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24주일 (마태오 18,21-35)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여라.

2011. 9. 11. 오전 7:03:28

글자
 
 

 2011 9 11  연중 제24주일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잘못을 저지르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이면 되겠습니까?

예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여라.

(마태오 18,21-35)

 

Lord, if my brother sins against me,
how often must I forgive?
As many as seven times?”

Jesus answered, “I say to you,

not seven times but seventy-seven times

 

 

말씀의 초대

 분노하는 마음을 풀고 이웃을 용서하면 우리 자신의 죄도 없어진다. 우리가 마음속에 화를 품고 있는 한 주님께서 고쳐 주실 수 없다. 우리가 용서하고 화해할 때 주님 또한 우리를 용서하신다(제1독서). 신앙인의 삶과 죽음은 분리된 것이 아니다. 주님 안에는 삶과 죽음이 하나로 통합되어 있다. 주님 안에 믿음을 두고 사는 사람은 이미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사람이다(제2독서). 한 데나리온은 예수님 시대 노동자 하루 임금이다. 한 탈렌트는 육천 데나리온, 곧 육천 일의 노동 가치를 갖는다. 일만 탈렌트 빚은 평생 무엇으로도 갚지 못할 빚이다. 우리가 하느님께 이런 빚을 지고 사는 사람이다(복음).

☆☆☆

오늘의 묵상

 세상에서 혼자 살기는 춥고 외롭습니다. 그렇다고 사람들과 부대끼며 살기에는 상대방의 가시가 너무 아픕니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라는 것이 고슴도치를 부둥켜안고 사는 듯 쉽지 않습니다. 자신의 삶에 동반하는 사람들을 둘러보면 부부 사이부터 가족, 친척, 이웃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을 만나는 것 같지만 자신과 관계 맺고 사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수천 억 명이 살다간 인류 역사 속에 한 시대 한 지점에서 만나 삶을 함께하는 인연입니다. 이 소중한 인연으로 서로 부둥켜안고 사랑하며 살아도 모자라는데 그 만남들에서 숱하게 상처를 주고 상처를 받으며 살고 있습니다. 어쩌면 사람과 사람 관계에서 상처 없는 만남은 거의 불가능해 보입니다.
그런데 상처를 많이 받고 덜 받고는 자신의 삶의 태도에 달려 있습니다. 내적으로 겸손하고 감사하며 사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의 차이입니다. 내면에 온갖 자존심과 열등감, 욕심이 채워져 있을수록 상처도 많이 받습니다.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를 감옥에 가두어 두는 못된 종처럼 자신이 받은 은혜는 생각조차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마음속에 자신만이 살고 있고 온갖 욕심들이 꽉 차 있으면 그만큼 상처도 많이 받습니다. 마음을 비워야 합니다. 마음을 비운다는 것은 감사하는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우리가 삶에서 작은 것 하나에도 감사하며 살 때 내적인 겸손이 생깁니다. 내적인 겸손이 쌓일 때 우리는 상처에서 자유로워집니다. 그 출발은 하느님께 엄청난 사랑의 빚을 지며 살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내 삶에 깊이 감사하고 나면 모든 이의 모든 것을 용서하고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상처 받을 일도 없어집니다.

 

 

나는 용서가 필요한 죄인

  -반영억라파엘신부-

사랑을 베푸시는 하느님, 거슬러 반항하고 실수하는 죄를 용서해 주시는 하느님의 자비를 묵상하는 가운데 우리를 진정한 용서와 화해의 삶에로 이끌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사람은 자기는 어리석을 지라도 남의 허물을 보고 꾸짖는 일은 잘합니다. 그러나 비록 재주가 많은 사람이라 해도 자신을 용서하는 것에는 어둡습니다. 남을 꾸짖는 마음으로 자기를 꾸짖고 자기를 용서하는 마음으로 남을 용서하면 좋으련만 기회만 있으면 타인을 꾸짖으려 하니 문제입니다.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일곱 번까지 용서하면 되겠습니까? ’하고 묻는 베드로에게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는“한없이 용서하라”는 말씀입니다. 용서한다는 것은 말같이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나도 용서가 필요한 죄인이라는 것을 깨달을 때 비로소 타인을 용서할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알게 모르게 많은 용서를 받아왔고 또 열심히 노력하며 살아도 인간의 연약함으로 인한 실수와 잘못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타인의 잘못에 대해 관대해질 수 있습니다.

