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을 새우시며 하느님께 기도하시고 열둘을 뽑아 사도로 삼으셨다.(루가 6,12-19)

2011. 9. 6. 오전 8:06:49

글자

 

2011년 9월 6일 연중 제23주간 화요일

 예수께서는 기도하시려고 산에 들어가

밤을 새우시며 하느님께 기도하셨다.

날이 밝자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

그중에서 열둘을 뽑아 사도로 삼으셨다.

(루가 6,12-19)

 

 Jesus departed to the mountain to pray,
and he spent the night in prayer to God.
When day came, he called his disciples to himself,
and from them he chose Twelve,


  

 열두 제자는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연상시킨다. 예수님께서는 유다인 전체의 구원을 바라셨던 것이다. 그러기에 제자들은 모두 서민 출신이다. 그러한 사람들을 예수님께서 위대한 사도로 바꾸신 것이다. 주님께서는 하시지 못할 일이 없다 

☆☆☆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의 선택을 앞두시고 밤새워 기도하셨습니다. 그러나 뽑힌 이들의 면모는 결코 출중하지 않았습니다. ‘겨우 이런 사람들을 뽑으시려고 밤새 기도하셨을까?’ 하는 느낌마저 가질 수 있습니다. 더구나 제자 중에는 자신에게 등을 돌릴 유다 이스카리옷도 있었던 것입니다.
제자들의 면면은 참으로 미천하였습니다. 인간적 안목으로 볼 때 대부분 부족한 이들이었습니다. 당시에도 뛰어난 인물이 분명 많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보잘것없는 이들을 제자로 선택하셨습니다. 그것도 밤새워 기도하신 뒤에 뽑으셨습니다.
하느님의 일을 인간적 기준으로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 눈으로 보기에 부족하기만 해도 그분께서 보시기에는 넉넉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의 교회 현실은 그렇지 못합니다. 갈수록 사람을 선택하는 기준이 세속화되고, 세상 잣대로만 판단하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밤새워 기도하신 뒤에 뽑았으나, 우리는 무엇보다도 먼저 세상 기준을 헤아립니다. 선택의 첫 기준은 예수님처럼 기도하는 모습이어야 합니다. 뽑는 이든 뽑히는 이든 기도를 가장 중요한 것으로 여겨야 합니다.

  

부르심은 자격이요, 응답은 능력이다

  -반영억라파엘신부-

저는 가끔 저의 신상에 대해 생각합니다. 신부가 아니었다면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 죄도 허물도 많고, 뛰어난 능력도 없고, 잘난 것이 없는 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 도구로 쓰고 계시다고 생각하면 참으로 부끄럽습니다. 감사하고 새 힘을 얻게 됩니다. 그분의 자비가 크시다는 것을 새삼 느끼며 잘 살아야겠다고 다짐합니다. 

주님께서는 산에 들어가 밤을 새우며 기도하시고(루가6,12)나서 제자들을 선택 하셨는데 그 중에는 세리 마태오와 열혈당원 시몬이 섞여 있었습니다. 그들은 일제강점기의 독립군과 친일파로 비유할 수 있는 사이입니다. 그리고 후에 배반자가 된 유다 이스카리옷도 있었습니다. 기도하시고 뽑은 결과입니다. 저 같으면 그들은 쏙 빼놓았을 텐데 주님께서는 그들을 선택하여 부르시고 당신의 대리자로 지정하셨습니다. 정말이지 예수님의 품이 아니라면 도저히 그 자리에 함께 있지 못할 사람들입니다. 

꼴 보기 싫은 사람들을 옆에 두고 속 끓일 생각해 보십시오. 밥맛 떨어지고 꿈에 나타날까 두렵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많은 허물과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부르십니다. 그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이 자격입니다. 그리고 부족하지만 응답한다면 주님의 능력이 함께하는 것입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의 자비가 없다면 어떻게 감히 저 같은 죄인이 주님의 일을 하겠습니까? 주님의 크신 자비가 저를 지탱하게 합니다.

