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분명히 말한다.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도 매여 있을 것이며
땅에서 풀면 하늘에도 풀려 있을 것이다.
(마태오 18,15-20)
Amen, I say to you,
whatever you bind on earth shall be bound in heaven,
and whatever you loose on earth shall be loosed in heaven

말씀의 초대
예언자는 말씀을 전하는 사람이다. 충실하게 전해야 올바른 예언자가 된다. 주님의 말씀은 경고와 격려가 반복된다. 어떤 말씀을 하시든 최선을 다해 전해야 한다. 그것이 예언자의 소명이다(제1독서). 율법의 완성은 사랑에 있다. 아무리 철저하게 율법을 지켜도 사랑이 빠지면 완벽하지 못하다. 모든 율법은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한마디로 요약된다(제2독서). 예수님께서는 형제의 잘못을 타일러 주라고 하신다. 당연히 그래야 할 일이다. 그러나 쉽지 않은 일이다. 잘 아는 사람일수록 훈계는 더 어렵다. 그러기에 반복하라고 하신다.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을 동원하라고도 하신다. 그들과 함께 기도하라고 하신다. 예수님께서도 함께하시겠다는 말씀이다(복음).
☆☆☆
오늘의 묵상
예수님께서는, 형제가 죄를 짓거든, 가서 단둘이 만나 타일러 주라고 하십니다. 한두 번은 가능할 것입니다. 그러나 계속해서 그렇게 하기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용서는 마음먹는다고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용서는 순간의 결정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시간을 두고 쌓는 덕(德)입니다.
그렇습니다. ‘용서는 덕’입니다. 덕에 도달하려면 누구나 수행의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마음만 먹으면 언제라도 용서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착각입니다. 용서를 감정 차원으로 해석한 착각입니다.
순간에 생긴 미움은 순간의 용서로 사라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랜 세월에 걸쳐 쌓아 온 미움은 순간의 용서로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미움이 쌓인 시간만큼 수련과 극기가 필요합니다. 그것이 무엇일는지요? ‘작은 용서’입니다. 혼자만이 알고 있는 작은 용서를 수없이 실천하는 것입니다. 작은 용서가 몸에 배어야 큰 용서가 가능해집니다.
예수님께서는 형제가 잘못하면 만나서 타일러 주라고 하셨습니다. 일차적으로 형제는 가족입니다. 그들을 먼저 받아 주라는 말씀입니다. 가까운 사람을 이해하지 못하면 멀리 있는 사람도 이해할 수 없는 법입니다.
신앙 공동체는 세상 속에서 주님의 현존의 표시가 됩니다. 그래서 신앙 공동체는 주님의 뜻을 이루는 사랑과 자비와 용서의 공동체여야 합니다. 주님께서 살아 계시는 증거가 되도록 신앙에 충실한 공동체를 만들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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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23주일 (마태18,15-20 : 로마13,8-10 : 에제33,7-9)
예수님께서는 그리스도인들의 형제적 충고에 대하여 말씀하신다. 교회는 교회에 해를 끼치면서 못된 짓을 하는 형제를 어떤 태도로 대해야 하는가? 초세기 그리스도인들은 그수가 매우 적었다. 그래서 사회가 그들을 어떻게 평가하는지에 대해 특별히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교회는 교우들 사이의 화목과 일치라는 내적인 요구를 더 크게 느끼고 있었고, 또 교회가 하느님의 사랑에서 생겨났기에 사랑의 친교를 나누는 공동체가 되어야 하고, 그 친교 안에서 모든 사람은 형제들의 믿음과 성덕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을 잘 깨닫고 있었다. 아무도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친교에서 제외되는 사람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지혜와 인내를 가지고 듣고 대화하려는 노력을 기울였다. 오늘 복음은 바로 이러한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관습을 가르쳐 주고 있다.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지은 죄를 확인하고 유죄 판결을 내리는 법정처럼 되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교회는 판단과 행동의 기초를, 정의보다는 죄를 용서하고 화해하려는 자비에 두어야 한다. 형제가 잘못을 계속하더라도 교회는 그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그쳐서는 안 된다. 형제적 친교를 유지한다는 것은 교회가 그를 위한 기도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것을 뜻한다. 주님께서는 그렇게 기도하는 교회 안에 현존하시고 그들과 함께 기도 하실 것이다. "단 두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다." 주님보다 먼저 교회가 형제를 단죄하고 파문해서는 안 될 것이다.