 

베드로가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마태18,21)하고 횟수를 말한 것은 그냥 억지로 눈감아주고 참아주는 한계를 말한 것입니다. 그러나 횟수가 문제가 아닙니다. 주님은 ‘분노자체도 남기지 않는 용서’를 말씀하시고자 합니다. 당신 친히 배반자 유다를 용서하시고 베드로에게 3 번씩이나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시며 죄책감에서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또한 당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자들을 위해서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모르고 있습니다.”(루가23,34)하고 용서할 뿐만 아니라 아버지 하느님께 기도까지 하셨습니다. 

우리도 말로는 종종 ‘용서합니다.’ 하면서 그 말을 하는 순간에도 마음에는 분노와 적개심, 원한이 남아 있습니다. 여전히 내가 옳았다는 말을 듣고 싶어 하며, 아직도 사과와 해명을 듣고 싶고, 끝까지 너그러이 용서한데 대한 칭찬을 돌려받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용서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분의 용서는 무조건적인 것입니다. “내가 너의 죄를 기억하지 않으리라.”(이사43,25). 하지만 이런 용서는 자신의 힘만으로는 할 수 없습니다. 진정한 용서는 하느님의 은총으로만 가능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느님께서 우리를 용서해 주신 그 사랑이 우리 안에 자라도록 청하고 무던히 주님께 의탁해야 하겠습니다.

용서란 믿음의 행위입니다. 따라서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에 귀 기울이고 그 말씀을 받아들이고 그 말씀대로 행해야 합니다. “네 이웃의 불의를 용서하여라. 그러면 네가 간청할 때 네 죄도 없어지리라.”(집회28,2). “분노를 품고 있으면 누가 그의 죄를 사해 줄 수 있겠느냐?”(집회28,5) “계명을 기억하고 네 이웃에게 분노하지 마라. 지극히 높으신 분의 계약을 기억하고 잘못을 눈감아 주어라”(집회28,7). “사랑하는 여러분, 스스로 복수할 생각을 하지 말고 하느님의 진노에 맡기십시오. 성경에서도 ‘복수는 내가 할 일, 내가 보복하리라.’하고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로마12,19). “용서한다는 것은 언제나 용서하시는 하느님의 심장 박동에 맞추어 춤추는 것입니다.”(스미즈) 용서한다는 것은 ‘다 잊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그 상처에서 더 이상 억매이지 않고 자유로워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용서는 말씀대로 행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말씀대로 행했을 때 하느님 안에서 자유를 누리게 됩니다. 사실 우리는 하느님으로부터 많은 용서를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용서해야 합니다. 용서하지 않으면 그 분노와 미움이 독이 되어 본인을 해칩니다. 용서하지 않을 때 우리는 과거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미래에로 갈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용서해야합니다. 용서는 죄의 악순환을 끊어 버리고 서로가 사는 길입니다. 그러므로 용서하십시오! 

우리나라 사람들 중 4.2%가 화병에 걸려있다는 조사결과도 있습니다. 화병은 속에서 불이 나는 병입니다. 화날 일이 전혀 없는 것 같은 상황인데도 가슴 안에서 화가 부글부글 끓고 신체에 이상이 생기는 병입니다. 상처가 뿜어내는 분노, 화, 적개심, 복수심을 내 보내지 않고 차곡차곡 쌓아둔다면 어찌 우리 몸이 견뎌낼 수 있겠습니까? 

