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24주간 화요일(루카7,11-17) “젊은이여, 일어나라.”

2011. 9. 13. 오전 6:31:57

글자

2011년 9월 13일 화요일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 주교 학자 기념일 

 주께서는 그 과부를 보시고 측은한 마음이 드시어

“울지 마라.”하고 위로하시며

앞으로 다가서서 상여에 손을 대시자

메고 가던 사람들이 걸음을 멈추었다.

예수께서 “젊은이여, 일어나라.”하고 명령하셨다. 

(루가 7,11-17)

 

 When the Lord saw her,
he was moved with pity for her and said to her,
“Do not weep.”
He stepped forward and touched the coffin;
at this the bearers halted,
and he said, “Young man, I tell you, arise!”

 

 

말씀의 초대

 교회의 지도자와 봉사자는 가정생활에 충실하고 이웃과 관계에서도 품위 있으며 좋은 평판을 듣는 사람이어야 한다. 모범적인 삶을 살며 교회에 봉사할 때 신자들은 그들의 모습을 보고 신뢰하며 더욱 굳건한 신앙을 갖게 된다(제1독서). 예수님 일행이 젊은 외아들을 잃은 슬픈 장례 행렬을 만난다. 주님께서는 그를 죽음에서 생명으로 일으키신다. 주님께서 생명의 주인이심을 드러내신다(복음).

☆☆☆

오늘의 묵상

 외아들을 잃은 한 여인이 있습니다. 자식의 시신을 메고 가는 상여 뒤를 그 여인과 그 고을 사람들이 큰 무리를 이루어 행렬 지어 따라가고 있습니다. 남편 없이 오로지 외아들에게만 희망을 두고 모든 것을 바치며 산 여인입니다. 그런데 그런 외아들이 죽은 것입니다. 수많은 사람이 같이 슬퍼하며 상여 뒤를 따르는 것으로 보아 그 여인의 슬픔이 얼마나 큰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자식이 먼저 죽으면 가슴에 묻는다고 하지요. 그래서 부모가 자식을 먼저 보내는 심정을 ‘참척(慘慽)의 고통’이라고 합니다. 지금은 고인이 된 소설가 박완서 씨는 오래 전, 남편을 잃은 지 석 달 만에 외아들마저 잃게 되었지요. 그는 십자가를 내동댕이치고 하느님을 원망하며 스스로 미치지 않는 게 저주스러웠다고 그때의 순간을 회고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런 견딜 수 없는 극도의 고통 속에서 주님을 더 깊이 만납니다. 자신의 잘남과 능력을 믿고 살다가, 운명을 한 치도 어떻게 할 수 없는 인간의 한계를 만나는 순간, 그 고통의 밑바닥에서 결국은 주님을 부르게 됩니다. 고(故) 박완서 씨도 그 순간에 다른 사람들에게 철저히 무관심하며 이기적으로 살아왔던 자신의 죄를 고백합니다. 그 후에 그는 신앙 산문집, 『한 말씀만 하소서』를 발표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외아들을 잃은 슬픈 ‘죽음의 행렬’이 주님을 만납니다. 주님을 만나면서 외아들은 다시 살아나고 이제 그 행렬은 기쁨으로 가득 찬 ‘생명의 행렬’로 바뀝니다. 피조물인 우리가 어쩔 수 없이 마주하는 슬픈 운명은 결국 주님을 만날 때에만 위로받을 수 있고 생명을 얻게 됩니다. 박완서 엘리사벳 님이 아름답게 한 생을 마감할 수 있었던 것은 ‘죽음의 행렬’에서 예수님을 만나 ‘생명의 행렬’에 합류했기 때문입니다.

