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9월 3일 토요일 성 대 그레고리오 교황 학자 기념일

2011. 9. 3. 오전 6:4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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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9월 3일 토요일  성 대 그레고리오 교황 학자 기념일

성 대 그레고리오 교황은 540년 무렵 로마에서 태어났다. 성인의 아버지가 로마의 일곱 부제 가운데 한 사람이었을 정도로 성인은 신심 깊은 가정에서 자랐다. 성인은 한때 로마의 행정 장관을 지낼 정도로 유능하였으나 모든 재산을 기증하고 수도원에 들어가 사제가 된다. 590년에 교황으로 뽑혔고, 교황을 ‘하느님의 종들의 종’이라고 부른 최초의 교황이다. 성인은 교황직을 수행하면서 신앙과 윤리에 관한 수많은 저술 활동을 하였으며, 604년 세상을 떠났다.

“당신들은 왜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될 일을 하는 것입니까?”
“사람의 아들이 바로 안식일의 주인이다.”
(루가 6:1.5)

 “Why are you doing what is unlawful on the sabbath?”

“The Son of Man is lord of the sabbath.”

 

말씀의 초대

예수님께서는 당신 죽음을 통하여 인류의 죄를 속죄하셨다. 이로써 인류는 하느님과 화해하게 된 것이다. 거룩하고 나무랄 데 없는 주님의 자녀가 된 것이다. 모든 것은 그분의 은총이었다. 남은 일은 복음의 사람답게 살아가는 일이다(1독서). 밀밭 사이를 지나던 예수님의 제자들이 밀 이삭을 뜯어 손으로 비벼 먹었다. 별 생각 없이 그랬을 것이다. 그런데 그날이 안식일이었다. 바리사이들은 제자들을 비난한다.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추수 행위를 했다고 지적한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옹졸한 마음을 꾸짖으신다(복음).

오늘의 묵상 

밀밭 사이를 가로질러 가던 제자들이 밀 이삭을 뜯어 손으로 비벼 먹었습니다. 배가 고파 그랬던 것은 아닐 것입니다. 지나던 길에 간식 삼아 그랬을 것입니다. 그분들의 동심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바리사이들은 율법을 어겼다고 따집니다. 안식일에 추수를 하면 안 되는데 손으로 비벼 먹은 것을 추수 행위로 간주한 것입니다. 제자들은 어안이 벙벙했을 것입니다.
예리한 눈길로 바라보고 있는 바리사이들을 예수님께서는 어떤 눈빛으로 대하셨을까요? 그분께서는 담담하게 말씀하십니다. ‘다윗과 그 일행의 예화’를 들어 그들에게 답변하십니다. 말씀의 요지는 ‘율법의 유연성’을 잃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나무는 보면서 숲을 보지 못하면’ 열심히 사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을 섬기는 생활이 힘들고 딱딱한 것이 된다면 곤란한 일입니다. 예수님은 ‘하지 말라는 율법’을 ‘하라는 율법’으로 바꾸신 분이십니다. ‘밀 이삭 비벼 먹는 것’으로 상징되는 하찮은 일 때문에 신앙의 기쁨을 어둡게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닌지 늘 돌아보아야 합니다.
부모는 모든 자녀를 사랑합니다. 별난 자식에게는 더 많은 애정을 기울입니다. 주님께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당신 앞에서 두려움을 가지는 것을 좋아하실 리 없습니다. 세상에 어떤 부모가 부모 앞에서 벌벌 떠는 자식을 좋아할는지요?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안식일은 유다인들에게 대단히 중요한 날입니다. 모든 일에서 해방되어 주님 안에서 쉬는 날입니다. 이날은 일하는 다른 날과 구별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주님께서 부활하신 주님의 날인 주일로 안식일을 대체합니다. 주님의 날은 다른 날과 구별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왜 일을 해야 하는지,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우리의 삶이 어떻게 시작되어 어떠한 목표를 향해 가야 하는지 주님 안에서 되새겨야 하는 날입니다. 주님께 감사하는 마음과 더불어 주님을 위해 하루를 봉헌해야 하는 날입니다. 이런 구별은 우리가 결코 일의 노예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할 것입니다. 어떤 신분이나 처지에 있든 인간이면 누구나 쉴 권리가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안식일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우리를 위해 있는 것입니다.