분노와 원한으로 치를 떨 때 우리 몸이 치명적인 영향을 받게 됩니다. 상처받은 것도 억울한데 화병에 걸려 심장마비로 쓰러지고, 암에 걸리고 그래서 죽는다면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더 억울한 것은 나를 아프게 하고 상처를 준 이들 중 많은 이가 자신의 잘못을 기억하지 못하고 있으니 당연히 용서를 청해야한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잘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미 세상을 떠난 이도 있습니다. 용서하지 않으면 자신에게 상처를 덧나게 하고 스스로를 파괴할 뿐입니다. 그러니 자신을 위해서라도 용서하십시오. 이런 말도 있습니다. “원망은 황산과 같아서 그것이 담긴 그릇조차 녹인다.”

우리가 누군가를 용서하지 못한다는 것은 그 사람에게 집착하면서 미움과 원한을 움켜쥔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집착이 얼마나 우리의 진을 빼는지 모릅니다.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까지 그놈을 용서하지 못하겠다.’고 이를 갈다가 결국은 내가 원한 속에 죽고 맙니다. 그래서 용서는 하느님의 도움이 꼭 필요합니다. 주님의 기도를 마음으로 해 보십시오. “오늘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이 기도를 계속 이어가려면 먼저 용서해야 합니다. 인간적으로 나는 용서할 수 없지만 하느님께서 나에게 힘을 주셔서 용서할 수 있습니다. 

이 세상 누구도 완전하지 않습니다. 인간이기에 실수하고 실패합니다. 우리 자신이 허점 많고 부족한 인간이란 사실을 기억하면서 죄를 범한 자신을 스스로 용서해 주고 결코 자신을 단죄하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유다는 자기 스스로를 인정할 수 없었기에 목매 죽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 모세, 다윗, 베드로, 바오로...는 하느님과 함께하는 새 삶을 시작하였습니다. 성경의 에사오(창세33,4)나 요셉(창세45,14-15), 스테파노(사도7,60), 예수님(루가23,34)의 모습을 통해 용서한 삶의 모범을 배워야 하겠습니다. 

요한의 첫째 서간 2장1절에서는 “누가 죄를 짓더라도 하느님 앞에서 우리를 변호해 주시는 분이 계십니다.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은 우리 죄를 위한 속죄 제물이십니다. 우리 죄만이 아니라 온 세상의 죄를 위한 속죄제물이십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를 위해서 제물이 되신 분의 은혜를 입고도 이웃에게는 나 몰라라 한다면 믿음의 소유자라 할 수 없습니다. 그야말로 일만 달란트나 되는 돈을 빚진 사람이 빚을 탕감 받고도 백 데나리온밖에 안 되는 빚을 진 사람에게 ‘내 빚을 갚아라.’ 하고 호통을 치는 사람과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송봉모 신부님은 효과적인 용서방법으로 네 가지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1). 베개를 가지고 십자가 앞에 앉아라. 십자가는 용서의 강력한 상징이다. 십자가 앞에서 성호를 그은 뒤 나에게 상처를 준 상대방에게 맺힌 분노와 적개심과 한을 강렬하게 표현하라. 그놈의 자식, 죽일 놈의 새끼, 염병할 놈등등..입에서 나오는 대로 표현하라. 분노가 극에 달하고 참기 어려우면 주먹으로 옆에 놓아둔 베개를 쳐라. 분명, 잘못은 잘못이다.

2). 증오심에서 벗어나 맺힌 한을 풀고 싶다는 바람을 말씀드려라. 화병에 걸리고 암에 걸려 더 이상 억울하게 살고 싶지 않다는 바람을 말씀드려라. 나의 억울함을 사람들에게 호소하며 동정을 구하며 살고 싶지 않다고 말씀드려라. 그 사람도 악의 세력에 이용당했다고 생각해 봐라.

3).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을 바라보라. 억울하게 돌아가셨지만 한을 품지 않고 사랑뿐이신 예수님을 바라보라. 우리가 겪은 어떠한 불의도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겪으신 사건보다 더 불의하지는 않다.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나이까?’울부짖으셨던 주님을 바라보면 우리의 ‘어찌하여?’라는 물음은 주님의 ‘어찌하여?’를 통해 치유된다. 