"제가 제 형제를 지키는 사람입니까?" 카인은 아벨과 연대감을 느끼지 못했다. 우리도 우리의 형제들에게 연대감을 느끼지 못한다. 빌라도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다른 사람 때문에 위험에 놓이게 될 것을 두려워하여 손을 씻으려고 한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우리 각자에게 주의를 주신다. "너희는 너희 자신의 잘못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잘못에도 책임을 지게 될 것이다." 하느님의 법은 죽을 위험에 있는 사람을 도와 주지 않을 때뿐만 아니라 죄 때문에 하느님의 사랑을 잃게 될 위험에 있는 사람을 도와 주지 않을 때에도 벌을 내린다(제1독서).
그리스도인의 윤리는 "이것을 하지 마라.저것을 하지 마라."와 같은 많은 계명들로 우리를 얽어매는 사슬처럼 생각될 때가 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무엇을 금지하시기보다는 오히려 우리에게 책임 있는 행동을 하게 하신다. 하느님께서 우리 곁에 데려다 주신 이들을 적극적으로 사랑하게 하신다. "법"은 우리에게 사랑을 실천하게 하는 최소한의 기준이다(제2독서).
교회를 하나의 사회 제도로만 이해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누구든지 친구들을 만나고 형제적 친교를 나눌 수 있는 장소가 되어야 한다. 그 교회는 다른 형제들에게 책임감을 느끼는 하나의 가정이다. 그러므로 믿는 이들의 모임은 누구든지 마음을 열고 대화할 수 있는 자리가 되어야 한다. 교회의 이러한 모습은 바로 교회가 복음의 요구를 충실히 따르고 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복음).
듣기 좋은 소리보다 사랑이 먼저다
-반영억라파엘신부-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주님의 사랑은 우리의 생각보다 깊고 넓고 높습니다. 이 시간 주님의 사랑 안에 머물기를 기도합니다. 또한 주님의 사랑으로 바른 충고를 할 수 있고, 받아들일 수 있는 지혜를 간구합니다.
저는 강론 시작에 앞서 항상 ‘사랑합니다’ 하고 말문을 엽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도 주님의 이름으로 사랑해야 함을 일깨우기 위해서 입니다. 가끔은 ‘하늘만큼, 땅만큼’‘사랑합니다’를 합니다. 한번해볼까요? 사랑합니다, 사랑합니다. 하늘만큼. 땅만큼, 땅만큼. 하늘만큼. 예 ,좋습니다. 우리 서로 서로가 하늘만큼 땅만큼 사랑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오늘 2독서 로마서에서 사도바오로는 아무리 해도 다할 수 없는 의무 한 가지가 있는데 그것은 ‘사랑의 의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남을 사랑하는 사람은 율법을 완성한 것입니다.”(로마13,8) 라고 ‘사랑’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사람은 참으로 연약함을 지녔습니다. 하늘만큼, 땅만큼 사랑한다고 하니까 처음에는 너무너무 기뻐합니다. 그러나 시간이 좀 흐르면 똑 같은 사랑을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에게! 이것밖에 안 돼!’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좋은 것에 젖어있으니까 좋은 줄을 몰라요. 그래서 인사를 바꿔야 하겠습니다. ‘하늘도 알고, 땅도 알고’, ‘땅도 알고, 하늘도 알고!’
즉 하늘도 알고 있을 만큼, 땅도 알고 있을 만큼 사랑해! 하는 것입니다.
사랑을 하려거든 하늘 앞에, 땅 앞에 부끄럼 없이 해야 하겠습니다.
복음은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 가서 단둘이 만나 그를 타일러 라. 그가 네 말을 들으면 네가 그 형제를 얻은 것이다”(마태18,15)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충고가 얼마나 어려운 일입니까?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고 했습니다. 칭찬은 달디 달지만 충고는 한없이 쓰니 섣불리 쓴 약을 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늘도 알만큼 큰 사랑을 갖지 않은 이상 섣불리 충고를 해서는 안 됩니다. 물론 땅도 알만큼 큰 사랑이 없는 한 칭찬도 쉽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사랑이 없는 칭찬은 그로 하여금 칭찬의 노예가 되게 하기 때문입니다. 칭찬은 달지만 독이 되기 쉽고, 충고는 쓰지만 약이 되기 쉽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칭찬과 충고를 하기에 앞서 주님의 사랑으로 자신을 충만케 해야 하겠습니다.