 

 

안식일 법은 십계명의 한 계명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켜라. 엿새 동안 일하면서 네 할 일을 다 하여라. 그러나 이렛날은 주 너의 하느님을 위한 안식일이다.” 탈출기 20 8-10절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이후 유다인들은 안식일을 주님의 날로 섬기며 소중하게 받듭니다.
율법주의가 깊어지자 피해야 될 일들이 많아졌습니다. 하루를 쉬며 하느님을 찬미하라는 취지가 경직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윤이 남는 일은 금지되었습니다. 나중에는 이익이 되는 행위 자체를 피하게 했습니다. 어떤 행동이 그 범주에 속하는지 따지기 시작했습니다. 하도 여러 사례가 나오기에 안식일 법이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의 근본을 묻고 계십니다. 왜 안식일이 생겨났는지 생각해 보라는 말씀입니다. ‘죄인을 만드는안식일이 아니라, ‘주님을 섬기는안식일이 되어야 한다는 가르침입니다. 그러시면서 다윗의 예를 드셨습니다. 사울에 쫓기던 그는 사제가 아니면 먹을 수 없는 빵을 먹었습니다(1사무 21,5 참조). 하지만 배가 고팠기에 용인되었습니다
.
다윗은 아무런 벌도 받지 않았던 것이지요. 그런데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을 죄인으로 몰고 있습니다. ‘밀 이삭 뜯어 먹은 행위를 안식일에 금지된 추수 행위로 간주한 것입니다. 우리도 여차하면 바리사이가 될 수 있습니다. 언제라도 사람이 우선입니다.

사랑을 막을 수는 없다

  -반영억신부-

간혹 신자 분들이 ‘미사참례를 어디부터 해야 영성체를 할 수 있습니까?’ 하고 묻습니다. 글쎄요? 병자 봉성체를 하게 되면 전례문은 짧지만 참회와 복음말씀 듣기, 그리고 주님의기도 후 영성체 예식을 합니다. 준비된 마음으로 영성체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지요. 주님을 모시고자 하는 간절한 마음을 가지고 미사참례를 하러 왔는데 시간을 잘못 알고 온 거예요. 벌써 신부님 강론도 끝나고….. 주님은 모시고 싶고…어쩌면 좋을까? 주님과 온전히 하나가 되고 싶어서 준비하고 왔건만 …무슨 답을 원하십니까? 여러분 가슴 안에 답이 있습니다.

법은 함부로 어겨서는 안 됩니다. 법은 “공동선을 지향하면서 반포한 이성의 명령”(성 토마스 아퀴나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인간의 존엄성을 해하거나 억압할 경우에는 어길 수 있습니다. 그래야 법의 의미를 지킬 수 있고 사람도 살기 때문입니다. 법의 자구에 매여 있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법의 해석방법을, 안식일의 참된 의미를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루카6,5) 하시며 확실하게 가르쳐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로부터 모든 권한을 부여 받은 “사람의 아들”이십니다. 안식일의 휴식 규정과 해석에 관한 결정권을 지니고 계십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희생제물이 아니라 자비입니다.(마태12,5-7) 자비를 거스르는 법은 어길 수밖에 없습니다. 

안식일에 생명을 구해야 하는가? 아니면 파괴해야 하는가? 그 누구도 사람을 살리는 것보다 죽이는 것을 선택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법의 자구에 매이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헤아려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결코 사람을 못살게 구는 법을 만드신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이웃에게 자비를 베푸는 것이 규정을 지키는 것보다 더 중요합니다. 

사실 “우리는 율법에 따른 행위가 아니라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의롭게 되려고 그리스도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갈라2,16). 그리고 “남을 사랑하는 사람은 율법을 완성한 것입니다”(로마13,8). 그 어떤 법도 사랑을 막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법을 무시해서도 안 되겠지만 법규에 얽매여 사랑하기를 멈춰서도 안 됩니다. 미사에 오시면 정성껏 준비하여 예수님을 믿음으로 모시기 바랍니다. 사랑합니다. 



율법주의와 자기중심주의

-전삼용신부-

 언젠가 한 신자에게서 전화를 받았습니다. 결혼 한지 얼마 안 되는 자매인데 아기를 낳고 몸이 허해져서인지 자꾸 가위에 눌린다는 것입니다. 여러 방법을 다 써 보았지만 안 되어서 다시 성당에 다니기로 결심하였다고 합니다. 물론 좀 냉담하였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고해성사 보는 것이 쉽지 않았는데 왜냐하면 아기가 아빠에게 안겨있으면 자꾸 울기 때문에 떼어놓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고해성사를 했고 성체를 영했는데 그 다음 주엔 산소 벌초를 하러 가야했기 때문에 또 미사에 갈 수 없었습니다.