4). 상처를 준 사건 속에 예수님을 초대하라. 그 이유는 과거의 상처에서 치유되기 위해서이다.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에게 하신 것처럼 우리한테도 해 주시기를 청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제자들에게 아픈 기억, 슬픔. 실망. 상처만을 남겼는데 함께 걸어가면서 아픈 체험을 다 들어 주셨고 그들의 상처에 사랑으로 응답해 주셨다. 상처의 기억을 치유할 때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마음을 나누어야 한다. 예수님의 눈으로 우리 과거 사건을 바라 보아야한다. 이 상황에서 예수님이시라면 어떻게 처신하셨을까?

우리의 삶의 여정에서 믿음에 따르는 신앙고백을 해야 하겠습니다. 상처의 한 가운데 주님의 십자가를 놓으십시오. 먼저 하느님 앞에 허물이 많은 인간임을 인정하고 또 많이 용서 받아왔음을 고백하며 앞으로 열심히 노력하는 가운데에서도 불구하고 걸려 넘어질 수 있는 연약함을 지녔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하겠습니다. 그리하면 주님께서 용서를 청할 수 있는 은총과 더불어 용서할 수 있는 넉넉함을 주실 것입니다. 아울러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해 주실 것입니다”(1요한1,9).

물론 맺힌 한을 푸는데 시간이 필요합니다. 상처가 크면 클수록 더 그렇습니다. 따라서 그 상처로 더 이상 영향을 받지 않는다고 생각될 때까지 기도를 계속해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제가 용서하기도 전에 당신이 먼저 용서하셨음을 감사합니다. 혹시 상처받았다고 생각하십니까? "누구의 잘못이냐고 따지지말고 그 사람을 도구로 쓰셔서 나를 성화시켜주시는 하느님께 감사하십시오."(구엔 반 투안 추기경)

“우리가 제비꽃을 밟으면 제비꽃은 우리 발뒤꿈치에 좋은 향기를 남긴다. 용서는 그 향기와 같다.” 사랑합니다 !!! 

http://cafe.daum.net/rara63/bmQo/494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
 
 
주님께서 허럭하신
풍성한 추석 되세요
 
교형자매님 가정마다
행복이 넘치시길 빕니다.
 
사랑 합니다.
 
 
 
 
~로마노 올림~~

 

 

원수를 사랑하고 용서한다면

-최인각신부-

당신은 자비로운 사람

아무리 노력해도 용서되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정말 사무치는 한을 맺게 한 원수, 철천지원수(徹天之怨 )가 그렇습니다.

신학교에 입학하기 전, 레지오 활동을 하면서 환자를 방문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분은 40대 남성이었는데, 급성간암으로 얼마 못 살 것이라 했습니다. 참으로 착해 보이는 분이었습니다. 그분과 이야기를 나누며, 병을 얻게 된 동기를 알게 되었습니다. 잠을 자다가 우연히 눈을 떴는데, 자신의 집에 세 들어 살던 사람이 자신의 방에 들어와 텔레비전을 훔치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그 사람과 눈이 마주쳤는데, 그 눈길이 너무 무서웠다고 합니다. 너무 놀라고 화가 났지만, 무서운 마음에 말도 못하고 안절부절못하며, 그 사람을 신고할까 말까 고민하다가, 그만 깊은 병에 걸리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야기하는 그 순간까지도 용서되지 않아 그분의 얼굴은 일그러질 때가 잦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제 그가 용서의 시간을 놓치면 안 될 것 같아, 함께 기도하자고 하면서, 그분께 들었던 내용과 전개된 과정을 재정리하며 하나하나 용서의 기도를 바쳤습니다. 용서의 기도를 바친 다음, 물건을 훔쳐간 이를 위한 축복의 기도도 했습니다. 놀랍게도 눈물 흘리며 고통스러워하던 그의 얼굴이 서서히 밝아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더니, 저를 붙들고고맙습니다. 이제 살 것 같습니다며 이야기하는 것이었습니다. 우선, 자신의 마음속 응어리를 다 털어놓았고, 그를 용서했으며, 이제는 그가 잘 되기를 바랄 수 있어 행복하다고, 더욱이 자신이 그 사람에게 텔레비전을 선물했다고 생각하니, 정말 행복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의 몸이 나아지는 느낌이 든다며, 다시 눈물범벅이 되었습니다. 참으로 오래전 일이지만, 아직도 기억이 생생합니다.

