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9월 15일 목요일 고통의 성모 마리아 기념일
예수의 십자가 밑에는 그 어머니와
이모와 글레오파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여자 마리아가 서 있었다.
(요한 19,25-27)
Standing by the cross of Jesus were his mother
and his mother’s sister, Mary the wife of Clopas,
and Mary Magdalene.
‘고통의 성모 마리아 기념일’은 16세기부터 시작된 대중 신심이었다. 9월 셋째 주일에 미사와 행렬을 하던 것을, 1668년 인노첸시오 11세 교황이 축일로 인가하였다. 1908년 비오 10세 교황은 ‘성 십자가 현양 축일’ 다음 날인 9월 15일로 날짜를 확정하였다. 예수님과 함께하시면서 겪으신 성모님의 고통을 묵상하고자 오늘의 축일이 제정되었다. 말씀의 초대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죽음까지도 아버지께 순종하며 받아들이신 분이시다. 이로써 그분께서는 모든 이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셨다. 우리도 그분께 순종하며 우리 삶의 십자가를 기꺼이 질 때 그분을 통해 구원을 받게 된다(제1독서). 십자가 곁에 그분의 어머니 마리아가 함께 계신다. 바라보고 계시는 것이 아니라 ‘곁에’ 계신다는 것은 예수님과 함께 고통을 겪고 계심을 나타낸다. 아들 예수님의 죽음의 고통은 그대로 어머니의 고통이 된다(복음). ☆☆☆ 오늘의 묵상 장애인 바르나바 형제가 큰 수술을 하였습니다. 그는 마흔이 다 되도록 말 한 번 시원하게 못해 보고 제 힘으로 밥을 먹을 수도 앉아 있을 수도 없는 중증 장애인입니다. 수술 후 그는 호흡기 장애를 일으켜 인공호흡기에 의존하며 최악의 고통을 안으로만 삭이고 있었습니다. 통증을 호소하며 소리라도 지를 수 있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목소리조차 낼 수 없는 그가 고통 속에서 그저 버둥거리기만 하는 모습이 너무나 안타까울 뿐입니다. 남들의 마음이 이럴진대 평생을 아들과 한 몸처럼 지냈던 바르나바 형제의 어머니 마음이야 오죽하겠습니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발만 동동 구르는 어머니의 모습에서 십자가 아래 성모님의 모습을 떠올립니다. ☆☆☆ 십자가에 못 박혀 매달리신 예수님의 발아래 어머니 마리아께서 서 계십니다. 비통한 모습으로 아드님을 바라보시는 어머니께 주님께서는 위로를 보내십니다. 죽어 가는 아드님을 바라보고 계신 어머니께는 어떠한 위로도 소용없을 것이지만, 그래도 예수님께서는 당신 어머니께 그윽한 눈빛으로 위로를 보내십니다.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이 말씀을 들으시는 순간, 어머니의 가슴은 찢어질 듯 아프셨을 겁니다. 우리의 한 분 어머니! 사랑의 키 낮춤 새벽을 열며 갑곶순교성지에서는 할 일이 참으로 많습니다. 사람들은 이곳이 무척 좁다고 이야기하지만, 2명의 직원과 제가 관리하기에는 이 성지의 땅은 너무나도 넓습니다. 그러다보니 매일 손에 장갑을 끼고서 일을 할 수밖에 없어요. 삽질, 곡괭이질, 예초기로 풀베기, 배수로 파기, 나무 심기 등등……. 어떻게 생각하면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많은 일들이 갑곶성지에는 가득합니다. 오늘 만나는 사람에게 커피 대접을 해봅시다. 벽다방인 자판기커피도 좋아요. 빠다킹신부 고통의 신비 -최혜영 수녀-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의 삶은 예수님의 삶만큼 고통으로 점철되어 있습니다. 고통의 성모 마리아 -김경희 수녀- 오늘은 성모님의 많은 모습 중에 특별히 십자가 밑에 계신 어머니를 묵상하게 됩니다. 