또 남편에게 우는 아이를 맡기고 고해성사를 받아야하는 것인지, 만약 그렇다면 너무 힘겨워서 다시 냉담할 것만 같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고해성사를 할 필요가 없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일부러 빠진 것이 아니라 어쩔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가족 일 때문에 그랬기 때문에 오히려 가족을 위해 사랑을 실천한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죄는 자신의 자유의지로 짓는 것입니다. 무조건 주일에 미사를 못 했다고 해서 죄라고 단정 지어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바리사이나 율법학자들은 이런 상황이오면 주일미사에 빠진 것만 가지고 그 사람에게 죄를 씌우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안식일 날 남의 밭에 들어가 이삭을 훔쳐 먹었습니다. 물론 이스라엘 법대로 하면 무엇을 훔친 것보다는 안식일날 일을 한 것이 더 큰 죄였습니다. 예수님은 당신 제자들을 비난하는 사람들을 다윗의 예를 들며 꾸짖습니다. 안식일 법이 있기는 하지만 법이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지 사람이 법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님을 일깨워주십니다.

율법주의자들의 특성이 결과만 가지고 다른 사람을 판단한다는 것입니다. 그들 자신이 위선적으로 겉으로 보이게만 잘 살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판단할 때도 겉으로 보이는 결과만 가지고 사람을 판단합니다.

  또 열심하다고 하는 신앙인 중에서도 하느님은 모든 것을 용서해 주시니 굳이 죄의식을 지니지 않아도 된다고 하며 죄를 스스럼없이 짓고 고해도 보지 않는 사람도 만나게 됩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에서도 보듯이 제자들이 율법을 어긴 것이지 예수님은 절대 율법을 어기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스스로 자의 해석하여 율법을 정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율법은 일점일획도 사라지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겉모습만 너무 치우치면 속이 빈 율법주의자가 되고, 그렇다고 율법을 무시하면 자기 자신이 하는 모든 행위가 율법이라고 주장하는 어리석은 자기중심주의 사람이 되어버립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두 극단을 극복하고 균형 잡힌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요?   우리는 두 마리의 소가 끄는 수레를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사무엘 상권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스라엘이 블레셋 군에게 계약의 궤를 빼앗긴 일이 있었습니다. 계약의 궤는 성모님을 상징하고 그 안에 들어있던 십계명판은 율법자체이신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처음 블레셋 군과 싸울 때 계약의 궤는 실로라고 하는 곳에 있었습니다. 사실 계약의 궤는 엘리라고 하는 예언자와 그의 두 아들, 또 온 이스라엘 사람들로부터 소외받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을 지키는 사제들인 엘리의 두 아들과 엘리까지도 사실 정의롭지 못한 사람들이었고, 또 이스라엘 백성이 전쟁에 나갈 때 아예 하느님의 힘을 청하지 않고 자기들끼리만 싸우러 나갔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전쟁에 패하자 그들은 그제야 계약의 궤가 자신들에게 있음을 깨닫고 그것을 가져오게 합니다. 그들은 그 계약의 궤의 힘으로 전쟁에서 승리하리라 생각했지만 블레셋 군들에게 패하고 계약의 궤까지 빼앗기게 됩니다. 계약의 궤가 그들의 전부가 아니라 자신들의 목적을 위한 하나의 유용한 물건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이들이 율법을 무시하고 자신의 생각을 더 먼저 앞세우는 자기중심주의자들입니다.

그러나 계약의 궤는 블레셋의 신인 다곤상을 쓰러뜨리는 것은 물론이요 그 도시에 있는 사람들을 종기와 같은 질병으로 고통을 받게 하였습니다. 그 궤를 옮기는 마을마다 온갖 재앙이 들끓었습니다. 이들이 법은 지니고 있되 참 의미는 생각하지 않고 율법만 지니고 있는 것으로 만족하려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실제로는 율법의 참 정신을 찾으려고 하지 않으면서도 율법을 지니고 지키는 것만으로 거룩하다고 여기는 율법주의자들의 모습입니다. , 율법주의자들은 법을 가지고 있지만 그 법 때문에 스스로 자멸하게 되는 것입니다.