☆☆☆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나인이라는 동네에 이르시어 장례 행렬을 만납니다. 그리고 죽은 사람이 과부의 외아들임을 아시고 다시 살아나게 하셨습니다. 무엇이 그분께서 기적을 일으키시게 하였을까요?
동정심이었을까요? 아니면 어머니의 애절한 마음이었을까요? 이에 대한 답변은 각자의 깨달음에 관한 문제입니다. 그러나 기적의 원인은 분명 그 어머니에게 있었습니다. 아들을 잃고 처연한 모습으로 걸어가는 모습에서 예수님께서는 많은 느낌을 받으셨을 것입니다. 더구나 나인의 기적은 누구의 간청으로 일어난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스스로 기적을 베푸신 것입니다.
당시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하느님을 아주 냉정한 분으로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인간 각자의 애환에 특별히 신경 쓰지 않는 차가운 심판관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반대의 모습을 드러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결코 인간적인 슬픔을 외면하시는 분이 아님을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세상의 그 누구라도 부모님의 사랑 앞에서는 숙연해지기 마련입니다. 나인의 기적은 어머니의 사랑이 정답이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서 그러한 사랑을 지니신 분이심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내가 기적을 이루어야

  과부의 아들     

-김인한 신부-

 몇 년 전 주일이었습니다. 홀로 계신 제 어머니가 중풍으로 쓰러지셨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마침 본당 신자 할머니가 병자성사를 청했기에,
비록 마음은 어머니에게 가 있었고 어머니 생각으로 마음은 아팠지만
눈물을 삼키며 그 할머니에게 정성스럽게 병자성사를 주었습니다.
그리고 주일 미사를 다 마치고 나서야 어머니 병실을 찾아가 볼 수 있었습니다.
사제의 삶은 지금 맡겨진 이들을 더 사랑하기 위해서 눈물을 머금고 살아가는
삶입니다. 어머니를 떠나 복음 전도를 위해 여행하시는 예수님도
부모를 몰라라 하는 분이어서가 아니라, 지금 곁에 있는 사람들,
지금 가난한 사람들, 지금 당신만을 바라보고 있는 이들을
더 사랑하시려 함이었습니다.
오늘 저는 복음을 묵상하다 예수님께서 과부와 그의 아들을 바라보시며
자신의 어머니인 마리아를 떠올리지 않으셨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혹 예수님께서는 어머니 마리아 생각에 눈물을 흘리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저도 과부인 저희 어머니를 떠올려보았습니다.
문득 눈물 흘리시는 예수님이 떠오릅니다.

 

 

 

 부부관계가 자녀의 양식입니다.

-송미영 수녀-


 작년에 사랑하는 친구가 주님 곁으로 갔습니다. 친구는 참으로 남편과 자녀들을 사랑했습니다. 어느 날 자신의 병이 깊다는 것을 안 친구는 가족에게 아무것도 해줄 수 없는 것을 아파하면서 그들이 새 가정을 꾸밀 수 있도록 자신이 멀리 떠나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저에게 말했습니다. 그때 저는 어떤 말로도 위로를 해줄 수가 없었습니다. 단지 엄마와 아내는 ‘무엇을 주어야만 가치있는 존재’가 아니라 ‘있어서 좋은 존재’라고 말했습니다. 그들 곁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가족한테는 충분하다고 말했습니다. 항상 그들을 바라보고 용기를 주고 칭찬해 주고 귀여워해 주고 자랑스럽게 여기며, 한결같은 믿음을 주는 그런 존재로 머물러 있는 사람이 엄마요 아내라고 말입니다. 가끔 부모들이 자녀를 위해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를 물어옵니다. 저는 다음 기도가 참 아름답다고 생각합니다.
‘부모의 기도’
주님, 가진 것은 없지만 자녀에게 줄 것이 있습니다.
온화한 미소입니다.
주님, 가진 것은 없지만 자녀에게 줄 것이 있습니다.
상냥한 말과 친절입니다.
주님, 가진 것은 없지만 자녀에게 줄 것이 있습니다.
기쁨 속에 사는 모습입니다.
주님, 가진 것은 없지만 자녀에게 줄 것이 있습니다.
분수에 맞는 검소한 삶과 기도의 모습입니다.
주님, 가진 것은 없지만 자녀에게 줄 것이 있습니다.
소망과 이상입니다.
주님, 가진 것은 없지만 자녀에게 줄 것이 있습니다.
서로 사랑하는 모습입니다.
사랑의 주님, 이것이 저희가 자녀들에게 물려줄 유산임을 명심하여
실천할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아멘.