루이사 피카레타의 글입니다. “통고의 어머니, 이제 어머니께서는 마지막 희생을, 곧 숨을 거두신 아들 예수님을 무덤에 묻어야 하는 희생을 치를 준비가 되셨으니 하늘 뜻에 온전히 맡기시고 예수님을 동반하셔서 어머니의 손으로 무덤에 안장하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팔다리와 손발을 가지런히 매만져 정돈한 후 작별인사와 마지막 입맞춤을 하시려는 순간, 심장을 가슴에서 비틀어 뜯어내는 듯한 아픔을 느낍니다. 사랑이 어머니를 예수님의 지체에 못박고, 그 사랑과 비통함 때문에 생명이 없는 아드님과 마찬가지로 어머니의 생명도 막 꺼지려고 합니다.” 우리의 어머니 -반영억라파엘신부-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유언입니다. 세상을 떠나시면서 아들의 역할을 다하고 계십니다. 자기가 하지 못하는 것을 이제 제자들이 다해 주기를 바라며 어머니를 맡깁니다. 또한 어머니께서 당신 제자들을 아들로 받아들이기를 원하십니다. 이제 어머니와 제자, 제자와 어머니의 관계가 새롭게 형성됩니다. “여인이시여,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제자들에게“이분이 네 어머니이시다.”(요한 19,26-27) 하심으로써 어머니를 제자들의 어머니, 믿는 이들의 어머니, 교회의 어머니로 선언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마리아를 어머니로 받아들이고 자기 집에 모셨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수락하고 이행한 것입니다. 이제 성모님은 나의 어머니이십니다. 집회서를 보면“마음을 다해 네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하고 어머니의 산고를 잊지 마라. 네가 그들에게서 태어났음을 기억하여라. 그들이 네게 베푼 것을 어떻게 그대로 되갚겠느냐?”(집회7,27-28)고 적혀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들로서 해야 할 일을 다 함으로서 어머니와 제자들과의 관계를 새롭게 하고 그 사랑을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십자가 곁에 서 계신 어머니의 고통이야 무엇으로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마는 어머니께서는 십자가의 고통을 하느님 사랑의 표현으로 받아들이고 급기야 아들의 시신을 품에 안게 되었습니다. 미켈란젤로는 아들의 시신을 안은 동상에 ‘피에타’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피에타’는 이태리어로 ‘충실한 믿음’을 뜻합니다. 그야말로 우리의 어머니 마리아는 자신의 온 마음으로 오직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만을 원하고 그대로 따른 “충실한 믿음의 여인”이었습니다. 우리도 하느님의 뜻에 대한 충실한 믿음 안에 머물러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우리의 묘비에도 ‘피에타’ 라고 쓸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고통의 성모 마리아 기념일에 고통 안에서 믿음을 드러내신 어머니를 통하여 ‘고통이 하느님의 섭리요, 은총의 기회이며 하느님께 영광을 드릴 수 있는 절호의 찬스’(십자가의 성 요한)라는 것을 일깨우시기 바랍니다. 성모님은 구세주 예수님의 어머니로서 크나큰 고통을 감당하셔야 했는데 흔히 일곱 가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1).‘아기는 수많은 이스라엘 백성을 넘어뜨리기도 하고 일으키기도 하실 분이며 많은 사람들의 반대를 받는 표적이 되어 당신의 마음은 예리한 칼에 찔리듯 아플 것’이라는 시므온의 예언입니다.(루카2,34-35) 2).헤로데를 피하여 ‘에집트로 피난을 가셔야 했습니다.(마태2,13-18) 3).예루살렘 성전에서 예수님을 잃으신 고통(루카2,41-51) 4).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예수님과 서로 만나신 고통(루카23,26-32) 5).