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루가 6,39-42)

2011. 9. 9. 오전 6:42:53

글자

 

2011 9 9일 연중 제23주간 금요일

 소경이 어떻게 소경의 길잡이가 될 수 있겠느냐?

그러면 둘 다 구덩이에 빠지지 않겠느냐?“
(루가 6,39-42)

 “Can a blind person guide a blind person?
Will not both fall into a pit?

 

예전의 바오로는 박해자였다. 하지만 예수님을 알게 되자 모든 것을 바꾸었다. 주님을 위해 포기한 것이다. 바오로는 지난날을 용서받았다는 확신을 갖고 있다. 믿음을 몰랐던 시절의 일이었기 때문이다. 주님께서는 바오로에게 새로운 직무를 맡기신다(1독서). 자신의 잘못에는 너그럽지만 타인의 잘못에는 매몰차다. 자신의 허물은 모르면서 남의 허물은 잘 알고 있다. 그러므로 비난에 앞서 돌아봐야 한다. 내 눈의 들보는 못 보면서 남의 눈의 티를 보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봐야 한다(복음).

 

박제가(朴齊家)는 조선 후기의 실학자입니다. 그는 청나라의 수도인 연경을 다녀온 뒤 선진 문물에 크게 감명받습니다. 그래서 기술 도입과 제도 개선의 시급함을 깨닫고 쓴 책이 『북학의』(北學議)입니다.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장사와 제조업의 장려, 신분 차별의 타파와 해외 통상까지 주장하고 있습니다. 다음은 그 책에 나오는 한 구절입니다.
“집에서 물건을 만들거나 시장에 내다 파는 것을 수치로 여긴다. 자와 먹통, 칼과 끌을 갖고 남의 집에서 품팔이하는 것을 부끄러워하고, 사람들은 그들을 우습게 여긴다. 그런 일을 하는 이 중에는 혼인길마저 끊긴 사람도 많다.

오늘날도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마땅한 직업이 없어 혼인길이 난감한 젊은이들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직장 때문에 부모들은 골머리를 앓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외국인 노동자들이 판을 칩니다. 우리는 너무 하기 쉬운 일만 바라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직업에 관한 한, 내 눈의 들보를 못 보고 있는 것은 아닐는지요
?
박제가는 서자 출신으로 출셋길이 막혀 있었습니다. 열한 살에 부친을 잃고 가난에 허덕대던 그는 악조건을 이겨 나가려고 닥치는 대로 일합니다. 그러한 고생이 있었기에 세상에 대해 눈뜰 수 있었습니다
.
자녀들의 고생을 막아서는 안 됩니다. 맹목적인 사랑은 자식의 앞날을 망칩니다.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준열한 꾸짖음입니다. 남을 탓하기에 앞서 자신을 돌아보라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쉽지 않습니다. 불평과 불만이 언제나 앞서 나타납니다. 기분이 언짢거나 마음이 섭섭하면 더욱 그렇습니다. 좋은 모습은 보이지 않고, 나쁜 모습만 눈에 뜨입니다.
그러니 평소의 마음 상태가 중요합니다. 평온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마음이 평화스러우면 많은 문제는 저절로해결되기 때문입니다. 평화를 위해 애쓰면, 불평하고 싶은 충동 역시 억제됩니다. 그러므로 눈의 들보를 빼는 작업은 평화를 위한 노력입니다. 마음의 평온을 청하는 기도입니다
.
완벽한 만족은 없습니다. 80퍼센트의 만족과 20퍼센트의 불만이 정상입니다. 지극히 정상적인 일입니다. 100퍼센트 만족은 오히려 위험합니다. 신앙생활에서는 자칫 광신으로 흐르기 쉽습니다. 대인 관계에서는 여차하면 정신적인 문제로 발전합니다. 어느 정도의 불만이 긴장을 유지시켜건전한 관계를 지속시켜 줍니다
.
절제하지 않으면 만족은 없습니다. 지금의 처지를 만족의 시선으로 보려는 것이 내 눈의 들보를 아는 일입니다. 절제하지 않기에 눈이 멉니다. 애욕에 눈멀고, 돈에 눈멀고, 권력에 눈멀어 자신을 탓하고 남을 탓합니다.