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충고를 한다는 것은 사람이 할 수 있는 가장 어렵고 힘든 일이다. 자기 자신에게 먼저 충고해서 바꾸고 변화시키는 일부터 하자!” 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성녀 안젤라 메리치는 “좋은 충고를 받아들여 현명하게 판단하고 수행하십시오. 충고는 하느님의 소리요, 하느님의 뜻입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성경은 “미련한 자는 제 길이 바르다고 여기지만 지혜로운 이는 충고에 귀를 기울인다.”(어리석은 사람은 제 잘난 멋에 살고 슬기로운 사람은 충고를 받아들인다.)(잠언12,15)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충고를 할 수 있는 큰 사랑과 온유함을 간직해야 하며 동시에 충고를 하느님의 소리요, 뜻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넉넉함을 지녀야 합니다.
성경은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나는 책망도 하고 징계도 한다. 그러므로 열성을 다하고 회개하여라.”(묵시3,19). “내 아들아, 주님의 훈육을 하찮게 여기지 말고 그분께 책망을 받아도 낙심하지 마라. 주님께서는 사랑하는 이를 훈육하시고 아들로 인정하시는 모든 이를 채찍질 하신다.”(히브12,5)하십니다. 따라서 하느님의 소리로, 하느님의 뜻으로 다가올 충고자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또한 다른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소리가 되어줄 수 있다면 큰 은총입니다. 한 주간 바른 충고를 통해 우리를 성장시켜 주시도록 기도하고 듣기 좋은 소리보다 바른 말에 귀 기울이시길 희망합니다. 사실, 충고는 어디에서도 환영받지 못합니다. 충고가 필요한 사람일수록 더욱 경시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효과 있고 살아있는 충고는 사랑입니다. 사랑하는 마음으로 진심을 가지고 대하면 사람은 변하기 마련입니다. 프랑스의 소설가 빅토르 위고의 ‘장발장’을 기억해 봅니다. 주인공 장발장은 너무 배가 고픈 나머지 빵 한 조각을 훔쳐 먹습니다. 이 빵 한 조각 때문에 19년간 중 노동을 선고받은 장발장은 출소한 후 길을 헤매다가 한 신부님의 도움으로 하룻밤을 성당에서 묵게 됩니다. 신부님은 장발장을 따뜻하게 맞이하고 먹을 것을 주며 위로 합니다. 장발장은 처음 받는 인간적인 대접에 감격합니다. 그러나 신부가 잠든 사이 유혹을 떨쳐 버리지 못하고 은촛대를 집어 들고 도망칩니다. 잠시 후 경찰에 붙잡힌 장발장은 성당으로 끌려옵니다. “신부님, 혹시 은촛대를 잃어버리지 않았습니까? 아무래도 이 사람이 성당에서 훔친 것 같아 잡아왔습니다.” 말없이 장발장을 바라보던 신부님이 대답합니다. “아닙니다. 그 촛대는 제가 이 사람에게 선물로 준 것입니다.” 그 날 이 후 장발장은 변했습니다. 불쌍한 이웃을 돌보는,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으로 바뀌었고 훗날 이웃의 존경받는 사람이 되어 시장까지 되었습니다.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은 형벌이 아니라 사랑입니다. 자녀, 친구, 이웃과의 관계 안에서도 정곡을 찌르는 논리 정연한 설득과 충고가 아니라 진심어린사랑입니다. 사랑은 사랑을 낳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타일러라’는 말씀은 남의 잘못을 지적하라는 말이 아니라 내 이웃이 잘못된 길을 가고 있다면 사랑하는 마음으로 지혜롭게 배려하여 변화시킬 수 있도록 하라는 말씀입니다. 사실 우리는 남에게 충고는 잘하면서 남의 충고는 잘 받아들이지 못하는 연약함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 한계를 잘 극복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사무엘 하권 12장을 보면 나탄이 다윗을 꾸짖는 장면이 나옵니다.
