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9월 7일 연중 제23주간 수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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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사람들아, 너희는 행복하다. 하느님 나라가 너희의 것이다. (루가 6,20-26) Blessed are you who are poor,
말씀의 초대
신앙인은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살아난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하늘의 삶을 추구해야 한다. 현세적인 삶에 너무 얽매여서는 안 된다. 낡은 인간은 끝났고, 새 인간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남은 일은 주님을 따라 끊임없이 변화하는 일이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가난하고 굶주리며 우는 이들을 행복하다고 하신다. 하지만 원인이 ‘주님과 믿음’ 때문이어야 한다. 주님과 무관한 가난이라면 행복이라고 할 수 없다. 신앙생활과 관계없는 슬픔 역시 행복은 아니다. 행복은 주님께서 베푸시는 은총인 까닭이다(복음). ☆☆☆ 오늘의 묵상 누구나 행복해지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복음 말씀은 뜻밖입니다. 출발부터 다릅니다. 가난한 사람을 ‘행복하다고’ 하십니다. 행복의 우선 조건을 ‘부자’라고 생각했던 이들에게는 난감한 표현입니다.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하느님의 나라가 너희 것이다.” 그러고 보니, 부자라고 모두 행복한 것은 아닌 듯합니다. ☆☆☆ 오늘 복음은 행복에 대한 내용입니다. 인류가 그토록 갈망하는 행복에 대한 기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놀랍게도 부족함을 느끼는 데 행복이 있다고 하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생각하는 행복의 기준은 넉넉하고 넘치는 것입니다. 마음의 가난을 행복의 첫 조건으로 꼽으신 예수님의 가르침의 본질은 무엇일까요?
☆☆☆
‘참행복’에 관한 말씀은 루카 복음과 마태오 복음에 나란히 등장합니다. 그러나 ‘불행 선언’은 루카 복음에만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불행 선언’을 말씀하셨음에도 마태오 복음사가는 그 사실을 몰랐거나, 편집 과정에서 빠뜨렸을지도 모릅니다. ☆☆☆ 예수님의 가르침은 세상이 추구하는 것과 정반대의 입장을 보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부를 추구하고, 배부른 것을 찾고, 웃음을 찾으나, 주님께서는 가난과 굶주림과 눈물과 박해를 말씀하십니다. 여기에는 깊은 뜻이 있습니다. 참된 행복을 주는 것은 부와 배부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참행복을 주시는 분은 하느님이시라는 사실입니다. 가난하고, 굶주리고, 슬퍼하는 사람들이 찾고 기대하는 분은 바로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그들의 보호자요 배경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
행복은 천상의 것들을 추구하는 것이다
-반영억라파엘신부-
남보다 머리가 좀 뒤떨어진 노인이 한 분 계셨습니다. 머리가 좋지 않다고 사람들에게 놀림을 받고 무시를 당해서 하느님께 열심히 기도를 하였더니 어느 날 하느님께서 나타나셔서 소원 한 가지를 청하면 꼭 들어 주겠다고 하셨습니다. 노인은 얼른 똑똑한 머리를 달라고 청했습니다. 청하고 나서 가만히 생각하니 머리보다는 돈이 좋을 듯 했습니다. 돈이 많으면 머리 좋은 사람을 부릴 수 있다고 생각해서 청을 바꾸었습니다. 또 청을 바꾸고 생각하니 돈보다는 말년에 아리따운 여자와 함께 사는 것이 좋을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다시 하느님께 청했습니다. 청하고 나니 다시 욕심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다시 간절히 청했습니다. 세 가지를 다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하느님께서 참다못해 말씀하셨습니다. ‘자꾸 이랬다. 저랬다 하지 말고 한마디로 말 하여라.’ 그래서 큰 소리로 외쳤답니다. ‘머리 돈 여자!’ 하느님께서는 그의 청을 들어 주셨고 그는 지금 많은 어려움 속에 산답니다. ‘머리 돈 여자 !’ 정신없는 여자와 살려니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행복은 똑똑한 머리에서 오는 것도 아니고 많은 돈에서 오는 것도 아닙니다. 그렇다고 아리따운 여인에게서 오는 것도 아닙니다. 행복은 ‘천상의 것들을 추구하는 데 있는 것입니다’(골로3,2). ‘옛 생활을 청산하여 낡은 인간을 벗어 버리고 새 인간으로 갈아입은’사람다운 생활을 하는 데 있습니다.(골로3,9-10)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사람들, 굶주리는 사람들, 지금 우는 사람들, 미움을 사고 쫓겨나고 모욕을 당하고 누명을 쓴 사람들을 행복하다고 하시고 오히려 부유한 사람들, 배부르고 웃고 칭찬 받는 사람들을 불행하다고 하시니 선뜻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분명 그렇게 말씀하십니다. 부유한 사람은 부 때문에 위험합니다. 그들은 자기 삶의 확고한 기반을 하느님에게서가 아니라 자신의 부에서 찾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가난한 이들은 모든 것을 하느님께 의탁하고 하느님에게서 얻으려 하기 때문에 행복합니다.