예수님 주변에는 항상 사람들이 몰려들었습니다. 주님께는 모두를 껴안을 수 있는 큰 품과 온유함이 있었고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능력의 힘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언제나 아버지께서 가르쳐 주신 것만 말하고 아버지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하셨습니다(요한 8,28-29). 이렇게 주님께서는 스승이기에 앞서 제자의 삶을 충실히 살았기에 스승이시기도 하십니다. 

많은 분들이 ‘저 같은 사람이 무엇을 하겠습니까? 저는 아닌 것 같습니다’ 하며 봉사의 기회를 거절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것은 오히려 교만함이 아닌가 합니다. 오히려 ‘부족하지만 주님의 도우심에 힘입어 열심히 하겠습니다’ 하는 것이 겸손입니다. 

주님께서는 일상 안에서 매 순간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그분께서 기뻐하시는 일에 기꺼이 응답하시길 바랍니다. 응답은 곧 능력이라는 것을 생각하며 나의 부족함을 무릎 쓰고 답하시길 바랍니다. 그리하면 주님께서 몸소 다 채워주실 것입니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불러 악령들을 제어하는 권능을 주시어 그것들을 쫓아내고 병자와 허약한 사람들을 모두 고쳐 주게 하셨다”(마태10,1)고 말씀하십니다. 마찬가지로 주님께서는 당신이 필요로 할 때 우리에게도 언제든지 당신의 능력을 주시고 우리를 도구 삼아 일하십니다. 그러므로 언제나 그분의 부르심에 기쁘게 응답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사랑합니다.

 

   기도의 손     

-김인한 신부-


 신학생 때 주일학교 교사들과 술자리를 갖고 집에 늦게 들어왔는데 제 어머니께서 묵주를 두 손으로 꼭 쥐신 채 잠이 들어 계셨습니다.
저는 신학생이면서도 늦게까지 다른 일에 빠져 있었지만 어머니는 저를 위해서 계속 기도하셨던 것입니다. 그때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어머니의 기도하는 손 끝에는 아들을 위한 마음이, 그리고 좋은 신부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절절히 배어 있었습니다. 정안수 떠놓고 달밤에 손을 비비는 어머니들의 마음이 전해져왔습니다. 바로 기도하는 자의 모습인 것 같습니다.
단순한 욕심이 아니라 더 인간답게 살고자 하는 바람이 담겨 있는 것 같습니다.
열두 제자를 뽑기 위해 기도하는 예수님의 손을 떠올려봅니다.

부족한 이들이지만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고 그들이 주님의 도구로 살아가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예수님의 기도의 손 끝에는 하느님이 담겨 있고, 자신이 아끼는 제자들에 대한 사랑이 담겨 있습니다.

오늘 아침 제가 기도하는 손에는 무엇이 담겨 있는지 바라봅니다.

혹 내가 정말 마음을 다해서 절절히 기도하는 순간에도 예수님처럼 정말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길 바라는지, 아니면 내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지 묻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처럼 간절한 마음이 배어 있는 우리네 삶이었으면 합니다.

 

 