 

너나 잘해, 내 걱정 하지마!

 -반영억 라파엘 신부-

살아가면서 말은 청산유수인데 삶이 뒷받침 되지 못하여 인정받지 못하는 사람을 만납니다. 자신의 큰 허물은 보지 못하면서도 남의 작은 허물만 보고는 나무라는 사람도 있습니다. 삶의 모범을 보이지 못하면서 대접받으려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래서 옛날부터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 나무란다." ‘방귀뀐 놈이 성낸다.’라는 말을 합니다. 남의 잘못은 잘 찾아내고 자기 잘못은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문제입니다.

 다른 사람의 지극히 하찮은 잘못은 크게 보이지만 자신의 잘못은 대단히 중대한 것일지라도 작게 보이는 것은 내가 ‘보고 싶은 대로’ 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먼저 내 눈에 들보가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면 다른 사람들을 ‘있는 그대로’ 보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그래야 네가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뚜렷이 보고 빼낼 수 있을 것이다”(루가6,42)는 주님의 말씀을 새겨들어야 하겠습니다.

 노랫 말에 ‘너나 잘해, 내 걱정 하지마!’ ‘너나 잘해, 잘난 체 하지 마’ 하는 가사가 있습니다. 삶의 모범을 보이지 못하면 속으로는 그런 감정을 갖게 되는가봅니다. 삶이 풍요롭지 못할 때 하는 말이나 행동은 헛소리요, 위선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삶으로 말해야 합니다.

 어미게와 아기게의 이야기를 생각해 봅니다. 어미게가 아기게의 걷는 모습을 보니 걷는 보기에 좋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어미게가 말합니다. “제발 옆으로 걷지 마라. 의젓하게 똑바로 걸어라.”그러자 아기게가 말합니다. “네, 엄마. 그러면 엄마가 걷는 법을 가르쳐 주세요.” 어미게는 “그래. 따라서 하렴”하고 걷는데 자꾸 옆으로 옆으로 걷습니다. 아기게가 뒤따라 옆으로 옆으로 걸었습니다. 교훈을 늘어놓기 전에 자신부터 똑바로 살고, 똑바로 걸어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 “제 탓이요, 제 탓이요, 저의 큰 탓이옵니다.”라고 하며 가슴을 펑펑 칩니다. 입으로가 아니라 온 몸으로 해야 합니다. 그리하면 용서를 할 수 있고 화해를 이루며 화목해지고 행복해 집니다. 남의 탓하지 않는 하루의 삶을 위해 주님의 이름으로 시작하고 끝맺음 역시 주님의 이름으로 할 수 있는 마음을 키워야 하겠습니다.

 세상은 노력한 만큼 잘 살게 되고, 사랑하는 만큼 아름다워지며 가슴을 여는 만큼 풍족해 집니다. 주님께 마음을 열고 내 자신을 바꾸고 쇄신시키는 일부터 시작하는 오늘이기를 기도합니다. “어떻게 하면 제 눈의 들보를 빼낼 수 있을까요?”“우선 네 눈에 들보가 있다는 사실을 인정부터 하여라.” 사랑합니다.