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예수님을 보신 고통(요한19,38-40) 6).예수님의 성시를 품에 안으신 고통(요한19,41-42) 7).예수님의 성시를 돌무덤에 장사지내심을 보신 고통(요한19,41-42)입니다. 힘들고 어려울 때 성모님의 고통보다 더 큰 아픔을 겪고 있는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성모님은 당신의 모든 것을 희생으로 바치셨고 하느님이 당신의 전부였습니다. 우리도 성모님을 거울삼아 자진하여 고통을 참아 받으며 하느님과 이웃에게 희생의 제물이 되기를 희망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고통이 없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고통을 신앙으로 받아들인다면 예수님의 수난을 함께 나누고 예수님께 대한 우리 사랑을 보여 드릴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됩니다.(마더 데레사) 그러므로 “여러분의 생각은 언제나 성모님께서 울고 계시던 구세주의 십자가 곁에 머물도록 하십시오. 항상 성모님과 함께 울도록 하십시오.”(교부 푀멘) 십자가위에 높이 달리신 당신 아드님 곁에서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흔들리지 않는 믿음으로 함께하신 어머니와 더불어 그리스도의 수난에 동참하여 마침내 부활의 영광에도 참여케 되기를 기도합니다. 사랑합니다. 바이올린
바르나바 형제의 어머니가 물었습니다. “신부님, 하느님 나라가 분명히 있지요? 아들이 저렇게 고통스러워하니까 이제 그만 놓아 주고 싶습니다.” 사람의 목숨이 놓는다고 놓아지겠습니까? 자식이 고통스러워하는 것을 바라보다 못해 던진 질문입니다. 차마 겉으로 말할 수 없어 마음속으로 혼자 대답합니다. ‘하느님 나라는 분명히 있습니다. 이렇게 착한 사람들이 가야 할 하느님 나라는 꼭 있습니다. 죄 없으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알려 주신 것이 결국 하느님 나라가 아니겠습니까? 그 희망이 없다면, 죄 없는 이의 억울한 고통을 어떻게 이겨 낼 수 있겠습니까? 세상에 그 어떤 고통도 무의미한 것은 없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십자가 곁에 성모님께서 서 계십니다. 성모님께서는 당신께서 감당하시고 있는 이 기구한 운명을 이해하지 못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뒤에는 부활과 인류 구원의 역사가 숨어 있었지요. 지금은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지만 주님의 날에는 그 모든 것의 의미가 환하게 드러날 것입니다. 이 땅에서 슬퍼하는 사람들, 그 너머에 더 이상 눈물이 없는 눈부신 부활의 세계가 분명히 있습니다.
흔히 사랑하는 님은 앞산에 묻고, 사랑하는 자식은 가슴에 묻는 것이 부모의 마음이라고 합니다. 사랑하는 아드님의 죽음 앞에서 어머니 마리아께서는 그 어떤 말도 위로의 말로 들려오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누가 내 어머니며 내 형제들이냐?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어머니요 형제들이다.”라고 하신 아드님께서 마리아에게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라고 하셨을 때, 성모님께서는 그 어떤 말보다 아드님의 그 한마디 말씀에 온갖 고통〔七苦〕이 한순간에 사라지셨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아드님께서는 당신의 어머니를 우리의 어머니라고 하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성모 마리아의 자녀들입니다. 마리아께서는 아드님을 바라보시던 그윽한 눈매로 이제 우리를 바라보고 계실 겁니다.