그래서 아우구스띠노 성인은 말합니다.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을 알되 하느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불행하며, 이 모든 것을 모르나 하느님을 아는 사람들은 참으로 행복합니다.” 그리고 “행복한 사람이란 하느님에 대한 많은 것을 아는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을 자신 안에 모신 사람입니다.”(니사의 성 그레고리오) 성 베르나르도는 “내 행복은 오직 하느님 곁에 있는 것, 내 주 하느님께 희망을 두는 일 뿐입니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눈에 보이는 것만을 가지고 ‘행복하다.’, ‘불행하다’를 말하지 말고 “우리 마음에 열성을 기르고 믿는 바에 관심을 일깨우며 천상사물을 갈망하십시오. 어떠한 불행 중이라도 천상 것을 추구하는 이 행복을 스스로 포기하지 마십시오.”(성 대그레고리오 교황) 시편의 말씀으로 마무리 합니다. “행복하여라! 악인들의 뜻에 따라 걷지 않고 죄인들의 길에 들지 않으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않는 사람, 오히려 주님의 가르침을 좋아하고 그분의 가르침을 밤낮으로 되새기는 사람, 그는 시냇가에 심겨 제때에 열매를 내며 잎이 시들지 않는 나무와 같아 하는 일마다 잘 되리라.”(시편1,1-3) 사랑합니다. 행복하십시오!
<바닥체험>
-양승국신부-
살다보면 가끔씩 철저하게도 제 자신이 망가지는 체험을 할 때가 있습니다. 나름대로 정성을 다했다고, 할만큼 했다고 생각하지만 때로 올바른 지향을 두지 않았기에 참담하게 무너져 내리는 실패를 체험합니다.
가끔씩 바닥으로 떨어지는 참담함이나 비참함을 절절이 체험하면서 제가 얻은 소중한 진리가 한가지 있습니다.
우리가 쉽게 밑바닥으로 떨어지는 순간이 언제인가 하면 역설적이게도 우리가 기를 쓰고 위로만 올라가려는 순간이라는 사실입니다.
때로 "이 정도면 내 인생도 꽤 잘 나가는 편이겠지?"하는 순간, 그것이 농담이라 할지라도 은연중에 제 잘난척하는 순간 하느님은 어느새 우리를 심연의 바닥으로 내동댕이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러한 바닥체험을 통해 기고만장하던 우리의 기를 꺾어 놓으십니다.
그렇게 잘 나가던 우리가 한 순간에 "야, 내가 어쩌다 이 모양이 되었나?", "내가 이 정도 밖에 안 되는 놈이었구나!"라고 고백하게 만드시는 분이 우리의 하느님이십니다.
그럴 때 물론 괴롭기 그지없습니다.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기어 들어가고 싶습니다. 모든 것이 싫어집니다.
그러나 또 한가지, 바닥에 떨어지는 순간마다 얻게 되는 소중한 체험이 하나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가끔씩 바닥에서 헤매고 있는 사람들에게 "아주 가끔씩은 바닥을 길 필요가 있다"는 말을 해줍니다.