 

네 눈의 티, 내 눈의 들보

- 김정미 수녀-

올해 어느 날, 검찰의 PD수첩 수사 결과 발표와 관련하여 청와대 대변인은게이트키핑 기능이 없고 주관적 판단이 객관적 진실을 압도하는 것은 언론의 본령이 아니다.”라며이런 사건이 외국에서 일어났다면 경영진이 국민에게 사과하고 총사퇴해야 하는 상황이라고 생각한다.”고 밝힌 바 있다. 보도를 읽고 나는 얼핏 헛웃음이 나왔다. 그렇다면 이 경우에 꼭경영진이 국민에게 사과하고 총사퇴해야 하는 상황이 맞는다면, 우리는 이 경우를 다른 경우에도 공정하게 적용해야 맞다. 같은 잣대로 앞뒤를 잘 재보고, 같은 생각을 일관되게 밝혀야 하며, 또 자신이 말 한 그대로 자신이 먼저 실행에 옮겨야 옳다.

대부분의 국민이 원하지 않을 뿐더러 적극적으로 반대하는 4대강 살리기사업을 구태여 힘으로 밀어붙여, 예산배정과 착공을 강행한 우두머리한테도, 없는 이의 삶의 터전을 밀어내는 뉴타운 개발사업과 용산 참사의 왜곡과 진실은폐의 권력자들한테도, 없는 이들을 등쳐서 가진 자들을 부양하는 부도덕하고 불의한 정책 추진자들에게도 외치고 적용해야 한다
.

영화 <블랙>에서 주인공은 신체장애로 듣지도 보지도 못한다. 깜깜한 어둠, 절대적 어둠에서 빛의 세계로 들어가기 위한 주인공과 선생님의 처절한 삶은 겉이 멀쩡한 비장애인인 우리의 어둠을 더욱더 또렷이 비춰준다
.
하느님 앞에선 우리 모두 장님입니다. 하느님의 눈으로 보면 우리 모두가 장님에 귀머거리입니다. 누구도 하느님을 보거나 듣지 못하니까요.”(영화 <블랙>의 주인공, 미셸의 졸업연설 중
)
네 눈의 티, 내 눈의 들보란 무엇인가? 들보로 가려진 내 눈으로 어찌 맑고 투명하게 다른 이의 티를 볼 수 있겠는가? 무겁게 내 안에 갇힌 마음으로 어찌 다른 사람의 처지를 헤아릴 수 있겠는가
?

이런 세상 한가운데서 오늘은 내 눈의 들보를 의식하고 만지고 느껴보자. 할 수 있다면 그 들보를 걷어내 가볍고 환한 눈을 주시도록 주님께 청하자. 눈이 열리면 귀도 같이 밝아짐을 느낀다. 하느님 앞에선 우리 모두 하느님을 알아뵙지 못하는 맹인이지만 새로운 눈과 귀로 이웃과 세상을 바라볼 수 있다. 그리고 그 이웃과 세상을 통해 우리는 하느님의 존재를 느낄 수 있다. 오늘 우리의 새로운 눈은 예수님의 눈이 되고, 우리의 새로운 귀는 예수님의 귀가 된다. 우리의 새로운 마음은 예수님 마음이 되고, 그 마음으로 세상 안에서 예수님의 손과 발이 된다
.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그래야 네가 형제자매의 눈에 있는 티를 뚜렷이 보고 빼낼 수 있을 것이다!

   

  거울을 보라!

 -김찬선신부-

 눈 먼 이가 눈 먼 이를 인도할 수야 없지 않느냐 하시는데어찌 보면 인도할 수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저의 경우 영적 동반을 받으러 사람들이 가끔 찾아오는데  저와의 대화를 통해서 길을 찾고 기뻐하는 것을 보면서 저도 흐뭇했던 적이 많습니다.
눈 먼 제가 사람을 인도할 수도 있다는 얘기지요.

저야말로 오늘 복음의 주님께서 말씀하신 제 눈의 들보는 보지 못하면서 남의 눈의 티를 보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제 눈의 들보는 보지 못하고 남의 티는 보는 바로 그것 때문에 눈이 먼 저이면서도 다른 사람을 인도하기도 하는가봅니다.
자기에게 어떤 문제가 생기면 그것을 객관적으로 보지 못하지만 다른 사람의 문제는 객관적으로 보기에 해결책이 보입니다.

