하다는 뜻이고 성인처럼 사는 사람을 신학생들은 “쟤는 상투스야!”라고 말합니다. 이 말 안에는 약간 비꼬는 의미도 들어있습니다.

그 신부님과 같은 반이었던 상투스는 늦게 신학교에 들어와 나이가 같은 반 신학생들보다 좀 많았다고 하는데 그 거룩한 것이 정도를 지나쳤다고 합니다.

그 상투스 형은 자신만 열심히 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까지도 열심히 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런 사람이 옆에 있으면 주위 사람들은 큰 어려움을 겪습니다.

기도에 늦거나 빠지거나 하면 교수 신부님들보다 그 형에게 먼저 한 소리 들어야 했고 심지어는 옆에서 졸면 가지고 다니는 바늘로 그의 허벅지를 찔렀다고 합니다.

그런데 반전이 일어났습니다. 어느 날 기도 중에 배가 아픈지 그 신학생이 혼자 밖으로 나갔다고 합니다. 그것도 희한한 일인데 미사와 기도가 끝날 때까지 그 형은 들어오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것은 상투스에겐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었습니다.

아침 미사가 끝나고 같은 반 학생들이 화장실로 갔더니 그 선배는 씩씩거리며 무언가를 열심히 빨고 있더랍니다. 그것은 신학생들이 입는 흰 와이셔츠였습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배가 너무 아파서 대변을 보고 휴지로 엉덩이를 닦았는데 이상하게 변이 휴지에 묻어나오지 않더랍니다. 그래서 다시 닦아도 그렇더라는 것입니다. 알고 보니 엉덩이 밑까지 내려와 있던 흰 와이셔츠 위를 닦은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아시겠죠? 결국 와이셔츠로 밑을 닦아버린 것입니다.

결국 상투스는 남들 보기엔 거룩해 보일 수 있지만 자기의 밑도 제대로 닦지 못하는 사람이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거룩하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거룩한 행위를 하면 그 사람이 거룩한 것일까요?

오늘 복음에서 스스로 거룩하다고 여기고 있었던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이 자신과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은 단식을 하는데 왜 예수님의 제자들은 단식하지 않느냐고 따집니다. 사실 이들은 지켜야 할 모든 규정들을 다 지키며 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은 신랑이고, 제자들은 그 혼인잔치에 온 친구들인데 신랑이 있는 혼인잔치에서 어떻게 단식할 수 있겠느냐고 하시며,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오는데 그 때는 그들도 단식을 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그들이 때와 장소에 맞지 않는 규율들을 강요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새 술은 새 포대에 담아야 하고 새 옷은 새 천으로 꿰매야 한다고 하십니다.

어떤 거룩한 행위를 하는 것 자체가 그 사람을 거룩하게 해 준다는 생각을 버리라는 뜻입니다. 자신이 행하고 있는 것들을 다른 사람이 행하지 않는다고 해서 다른 사람이 자신보다 덜 거룩하다고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사실 어떤 때는 규율을 어기는 것이 사랑이 될 때도 있습니다. 주위에 아픈 사람을 위해 주일미사를 빠져야 했다면 그 사람을 모른 채 하고 미사에 나온 사람보다 더 큰 기도를 드린 것입니다. 그런데 고해성사는 주일미사에 빠진 사람이 보고 사랑을 저버리고 미사를 온 사람은 보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따라서 겉으로 보이는 행위만 가지고 사람을 판단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입니다.

 

제가 로마에 유학 나와서 있을 때 이런 분을 또 보았습니다. 그 분은 우리의 지도 신부님이셨는데 본인 스스로 매우 거룩한 사람인 것처럼 살고 또 우리에게는 규칙대로만 살지 않으면 매우 화를 내시는 분이셨습니다.

밤에 순찰을 돌고 신학생들의 방에서 나오는 소리를 엿듣거나 들어와 보기까지 하는 모든 신학생들의 공공의 적이었습니다.

제가 영성체를 하는데 그 때 그 신부님이 성혈을 찍어서 영해 주셨습니다. 그 신부님은 성혈을 찍으면서 몇 방울 바닥에 떨어뜨렸는데 그 성혈을 신발 신은 발로 쓱쓱 문질러서 닦아버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분들은 남들이 자신을 거룩하게 생각한다고 믿고 남들에게 보이기 위해 항상 경직된 삶을 살아야합니다. 그건 사제들도 마찬가지고 수녀님들도 마찬가지고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벗어버리려 해도 남들에게 ‘사제처럼’ 보여야 한다는 마음에 자신을 포장하게 만들고 그렇게 사람들 앞에서는 경직되어버립니다. 스스로 거룩해지고 위해 거룩한 행위를 하지만 사실은 속빈 강정에 불과합니다.

속빈 강정이란 겉은 번들번들하고 달고 맛있어 보이지만 딱딱한 겉에 비해선 속은 텅텅 비어있는 경우를 들어 하는 말입니다. 겉만 포장하며 사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텅 빈 속을 감추기 위해 그 겉도 얼마나 단단히 굳어져 있습니까?