 

고통을 받던 그들은 꾀를 생각해내는데 아기 송아지가 딸린 두 어미 소를 엮어 마차를 끌게 하고 그 마차에 계약의 궤를 싣습니다. 만약 벳 셰메시, 태양의 집이라 불리는 이스라엘 동네로 곧장 걸어가면 그 질병이 계약의 궤로부터 오는 것임을 알게 되리라 여겼습니다.

두 어미 소는 새끼 송아지의 울음소리를 멀리하고 벳 셰메시쪽만 바라보고 걷습니다. 벳 셰메시는 하느님이 사시는 곳이고, 성전이며 그래서하느님나라를 상징합니다. 아기 송아지의 울음소리에도 흔들리지 않고 둘이 함께 같은 방향으로 걸을 수 있었던 이유는 뒤에 계약의 궤가 실려 있었고 하느님나라라는 공통의 지향점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이란, 하느님만을 바라보기 때문에 자신의 생각을 죽이고 그 분이 가르치신 법을 따르는 사람입니다. 하느님만을 바라본다는 것은 자신을 버린다는 뜻이고 계약의 궤를 운반한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사랑의 율법의 의미를 항상 잊지 않고 실천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야 두 극단으로 빠지지 않아 마차가 멈추지 않습니다.

지나침은 부족한 것보다 못하다고 합니다. 자기중심주의를 극복하기 위해 하느님 나라만 바라보는 노력, 율법주의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께서 가르쳐주신 율법의 참된 의미를 깨닫기 위해 끊임없이 배우고 묵상하는 노력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사랑과 원융 무애

-김찬선신부-

 

 융통성이 있는 사람이라는 말은 좋은 뜻인 것 같습니다.
예외 없는 원칙은 없다는 말도 좋은 뜻인 것 같습니다.

그러면
융통성은 어디까지 부려야 하나?
예외는 얼마나 인정될 수 있나?

사랑만큼 융통성을 부려도 된다.
사랑만큼 파계를 해도 된다.

사랑과 원융무애圓融無碍.
사랑과 자유.

사랑이 있으면 원칙도 좋고
사랑이 있으면 예외도 좋다.

사랑이 있으면 규율 안에 있어도 매이지 않고
사랑이 있으면 규율 밖에 있어도 방자하지 않다.

다윗이 먹어서는 안 되는 빵을 먹은 것이나,
사람의 아들이 안식일의 주인이라시며 안식법을 넘어서시는 것이나,
다 이런 것이 아니겠는가?

  

 <삶의 기로 앞에서>

-양승국신부-

 가끔씩 가족공동체 안에서 또는 수도공동체 안에서 구성원들끼리 의견이 대립될 때면 어떻게 풀어 가십니까? 때로 복잡하게 얽혀있는 인간관계 구조 안에서 해결의 실마리를 찾기가 정말 힘들기도 하지요.  

너무나 복잡한 문제 앞에서 "이럴 땐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나?"하고 고민할 때가 많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단 한 문장으로 문제 해결을 위한 열쇠를 제공하십니다.  

"사람의 아들이 바로 안식일의 주인이다." 

그렇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선택의 기준은 오직 예수님이십니다. 그분께서 짧은 지상생활 동안 우리에게 보여주셨던 삶의 모습들, 사상, 가치관들, 삶의 양식들, 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 그분 자체, 복음 자체가 그리스도인들의 판단 기준입니다

애매하고 난처한 상황에 부딪힐 때마다 우리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복음서를 펼쳐드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예수님이셨다면 어떻게 행동하셨을까? 만일 지금 이 자리에 예수님이 계시다면 어떤 결정을 내리실까?" 한번 먼저 생각해보는 일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된 우리에게 있어서 예수님은 이제 세상만사의 원리이자 기준이십니다

유다교 회당으로 기도하러 가실 때마다 예수님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드는 한가지 광경이 있었습니다. 성전을 더럽히는 상인들과 유다 관료사회의 철저한 부패를 보신 것입니다. 하느님의 집안에서조차 너무도 자연스럽게 상거래를 일삼는 그들을 보시고 예수님은 이런 판단을 하셨습니다. "저 사람들, 정말 해도 해도 너무 하는구나. 이건 아무리 생각해도 아니다"는 판단과 함께 유다 교계제도에 정면으로 대항하십니다. 참으로 위험하고도 무모한 결정을 내리십니다. 그리고 생각이 굳어지자 즉시 실천에 옮기십니다. 낄낄대며 성전 마당에서 돈을 세고 있는 상인들을 사정없이 몰아내시고, 좌판을 둘러엎습니다