나탄은 다윗을 찾아와 “어떤 성에 두 사람이 살고 있었는데 한 사람은 부자였고 한 사람은 가난했습니다. 부자에게는 양도 소도 매우 많았지만 가난한 이에게는 품삯으로 얻어 기르는 암컷 새끼 양 한 마리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이 새끼 양을 제 자식과 함께 키우며 한 밥그릇에서 같이 먹이고 같은 잔으로 마시고 잘 때는 친 딸이나 다를 바 없이 품에 안고 잤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부잣집에 손님이 하나 찾아왔습니다. 주인은 손님을 대접하는 데 자기의 소나 양은 잡기가 아까워서 그 가난한 집 새끼 양을 빼앗아 손님 대접을 했습니다. 다윗은 몹시 괘씸한 생각이 들어 나탄에게 소리쳤습니다. “저런 죽일 놈! 세상에 그럴 수가 있느냐? 그런 인정머리 없는 짓을 한 놈을 그냥 둘 수 없다. 그 양 한 마리를 네 배로 갚게 하리라.”
그 때 나탄이 다윗에게 말하였습니다. “임금님이 바로 그 사람입니다!”
다윗은“내가 주님께 죄를 지었소.”하고 자기 죄를 고백하며 용서를 청하고 주님께서 내리시는 시련에 아무것도 먹지 않고 눈물을 흘리며 애원합니다. 결국 죄의 씨인 다윗의 아들이 죽고 밧 세바가 아들을 낳게 되는 데 그 이름을 솔로몬이라 하였습니다.
누구나 잘못을 범하여 하느님 눈 밖에 날 수 있으나 하느님의 소리를 듣고 죄를 고백하면 그분의 크신 자비가 새 삶을 살도록 안배하십니다. 예언자 나탄의 소리를 귀여겨들었던 다윗처럼 우리도 쓴 소리를 귀여겨들을 줄 알고 하느님의 자비에 나를 온전히 맡겨야 하겠습니다. 그리하면 우리가 생각지도 못한 더 큰 은총이 우리를 감싸주실 것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그러므로 하늘이 알고, 땅이 알아도 부끄럽지 않을 만큼 많이 사랑하고 나 혼자만 열심히 하면 된다는 생각을 말며 모두가 더불어 잘사는 공동체를 이루기를 희망합니다.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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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고는 보초의 임무다
-강길웅신부-
군대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작전에 실패한 지휘관은 용서받아도 보초 경계를 게을리 한 지휘관은 용서받지 못한다.'라는 것입니다. 똑같은 실수라도 작전의 실패와 보초 경계의 태만은 차이가 큽니다. 작전의 실패는 최선을 다하다가 실패한 것이지만 보초 경계의 태만은 그 자체가 이적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보초에게는 막중한 책임이 있습니다. 그 한 사람에 의해서 전체가 죽을 수도 있고 살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보초는 항시 경계를 게을리 해서는 안되며 위험이 있을 시에는 사람들에게 알려서 재난 을 피해야 합니다. 일찍 알렸는데도 그에 대응치 못해서 사람들이 다치면 그것은 그 사람들 잘못이지만 알리질 못해서 사고를 만났다면 그것은 순전히 보초 책임입니다.
예언자는 시대의 보초입니다. 위험이 있을 때 그는 두려움 없이 세상에 알려야 합니다. 오늘 1독서에서는 에제키엘이 하느님의 보초로서 소임받은 내용을 전해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모든 예언자들은 그 고달픈 직무 때문에 왕과 백성들에 게 미움을 받아 참으로 고난의 길을 걸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보초의 임무는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지난 박정희 대통령 시절에 '유신만이 살길이다.'라는 구호가 있었습니다. 그때 정부 주도하의 언론 매체 때문에 대다수 국민들도 그렇게 믿었습니다. 국민투표에서도 거의 100% 가까운 지지표를 받은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런데 그때 우리 교회의 주교님과 몇몇 신부님들이 정부 정책의 부당함을 지적하면서 '유신철폐'를 요구했습니다. 그것은 실로 대단한 도전이었으며 사리를 분간하지 못 하는 무모한 행위로까지 보였습니다.