 주님께서 내 이름을 부르실 때

-송미영 수녀(한국순교복자수녀회)-


 ◆‘괜찮아! 괜찮아!’는 한국 영화 ‘미녀는 괴로워’에서 청중이 제니에게 외치는 소리입니다. 진실과 사랑을 잃어버리고 괴로워하던 가수 제니가 자신이 ‘강한나’임을 청중에게 눈물로 고백합니다. 그러고 나서 진정한 한나로 돌아온 그녀는 소중한 아버지와 친구와의 사랑을 회복하게 됩니다.
우리는 세례 때 새 이름을 받고 주님의 자녀로 새로 태어났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세상에 속한 사람들이 아니라 영원한 하느님아버지의 아들딸이 되어 천상 유산의 상속자가 된 것입니다. 그러나 때때로 자신이 마음에 들지 않아 힘들 때가 있습니다. 자신에 대해 부정적일수록 더욱 괴로울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계실 때 병든 사람들을 치유해 주셨습니다. 지금도 날마다 우리의 ‘병든 자유’의 몸을 치유해 주시고 창조 때의 참모습을 회복시켜 구원의 예표로 보여주고 계십니다.
어린 시절, 퇴근한 아버지의 웃옷 주머니에서 복슬복슬 귀여운 강아지가 나왔을 때 우리 형제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좋아했습니다. 그 귀여운 강아지가 우리 것이라니, 너무 행복해서 믿어지지 않았습니다. 아버지 어머니가 우리를 귀엽게 바라보시는 눈길을 느끼며, 똘망똘망한 눈으로 쳐다보는 귀여운 강아지의 이름을 정하는 데 날이 새는 줄도 몰랐습니다. 강아지의 특징이 잘 드러나는 예쁜 이름을 지어주고 나니 비로소 ‘우리 강아지’가 되었습니다. 몇천 번을 불러도 질리지 않을 그 예쁜 이름을 자꾸자꾸 부르며 쓰다듬어 주었습니다.
아버지 어머니가 우리의 이름을 다정하게 부르실 때 그보다 더 달콤한 느낌은 없습니다. 주님께서도 우리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주시며 당신의 사랑을 표현하십니다. 귀를 기울여 들어보세요. 주님께서 우리의 이름을 얼마나 다정하고 사랑스럽게 부르시는지를, 그리고 우리가 그 소리에 잠겨 사랑스럽고 소중한 참모습을 발견하는 행복을 느끼기를 얼마나 바라시는지를. 

 

 

 

 고통의 자리가 하느님이 함께 계시는 자리로

-서영남 (인천 민들레 국숫집)-

 

예수께서 하느님께 기도하시고 사도들을 뽑으십니다. 사도들은 하느님께서 뽑으십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선택하는 것이 아닙니다. 또 사도라는 명칭은 파견된 자라는 뜻입니다. 무엇을 위해 파견된 사람인지는 예수님의 사명을 보면 확실해집니다. 다른 사람의 고통을 측은히 여기고 살리는 일을 하기 위해서입니다. 사도란 예수님이 보여주신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드러내고 실천하는 사람입니다.

매달 민들레 국숫집이 쉬는 금요일에 두 번 청송을 다녀옵니다. 민들레 국숫집의 첫 손님이기도 한 대성씨는 일이 없는 날은 함께 청송을 가기도 합니다. 얼마 전에 함께 청송에 가서 청송 감호소 형제들을 만났습니다. 교무과 상담실에 둘러앉아 기도 나눔을 하고, 음식을 나눈 후에 자기 소개를 하는 시간에 한 달 후면 출소하게 되는 용하 형제가 자기 소개를 했습니다. 나이가 마흔여섯이고, 고아원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고 소년원을 들락거리기 시작했고, 스무 살이 넘어서는 교도소를 들락거리면서 지금껏 30여년을 징역살이를 했고 출소해도 갈 곳도 없고, 또 교도소에서 손을 다쳐서 비록 오른 손가락이 전부 절단되기도 했지만 믿음 생활을 하는 요즘이 행복하다고 말했습니다. 대성씨는 용하씨가 안쓰러운 모양입니다. 몇 번을 제게 용하씨 도와주면 좋겠다고 이야기합니다.

두 주일 후에 청송 2교도소와 청송교도소 두 군데 자매 상담을 하는 날에 대성씨도 함께 청송으로 내려갔습니다. 오전에는 제가 청송 2교도소 자매 상담을 하는 데는 혼자 들어가야 했습니다. 그래서 대성씨는 청송 감호소의 용하 형제를 면회하기로 했습니다. 청송 감호소의 용하 형제를 면회하고 나온 대성씨는 면회시간 30분이 너무도 짧았다고 합니다. 용하 형제는 면회 왔다는 교도관의 말에 설마 자기를 면회 올 사람은 없고 아마 동명이인일 것이니 다시 확인해 달라고 했다고 합니다. 이제 두 주일 후면 출소할 텐데 갈 곳도 없고 살아갈 길도 막막해서 그저 하느님께 기도만 하고 있었는데 하느님이 기도를 들어주셨다며 대성씨를 어찌나 반갑게 맞이해 주는지 가슴이 찡했다고 합니다. 용하 형제에게 민들레 국숫집 2층에서 함께 살자고 말했답니다. 30여년을 징역살이하면서 아무도 찾아와 주지 않았던 용하 형제에게는 생전 처음 자기를 찾아온 대성씨가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보여주는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이제는 고통의 자리가 하느님이 함께 계시는 자리로 변했습니다. 
 