이렇게 살다보면 형식주의의 대표적인 예인 열매 없이 잎만 무성해서 저주 받은 무화과나무처럼 되고 맙니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고 새 옷은 새 천으로 꿰매야 합니다. 각자 때와 장소에 맞는 행위가 다를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행위 자체가 거룩함을 의미하지는 않으니, 다른 사람의 행위를 자신의 기준에 따라 비판하기 보다는 먼저 내 자신의 내면을 채우는데 더 노력을 기울이며 살아야겠습니다. 다른 사람의 행위를 비판하는 나 자신도 속빈 강정일 수 있습니다.

 

 

새로운 노래를 주님께 불러드려라

-최성기 신부-

 

오늘 독서에 나오는 찬가 안에는 초대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신앙고백이 담겨져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드러내는 분이시며, 창조하는
분이시고, 교회의 머리이시며, 죽은 이들을 살리시고, 만물을 화해시키시는
분임을 노래합니다. 우리 역시 미사 중에 신앙을 고백합니다. 신앙고백의
정식에는 하느님께 대한 믿음 고백과 동시에 하느님께 대한 그릇된 생각을
벗어버리려는 신앙 공동체의 눈물 나는 투쟁이 담겨 있기도 합니다. 또한
새롭게 이해된 하느님,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고 성령을 통해 이끄시는 삼위일체 하느님께 드리는 교회의 새로운 찬가입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해묵은 삶의 모습 안에서 단식 논쟁이 일어납니다. 새 옷의
비유나 새 포도주의 비유 역시 늘 새로운 시야로 세상을 바라보고 하느님을
바라볼 것을 요구합니다. 우리가 이해하고 있는 하느님 안에서 우리가 자신의
욕심과 삶의 방식을 고수하고 싶어하지는 않는지를 살펴야 한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삶으로 신앙을 고백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우리 삶의 터전을
되살리는 일, 그리스도의 사랑을 살아내는 일, 그리고 성령의 바람을 타고 삶을 살아가는 일을 통해 신앙고백을 하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우리가 사는
이 시대에 맞는 새로운 노래를 그분께 불러드릴 수 있도록 언제 빠질지 모르는 바리사이의 유혹을 끊어버리는 것, 우리 삶이 깨어 있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건배!

-김찬선신부-

 

“요한의 제자들은 자주 단식하며 기도를 하고, 바리사이의 제자들도 그렇게 하는데,
당신의 제자들은 먹고 마시기만 하는군요.

단식기도,
이에 대해서 저는 2중적입니다
.한 마디로 제 좋을 대로 태도를 취하는 것이지요.
나이를 먹으면서 전처럼 단식을 하는 것이 점점 힘들어지고
그래서 옛날처럼 단식을 잘 하지 못해 요즘 조금 수그러들었지만 단식을 소홀하게 생각하는 분들에 대해 오늘 복음의 바리사이나 율법 학자들과 마찬가지로 비판적입니다.
요즘 대부분의 사람들이 건강이나 몸매를 위해서는 단식하면서도
영적인 목적의 단식은 소홀히 한다고.
그런가 하면 제가 술을 먹는 것에 대해서는
오늘 복음의 예수님을 끌어다대며 합리화합니다.
본당에 있을 때 한 번은 개신교 목사님이 찾아오셨습니다
.
어떤 문제들에 대해서 얘기를 듣고 싶어서였습니다
.
하나는 독신의 문제이고
다른 하나는 술을 마시는 문제였습니다.
술에 대해서 얘기를 하면서 성서에 술을 마시지 말라고 했는데
왜 천주교 신부들은 그렇게 술을 잘 마시냐고 묻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오늘 복음과 예수님께서 요한에 대한 증언을 하신 대목을 대며
예수님도 먹고 마시지 않았냐고 농담반 진담반 둘러댔습니다.
저의 경우는 술 좋아하는 것을 합리화하기 위해서지만
아무튼 예수님의 경우는 먹고 안 먹고의 기준이 사랑입니다.
몸매 유지가 먹고 안 먹고의 기준이어서 안 되고
입맛이 먹고 안 먹고의 기준이어서 안 되고 율법이 먹고 안 먹고의 기준이어서 안 되고 오직 사랑만이 먹고 안 먹고의 기준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을 더욱 갈망케 하기 위해 단식을 한다면 옳은 단식이고 북한 동포를 생각하며 단식을 한다면 옳은 단식입니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우리 단식의 이유인 것처럼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 때문에 먹고 마십니다.
세리와 죄인들과 같이 식사하시고 한 잔 하신 예수님은
정말 대단한 사랑을 보이신 것입니다.
아무리 술 좋아하는 저이지만
, 그래서 분위기 좋은 곳에서  좋아하는 사람들과 술 마시자고 하면 좋아하겠지만 주님께서 저보고 당신처럼 서울 역 노숙자들과 술 한 잔 하라시면 정말 억지로 또는 순종하는 마음으로 마실 것입니다.
언제 저는 저의 만족이 아니라 이웃 사랑으로
서울역의 노숙자와 술 한 잔 할 수 있을런지요.

그런 제가 될 수 있고 
그런 여러분이 될 수 있기를 빌며 사랑이라는 새 가죽 부대에 담긴 사랑의 포도주를 오늘 한 번 건배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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