고등학교 때 친구와 멱을 감으로 간 적이 있습니다. 저는 헤엄을 조금 치고 그 친구는 헤엄을 전혀 치지 못하기에 그냥 물놀이만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친구가 갑자기 허우적대기 시작했습니다.
물이 흐려 쑥 꺼진 곳이 보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1m
만 나와도 얕은 곳인데 당황을 하니 그곳을 벗어나지 못하고 계속 허우적거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가서 등을 조금 떼밀어주니 그곳을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무릇 모든 봄은 거리가 있어야 합니다.
눈이 얼굴에 있고  얼굴이 눈에서 제일 가깝지만 얼굴에 붙은 밥풀을 보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타자의 바라봄-객관이 필요하고 거울이라는 객관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떨어져 있음-거리가 객관의 본질입니다.

그러니 거리와 객관을 확보하지 못할 때  자기를 보지 못함특히 자기의 잘못을 보지 못함은 지극히 당연합니다
또 그러니 보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자명합니다.

자기를 잘 보기 위해서는,
1)
자기의 눈만으로는 자기를 보지 못함을 인정해야 합니다.
2)
자기의 모습을 일러주는 다른 이의 눈이 필요합니다.
3)
다른 이의 눈이 없으면 거울이 있어야 합니다.

누가, 무엇이 거울입니까? 모든 이의 덕행과 악행이 모두 거울입니다.
상대의 얼굴에 숯검댕이가 묻었으면 나도 묻었음을 보는 것입니다.
이웃의 덕행을 보면서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는 것입니다.
글라라 성녀는 우리 서로 거울이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예수 그리스도라는 거울을 보라고 하십니다.
“그리스도는 영원한 영광의 광채요 영원한 빛의 반사이며 티 없는 거울이시니, 오 왕후이신 자매여, 이 거울을 매일 들여다보시고 모든 덕행의 꽃과 의복으로 속속들이 단장하고  여러 가지 보석으로 그대 안팎으로 꾸미도록  그대 얼굴을 그 거울에 자주 비춰 보십시오.
같이 사는 형제, 자매가 우리의 거울입니다. 성인, 성녀들이 우리의 거울입니다.
성 프란치스코는 우리가 매일 봐야 할 거울입니다. 성모 마리아도 우리가 매일 봐야 할 거울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예수 그리스도, 이 분이 하느님 아버지를 비추실 뿐 아니라 우리도 비추시는 가장 티 없는 우리의 거울이십니다.

 

 

제자는 스승보다 높지 않다.”

-전삼용신부-

저의 첫 번째 기억은 할아버지 할머니의 기억입니다. 그 분들 곁에서 기어 다니기도 하고 재롱도 떨곤 했는데 삼 개월 새에 두 분이 모두 돌아가셨습니다. 저는 그 이후로 죽음을 많이 두려워했고 다른 한 편으로는 어차피 죽는다면 행복하게 살다 죽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행복하게 살기 위해 무엇이 되어야하는가를 고민하였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하면 정말 행복하게 살 수 있는지 알고 싶었습니다.  