자녀들은 부모님이 서로 사이좋게 지내는 모습만 봐도 저절로 큽니다. 부모님의 분위기가 자녀의 일용할 양식입니다. 오늘 예수님은 한 어머니에게 아들을 되살려 돌려주셨습니다. 오늘은 주님께서 우리 아이를 살려주시고 다시금 우리 품에 안겨주신 날입니다.

 

 

하느님의 새로운 백성

-박상대신부-

 

  루가복음은 예수님의 평지설교(6,20-7,1)를 보도한 후, 곧바로 두 편의 기적사화를 들려준다. 두 편의 기적사화는 가파르나움에서 중병으로 거의 죽게된 백인대장의 종을 원격(遠隔) 치유하신 기적(7,1-10)과 나인에서 과부의 아들을 소생시킨 기적(7,11-17)이다. 오늘 복음은 과부의 아들을 소생시킨 기적에 관한 내용이다. 그런데 전후좌우의 문맥을 살펴보면 왜 두 편의 기적사화가 여기에 자리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

 

  루가복음사가는 이 시점에서 예수님의 신원(身元)과 정체성에 대한 중간결산을 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중간결산의 역할은 세례자 요한에게 주어졌다. 두 편의 기적사화 다음 대목을 보면 세례자 요한이 자기 제자들을 예수께 보내어 "오시기로 되어 있는 분이 바로 선생님이십니까?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또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하겠습니까?"(7,19) 라는 질문을 던지고는 그 답변을 요구하고 있다.

 

세례자 요한이 보낸 제자들의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을 먼저 살펴보자.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너희가 듣고 본 대로 요한에게 가서 알려라. 소경이 보게 되고, 절름발이가 제대로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해지고,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사람이 살아나고, 가난한 사람이 복음을 듣는다. 나에게 의심을 품지 않는 사람은 참으로 행복하다"(7,22-23) 하고 말씀하셨다. 의아하면서도 재미있는 곳은 바로 직전의 구절이다.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께 신원(身元)에 관한 질문을 던지자마자 루가는 "바로 그 때 예수께서는 온갖 질병과 고통과 마귀에 시달리는 많은 사람들을 고쳐 주시고, 또 많은 소경들의 눈도 뜨게 해 주셨다"(21절) 라는 재빠른 보도를 삽입하였다. 이 보도와 예수님의 답변을 비교해 보면 "죽은 사람이 살아나는 것"이 빠져있다. 따라서 루가에게는 죽은 사람을 소생시키는 기적을 앞서 보도해야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나인에서 과부의 아들을 소생시킨 기적은 루가복음의 고유사료이다. 전체 구조의 흐름은 엘리야 예언자가 사렙다 지방 과부의 죽은 아들을 되살린 기적(1열왕 17,8-24)이나 엘리사 예언자가 수넴 여인의 죽은 아들을 되살린 기적(2열왕 4,20-37)을 따르고 있다. 그러나 복음이 선포하는 진의(眞意)는 판이(判異)하다. 엘리야나 엘리사는 죽은 아이를 살리기 위하여 안간힘을 다 쓴다. 엘리야가 과부의 죽은 아들 위에 엎드려 몸과 몸을 맞대고 야훼께 수 차례 기도를 올리는가 하면, 엘리사는 죽은 아이의 방에서 이리 저리 걷다가 아이 위에 엎드리기를 일곱 번 거듭하여 사자(死者)를 소생시키는데 비하여, 예수께서는 상여(喪輿)에 손을 대고 "젊은이여, 일어나라"(14절) 라는 단 한마디의 명령으로 생명을 도로 주신 것이다. 사태가 이렇게 되고 보니 사람들의 반응은 실로 놀라울 수밖에 없다.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이란 오직 두려움에 사로잡혀 하느님을 찬양하는 일밖에는 아무 것도 없었던 것이다. 사람들이 드디어 예수님을 "위대한 예언자"로 "자기 백성을 찾아와 주신 하느님"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한 셈이다.(16절) 여기서 하느님의 새로운 백성이 싹트게 되는 것이다.