많은 천주교 신자들까지도 그때의 주교님과 신부님들을 공격하고 비난했습니다. 정부가 어련히 잘 하고 있는데 왜 교회가 정치에 간섭하느냐 라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교회에 대한 나쁜 여론이 빗발치듯했습니다. 그래서 그때 주교님 한 분과 신부님들 몇 분이 투옥되었으며 많은 고초를 겪었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한참 지난 뒤에야 우리는 그분들이 옳았으며 백성은 유신에 속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다수는 우둔합니다. 한마디로 군중은 어리석습니다. 앞에서 누가 얼굴을 가리고 거짓말을 하면 그것이 옳은 줄 압니다. 그래서 전체 가 잘못된 길을 옳은 길인 줄 알고 착각 속에 걸어갑니다. 따라서 예언자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귀를 가져야 합니다. 다시 말해 충고를 받아들이는 아량과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보초의 말을 듣지 않고 충고를 외면하면 그는 망합니다. 혼자만 망하는 것이 아니고 나라도 망치고 백성도 망칩니다, 그러나 충고를 듣는 것도 어렵지만 충고를 하는 것도 어렵습니다.
유럽에서 어떤 왕이 낮잠을 자는데 왕궁 뒤에 있는 방앗간의 풍차 소리 때문에 잠을 못 이루자 짜증이 생겼습니다. 화가 난 왕은 신하를 시켜 풍차를 부숴 버리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신하들이 달려가서 그 풍차를 부숴 버리자 방앗간 주인이 나와서 “왕은 백성의 아버지인데 자녀들이 생업에 힘쓰는 것을 기뻐하지 않고 도리어 한 몸의 평안을 위해 재산을 부숴 버리다니 이 나라의 장래가 걱정된다."며 한탄했습니다. 신하들이 이 말을 왕에게 전하자 왕은 방앗간 주인에게 정중하게 사과하고 풍차를 다시 만들어 주었습니다. 이 왕이 바로 프로이센의 프레데릭 대왕입니다.
오늘 예수께서는 충고의 말씀을 들려주시면서 교회의 말조차 듣지 않거든 그를 이방인이나 세리처럼 여기라고 하셨습니다. 누구에게나 잘못은 있을 수 있고 실수가 없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모두에게 충고가 필요합니다. 인간은 사실 자기 자신을 잘 바라보지 못합니다. 자신보다는 옆에서 더 잘 바라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충고를 받을 수 있는 아량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큰 사람입니다. 뿐만 아니라 솔직한 충고를 해 줄 수 있는 지혜도 필요합니다. 그래야 용기있는 사람입니다. 신앙인에겐 모두 보초의 임무가 주어져 있습니다. 잘못은 지적하고 고쳐야 하는 책임과 의무가 있습니다. 남이 잘못되고 있는데도 충고하지 않고 바로 잡아주지 않는다면 그는 공범잡니다.
불이익을 당한다 해도 틀린 것은 지적하고 고쳐 줄 때 그가 참 신앙인의 길을 걸어가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훌륭한 보초가 되기 위해서는 우리가 먼저 남의 말을 잘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아무리 자존심이 상하고 체면이 손상된다 해도 겸손하게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남에게 해야 할 의무를 다하십시오. 그러나 아무리 해도 다할 수 없는 의무가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사랑의 의무입니다. "(로마 13,8) 이 사랑이 바로 보초의 의무가 될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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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변화시키는 힘은 사랑입니다
-이기양신부-
이런 말 들어보셨는지요?
"남이야 전봇대로 이를 쑤시건 말건 무슨 상관이냐?"한 마디로 참견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우리 시대 많은 사람들은 남의 일에 대해 별로 신경 쓰지 않을 뿐더러 특히 다른 사람이 나에 대해서 간섭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사는 우리에게 오늘 독서와 복음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특히 1독서에서 하느님께서는 누가 악한 길을 가고 있을 때 지나쳐서 그 사람이 죽게 되었다면 경고하지 않은 사람에게 죗값을 묻겠다고 말씀하고 계시지요.
또한 예수님께서는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 가서 단 둘이 만나 그를 타일러라. 그가 네 말을 들으면 네가 그 형제를 얻은 것이다"(마태 18,15)하고 말씀하십니다. 부모가 자기 자식을 타일러도 말을 잘 듣지 않고 선생님이 학생을 야단치기라도 하면 봉변당하기 쉬운 시대가 요즈음 우리가 사는 시대입니다.