초등학교에 들어갔더니 선생님들이 이승복 열사나 안중근 의사를 예로 들면서 그렇게 나라를 위해 죽는 것이 가장 보람 있고 행복한 것이라 가르쳤습니다. 저는 처음엔그런가 보다.’라고 생각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나라가 죽은 다음의 생명까지 책임져주지는 않을 것이라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조금 더 크니 위대한 사람이 되어야 행복하다고 배웠습니다. 세종대왕이나 이순신 장군, 혹은 빌게이츠처럼 큰일을 이뤄내야 행복하다고 가르쳤습니다. 저는 또 그 말이 옳은 줄 알고 위대한 사람이 되려고 결심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런 위대한 일을 이뤄내야 하는 것 자체가 스트레스였고 부담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일을 이루어내기까지는 그 맛을 알 수 없으니 마치 쇼윈도에 서서 갖지도 못하는 물건을 들여다보는 것으로 대부분의 시간을 소비해버려야 한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또 많은 대통령이 손가락질을 당하고 부자들도 결국 감옥신세를 지는 것을 보고는 그것도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어렵게 무엇을 달성해도 그것 자체가 행복을 보장해주지는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빈 라덴도 그의 나라 백성들에게는 자신의 민족과 종교를 위해 싸우는 위대한 애국자이자 종교지도자입니다. 어떤 사람들에겐 그 사람이 위대한 스승이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결국 제가 찾은 가장 완전한 스승은 그리스도였습니다. 그 분만이 죽음도 두려워할 필요 없는 영원한 행복을 가르쳐 주신 분이셨습니다.

어느 순간 십자가를 보았습니다. 옷도 못 입으신 가난한 예수님이 달려 계셨지만 그분만큼 부자는 없을 것이란 생각을 했습니다. 세상 것들은 아무 것도 바라지 않으실 만큼 부족한 것이 없으신 분이셨기 때문입니다. 아무 힘없이 못 박히셨지만 그분만큼 강하신 분도 없다고 느꼈습니다. 죽음까지 두려워하지 않을 만큼 강한 사람을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몇몇 사람들로부터는 미움과 배반을 당하셨지만 그분만큼 사랑받는 분이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저는 그리스도만이 저를 행복으로 이끌어 줄 수 있는 유일한 스승임을 깨닫고 다니던 대학도 포기하고 그분을 따르기로 결심하였습니다. 그랬더니 이해할 수 없는 행복이 저에게 다가왔습니다.

마리아 막달레나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자마자, “라뿌니!”, 스승님!’이라고 불렀듯이 우리의 유일한 스승은 그리스도뿐이십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참다운 스승을 갖고 그분처럼 되기 위해 꾸준히 배워야 하는 중요성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눈먼 이가 눈먼 이를 인도할 수야 없지 않으냐? 둘 다 구덩이에 빠지지 않겠느냐? 제자는 스승보다 높지 않다. 그러나 누구든지 다 배우고 나면 스승처럼 될 것이다.”

그리스도를 알기 이전에 스승이라고 불렸던 분들은 어쩌면 많은 것을 가르쳐 주려고는 했지만 참다운 영원한 생명의 길을 가르쳐주지는 못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에 아버지도 하늘에 계신 분 한 분뿐이시고, 스승도 그리스도 한 분뿐이시라고 분명히 가르치셨습니다. 그리고 훌륭한 제자는 스승보다 높지 않기에 스승처럼 되기 위해 끊임없이 배워나가는 사람이어야 한다고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무릎팍 도사에 출연한 천재 첼리스트 장한나는 살아오면서 가장 감사한 것은 가장 적당한 때에 가장 적합한 스승을 만나왔다는 것이었습니다. 첫 선생님은 너무 엄해서 첼로를 배우는 것이 재미없었지만 그 다음 선생님은 먹을 것을 함께 먹어가면서 첼로를 즐겁게 연주하는 법을 가르쳐 주었고 그 때부터 천재로 불렸고 또 더 훌륭한 선생님들을 만나게 되어 세계적인 음악가가 되었습니다.

지금도 지휘를 배우고 있는데 그녀는 휴가를 대신해 위대한 지휘 선생님께 지휘를 배우고 돌아온 것이 휴가를 즐긴 것보다 훨씬 즐겁고 가치 있었다고 합니다. 정말 천재는 자신이 천재이기 때문에 더 이상 배우려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더 훌륭한 선생님을 찾아 배우고 또 배우는 사람인 것 같습니다.  