 

 
조건 없는 부르심     

-최혜영 수녀-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중요한 일을 앞두고 기도를 하셨습니다. 열두 제자들을 뽑으실 때도 산에 가셔서 밤을 새우시며 하느님께 기도를 하셨습니다.
어떤 기준으로 제자들 가운데서 열둘을 뽑으셨는지 알 수는 없지만, 열둘이라는 숫자는 하느님의 백성, 곧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상징하는 숫자로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열두 사도는 “새로운 하느님의 백성”이라는 제자 공동체, 나아가 그리스도 교회의 정체성과 맞닿아 있습니다. 초대교회에서는 ‘사도’라는 말을 생전의 예수님께 직접 가르침을 받은 예수님의 직제자에게만 사용하였습니다.
갈릴래아 어부였던 베드로와 안드레아, 제베대오의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 세리였던 마태오와 열혈당원인 시몬, 배신자가 된 유다 이스카리옷….
각양각색의 인물들이 한 제자단에 속할 수 있었다는 것은 예수님의 부르심에 아무런 조건이 없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종종 누구누구가 마음에 안 들어서 교회에 가지 않는다는 사람들을 만나게 되는데 예수님의 열두 제자단을 생각한다면 감히 그런 말을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나의 선택이 아닙니다.
나를 불러주신 예수님 안에서 이웃의 약점이나 잘못을 받아줄 수 있는 관대함이 커지기를 기원해봅니다.


  날이 새자 제자들을 부르시어 그들 가운데에서 열둘을 뽑으셨다.”

-양승국신부-

 

<이토록 저를 소중히 여기시는 주님>


밤새워 기도해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저는 몇 번 시도를 해보았지만, 늘 실패로 끝났습니다. 밤을 꼬박 샌다는 것, 그것도 기도하며 지샌다는 것,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정기적으로 철야기도하시는 분들 정말 대단한 분들이라고 생각이 듭니다.


예수님께서도 공생활 기간 동안 가끔 철야기도를 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그런 상황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저녁 무렵 산에 오르신 예수님께서는 밤을 새워가며 기도하십니다. 공생활 기간동안 예수님께서는 아주 자주, 시도 때도 없이 철야기도를 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런 순간들은 당신 일생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 절대 절명의 순간, 삶의 분수령이 되는 순간들이었습니다.


십자가 죽음을 앞두고, 오늘 복음에서처럼 당신의 제자들을 뽑기 위해서, 철야기도를 하셨습니다. 그만큼 예수님께서는 제자 선발에 큰 중요성을 두신 것입니다.


제자들을 뽑기 위해 밤을 꼬박 지새우시며 하느님 아버지께 기도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묵상하면서 충만한 감사의 정이 느껴졌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마도 저를 위해서도 열렬히 기도해주실 것이라는 생각, 그래서 내 성소, 비록 너무나 부족하고 부당해서 정말 부끄럽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중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가 이토록 철저하게도 부족하지만 예수님께서 나를 소중히 여겨주시니 다시금 힘을 냅니다. 내가 이토록 나약하지만 예수님께서 기도해주시고 걱정해주시니 모든 것 그분께 맡기고 앞으로 나아갑니다.


이제 막 본격적인 수도생활을 시작하는 후배들과 살아가면서 늘 느끼는 것입니다.


세상 모든 젊은이들이 다 따라가는 그 휘황찬란한 길, ‘때깔 나는’ 길을 뒤로 하고 너무나 가파른 언덕길, 어찌 보면 너무나 팍팍해서 짜증나고 숨 막히는 길을 선택하는 우리 어린 수도자들, 너무나 사랑스럽고 또 존경스럽습니다. 그들을 바라볼 때 마다 하느님의 현존이 손에 잡힐 듯 가까이 느껴집니다.