철천지원수를 용서하고 축복한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하지만 용서 못할 사람을 용서하고 축복할 때, 최종적으로 자유롭고 행복해지는 사람은 본인 자신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죄지은 형제를 조건 없이 용서하라는 말씀을 하시고, 그 비유로 만 탈렌트(60,000,000일간의 노동자 일당)를 빚진 매정한 종에 대해 이야기 해 주십니다. 만 탈렌트의 빚을 진 사람에게 그 빚을 갚을 능력이 없자, 주인은 그 종에게 자신과 아내와 자식과 그 밖에 가진 것을 다 팔아 갚으라고 명령합니다. 그러자 그 종이 엎드려 절하며, ‘제발 참아 주십시오. 제가 다 갚겠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주인은 가엾은 마음이 들어 그 종의 모든 부채를 탕감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종은 나가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100일간의 노동자 일당) 빚진 동료를 만나게 되자, 그의 멱살을 잡고 빚을 갚으라고 하며, 그의 청을 들어주지도 않고 빚을 다 갚을 때까지 감옥에 가둡니다. 이 일을 지켜본 동료들이 너무 안타까운 나머지, 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죄다 이릅니다. 그러자 주인은 그 종을 불러이 악한 종아, 네가 청하기에 나는 너에게 빚을 다 탕감해 주었다.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하지 않느냐?’라고 말합니다. 그러고 나서 화가 난 주인은 그를 고문 형리에게 넘겨 빚진 것을 다 갚게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를 통해 매정한 사람의 말로(末路)가 어떻게 되는지 분명히 보여주시며, “너희가 저마다 자기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의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상처받은 사람, 즉 용서할 권리가 있는 사람이 용서하지 않으면, 매정한 사람이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용서할 권리가 있는 사람은 다른 한편으로는 그 어느 곳에서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준 사람이고, 용서받아야 할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용서 받았거나 용서를 받아야 할 사람임에도, 남을 용서하는 일에 매정하다면, 그 잘못은 본인에게 돌아갑니다. 그러면 이중으로 손해보는 사람은 누구이겠습니까?

분노와 복수심을 자극하는 그 사람과 그 사건을 마음으로부터 용서할 수 있는 힘과 축복할 수 있는 힘을 십자가상 예수님께 청하기를 간절히 희망합니다. 여러분의 상처와 화와 분노가 사르르 녹으며 기쁨을 맛볼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힘을 얻어 정말 어려운 용서와 축복을 실행한다면, 예수님은 기뻐하시며너는 정말 자비로운 사람이다. 고맙다. 너는 너 자신과 너의 원수를 정말 사랑하였다. 너는 착하고 귀한 사람이니, 너에게는 복이 있다라고 하시리라 믿습니다. 용서를 통해 복을 받고 치유받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라며 기도합니다. 저도 이번 주간을 용서의 주간으로 살아가고자 합니다.

 

하느님이 인간에게 지구임대료를 청구하신다면?