저도 가끔은 이제 배울 만큼 배웠다는 교만한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러던 와중에 유학 와서 만났던 저의 스승은 학문적으로는 말할 필요도 없고, 우리나라 나이로는 회갑이 지나셨지만 너무 겸손하여 제자와 무릎을 꿇고 이야기 하시는 분이시고 가난하지만 자신이 받는 대부분의 돈을 더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주시는 분이시고 남이 버린 옷을 주워 입으시며, 잠잘 곳이 없는 사람들과 사제관을 함께 쓰며 사랑을 실천하시는 분이셨습니다.

저는 그 분을 보며 잠시나마 가졌던 교만한 생각을 접고, ‘나는 아직도 멀었구나!’라는 반성을 하게 되었고 끊임없이 배워나가야 하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왜냐하면제자는 스승만큼만 되면 되는데 어떤 누구도 그리스도만큼은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죽기까지 배워야합니다.  

이렇게 따질 때 사실 좋은 스승을 만나는 것도 중요하지만 또한 우리도 누군가의 스승이 되어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저도 이렇게 닮아나갈 스승이 있지만 또 어떤 사람들에게는 스승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누군가로부터 배우고 또 누군가를 가르치는 것입니다.

성당에 다니시는 부모님들은 성당에서 사제로부터 배우는 제자들일 수 있지만 집에서는 아이들의 스승이고 또 직업적으로도 가르치는 일들을 할 수 있습니다.  

좋건 싫건 우리 모두는 누군가를 스승으로 삼고 닮아가야 하고 또 누군가의 스승이 되어야합니다. 신앙인으로서 좋은 스승이 되기 위해서 멈추지 말아야 하는 것은 참 스승인 그리스도를 멈추지 않고 배워나가는 참다운 제자가 되는 것입니다. 겸손한 마음으로 스승과 같아질 때까지 배워나가려 노력하는 사람이 바로 주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일 것입니다.

 

 소경이 어떻게 소경의 길잡이가 되겠느냐?

 -강영구신부-
+소경이 어떻게 소경의 길잡이가 될 수 있겠느냐? 그러면 둘 다 구덩이에 빠지지 않겠느냐?
그대에게  저는 자주 저 자신에게 이렇게 질문합니다.
“너는 눈 뜬 사람인가? 네 눈에는 무엇이 들어있는지 아는가?”
솔직히 제 자신을 정직한 눈으로 바라보면 부끄럽기 짝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일 수많은 교우들 앞에서 무엇인가 지껄여야 하고,
무엇인가 가르쳐야 하는 저의 처지가 한심하고 처량합니다.
어찌 생각하면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는 것이 아니라,  소경이 눈 밝은 사람들의 길잡이를 하겠다고 어설프게 설쳐대는 모습입니다.
세상 온갖 풍파에 시달리면서 도를 닦아온 교우들이  저의 이런 어리석은 모습을 바라보는 심정이 얼마나 답답하겠습니까?
둥근 달은 말을 하지 않아도 어둠 밤을 비추어줍니다.
제 스스로 빛을 내는 것은 아니지만, 태양으로부터 충만한 빛을 받아서 어둠을 밝힙니다.
촛불도 소리치지 않지만 스스로를 태워서 주위의 어둠을 밝힙니다.
한 자루의 촛불만 있어도 방 안의 어둠을 몰아낼 수 있습니다.
저는 온전히 예수님께 귀의(歸依)하여 그분의 빛으로 어둠을 밝히는 달 같은 사람이 되기를 소망하고 있습니다.
말없이 스스로를 태워서 주위의 어둠을 밝히는 촛불이 되고 싶습니다.  
오늘도 행복한 하루가 되기를 기도합니다.(一明)

 

 내 탓이오!  