그런데도 하느님께서는 잘못된 길을 가는 이에게 바른 길을 가도록 충고해야 할 의무를 말씀하십니다. 어떻게 지혜롭게 바른 길을 안내할 수 있을까요?
신부가 되기 위해 공부를 하는 동안 방황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휴학과 복학을 반복하며 2년을 지내면서 앞날이 혼미하던 그 시절, 답답한 마음에 어떤 때는 친구들과 어울려 늦게까지 이야기도 하고 술도 마시면서 1년 반을 지냈는데 어느 날 새벽 4시쯤 집에 들어갈 때였습니다. 담을 넘어 들어가니 어머니가 서 계셨습니다.
"왜 담을 넘어오느냐? 벨을 누르면 언제든지 문을 열어줄 터이니 다시는 담 넘어 다니지 말거라."
어머니께서는 이 말씀만 하시고는 두말도 없이 들어가 버리셨습니다. 모든 것을 다 알아들을 수 있는 한 말씀이셨지요. 그 다음부터는 밤늦게 다니지 않았습니다. 충고라는 것은 말로 되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되는 것이지요.
오늘 제2독서는 "남을 사랑하는 사람은 율법을 완성한 것입니다"(로마 13,8)라며 사랑이 충고의 정신임을 강조합니다. 사랑하는 마음으로 진심을 가지고 대하면 사람은 반드시 변하기 마련입니다.
프랑스의 시인이자 소설가인 빅토르 위고의 「장발장」 이야기를 아시지요? 주인공 장발장은 너무 배가 고픈 나머지 빵 한 조각을 훔쳐 먹습니다. 그리고 이 빵 한 조각 때문에 수감과 탈옥을 반복한 끝에 19년간 중노동을 선고받고 출소하지만 전과자란 낙인 때문에 어디도 몸을 두지 못하고 미움과 적개심만을 키우게 됩니다. 그러던 중 어떤 사람의 안내로 밀리에르 신부를 만나게 되고 하룻밤을 성당에서 묵게 됩니다. 신부는 장발장을 따뜻하게 맞이하고 먹을 것을 주며 위로합니다. 장발장은 처음 받는 인간적인 대접에 감격하게 되고 양심에 눈을 뜨게 됩니다. 그러나 신부가 잠든 사이 장발장은 유혹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은 접시를 집어 들고 도망칩니다. 경찰에 붙잡힌 장발장은 성당으로 끌려오지요.
"신부님, 혹시 은 접시를 잃어버리지 않으셨습니까? 아무래도 이 사람이 성당에서 훔친 것 같아 검문하다가 잡아왔습니다."
한참을 아무 말 없이 장발장을 바라보고 있던 신부님이 대답하지요.
"아닙니다. 그 접시는 내가 이 사람에게 선물로 준 것입니다."
그리고 은촛대까지 그에게 가져가라고 쥐어줍니다.
그 날 이후 장발장은 딴 사람이 됐습니다. 이름을 바꾸고 열심히 일해 백만장자가 되고 존경받는 시장이 되었습니다. 불쌍한 이웃을 돌보는,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으로 변화되지요.
충고는 남의 잘못을 지적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하느님께서는 내 이웃이 잘못된 길을 가고 있다면 사랑하는 마음으로 지혜롭게 충고해 바른 길을 갈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하여 모두가 함께 잘 사는 공동체를 만들라는 가르침이지요. 사랑의 힘이 얼마나 위대한지를 체험하는 한 주간 되시기 바랍니다.

충고의 자세
-홍금표신부-
인간은 살아가면서 어쩔 수 없이 잘못을 저지르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이기에 잘못을 지적 받기도 하고 지적하기도 하면서 살아간다.
그러나 잘못을 지적하는 행동은 대체로 긍정적인 결과를 목표로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항상 긍정적인 결과만 도출하는 것이 아니라 부정적인 결과를 가져오는 경우도 많이 있다고 한다. 그러기에 이를 예방하기 위해서는 몇가지 요령이 필요한데 공통적인 사항은 이렇다 한다.