-박용식 신-

우리는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라며 주님의 기도를 바칩니다.
 그때마다 자신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주님께 청합니다. 그와 동시에 이웃의 잘못도 용서하겠다고 다짐합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들을 용서하신 것처럼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도 그래야 합니다.
 그러나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절대로 용서 못한다", "무릎 꿇고 싹싹 빌기 전에는 용서 할 수 없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런 마음가짐으로 과연 행복할 수 있을까요. 타인의 죄를 용서하지 못한다면 주님의 은총 역시 받을 수 없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형제의 죄를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마태 18,22)고 하십니다. 한 번도 용서하기 힘든데 끝없이 용서하는 것은 절대 쉽지 않은 일입니다.
 예수님은 끝없이 용서해야 하는 이유를 '매정한 종'(마태 18,2335)에 비유해서 설명하십니다. 이야기 속 임금은 자신에게 1만 탈란트(현재 가치 수 백억 원)를 빚진 신하의 빚을 탕감해주고 그의 죄마저 용서합니다. 하지만 그 신하는 자기에게 몇 푼 안 되는 돈을 빚진 동료에게 "빚을 갚아라" 이야기하며 그를 감옥에 가둡니다.
 
 한 잡지에 이런 재미난 질문이 실렸습니다.
 "인간은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지구에 살며 자연을 이용해 의식주를 해결하는데,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임대료를 받으면 얼마나 될까?"
 임대료와 자연 사용료를 우리네 계산법으로 산출하면 약 3000조 원을 넘는 큰 액수가 나온다고 합니다. 정말 하느님이 우리에게 자연 사용료 3000조 원을 청구하신다면 우리는 꼼짝없이 1만 탈란트를 빚진 신하가 되겠죠.
 하지만 하느님은 비유 속 임금처럼 해마다 우리의 빚을 탕감해주시고 햇빛과 공기와 물 등 자연을 누릴 수 있는 혜택을 내려주십니다. 더 나아가 우리의 빚뿐 아니라 우리가 지은 죄마저 끊임없이 용서하십니다. 지금까지 살면서 수도 없이 잘못을 저질렀지만 하느님은 그때마다 우리를 용서해주셨습니다.
 우리가 이웃을 용서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용서하신 것처럼 우리도 이웃의 죄를 용서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자신에게 빚진 이웃을 용서하기는커녕 무섭게 달려들어 단죄하려 듭니다. 비유 속 무자비한 신하는 알고 보면 '우리 자신'입니다.
 사실 신부인 저 역시 용서하기 힘든 이들이 있습니다. 특히 해외에서 사목을 할 때 마음의 상처를 준 그야말로 원수 같은 사람이 몇 명 있습니다. 그 당시를 회상하면 지금도 가슴이 아픕니다. 하지만 그들이 머릿속에 떠오를 때면 또다시 용서합니다.
 그러나 그들을 용서하게 된 결정적 이유는 그들을 위해서가 아닙니다. 그들이 회개해서 예뻐졌거나, 그들을 미워한 제가 회개해서 그들을 사랑할 수 있기 때문도 아닙니다. 바로 제 자신을 위해서 용서합니다. 그들을 용서해야 제 죄도 하느님께 용서받을 수 있고 그들을 용서해야 제 마음이 편해지고 행복해지기 때문입니다.
 또 한가지 이유는 제가 하느님께 지은 큰 죄를 이미 용서받았기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 누군가를 용서하는 것은 앞으로 자신이 지을 죄를 하느님께 용서받기 위함입니다. 누군가를 용서하지 못한다면 앞으로 자신이 지을 죄를 어떻게 하느님께 용서받을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저는 모든 이들을 용서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지금도 어떤 사람이 저에게 잘못을 저지르면 용서합니다. 만일 제가 그들을 용서하지 않는다면 그들도 앞으로 저의 잘못을 용서하지 않을 것이 세상의 이치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그동안 수없이 용서 받았고 앞으로도 용서받을 일이 많을 것입니다. 주님 앞에 죄가 없는 사람은 이웃을 용서하지 않아도 되겠지만 그런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자신 삶의 죄를 용서받아 마음의 평화를 누리려면, 하느님 나라의 영원한 행복을 얻으려면, 이웃의 잘못을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합니다.(「예수님 따라 하기」 일부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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