 -조성풍 신부 -
제가 어렸을 적에 비하면 지금은 안경을 쓰는 어린 친구들이 참 많아졌습니다.
그런데 안경은 각자 다릅니다. 그 모양뿐만 아니라 각자의 시력에 따라, 그리고
눈의 상태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잘 보기 위해 자신에게 가장
적합한 안경을 쓰는 것은 중요하고도 필요한 일입니다. 그런데 주위 사람이나
사물을 잘 보기 위해서 안경을 쓰면 되는 것처럼, 자기 자신을 잘 보기 위해 쓸 수
있는 그런 안경이 있었으면 합니다. 정말이지 자신을 제대로 본다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자기 안에 있는 헛된 그림자들, 자기 부족, 자기 상처를 인식하고
보완할 수 있다면 얼마나 풍요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 생각해봅니다.
그러나 그 일은 쉽지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에게는 관대하고, 다른 사람들은
엄하게 대하는 경우들을 종종 봅니다. 자신의 눈에서 들보를 빼내기 위해서는
자신의 부족함을 고백할 수 있어야겠습니다. 단순히 미사 중에
‘내 탓이오’라고 하면서 가슴을 치는 행위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그러한 행위에 진정으로 마음이 함께해야 합니다.

 

  제 눈속에 있는 들보

 -서영남 -
◆저도 처음에는 노숙자들은 게을러서 비참하게 지낸다고 생각했습니다. 동네 아주머니가 민들레 국숫집을 찾아오셔서 고래고래 소리지릅니다. 왜 게으른 사람들에게 밥을 줘서 동네를 지저분하게 만드느냐, 아무데서나 소변을 봐서 지저분해 죽겠다고 합니다.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라고 합니다. 동네 한 어르신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불쌍한 사람들 밥을 주는 것은 좋은데 왜 사지 멀쩡한 젊은 사람들에게 밥을 줘서 더 게으르게 만드느냐고. 그럴 돈이 있으면 노인들을 대접해 드리는 것이 더 좋지 않느냐고 합니다.
청송 감호소에서 오랫동안 징역을 살고 있는 우리 형제들까지도 민들레 국숫집을 찾아오는 손님들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게을러서 노숙을 한다는 것입니다. 왜 3D 업종에서는 일할 사람이 없어서 쩔쩔맨다는데 일을 하지 않느냐고 합니다. 민들레 국숫집을 찾아와서 식사를 하는 분들 중에도 자신은 어쩔 수 없어서 밥을 먹으러 오지만 다른 사람은 게을러서 오니까 밥을 주지 말았으면 좋겠다고 합니다.
그런데 저는 민들레 국숫집의 VIP 손님들을 보면서 그들이 부조리와 불의 앞에 희생당하고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그들에게 게을러서 노숙생활을 한다고 말하기가 어렵습니다. 구조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이 생존권을 빼앗기고 살아갈 수 없는 현실에 화가 납니다. 민들레 국숫집의 VIP 손님들은 왼뺨을 맞고 오른뺨을 댈 힘이 없습니다. 왼뺨 한 대에도 일어설 힘이 없습니다. 그들이 게으르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나누지 않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우리 눈에 들보를 빼지 않고 이웃의 티를 봅니다.
“소경이 어떻게 소경을 이끄는 길잡이가 될 수 있겠느냐? 그러면 둘 다 구덩이에 빠지지 않겠느냐?”는 복음 말씀을 묵상해 봅니다. 스스로를 인도할 수 없으면 다른 사람도 인도할 수 없습니다. 또 형제의 눈에서 티를 빼내주려고 애쓰기 전에 자기 눈에서 들보를 빼낼 필요가 있습니다. 복음은 우리 자신부터 고치기 시작해야 세상이 조금이라도 좋아질 수 있다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사랑이란 자신의 깨끗한 마음으로 이웃을 바르게 보아주는 것입니다. 선입견을 가지고 섣불리 평가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양승국신부-

<바늘로 콕콕 찌르는 말씀>


급히 ‘출동’할 일이 있어서 공동체 식당에 있는 자동차 열쇠함으로 달려갔습니다. 마당에 차가 있는 것을 분명히 확인하고 올라갔기에 당연히 키가 있으려니 했었는데...없었습니다.