성모님께서는 지극히 겸손하게 하느님의 뜻을 받드시듯이, 그렇게 우리를 하느님의 자녀, 당신의 자녀로 받아들이십니다. 이제 우리는 더 이상 성모님의 마음을 아프게 해 드리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성모님을 모셔 줄 것을 청하셨기 때문입니다. ![]()
-방순자 수녀-
전에 가장 열악한 산동네를 찾아 공부방을 시작한 적이 있었는데 당시 우리 가정이 얼마나 위기에 처해 있는지 뼈아프게 체험했다. 30가정에 양쪽 부모가 있는 아이는 두세 명, 더 놀라운 것은 한 부모 가정 중에 엄마와 있는 아이는 네 명뿐이고 거의 아빠와 살고 있었다. 이런 환경에서 아이들의 피폐 상태는 이루 말할 수 없었다. 4학년만 되면 내면의 분노가 폭력으로 터져 나오기 시작한다. 부모가 자기 책임을 다하지 않은 탓으로 아이는 아무 죄 없이 받아야 할 사랑을 못 받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이 땅의 모든 어머니에게 자식이란 죽는 날까지 어떤 상황에서도 포기할 수 없는 존재였다. 그런데 천륜의 근본이 무섭도록 빠르게 무너져 가고 있다. 어느새 우리나라도 이렇게 되고 말았다.
그러나 사랑이신 하느님은 우리 모두에게 완전한 사랑의 어머니가 필요함을 아시고 한 어머니를 주신다. 아들 예수님 없이는 존재 이유가 없는 분이 성모님이시다. 두 분의 사랑과 일치는 우리의 이해를 넘어서는 ‘신비’라고밖에 할 수 없다. 성모님은 아들 예수님을 인류 구원의 산 제물로 바치면서 이미 당신 자신도 사랑으로 함께 죽으셨다. 그런데 그 기막힌 아들이 십자가에서 고통 중에 죽어가며 어머니에게 한 유언이 바로 ‘인류의 어머니’가 되시라는 말씀이다. 성모님은 십자가 밑에서 아들 예수님 대신 우리 죄인을 자식으로 얻으셨기에, 가장 고통을 안겨준 이 자식들을 절대 포기할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이 하느님의 영원한 사랑의 진리다. 가장 복되신 여인이라고(루카 1,48 참조) 일컬어진 분이 더없는 통고(痛苦)의 여인이셨다는 사실이 바로 이 진리, 곧 ‘사랑과 고통의 정비례 법칙’을 증명해 준다.
이 세상은 ‘죄의 무감각’이라는 가장 무서운 병에 걸려 의식할 겨를도 없이 ‘죄의 홍수’에 휩쓸려 파멸로 떠밀려 가고 있다. 혼자 힘으로는 세속이라는 거대한 물살을 거슬러 헤엄쳐 갈 수가 없는, 이런 세상에 살아야 하는 가엾은 우리에게 예수님은 유일하게 죄를 모르시는 거룩한 어머니를 새 구원의 방주로 주신다. 예수님과 함께 영혼 깊이 못 박히고 창에 찔리신 성모님의 티 없으신 성심을 우리의 안전한 피난처로 주신 것이다.
지금도 예수님의 손발에 못질하는 그 제단 옆에는 언제나 성모님이 계신다. 천상 어머니는 희생제물이 되신 당신 아들을 바치는 비통한 봉헌을 거룩한 미사 때마다 계속하신다. 여전히 당신과 예수님에게 못질을 계속하는 이 못난 자식들을 함께 바치시는 거룩한 사랑의 어머니, 이분을 나는 내 영혼의 집 안에 어머니로 모시고 살고 있는가? 진정한 어머니를 잃어가므로 인간이 파괴되어 가는 오늘날, 나의 모습과 삶으로 또 하나의 인자하신 어머니 마리아를 보여주어야 하지 않는가? 
-김찬선신부-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계실 때,
당신을 죽음에서 구하실 수 있는 분께 큰 소리로 부르짖고,
눈물을 흘리며 기도와 탄원을 올리셨고,
하느님께서는 그 경외심 때문에 들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드님이시지만
고난을 겪으심으로써 순종을 배우셨습니다.
그리고 완전하게 되신 뒤에는 당신께 순종하는 모든 이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셨습니다.”
오늘의 히브리서 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생각을 하게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드님이시지만
고난을 겪으심으로써 순종을 배우셨다 합니다.