참담한 실패, 죽고 싶은 마음,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들어가고 싶은 심정, 아침이 오지 말았으면 하는 바램으로 더 이상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을 때 그 고통은 이루 다 필설로 표현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 생의 최저점에 설 때마다 저는 제 자신 본연의 모습, 제 자신의 적나라한 모습을 똑똑히 확인합니다.
그러면서 "하느님을 떠난 나는 결국 티끌이었구나! 결국 내 생애는 하느님 자비로 이어온 자비의 역사였구나!"하는 진리에 도달하게 됩니다.
"하느님 저를 불쌍히 여겨주십시오. 이제 제게는 하느님 당신 밖에 아무 것도 없습니다" 라고 고백하는 겸손함, 거기서 다시 한번 이 세상 그 누구도 줄 수 없는 새 삶의 기쁨을 느낍니다. 그 순간이 바로 행복의 순간입니다. 그 순간이 바로 구원의 순간입니다.
결국 우리가 저주로 여기는 모든 것을 하느님께서는 축복으로 보십니다. 가난, 질병, 고통, 착취, 시련, 한탄, 원망, 박해, 욕설, 죽음, 십자가 이 모든 것이 하느님 보시기에는 축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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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찾아야 할 참된 행복”
-이기양 신부-
"인간만사 새옹지마(塞翁之馬)"란 고사성어가 있습니다. 새옹(塞翁)이란 새상(塞上:북쪽 국경)에 사는 늙은이란 뜻이지요. 글이 생겨난 이유는 이렇습니다.
옛날 중국 북방의 요새(要塞)근처에 점을 잘 치는 한 노옹(老翁)이 살고 있었는데 어느 날, 이 노옹의 말이 오랑캐 땅으로 달아나고 말았습니다. 마을 사람들이 이를 위로하자 노옹은 조금도 애석한 기색 없이 태연하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누가 아오? 이 일이 복(福)이 될는지."
몇 달이 지난 어느 날, 그 말이 오랑캐의 준마(駿馬)를 데리고 돌아왔습니다. 마을 사람들이 이를 치하하자 노옹은 조금도 기쁜 기색 없이 태연하게 말했습니다.
"누가 아오? 이 일이 화가 될는지."
그런데 어느 날, 말타기를 좋아하는 노옹의 아들이 그 오랑캐의 준마를 타다가 떨어져 다리가 부러지고 말았습니다. 마을 사람들이 이를 위로하자 노옹은 조금도 슬픈 기색 없이 또 태연하게 말했습니다.
"누가 아오? 이 일이 복이 될는지."
그로부터 1년이 지난 어느 날, 오랑캐가 대거 침입해 오자 마을 장정들은 이를 맞아 싸우다가 모두 전사했다. 그러나 노옹의 아들만은 절름발이었기 때문에 무사했다고 합니다.
이와 같이 새옹지마란 인간의 행복과 불행은 언제 바뀔지 모르기 때문에 너무 슬퍼하거나 또 마냥 기뻐해서는 안될 것이라는 의미의 고사성어입니다. 우리가 사는 인생은 화와 복이 노끈처럼 번갈아 찾아옵니다. 결코 어느 한쪽만 찾아오는 일은 없지요. 언제나 행복과 불행이 함께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4개의 행복 선언과 4개의 불행 선언을 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에는 우리가 바라는 행복과 불행이 반대로 나타나 있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가난한 사람, 굶주린 사람, 우는 사람, 박해받는 사람은 행복하다고 하시고, 반면에 부유한 사람, 배불리 먹는 사람, 웃고 지내는 사람, 칭찬 받는 사람은 불행하다고 깜짝 놀랄 말씀을 하십니다. 이것이 과연 무슨 뜻이겠습니까?
물론 여기서 가난한 사람, 굶주린 사람, 우는 사람 등은 게으름을 피운다거나 심한 낭비벽으로 가난해진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을 따르다가 어려워진 사람들입니다. 또 여기서의 부자 역시 재물과 권력과 세상을 사는 재미에 빠져서 하느님을 떠나 눈 앞 세상에만 의지하는 사람을 지칭합니다. 세상에서 부유해진 사람은 자칫 이 세상의 형편에 만족하기 때문에 하느님을 붙잡지 않게 됩니다. 자기의 재물과, 지혜와 권력에만 의지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재물은 더 많은 재물을 요구하고, 권력은 더 높은 권력을 요구합니다. 끝없이 세상에 집착하게 만들지요. 그럼으로써 결국 재물이 인간을 지배하게 됩니다.