 이 사람, 저 사람 만나는 사람마다 붙잡고 “혹시 자동차 키 못 봤냐?”고 묻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는 동안 시간이 흘러가고, 조급한 마음이 들면서 ‘그 누군가’를 향해 투덜거렸습니다.

 “자동차를 썼으면, 키를 제 자리에 갖다 두어야지! 한두 번도 아니고 도대체 정신을 어디다 두고 사는 거야?”

 그러고 있는 제게 뭐든 꼼꼼히 챙기고 사려 깊은 한 형제가 그랬습니다.

 “신부님, 어제 저녁에 신부님이 그 차를 쓰신 것 제가 봤는데, 혹시 모르니 호주머니 확인 한번 해보시죠.”

 ‘아차!’ 하면서 호주머니 여기저기를 뒤져나가다 보니, 자동차 키는 제 호주머니 속에 얌전히 들어있었습니다. 참으로 부끄러운 순간이었습니다.

 도로로 나가서는 더 합니다. 형제들에게는 ‘제발 신호 좀 잘 지켜라’ ‘중앙선은 생명선이다. 무슨 일이 있어도 중앙선 침범하지 마라’ ‘그렇게 예의 없이 끼어들기 하지마라’ ‘왜 그렇게 브레이크를 팍팍 밟느냐?’ 지적하지만, 그러는 저는 바쁘다는 핑계로 거의 ‘도로의 무법자’ 수준입니다.

 ‘수도자가 돈 버는 사람도 아닌데, 제발 딱지 좀 끊어오지 말고, 딱지 날아오지도 말게 하라’고 거품 물고 강조하지만, 정작 날아오는 딱지는 제 탓으로 인한 것이 많습니다.

 이런 제게 오늘 복음 말씀은 거의 바늘로 콕콕 찌르는 것 같은 말씀이군요.

 “이 위선자야, 먼저 네 속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그래야 눈이 잘 보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를 꺼낼 수 있다.”    여기서 말씀하시는 ‘티’는 작은 결점이고 ‘들보’는 큰 결점을 지칭합니다.

 많은 경우 우리 자신의 결점에 대해서는 한없이 관대합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의 결점에 대해서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더불어 우리 자신의 결점에 대해서는 솔직하게 인정하지도 않습니다. 어떻게 해서든 우리 자신의 결점에 대해서 합리화시키고, 정당화시키려고 기를 씁니다. 이런 사람을 두고 우리는 위선자라고 말합니다.


자신의 말과 행동이 달라도 너무 다른 위선자가 어떻게 다른 사람들을 인도할 수 있겠습니까? 

자신도 치명적인 병을 지니고 있기에, 자기 한 목숨 살리기도 힘든데, 어떻게 다른 사람을 치료할 수 있겠습니까?

 

무엇이 진리인지도 모르는 사람이 어떻게 진리에 대해 가르칠 수 있겠습니까?

 

참된 지도자가 되기 위해서 가장 먼저 갖추어야 할 조건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내 결점에 대해서 먼저 인식하는 것입니다. 내 결점이 무엇인지 정확히 파악했다면, 가르치기에 앞서 먼저 내 결점을 바로잡아야 할 것입니다. 

어두운 밤길, 차가 쌩쌩 달리는 도로에서 시각장애인이 시각장애인을 인도하다가는 둘 다 큰 낭패를 당할 것입니다.  자질이 없는 지도자, 능력이 없는 지도자, 무엇보다도 교만한 지도자, 이기적인 지도자가 남을 가르치려든다면, 그것처럼 위험한 일이 다시 또 없습니다. 가르치는 사람이나, 가르침 받는 사람이나 둘 다 망하는 길입니다.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이름 안에 누구나 세상 앞에서 지도자입니다.   끊임없는 자기반성과 쇄신, 쉼 없는 자기개발과 자기 연마는 지도자인 우리에게 필수적인 노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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