우리의 보통 생각은
우리 인간이나 순종을 배우고
그것도 고난을 통하여 순종을 배운다는 것인데
오늘 히브서는 우리의 주님이신 예수님께서도
순종을 배우셨고
고난을 통하여 순종을 배우셨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불순종의 죄를 짓던 사람이
고난을 통하여 순종할 수 있게 되었다는 뜻이 아닐 것입니다.
그것은 자녀들이 모두 모이는 이 명절
손자들의 언어를 배우는 할애비, 할미의 배움과 같을 것입니다.
매우 인격적인 순종이지요.
죄와는 전혀 상관없는 사랑의 키 낮춤이라고나 할까요?
자기의 고집에 사로 잡혀있고
자기의 고통에 빠져 있는 그런 자기 안의 갇힘이 아니라
우리의 손자가 나타날 때 그러하듯
대상을 만나는 순간
자기의 고집도 사라지고
자기의 고통도 사라지고
그의 뜻과
그의 고통만이 전부가 되는 그런 사랑의 키 낮춤입니다.
어제 십자가 현양 축일을 지내는 예수님께서 그러하셨고
오늘 십자가 아래서 아들의 고통을 당하신 마리아께서 그러하신
인격적인 순종,
사랑의 키 낮춤을 우리는 사랑합니다.
이렇게 일을 해야 하는 상황이다 보니 처음 성지를 방문하시는 분들이 저를 신부(神父)로 알아보지 못합니다. 그냥 성지에서 일하는 한명의 일꾼 정도로만 생각하지요. 어쩌면 너무나 당연합니다. 민소매와 작업바지 그리고 작업화를 신고 있는 나의 모습을 누가 신부로 볼 수 있겠어요? 알아보는 사람이 이상한 사람이지요. 저 역시도 교우들이 신부로 봐 주길 원하지도 않습니다. 저를 알아보면 일하는데 오히려 방해가 되니까요.
그래도 성지에 대한 인상을 좋게 심어드리기 위해, 성지에 오신 순례객들과 눈이 마주치면 꼭 먼저 인사를 합니다. 그런데 꽤 많은 분들이 인사를 하면 ‘다른 사람에게 인사를 하나?’라고 생각하시는 지 뒤를 돌아보면서 어색한 표정만 짓습니다. 그리고는 그냥 휙 하고 지나가지요. 인사한 제가 오히려 어색해지는 순간입니다.
잠시 뒤, 그 분께서 내 앞으로 다시 오십니다. 그리고는 “아니 신부님이세요? 복장을 그렇게 하셔서 신부님인줄 몰랐어요.”하면서 아주 반갑게 인사하십니다. 신부면 인사해야하고, 신부가 아니면 인사하지 않아야 하는 것일까요? 하지만 이런 분들만 계신 것이 아니에요.
너무나 더운 여름날, 땀을 뻘뻘 흘리면서 예초기로 풀을 베고 있을 때였습니다. 어떤 자매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아요. 그래서 예초기의 엔진을 끄고서 “무엇을 도와드릴까요?”라고 여쭈니, 자매님께서는 음료수를 주시면서 말씀하십니다.
“아저씨, 더운데 정말로 수고 많으십니다. 이것 좀 드시면서 하세요.”
내가 신부라는 사실을 모름에도 불구하고, 성지에서 일하고 있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먼저 다가오셔서 친절을 베푸시는 모습. 감동이었지요. 그리고 제 모습도 반성할 수 있었습니다.
아는 사람에게만 친절을 베풀고, 나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에게만 다가섰던 나는 아니었는지……. 입으로는 주님을 그렇게 믿는다고 하면서도, 주님께서 가장 큰 계명이라고 하셨던 사랑은 왜 철저하게 외면을 하고 있었는지……. 보이는 사람에게는 그렇게 사랑과 정반대의 모습으로 살아가면서,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믿는다고 외치는 것은 외선이 아닐까요?