그런가 하면 간음하다 현장에서 들켜 잡혀온 한 여인, 많은 사람들에 둘러싸여 죽음만을 기다리고 있던 한 여인 앞에서 예수님은 군중들과는 또 다른 판단을 하십니다. 먼저 예수님은 하느님 아버지라면 이 상황에서 어떻게 처신하셨을까? 하고 생각합니다. "아버지 편에서 보면 다 거기서 거긴데, 한번 실수한 걸로 쳐죽여야 한다고 돌을 들고선 저 사람들, 참으로 불쌍하구나. 저 여인, 지금은 비록 갈 때까지 간 여인이지만 분명히 기회만 주어지면 다시 설 수 있을거야"하는 생각과 함께 여인을 살리자는 판단을 내리십니다

예수님은 문제 앞에 섰을 때, 판단의 기로에 섰을 때, 언제나 적절하고 소신에 찬 대응을 하셨는데, 그 대응은 무엇보다도 하느님 아버지의 뜻에 따른 대응이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님의 결정은 자주 우리의 상상을 초월합니다

우리의 결정이 보다 복음적인 것이 되기 위하여 우리는 보다 자주 복음서를 펼칠 필요가 있습니다. 끊임없이 예수님의 복음을 우리 삶 가운데로 끌어와야 합니다. 복음의 생활화, 그것이야말로 하느님의 뜻을 구하기 위한 가장 적절한 수단입니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지금 현재 우리 성당에서는 공사 중입니다. 성당 옆 학교를 인수해서 저희 성당의 교육관으로 쓰일 예정입니다. 하지만 그대로 쓰기란 문제가 많아 리모델링 작업을 시작했지요. 그리고 성당 입구를 변경하고, 무허가 건물을 철거하는 과정에서 야외에 세워져 있던 성모님을 교리실로 잠시 옮겼습니다. 그런데 그 뒤 재미있는 현상을 하나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성모상이 그 자리에 없음에도 불구하고, 신자들이 성모상이 놓여 있었던 자리를 향해서 계속해서 인사하더라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당연히 성모상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인사를 하는 것이지요. 즉, 성모상은 보지도 않고 습관적으로 인사할 뿐입니다.
문득 이 모습이 우리들의 신앙생활과 비슷하지 않을까 싶어요. 주님을 제대로 바라보지 않고 또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 습관적으로만 하는 신앙생활. 그래서 제대로 사랑하지 못하면서 사랑이라는 단어만을 끊임없이 습관적으로 입으로만 반복하고 있을 뿐입니다.
사랑하기 위해서는 사랑해야 할 대상이 어떠한 지를 바라보아야 하겠지요. 그리고 어떤 사랑을 해야 할 지를 제대로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내 기준으로만 생각하고 판단한다면, 그것을 과연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단순히 습관적으로만 말하는 사랑일 뿐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 사람 몇 사람이 또 예수님께 따지지요. 제자들이 밀 이삭을 뜯어 손으로 비벼 먹었다는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즉,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될 일을 했다는 것인데요. 단순히 배고파서 길 가에 있는 밀 이삭을 뜯어 손으로 비벼 먹은 것이 자신들의 눈으로는 추수와 타작을 한 것으로 비춰진 것입니다.
자신의 기준과 판단만을 옳다고 내세우는 곳에서 과연 사랑이 있을까요? 율법의 최고 계명이 ‘사랑’에 있음을 알고 있어도, 그 사랑은 습관적으로 말만 할 뿐 실천이 없는 공허한 것이 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어느 여학교에 남자 선생님께서 새로 부임해 오셨습니다. 긴장되는 첫 번째 수업이었지요. 그런데 수업에 들어왔는데, 잠시 뒤 여학생들이 키득키득 웃는 것이 아닙니까? 사실 이 선생님의 남대문이 활짝 열려 있었기 때문이었지요. 그래서 학생 한 명이 이렇게 말합니다.
“선생님 앞문 열렸는데 데요.”
이 말은 곧 무엇을 의미합니까? 바지 앞의 지퍼가 열려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지요. 그러자 선생님께서는 아주 근엄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반장 나와서 닫어!”
제대로 알지 못하기 때문에 엉뚱한 말을 할 수밖에 없었지요.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제대로 알지 못한다면 또 제대로 보지 못한다면, 엉뚱한 사랑을 행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성모상에 인사할 때 습관적으로 하지 말고 눈을 맞추고 인사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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