 

  -반영억신부-

기네스북에 기록된 지금까지의 세계 최고령자 나이는 프랑스출신의 ‘잔 루이즈 깔망’할머니로서 1875년에 태어나 1997년 8월4일 12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셨다고 합니다. 지금은 미국 조지아주 애틀랜티에 살고 있는‘베시 쿠퍼’(1896,8,26생) 할머니가 115 세로 생존하고 계시다고 합니다. 그분의 장수비결은 남의 일에 이러쿵 저러쿵 관여하지 않는 것이고 인스턴트음식을 먹지 않는 것이라고 합니다. 의학기술의 발전과 인간의 많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결국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죽음은 우리 모두가 가야 할 길입니다.

 

오늘 성경말씀은 예수님께서 나인이라는 고을에서 죽었던 과부의 아들을 살려주시는 장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관에 손을 대시고 “젊은이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루카 7,14) 이르시자 죽은 이가 일어나서 말을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시체가 일어나서 말을 하다니 정말 엄청난 일입니다. 능력의 말씀으로 슬퍼하던 과부에게 기쁨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눈은 그 기적에만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됩니다. 그렇게 되면 언제든지 기적을 이룰 수 있는 능력의 주님을 제대로 볼 수가 없습니다. 죽었던 이가 살아난 것은 감사하고 기뻐해야 할 일이지만 우리는 은총의 열매에만 매달리는 약점을 지니고 있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죽은 자를 살려내고 기쁨을 주실 수 있는 분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최고령자가 122세의 나이로 죽음을 맞이하였는데 ‘베시 쿠퍼’도 세상을 떠날 것입니다. 죽었다가 되살아 난 그 젊은이도 얼마쯤 더 살다가 다시 죽었습니다. 어머니의 기쁨도 세월의 흐름 속에 잊혀져갔을 것입니다. 사실 우리도 큰 은총을 받아도 곧 잊어버리고 맙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기적에 매달릴 것이 아닙니다. 기적을 일으키고 그보다 더한 것을 하실 수도 있는 예수님을 제대로 만나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생명을 주관하시는 분, 곧 “생명의 영도자”(사도3,15)이십니다. 

 

요한 사도는 말합니다. “세상은 지나가고 세상의 욕망도 지나갑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은 영원히 남습니다.”(1요한2,17) 그러므로 기적이나 세상 것에 마음을 빼앗기지 말고 우리의 눈길을 ‘생명의 영도자’이신 주님께로 향해야 하겠습니다. 

오늘 기억하는 성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안티오키아에서 태어나( 349-407) 많은 설교와 저술로 그리스도인의 신앙생활을 격려하여 ‘황금의 입’(금구)이라는 별칭을 얻었습니다. 성인은 “나는 그분의 보증을 가지고 있습니다. 나는 진정코 내 자신의 힘에 의지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분의 성경 말씀을 굳게 붙들고 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나의 지팡이요, 나의 보호이며 나의 잔잔한 항구입니다. ……나는 말씀을 읽고 있습니다. 그것은 내 성벽이요 보호체입니다. 어떤 말씀입니까? “내가 세상 끝 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는 말씀입니다…… ‘주여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소서.’ 나의 뜻이 아니고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소서. 이것은 나의 보루이고 이것은 나의 움직임이 없는 바위이며 이것은 나의 흔들림이 없는 지팡이 입니다. 하느님의 뜻이라면 그대로 이루어지소서.”(성무일도독서기도)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성인은 성경의 말씀을 가슴에 새기고 계셨기에 황금의 입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자기의 뜻이 아니라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길 희망 하셨기에 주님께서 그를 통해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그의 강론 말씀은 살아있고 힘이 있었습니다(히브4,12). 우리는 주님께서 주신 은총덩어리, 다시 말하면 은총의 결과물에 집착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은총을 주시는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어떠한 처지나 환경에 구애됨이 없이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변함없이 우리와 함께하시는 주님, 무엇이든 주실 수 있는 주님을 만나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주님의 말씀을 들어야 하고 들은 바를 간직하고 또 행동으로 옮겨야 합니다. 성경을 통해 주님의 살아있고 힘 있는 말씀과 함께하면, 주님의 말씀이 가슴 안에 살아있게 되고 우리 입도 황금의 입이 될 것입니다. 기적을 바라지 말고 주님의 이름으로 내가 기적을 이루어야 하겠습니다. 황금의 입을 통해 이웃에게 위로를 주고 힘을 주는 날 되시기 바랍니다.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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