예수님을 향한 순수한 마음과 열정으로 똘똘 뭉쳐진 어린 수도자들입니다. 저보다 세상의 때가 훨씬 덜 묻은 형제들입니다. 마치 산속 깊숙이 몰래 피어있는 들꽃 한 송이를 보는 듯한 느낌이 드는 형제들입니다. 그들을 바라볼 때 마다 우리 가운데 활발히 활동하시는 성령의 움직임을 확인합니다.


오늘도 우리 주님께서 우리 모든 수행자들과 모든 그리스도인의 신앙여정에 동행해주시기를, 그들을 축복해주시기를, 그들의 인생길을 환히 밝혀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오창열 신부(영성의 집 관장)-


 예수님은 바쁘신 일정 중에서도 기도생활을 소홀히 하지 않으셨다. 기도하는 시간을 통해서 성부 하느님과 일치하였고, 기도함으로써 당신의 사명을 이행할 수 있는 힘과 능력을 얻었다. 특히 예수님은 밤을 새워 가며 기도하기도 하셨다. 공생활 시작 전 광야에서 40주야를 단식하시면서 기도하셨고, 수난 전에 게세마니 동산에서도 밤새 기도하셨다. 오늘 복음에서처럼, 제자들 가운데서 사도들을 선발하실 목적으로 철야기도 하기도 하셨다. 이처럼 중대한 일을 앞두고 기도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면서, 중대한 결정을 하거나 큰일에 앞서 기도하는 시간을 갖는 것이 얼마나 필요한 일인가를 생각하게 된다.


 예수님은 밤새 기도하신 후, 날이 밝자 제자들을 불러, 그 중에서 열둘을 뽑아 사도로 삼으셨다. 마르코 복음 3장에 따르면, 예수님은 “당신께서 원하시는 이들을 가까이 부르시고, …… 그들을 당신과 함께 지내게 하시려고” 선발하셨다. 또 사도들을 뽑은 목적은 “그들을 파견하시어 복음을 선포하게 하시며, 마귀들을 쫓아내는 권한을 가지게 하시려는 것이었다.”(3,13-15)


 하느님은 우리와 함께 하시려고 당신의 아드님을 이 세상에 보내 주셨다. 그렇듯이, 사도들을 선발한 목적 또한 그들을 당신 곁에 있게 하시기 위함이었다. 나중에 예수님은 사도들에게 “나는 이제 너희를 종이라 부르지 않고 벗이라 부르겠다.”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사도들을 당신의 친구처럼 대하시고, 그들과 우의를 나누시고자 하신 것이다. 실제로, 예수님은 인간적인 도움과 협조, 우애를 나누시며 생활하셨다. 라자로의 죽음을 슬퍼하셨고, 많은 부인네들이 그분을 도왔다. 그것이 예수님께는 행복이기도 하셨다. 하느님께는 부족함이 없고 하느님은 완전한 분이시지만, 우리와의 친밀한 사귐과 우애를 나누고자 하신다. 얼마나 놀랍고도 은혜로운 일인가? 이런 사실로 보아, 하느님은 나로 인해서 기뻐하시고 행복해 하시는 분이심을 알 수 있다. 그러니 우리 자신을 너무 과소평가하지 말아야 한다. 실망하지 말아야 한다.


 예수님께서 사도들을 선발한 중요한 목적은 그들로 하여금 ‘복음을 선포하게 하고, 마귀를 쫓는 구마의 능력을 주시기 위함’이었다. 복음 선포는 예수님의 일차적인 사명이었고, 사도들에게 주어진 사명이었다. 세례 받은 신자들은 예수님의 지상 명령에 따라 이웃에게 복음을 선포할 중대한 의무를 갖는다. 또한 사도들에게 마귀를 쫓는 능력을 주신 것은 우리를 유혹하여 죄에 빠지게 하고 하느님 나라의 영토를 확장하는 것을 방해하는 악의 세력에서부터 우리의 신앙을 지키고 보호하기 위함이다. 예수님도 공생활을 통해서 이 은사적인 구마 사목을 통해서 악의 세력에 적극 대처하시고, 그 영향으로 질병에 구속되어 있던 사람들을 치유해 주셨고, 그리하여 그들에게 자유와 해방을 가져다 주셨다.