먼저 잘못을 지적할 때는 가급적 다른 사람들 앞에서 지적하지 말고 아무도 모르게 그 사람에게 지적해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잘못된 사실」보다는 「그 사람」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두번째는 전하는 사람의 태도가 문제가 된다고 한다. 잘못의 지적은 「애정과 사랑을 전달하는 수단」이 되어야지 자신의 만족이나 타인을 비하하기 위한 목적이 되어서는 안된다고 한다. 그리고 비판에 앞서 상대방이 가지는 장점을 일깨워주고 상대방을 칭찬해 줄 수 있을 때 잘못을 지적받는 사람은 아프지만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여유가 생기게 된다는 것이다. 문제는 지적하는 사람의 말의 내용이 아니라 지적하는 태도에 더 유의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덧붙여 말한다면 부부 사이에서는 사소한 실수나 잘못에 대해서는 눈감아 주고 이해해 주는 것이 좋다고 한다. 너무 사소한 일에 대해 사랑의 이름으로 너무 자주 충고하는 것은 서로를 멀어지게 하는 지름길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리석은 자만이 노골적으로 비판한다』라는 격언처럼, 지혜로운 부부가 되기 위해서는 사소한 실수는 「그(녀)가 스스로 알도록 조금은 미루어두는 지혜」 나 아니면 「그(녀)가 느낄 수 있도록 눈감아 주는 지혜」를 가질 필요가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배우자가 자신의 부족함을 감싸주는 것을 느낄 때, 부부는 편안한 마음으로 서로를 배려할 여유를 가지게 되고 서로에게 나아갈 힘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떻든 이러한 관계에서 불변의 진리는 잘못을 했을 때, 잘못한 당사자가 그 사실을 인정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힘들겠지만 잘못을 인정할 수 있다면 아마 다른 모든 문제는 부차적인 문제로 머무르게 될 것이다.
오늘 복음은 그리스도인들이 마땅히 지녀야할 몸가짐을 밝혀 놓은 부분으로 잘못한 형제의 죄를 바로잡아야 할 때,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가져야 할 몇 가지 중요한 규범을 전해준다.
여기서는 먼저 형제적 충고를 할 때는 단둘이 만나서 그의 잘못을 타일러 주어야 한다고 한다. 아마 이 말씀은 충고의 목적이 무엇이어야 하는가를 보여주는 말씀인 것이다. 즉 형제적 충고는 「그 사람」에 초점을 맞추고 그 사람에 대한 애정과 사랑이 목적이 되어야지 「죄를 드러내고 밝히는 것」이 목적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의미이리라.
그리고 두번째는 개인적인 충고를 듣지 않거든 한 두 사람을 더 데리고 가서 충고하라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표현은 재판 때 복수증인을 채택하는데서 영향을 받은 표현일 수도 있지만 여기서는 형제의 잘못을 지적할 때는 객관적인 증거나 사실을 가지고 지적해야 된다는 의미인 것이다. 즉 섣부른 판단이나 독단적이고 주관적인 죄의 판단을 금지하는 말씀인 것이다.
그리고 세번째는 그래도 말을 듣지 않거든 교회에 알리고 교회의 말조차 듣지 않거든 이방인이나 세리처럼 여기라고 한다. 여기서 「이방인이나 세리처럼 여겨라」라는 표현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방인들이나 세리들을 백안시하고 관계를 갖지 않은 것을 참조하면 되는데 이 표현이 가지고 있는 의미는 그런 사람들과는 절교하든지 아니면 교회에서 내 쫓으라는 표현이다.
물론 이 말은 오해의 소지가 있을 수 있고 때로는 사랑에 반하는 행동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지만 이 표현이 강조하고자 하는 바가 절교나 파문이 아니라 잘못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행위를 강조하고 있다는 점을 이해하면 이 말이 가지는 의미를 알 수 있다.
즉 이 말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받아들이지 않는 자들과는 상종하지 말라는 의미 뿐 아니라 그리스도 공동체는 「잘못을 인정할 수 있는 사람」들만이 모이는 공동체이기에 잘못했을 때 잘못을 인정할 수 있는 사람이 되라는 의미도 함께 강조하는 표현인 것이다.
지난 8월 8일 성 도미니코 축일에 주교님이 수녀님들에게 하신 『잘못했을 때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서로 뜻이 다를 때 신자들의 말을 들을 수 있고, 화가 날 때 화를 참을 수 있는 수도자』가 되라는 말씀으로 결론을 대신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