오늘 우리들은 고통의 성모 마리아 기념일을 맞이해서 성모님의 고통을 묵상합니다. 바로 자신의 사랑하는 아들의 죽음을 직접 봐야 하는 아픔이지요. 그런데 이제는 우리 모두의 성모님이 되셔서 우리들의 고통을 함께 하시고 계십니다. 오늘 복음에도 나오지만, 예수님께서 성모님을 우리들의 어머니로 맡겨주셨거든요. 따라서 이런 사랑을 기억하면서 우리 삶 안에서 철저한 사랑의 실천을 위해서 노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 눈에 보이는 사람에게 사랑을 전혀 실천하지 못하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주님께 사랑을 실천할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주님과 성모님께서 사랑을 실천하셨던 그 모습을 기억하면서 우선 내 눈에 보이는 사람들을 향한 사랑의 실천을 먼저 행해야 하지 않을까요?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는 것을 믿으셨기에 믿음 하나에 자신의 전 생애를 내던진 분, 나의 아들이 아니라 하느님의 아들로서 성장할 수 있도록 하느님의 뜻에 귀 기울이신 분,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였기에 혈연을 넘어 신앙 가족 공동체의 중심에 세워지신 분….
마리아가 이상적인 인간상으로 부각될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처럼 적나라한 인간실존의 고통과 죽음을 관통하실 수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마리아는 가난한 이민자로서 이집트 피난살이를 경험하였고, 가난한 과부로서 어려운 살림살이를 꾸려냈으며, 남들에게 이해받지 못하는 아들에게서 하느님의 뜻을 찾았고, 마침내는 사형수의 어머니로서 십자가 밑에 섰습니다.
고통을 겪은 사람만이 남의 고통에 함께할 수 있다는 것은 인생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고통은 누구나 피하고 싶은 현실이지만 결코 피해서는 성장할 수 없는 인생의 길이기도 합니다. 고통을 피하기보다는 금이 불 속에서 단련되듯 우리 자신들도 고통의 용광로에서 새롭게 태어날 수 있는 인내심을 청해야 할 것입니다.
구세주의 어머니가 되신 마리아, 당신 아드님과 함께 수난의 길을 걸으시고 그 아들의 시신을 품에 안고 슬픔에 잠기신 성모님의 마음을 수도생활을 하고 있는 저는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습니다. ‘수난의 예수’ 영화의 한 장면이 떠오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고 가시다 넘어지셨을 때 아기 예수님이 넘어졌을 때를 연상하시면서 “얘야, 내가 여기 있다” 하고 외치는 어머니의 모성으로 힘이 되어주시려는 성모님, 피땀을 흘리며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예수님 곁에 어머니는 늘 함께하셨고, 아드님이 겪으시는 고통보다 더 큰 고통을 겪으셨습니다. 성모님의 이 고통을 어떻게 위로해 드릴 수 있겠습니까? 지금도 죄인들의 회개를 위해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시는 어머니이신데 저는 어머니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할까요? 어머니 마리아께서 바라시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기도하는 것입니다.
2003년 루르드에 갔을 때입니다. 벨라뎃다 기념관에서 성모님 발현 설명을 듣고 있는데, 루르드의 발현 메시지가 ‘기도하고 희생하며 보속하라’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듣는 순간부터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이 말씀을 마치 처음 듣는 것 같았습니다. 성모님이 우리에게 호소하신 말씀은 도저히 불가능한 일을 하라는 것도 아니고, 늘 묵주를 들고 오신 어머니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기도는 주님의 기도와 성모송과 영광송으로 엮어진 단순한 묵주기도인데 왜 이 기도를 많이 하지 못하겠습니까? 어머니 마리아께서 원하시는 묵주기도를 열심히 하리라 결심했던 때가 생각납니다. 예수님의 구원사업에 어머니께서 늘 함께하신 것처럼 저도 기도로 함께 어머니의 길을 따르고 싶습니다. ![]()