 사도들이 받은 이 두 가지 사명은, 오늘 우리 교회가 세상 가운데 건설해야 할 하느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서 계속해야 할 중대한 사명이다. 복음 선포와 복음 선포를 방해하는 악의 세력에 대한 적극적인 대처는 서로 긴밀한 관련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소홀히 할 수 없는 일이다. 예수님께서 사도들을 세상에 보내어 당신의 일을 계속하시려고 파견하신 것처럼, 매 미사 때마다 파견되는 우리는 개인적으로나 공동체적으로 바로 그러한 사명을 이행하기 위한 것임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그것이 주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뜻이고, 곧 파견하시는 목적인 때문이다.

새벽을 열며

 

 제가 사제서품을 받고서 처음으로 본당에 나갔을 때의 일입니다. 중고등부 여름 신앙학교에 지도신부로 쫓아간 적이 있었지요. 아마 강원도 어떤 계곡 옆의 캠프장으로 갔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순수한 아이들과 함께 즐겁고 또한 유익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지요. 딱 한 순간을 빼고 말입니다. 그 한 순간은 바로 물놀이 시간이었습니다.

물놀이를 하러 계곡의 넓은 공간으로 갔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순수해 보이는 아이들의 눈빛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한 스무 명 되는 아이들이 저를 붙잡고, 저를 물가로 데리고 가는 것이 아니겠어요. 조금 두려웠습니다. 그래도 이 순진한 아이들이니까 그냥 물속에 저를 집어 던지고 말겠지 했습니다. 아니었습니다. 물속에 집어 던진 것은 물론 나오지 못하게 그래서 물을 잔뜩 먹을 수 있도록 스무 명의 아이들이 저를 위에서 누르는 것이 아니겠어요? 인정사정 보지 않고 말이지요(제게 무슨 원수 진 것 같았습니다).

정말로 죽을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필사적으로 몸부림을 쳤습니다. 그리고 스무 명의 아이들을 제치고 물 밖으로 나왔습니다. 그때 처음으로 제가 힘세다는 것을 알았지요. 한 두 명도 아니고 자그마치 스무 명의 다 큰 아이들을 뚫고서 물 밖으로 나왔으니 말입니다. 하지만 실제 저의 힘은 그렇게 세지 않습니다. 바로 살겠다는 의지가 20명의 중고등부 아이들을 뚫을 수 있었던 것이 아닌가 싶어요.

살겠다는 절박한 의지는 불가능한 것도 가능한 것으로 만듭니다. 그렇다면 어렵고 힘들다는 우리의 삶에서도 이러한 의지는 필요하지 않을까요? 우리 신앙인들에게 이런 의지는 바로 기도를 통해서 얻을 수 있게 됩니다. 주님께 바치는 간절한 기도,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 맡길 수 있는 기도야 말로, 불가능해 보이는 일도 가능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 기도의 힘을 의심하시는 분들은 오늘 복음의 장면을 한 번 보셨으면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시려고 산으로 나가시어, 밤을 새우며 하느님께 기도하셨다. 그리고 날이 새자 제자들을 부르시어 그들 가운데에서 열둘을 뽑으셨다.”

전지전능하신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따라서 모르는 것이 없을 것이고, 고민하실 필요도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도 기도하십니다. 그것도 잠깐의 기도를 하신 것이 아니라, 밤을 새워가면서 고민 속에서 깊은 기도를 하십니다. 왜냐하면 이 기도를 통해서만 하느님의 뜻을 알 수 있고, 보다 더 바른 선택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기도하셨기에, 사람들은 예수님께 손만 대어도 병이 나을 수가 있었습니다.

예수님도 하셨던 기도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의 기도는 과연 어떠한가요? 잠깐의 시간을 이용한 화살기도 몇 회로 나의 모든 의무를 다했다는 식의 마음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앞서 살겠다는 의지가 순간적으로 힘센 나를 만들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이러한 마음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그때 우리들은 어렵고 힘든 세상에서도 한 줄기 희망의 빛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시간 내어 기도합시다. 기도는 여유가 있을 때만 바치는 것이 아닙니다.


 빠다킹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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