반대로 가진 것은 별로 없지만 하느님을 아는 사람은 하느님께 의지합니다. 이들은 세상적인 욕망에서도 멈출 줄 알고, 소유한 것이 많지 않아도 함께 나눌 줄 알며, 적은 것에 감사하고, 끝없는 소유의 욕망 앞에서 자유로와 질 수 있습니다. 참된 행복은 만족할 줄 아는데서 비롯되는데 이것은 하느님을 알 때 비로소 가능해집니다.
지금 우리는 순교자 성월을 지내고 있습니다만 순교자들의 삶을 보면 오늘 복음이 얼마나 명확한지를 확인할 수가 있습니다. 순교자들은 하느님 때문에 말 그대로 가난하고 굶주리고 울고 박해를 받았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토록 혹독한 박해 중에서도 모든 것을 하느님께 의지하고 살았기 때문에 죽음 앞에서도 평안할 수 있었고, 박해 중에도 많은 사람들의 모범이 될 수 있었습니다. 반면에 그 순교자들을 박해했던 사람들은 부유했고 권력가들이었으며 많은 사람들로부터 우러름을 받았지만 결국 아무것도 이루지 못했습니다. 세상의 부와 권력 안에서 행복과 만족을 찾으려고 했지만 그들의 이름은 어디에도 남아있지 않습니다. 세월이 흐른 지금 우리의 눈에 너무나도 잘 보이는 사실입니다. 박해를 하고 사람을 죽이면서 오히려 더 불안하고 힘겹게 살게 된 사람들이 그들이었습니다.
그렇다고 일부러 가난하게 되거나 박해받는 상황을 자처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성실하게 노력해서 풍요롭게 살아야 하지요. 그것이 하느님 축복의 열매입니다. 그래야 이웃과 나눌 수도 있고, 가정을 꾸려갈 수도 있지요. “배부른 김에, ‘야훼가 다 뭐냐?’하며 배은망덕하지 않게, 너무 가난한 탓에 도둑질하여 하느님의 이름에 욕을 돌리지 않게 해주십시오.”(잠언30,9)라는 잠언 저자의 말처럼 게을러서 가난해지지도, 또 재물 때문에 하느님을 떠나서도 안되겠습니다.
인생에 있어서 행복과 불행은 누구에게나 교차됩니다. 인간의 참된 행복은 권력이나, 재산, 또는 인간에게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믿고 의지할 때 얻어지는 것입니다. 참 행복은 재물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로부터 비롯되지요.
그런데 우리 시대는 아이에서부터 어른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돈! 돈! 돈! 하며 살아갑니다. 불행은 여기에서 시작됩니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또 자녀들까지도 돈을 벌러 나가지만 만족보다는 끝없는 갈증에, 그리고 상대적인 빈곤에 시달립니다. 욕망은 더 큰 욕망을 불러일으키지요. 우리는 하느님 안에서 만족할 줄 알며 절제할 줄 아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우리 가정을 이끌어 가는 것이 과연 무엇인지, 우리 공동체 안에 중심이 되어 있는 것이 무엇인지, 무엇보다도 내가 무엇으로 나의 중심을 채우고 있는지 되돌아 볼 필요가 있습니다. 세상적인 성공이나 재물에 얽매여 있다면 그것에 끝없이 휘둘릴 뿐 참된 평화나 행복은 얻기 어려울 것입니다. 하느님께 대한 믿음이 깊어질수록 우리는 흔들리지 않는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참 행복을 말씀하시며 우리 삶의 핵심을 선포하셨습니다. 주님을 떠나서 우리는 결코 행복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내 중심에 계실 때 참 행복이 시작됨을 기억하며 그렇게 살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여러분 모두 하느님 나라의 참된 행복을 맛보시기를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